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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가 일어나면 많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여겨 그분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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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유용하지만 영원한 나라에서 상을 받는 일에는 별 유익이 없다. 거기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은 성품으로 영원한 거주지가 정해진다. 이 땅에서 얻은 지식으로 교만해져서 사람을 그 잣대로 판단하는 이들은 천국에서 작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을 품는 그릇은 거기서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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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추구하는 목적은 자기 자랑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고 더욱 경외하기 위해서다. 성화로 소화되지 못하는 지식은 영적인 건강을 좀먹는 독이 되어 예배자가 아니라 지식에만 식욕이 돋는 편식주의자로 만든다. 독서가 기도보다 더 쉽고 좋다면 이미 온몸에 독성이 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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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간절히 주의 손길을 구하는 지속적인 채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질적 변화는 양적 경험의 축적을 통해 이뤄진다. 물은 99.9도를 지나 100도가 되어서야 끓는다. 영적으로도 임계점의 도약을 구하는 이들은 적당히 은혜 받고 적당히 헌신하는 삶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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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들 중에 천국에서 만들어지는 소설이나 영화에 폭력이나 갈등의 장면도 등장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선이 마침내 악을 이긴다는 것과 같은 전체 주제를 살릴 경우 플롯의 한 요소쯤으로 쓰임받는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천국에 가봐야 이런 주장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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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세습이 문제가 되는 건 큰 교회의 구조나 운영이 가진 문제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기득권이 없다면 굳이 세습이라고 불릴 것도 없다. 작은 교회 세습보다 큰 교회 세습에 교회 안팎의 시선이 따가운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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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신학자나 목회자들만 자신들에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로 바른 교리를 좇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요즘은 성도들도 비슷하다고 느낀다. 지옥이나 심판, 회개를 말하지 않고 믿음 이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구원에 침묵해도 구원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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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할 때 맥락 없이 무턱대고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협박조로 말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그분의 창조주 되심을 알아야 한다. 진화론이 성행하는 이유는 심판자를 없애버린 까닭이다.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면 지옥에도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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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로서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천국의 귀중함도 알지 못한다. 그는 지옥에 던져넣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주의하지 않고, 지옥의 고통으로 자신을 지옥에서 건져준 그분의 크나큰 희생과 은혜에도 둔감하다. 말로는 아니라 해도 실제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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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성경에서 그토록 지옥 불못에 대해 경고하셨는데도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파송을 받은 목자들이 지옥에 대해 입을 다문다. 그들은 지옥을 말하는 게 신사적이지도, 지성적이지도 않다고 여긴다. 구원이 절박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갈급하지 않은 자는 구원에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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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있는 대로의 지옥을 안 믿고 "지옥이 그리 무지막지할 리가 없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많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자비롭다는 교만이 섞인 판단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는 사람은 결코 모른다는 게 지옥의 압도적인 실상에서 비로소 영원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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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함께 해보면 상대방의 성품이 어떤지가 자연스럽게 보인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그렇게 경기를 함께 하다보면 의외로 참 어진 사람이 있고 생각보다 좀 사나운 사람이 있다. 승부 근성이 강한 이들은 '운동 제자훈련'이 요긴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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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돈이나 지식이 많으면 근심도 더 많다. 세상이 주는 것의 특징이다.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으면 별로 가진 것 없이 가난해도 늘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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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해나갈수록 많은 대중보다 깨어 있는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실감한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뜻을 굳게 정한 한 사람이 어영부영 교회만 오가는 천 사람보다 낫다. 그 한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일 수 있다.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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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열리면 말씀도 열린다. 