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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성막을 세움(4) - 성막의 내용과 운행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왔으니 곧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갈고리들과 그 널판들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 덮개와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가리는 휘장과 증거궤와 그 채들과 속죄소와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순금 등잔대와 그 잔 곧 벌여놓는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등유와 금 제단과 관유와 향기로운 향과 장막 휘장 문과 놋 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들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 문의 휘장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성막 곧 회막에서 사용할 모든 기구와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39:32~43).”
가. 성막의 재료들
성막을 세움 세 번째이다. 지난번에 성막을 세우는 문제가 교회를 건축하는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드렸다. 덮고 세우고 받치고 연결하고 수놓았다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더 구체적으로 성막의 내용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왔던 대로 성막의 내용은 증거궤와 떡을 진설하는 진설병의 상과 등잔대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물두멍과 울타리의 내용물로 되어 있다.
증거궤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상징이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궤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을 입혔고 그 안에는 감추인 만나와 싹 난 막대기와 증거판이 들어있다. 그 중심은 증거판이다. 증거판이 들어있기 때문에 증거궤라고 불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새겨지고 그 돌 판이 궤 안에 간수되어져 있는 것과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궤와 예수님이 꼭 같은 모양이다. 증거궤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진설병의 상은 12덩이의 떡을 얹어 놓는 곳인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덩이의 떡이 2줄로 여섯 개씩 놓여 있다. 이것은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에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라고 했다. 생명의 양식,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모두 진설병의 상을 놓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식이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등잔대는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등잔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분향단은 생명의 향기이신 그리스도이다. 번제단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인데 구속이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물두멍은 물의 말씀으로 씻는다는 말씀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기 위한 씻음이 되시는 그리스도이다. 울타리는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재료를 계산했는데 비용이라고 말했다. 금과 은과 놋이라고 하여, 금은 29달란트 730세겔이고, 은은 100달란트 1775세겔이고, 놋은 70달란트 2400세겔이었다고 말하고 조각목과 천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았다. 금은 신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은은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고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각목과 천은 심판받고 정결하게 된 인성을 상징하는 것인데, 왜 조각목과 천은 계산되지 않은 것일까? 시편 103장 15절에 보면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편 144장 3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 인생은 꼭 죄를 져서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죄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다 없어질 것들이라는 뜻이다. 천이 아무리 깨끗하고 온전하게 되었을지라도 불에 태우면 다 불살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므로 조각목과 천은 계산되지 않았다. 장차 없어질 것이고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계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이 되고 거기에 금이 입혀져서 하나님의 신성이 육체로 거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인생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것임을 정말 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귀하고, 우리에게 금을 입혀 사용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불만 하는 이유는 전부 다 풀과 같은 인생이 별 것인 줄 알고, 굉장한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에게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불만이 되는 것이다. 불 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확실히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그분의 부르심과 그분의 목적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루를 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리 잘났거나 못났거나 간에 우리 사는 날이 풀과 같다. 또 아무리 훌륭하거나 못 하거나 간에 그냥 한 줌의 흙에 불과하다.
이번에도 어떤 자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자기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병이 들어서 자꾸만 그렇게 끌고 가는 것이다. 병이 어떤 생각을 만들어 내고, 병이 생각을 끌고 간다. 한 순간에 끝나버리고 만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을 여기에 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 말씀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하신 말씀은 영원하신 이의 계획을 풀과 같은 인생에게 두었다는 뜻이다.
우리 같은 인생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두었다고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인생이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온다하더라도, 하루를 산다 하더라도 감사할 수밖에 없다. 계산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금과 은과 놋밖에 없다. 하나님의 신성하신 것, 그의 구속하신 것, 심판, 이것밖에는 중량을 달아서 계산할 것이 없고 값을 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제사장의 의복에 대해 나왔는데 에봇과 어깨받이, 흉패와 호마노, 겉옷과 긴 옷, 속옷, 두건과 금패, 고의, 띠로 되어있다. 에봇은 맨 위에 입는 반 조끼 같은 옷이다. 흉패와 어깨받이를 붙이기 위한 옷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짊어지기 위한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아니면 이스라엘을 짊어질 수 없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짊어진 사람이다. 가슴에 품고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다.