마음이 열린 기도 없이 머리로만 말씀을 담으려 하면 삶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기도할 때 내 기도를 들으시는 주께서 성경으로 내게 응답하시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성경 읽기다. 죄의 회개와 친밀함의 회복은 기도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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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방언은 내가 다른 기도로는 알 수 없는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바울의 남다른 충성에는 방언기도의 동력과 위로와 만지심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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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처럼 묵상도 하루 종일 이어가는 게 좋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안 하는 자는 복이 없다는 뜻이다. 복을 딴 데서 구하는 데 익숙하면 약속의 말씀이 심심하고 미심쩍어 보인다. 정말 그렇게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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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에는 내 마음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쓰신 성경 속의 글 또한 그 이면에 그분의 마음이 녹아 있다. 성경을 문자들의 나열로만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면 그분을 못 만난다. 하나님의 마음은 개개 문자가 아닌 큰 문맥 속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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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가 일어나면 많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여겨 그분을 떠날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 잘 삐지는 사람은 그때 아예 돌아서버릴 것이다. 종말을 거듭 경고해도 내내 마음을 두지 않던 이들은 다시 올 신랑께도 마음 둘 여유가 없어 늘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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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노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비가 온다며 마른 땅에 배를 지을 때 모두 비웃었다. 지금도 전에 경험한 적 없는 휴거와 큰 환난이 온다며 미리 대비하자는 말을 모두 가만히 비웃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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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때엔 고상한 거짓선지자들이 많다. 많은 이들이 영적 분별 없이 그들을 따라간다. 한 쪽 극단은 흔한 반지성주의에 온갖 영적 체험으로, 한 쪽 극단은 지성주의에 재림이나 내세에 무심한 이땅만의 학적인 기독교로 사람들을 혼동시킨다. 둘 다 미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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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에서 가장 큰 은혜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 계속 일깨워주시는 주의 음성에 깨어 있는 것이다. 가장 큰 불행은 주께서 거듭 일깨워주셔도 듣지 못하는 우둔한 귀다. 죽기 직전까지 남아 있는 게 청력인데도 살아서는 귀가 가장 어둡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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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철학의 유일한 문제다." 무신론자 까뮈의 말이다. 그가 진지한 철학자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삶을 문제시하며 아웅다웅할 때 죽음을 앞서 문제시한 비범한 조급함 때문이다. 삶을 즐기며 느긋해하는 사람들은 진지한 삶이 어떤 것인지 끝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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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의 고난을 두려워하면 삶 자체가 고난이 된다. 자기 십자가의 고난을 피해 가면 잘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씀을 굳게 붙잡을 생각은 안 한다. 영적인 미혹은 변장에 능하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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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꾸준히 사귀기가 힘들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혜인가. 자유의지가 없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와 사귄다면 내가 하나님이라도 별 재미나 의미가 없을 듯싶다. 피조물에게도 사랑은 억지로 우려낼 수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는 증표가 십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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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을 보며 고독과 실망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성도들의 종이라는 태도를 보기 어렵다. 정말 목회자가 낮아지면 교회가 바로잡힐 듯한데, 실상은 교권적 바리새주의와 권위주의가 생각보다 뿌리깊다. 예수님을 성경에서 배운 게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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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여전히 옹호하면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 신학 자체가 죄와 고통 가운데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하고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선을 긋는데도 차별 없는 진정한 개혁을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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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헬멧도 안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택배 아저씨가 너무 안쓰러워 콧등이 시큰해진다. 뒤에다 대고 부탁했다. "아저씨, 아무리 급해도 헬멧은 꼭 써야 돼요. 언제 사고나서 넘어질지 몰라요. 넘어지면 머리부터 땅에 닿을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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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의 나눔과 교제는 신자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자기 부인의 한 과정이다. 공동체의 규모와 관계없이 이 부분에서 열리고 자유하지 못하면 그의 신앙은 제대로 못 자란다. 자기 공개로 손해볼 일을 염려한다면 교회가 아닌 딴 데를 알아보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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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이른바 꽃꽂이 신앙이 된다. 겉으로만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신자들이다. 뿌리에 닿아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데 날마다 단장을 새로 해야 한다. 