이 에봇 위에는 흉패와 어깨받이가 붙어있다. 흉패는 보석으로 되어있고 어깨받이도 물론 호마노로 되어 있으니 보석으로 되어 있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오늘로 말하면 교회이다. 교회를 품고 교회를 짊어지기 위한 그런 옷이며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겉옷이라는 것은 바깥에 입는 옷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만 입는 두루마기 같은 긴 옷이다. 청색으로 만들었고 이것은 하늘에 속한 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죽 옷과 대조되는 옷이다. 가죽 옷은 우리 죄를 덮어주기 위한 옷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청색 옷은 하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옷이다. 가죽 옷을 입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죄의 가리움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속옷은 보통 늘 입는 옷이다. 한복을 입을 때 보통 옷을 입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다. 두루마기는 어디 나갈 때 입는 옷이고, 속에 입는 바지와 저고리가 평상복이다. 속옷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이것은 인자이신 그리스도, 심판으로 진실하게 된 인자의 모습이다.
두건과 금패는 이스라엘 죄책을 담당하기 위해서 이마에 붙였던 것이다. 보증이다. 우리를 보증할 수 있는 보증인으로서의 표시였다. 고의, 이것이 진짜 속옷이다. 수치를 가려주는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다. 띠는 붙들어 매는 띠인데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짰다고 되어 있다. 붙들어 매 주는 끈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금도 보고 청색 금색 자색 홍색 실도 보고 가늘게 꼰 베실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인격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사도들은 왜 예수를 따랐는가? 띠에 묶여서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고 난 사람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인격의 아름다움을 보면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오늘날 종교 안에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이 인격을 보지 못했을 때 필요한 것들이다. 이 인격을 보고 나면 그런 것들은 다 소용이 없고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제쳐놓고 다른 것을 쫓아다니는 것 같다. 사랑이나 믿음이나 능력 같은 것을 찾아다닌다. 어떤 교회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라고 하여 사랑의 교회라고 한다. 거기서는 사랑을 실천하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자고 한다. 물론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다른 곳에도 있는 것이다. 불교에 간들 없겠는가? 회교에 간들 없겠는가? 다 있다. 거기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매인 것과는 다르다.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 그리스도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띠가 되어서 묶인 것이 아니다. 믿음도 마찬가지고 권능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권능이나 능력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경우가 많은데 능력이 꼭 기독교에만 있는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다.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쫓아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것, 헛다리를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쁜 일이라는 말이 아니고 좋은 일이다.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매인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는 유명한 사람이고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인데, 말년에 그는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를 알기를 오직 사랑을 위해서 온 사람으로 알았다. 그래서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얼른 생각하면 예수의 사도 같지만 사실은 그는 사랑의 사도이지 예수의 사도는 아니다.
그런 것을 구별해야 된다. 사랑을 전파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같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너무 소중한 것이다. 너무 소중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나. 재료들이 준비됨
이 모든 재료들을 모세에게 가져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로 가져 온 것이고 또 인격의 재료들이 준비되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성막을 건축할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이 준비되었으면 그리스도가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집을 지으려면 여러 재료들이 준비된 다음에 집을 건축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집도 마찬가지로 이런 재료들이 있어서 건축되어진 집이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러한 재료들로 그분의 거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그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의 나라를 짓고 그의 교회를 짓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결국 그의 교회이다.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져야 되는가? 믿음으로 지어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지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다. 권능으로 지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그 인격으로 지어져야 된다.
이 성막의 모든 재료들 속에 사랑이나 믿음이나 권능, 이런 것은 없다. 전부 그리스도의 인격만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될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 인격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39:43).”라고 했다. 명할 때 무엇을 명했는가? 이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한 것이 믿음이나 권능이나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줄로 착각하게 되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쉽다. 절대로 그것은 구별해야 된다.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는 것을 표현한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족하셨고 모세는 그것을 축복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축복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축복이라는 것을 따로 받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족하셨으면 그것이 축복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축복이다. 축복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태어났다. 만족케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바로 축복이다. 그것이 복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저주이다.
마이크가 음성을 확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이 마이크가 만약 음성을 확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저주이다. 축복은 무엇인가? 마이크가 제대로 음성을 확성 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인생도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지, 축복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그 지으시던 일이 마쳐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날을 복주어서 거룩하게 했다(창2:2~3참).”고 한다. 그 지으시던 일은 사람을 짓는 일이었다. 사람을 지으시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했다. 우리가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만족이신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축복이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축복이다. 축복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축복이다. 만약 우리가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로 가만히 그대로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에게 천만금을 준다하더라도 축복이 되겠는가? 그 아이는 자라서 사람으로서 완전하게 성장을 하는 그것이 축복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만족이 될 때 그것이 축복이다.
예수님을 볼 때 일반적인 축복의 개념으로 보면 축복 받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고, 오히려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는 자리까지 갔다.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그를 복 있는 자라고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만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받아 그런 것도 아니고 큰 권능을 많이 받아 그런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권능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세상에서 본다면 저주받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축복인가? 하나님의 만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이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 이상의 다른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또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다. 성막이 건축됨
40장을 보면 성막을 세웠다는 말이 나온다.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출40:17)”했다. 이런 재료들이 다 준비되어 하나님이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때 성막을 세웠다. 제2년 1월 1일에 성막을 세웠다. 제2년이라는 말은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번째 해라는 말이다. 첫 번째 해의 1월 1일, 그 날을 1월 1일로 새로 달력을 만들었다. 애굽에서 나온 달을 첫째 달로 만들었다. 그 첫째 달 1월 1일이 유월절이 되게 되었다. 첫 번째 시작과 두 번째 시작,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번째 시작이 있는 셈이다.
첫 번째 시작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이다. 이 첫 번째 시작은 구속이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양을 통해 구속한 것이다. 값을 지불하고, 어린양을 대신 지불하고 살려내어 건져내 오는 것이 첫 번째 해의 시작이다. 그들의 해의 시작은 유월절이다. 어린양, 그리스도, 무교병, 쓴 나물을 통해서 구속한 것이 첫 번째 시작이다.
우리의 첫 번째 시작은 유월절이다. 세상에 종 되어 있던 나를 하나님이 구속해서 불러냈을 때 그 때 나는 첫 번째 시작을 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유월절을 통해 구속을 받는 것인데 구속을 받고 어디로 갈 곳이 없어서 모두 천당을 기다리고 있다. 구속을 받기는 받았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을 받고 난 다음에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서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갈 곳이 없다. 천당밖에는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모두 천당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천당을 기다리지 않고 두 번째 시작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막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성막을 건축한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구원이다. 유월절은 구속이고 성막을 건축하는 것은 구원이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유월절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내었는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서 끄집어내었다.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단체적인 실체로서의 교회를,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끄집어낸 것이다. 만약 이 성막 건축이 없으면 끄집어내놓았지만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왜 갈 데가 없는가? 성막 건축이 없기 때문에 갈 데가 없다. 땅위에 있는 교회는 성막이라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없고, 또 사람들 자체가 성막 건축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구원은 받았다고 한다. 내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나를 하나님 아들로 받아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는데 갈 곳이 없어서 천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때 목적 없이 구출해놓지 않았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고 구출해놓았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를 건져내놓은 것도 불쌍해서 건져내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내어 놓았다.
구속의 목표는 바로 성막 건축이다. 출애굽기의 목표는 성막 건축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기 18장까지는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까지 도착하는 길이다. 시내산에 도착해서부터는 무엇인가? 그때부터는 40장까지 전부 다 성막 건축이다. 사실은 출애굽기라고 하기 보다는 내용상으로 본다면 성막 건축의 책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서 출애굽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집은 무엇으로 지어질 수 있는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로만 지어질 수 있다. 이 인격으로만 지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인격 안에만 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집은 어떤 물질적인 공간이 될 수 없다. 육신적인 우리 인간의 집은 물질적이다. 왜냐하면 내 육신이 물질이므로 내 육신이 거할 수 있는 집은 물질이어야 된다. 그렇지만 내 영혼이 거하는 집은 물질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 물질일 수는 없다.
그런데 저 하늘 뒤에, 저 별 뒤에, 북극성 뒤에 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이없는 생각이다. 우리 마음도 우리 마음이 있을 집은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서로 친구를 사귀고 사회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 마음 둘 곳을 찾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내가 살 수 있지 물질 속에 내 마음이 살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도 물질 속에 거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어찌 물질 안에 거하시겠는가? 하나님의 집은 인격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천당이니 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공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고 이것은 유치원생도 알고 보면 안 할 일이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 속에 거하신다. 그 말은 곧 그 인격의 백성 속에, 인격의 실재 속에 하나님은 거하신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 교회가 아니고서 하나님이 어디에 가서 거하겠는가? 구속은 하나의 수단이다. 유월절은 하나의 수단이고 목표는 건축이기 때문에 출애굽기의 결론은 성막건축이다.