그 수고에 들일 힘으로 뿌리부터 견고히 하는 게 시간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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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기독교가 세상의 주류 집단에 가시적 영향으로 큰 변혁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기독교는 이제 스파이 전략을 써야 한다. 삶의 각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고 삶으로 녹여내는 사람들이 희망이다. 그 사람들이 사람들을 건져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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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포함해 다방면에서 앞으로 기독교는 세상의 핍박을 받는 모드로 흘러갈 듯싶다. 지금은 하나님의 절대가치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순교적 영성이 필요하다. 세상을 아는 일 못지 않게 세상이 모르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선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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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전통과 권위에 매이던 때를 지나 합리성을 중시하던 시대에서 지금은 개별성이 존중받는 시대다. 기독교는 유일하게도 권위와 합리성과 개별성에 신비로운 만남까지 두루 갖춘 진리체계다. 시대정신을 초월한 시대정신은 기독교뿐임을 더 담대히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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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마음은 사탄의 유혹에 깊이 빠진 증표다. 일에 열심인 자가 잘 걸리는 덫이다. 나 없이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신다. 내 일로 주의 성품을 일구지 못하면 업적은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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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는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주 고상한 지도자로 나타날 것이다. 특히 지식인이나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광명의 천사 같지만 성경이 말하는 걸 그대로 전하지 않는 자들은 실은 그의 등장을 돕고 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버가모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사탄의 권좌가 등장하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순교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터키의 버가모가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가 특히 성행하는 지역임을 지적하시면서 그러한 곳에서 버가모교회의 목사였던 안디바가 우상 숭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뜨겁게 달궈진 놋쇠 솥 안에서 죽임을 당해 소아시아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신다. 중요한 건 그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버가모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 내가 섬기는 교회 역시 세속적으로 부를 숭상하고 끊임없이 온갖 방도를 다해 추구하는 지역에 있다는 점에서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 세상의 임금이 사탄인데(요 12:31), 주의 몸 된 교회가 그 세상 한가운데 자리한다. 영적으로는 이미 사탄이 왕으로 사는 곳에 모든 교회가 산다.
당연히 그러한 곳에서는 교회가 핍박을 받을 것이고, 핍박을 받지 않는다면 세상과 반쯤은 타협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해 교회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자리와 환경을 미리 예고해주신 것 같다. 그때 성도와 목회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충성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충성된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에서 주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세상이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과 비슷하게 사는 증인은 이미 증인이 아니다. 증인이란 신분만 있고 충성됨이 없어도 실제로는 증인이 아니다. 그 충성됨이 없으면 실제로는 믿음을 저버리고 살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기 쉽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세상을 믿는 것이고 그 세상의 임금인 사탄을 믿는 것이다. 세상을 흑백논리로 볼 것까지야 없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묵상하는 주의 말씀대로라면 실제로는 그러하다. 사탄이 얼마나 지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고상한지를 안다면 이 말은 백 번이고 맞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온갖 우상 숭배에 별 가책도 없이 익숙해 있는 자들은 실은 사탄을 믿는 믿음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같은 편을 핍박할 리가 없으니까 세상에 사는 날이 마냥 편하고 즐겁다. 나 역시 그 영적인 유혹과 미혹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곳에서 교회가 성행하려면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 예수님이 괜히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콕 집어 예로 드신 게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한 번 비장하게 순교하는 것보다 날마다 충성된 증인으로 사는 게 더 어렵다지만, 지금 세상이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 명예라는 우상을 앞다투어 숭배하는 정도를 볼 때 거의 순교할 각오가 없이는 충성된 증인으로 살기 어려울 것 같다. 아직도 내게 순교할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내가 세상 한가운데서 교회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지.
주여, 뜨겁게 달궈진 놋쇠 솥 안에서 살갗이 벌겋게 타들어가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안디바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하신 주의 말씀을 2천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다시 묵상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우상 숭배의 도시 한가운데서 주께 이런 칭찬을 들을 만한 충성된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삶과 사역은 정확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일관된 방향에 서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주님보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증언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 제자도에 깨어 있게 하소서! 세상이 나를 미워하면 먼저 주를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잊지 않고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도록 날마다 주 안에서만 살게 하소서!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년 전 어제 나눈 묵상과 단상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