창세기에서는 건축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요셉이 죽어서 입관했다는 것으로 끝났다. 거기서는 생명의 시작만 있고 아직 건축이 없는 때이다. 출애굽기는 마지막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40:34)”라고 했다. 성막을 건축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했다는 것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연속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 성막의 운행
1) 물로 씻고 새 옷을 입음
성막을 세우고 그 기구들을 거룩하게 했다. 관유를 발라서 전부 거룩하게 했다고 한다. 관유는 몰약, 육계, 창포와 계피에 감람유를 섞어서 만든 기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향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막의 재료들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향기로운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막이 운행된다는 뜻이다.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사장들을 물로 씻기고 옷을 입혔다고 되어 있다. 물로 씻긴다는 것은 존재가 아닌 것들, 생명이 아닌 모든 것들을 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라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내 몸이었을지라도 지금은 죽은 것이 때이다. 각질화 되었거나 땀이 흘렀다거나 땀이 먼지와 합해졌다거나 하는 모든 것이 때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내 생명에 붙어 있어서 내 생명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씻는 것이 때를 씻는 것이다. 생명이 아닌 것들, 세상에서 묻는 먼지들을 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다. 세상의 풍조나 사상 같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은 세상에서 배운 것들이 인생을 가로막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어진 인생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헛된 지식을 배워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또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엉뚱한 것을 섬기고 살고 있다. 일생동안 허망한 것을 위해 발버둥 치다가 죽게 만들어놓았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으로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물로 씻어야 된다. 씻고 옷을 입어야 한다. 씻지 않고 옷을 입으면 옷이 더러워진다. 씻고 입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입은 옷이 아닌 새로운 옷이다. 먼지나 때는 세상에서 입은 옷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벗고 의의 옷을 새로 입어야 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된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했다. 이는 의가 진실에서 나오기 때문에 진실의 의라고 번역해야 된다. 진실의 의와 거룩함으로 옷 입은 새 사람이다.
교회는 진실의 의와 거룩으로 옷 입은 새로운 사람들이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인류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입어야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지, 세상을 입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에 방해되는 것도 그렇고,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에 방해되는 것도 그렇고, 교회를 섬기는 것에 방해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을 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세상의 상식 때문이다.
세상에서 배운 상식 때문에 그래도 이래야 되지 않느냐 한다. 그래도 이래야 되지 않느냐는 것은 알고 보면 세상에서 배운 것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무언가를 배워서 그 관념 속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하면 교회 생활하는 것이 자꾸 걸리게 된다거나 거리낌이 된다거나 갈려고 하는데 못 가게 막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된다. 순수하지 못하다. 그런 것은 물로 씻어야 된다.
이 물로 씻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때는 씻어내야 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원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어디에선가 묻어 온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사람들은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잘 모른다.
나쁜 습성도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는 것이 많다. 왜냐하면 사탄은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하면 고칠 수가 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때가 묻을 때 어디에서 묻었는지를 알면 거기를 안 가면 되는데 돌아다니면서 묻은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서 묻었는지를 모른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은 때에 해당된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이 준 것이다. 거지처럼 돌아다니면서 얻어먹다가 배운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기인 줄 생각하고, 자기의 지혜인 줄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날 가면 인생이 허망해지게 된다. 나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붙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가서보면 아무것도 없고 자기 인생만 비참하게 되고 허무하게 된다.
2)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함
제사장들을 물로 씻기고 새로운 옷을 입힌 다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더라고 되어 있다. 회막이라는 말은 모이는 곳, 만나는 곳이라는 말인데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는 회막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회막이라는 말이 나온다. 모세가 우상숭배가 있은 다음에 진 밖으로 자기의 거처를 옮겼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진 안에 같이 있지 않고 따로 나와 있었다. 그 때부터 회막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모세와 백성 사이에 어떤 간격이 생겼다. 그런 이후에 회막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가 항상 그렇게 주님과 같이 있다면 따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하는 것이다. 동산 안에 있을 때는 함께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따로 만날 일이 없었다. 동산을 떠나고 난 후에는 따로 만나야 된다. 그래서 어떤 종교적인 방법들이 생기게 되었다. 우상숭배 이후에 간격이 생겼기 때문에 회막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는 구름이 덮였다고 하는데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문제이고 바깥의 문제이고 보이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만날 때만 말씀하시고 만나지 않을 때는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름이 덮였다.
에덴동산에서도 화염검이 덮였다. 그룹들이 덮었다고 되어 있다. 가려진 어떤 사건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 가려짐이 오히려 표시가 되는 것이다. 성막에도 휘장이 가려져서 지성소가 보이지 않는 되었다. 모두 가려짐을 의미한다. 그 가려짐이 도리어 거룩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성막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내적인 문제이다. 성막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간증과 관계된다. 내적으로는 영광이 충만했다. 내적으로는 영광이 충만하고 외적으로는 구름이 덮혀 있었다는 뜻이다. 속으로는 하나님 영광을 볼 수 있고 겉에서 본다면 구름을 볼 수 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도 바깥에서 볼 때는 빽빽한 구름이 있었다. 모세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에덴동산은 영광으로 충만하지만 화염검으로 가려져있어서 바깥에서 볼 때는 무서운 곳이다. 안에 들어가면 영광스러운 곳이다.
이런 문제가 왜 생겼는가? 우상숭배 이후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관계로 인해서 구름이 덮여있는 것을 보고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구름이 뜰 때 움직이고 구름이 앉을 때 앉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영광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가려진 것을 보고 움직이게 되었다는 말이라 조금 불행한 일이다. 구름기둥이 뜬 것을 보고 성막 위에 구름기둥이 뜨면 이스라엘 백성도 같이 뜨고, 구름이 앉으면 같이 앉았다고 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믿는 경우가 많다. 벌 받지 않으려고 믿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면 그 세계를 벗어나서 하나님 내면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볼 때 그것은 캄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 우편은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인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십자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일 수도 있다. 영광은 안에 있고 구름은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성막과 함께 움직임
회막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나온다. 구름이 덮이면 그 자리에 앉고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도 옮겼다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되고 온전한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인가? 구름이 떠오르면 같이 움직이고, 구름이 앉으면 같이 앉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이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산에 들어가서 혼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2000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혹시 어떤 응답을 받아서 잘 가는 수도 있지만, 또 잘못된 응답을 받아서 잘 못 가는 수도 있다. 항상 잘 가는 것이 아니다.
성막과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도 더 안전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계시이다. 개인의 영성이나 느낌이나 의견이나 계획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신령한 기독교인이라면 자기의 영성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어떤 느낌을 따르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가장 정확한 정석은 무엇인가? 성막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구름이 뜨면 나도 뜨고, 구름이 앉으면 나도 앉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의 움직임이다.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가 움직일 때 나도 움직이고, 앉을 때 나도 앉아야 되는 것이다. 나 혼자의 생각과 나 혼자의 의견, 나 혼자의 영성, 나 혼자의 깨달음, 나 혼자의 느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와 함께 가는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현재적인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개인에게 일일이 다 코치를 해서 넌 이렇게 하고 넌 저렇게 하라고 하던 시대와 단체적인 실체에게 자기를 보여준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개인에게도 가령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엘리야에게도 있고 엘리사에게도 있지 않았느냐는 사람도 있다.
물론 있었지만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 몇 사람이나 되며, 자기가 과연 그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것은 영광으로 충만한 성막이다. 성막을 따를 때는 누구든지 따를 수 있었다. 영성이 높은 사람이냐 아닌 사람이냐가 아니다.
이것이 없을 때는 모세 한 사람만 겨우 산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가 있었고 받을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 장로들도 안 되었다. 그러나 성막이 세워지고 난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누구든지 성막의 구름이 뜨면 백성도 다 뜨게 되고, 성막의 구름이 앉으면 백성도 다 앉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 백성이 함께 움직이게 되지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만 영성을 주어서 넌 이렇고 하게 넌 저렇게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 다 움직이겠는가? 전쟁을 어떻게 하겠는가?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걸 다 방어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전쟁을 하겠는가? 정말 어리석은 일이고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사탄에게 밥이 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군대를 군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고, 개인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과 똑같다. 그러면 전쟁이 얼마나 허망한 전쟁이 되겠는가? 아무리 유능한 병사들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그 병사들이 군대가 되지 아니하고 개인적인 용사가 되었다면 그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사탄의 계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이 놀라운 것은 누구나 구름을 보면 뜰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다. 오늘 교회가,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가 움직일 때 그 때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눈 감고 있으면 안 된다.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보면 된다.
자기 혼자 또 골방에 앉아있으면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낙오병이다.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지만 낙오병이다. 아무리 유능한 병사라도 혼자 떨어져서는 안 된다. 상대방은 군대인데 나 혼자 떨어져서 무슨 수로 전쟁을 이기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회막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또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개인들이 자기대로 길을 찾아보려고, 자기대로 영성을 따라 보려고 한다. 어디 가면 영성훈련을 한다고 써 붙어있는 곳이 있다. 어떻게 영성훈련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하여 응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엘리사나 엘리야 같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우리 중에 그럴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10억의 기독교 인구가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그럴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어리석고 섣부른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회막에 구름이 충만할 때, 구름이 뜰 때 우리도 뜨자. 교회의 운행과 함께 우리가 운행하자.
다른 교회는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는 사실 알고 보면 누구라도 교회 앞에 자기의 행로를 묻는다면 교회는 금방 대답할 수 있다. 교회 앞에 당당하게 할 수 있고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앞에 떳떳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누가 특별히 영성이 더 높고 안 높고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해보면 안다.
내가 교회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 하나님 앞에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이고, 교회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도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없고 머리가 좋을 필요도 없고 기도의 능력이 많을 필요도 없다. 그 백성 안에 함께 움직이면 다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성막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움직임, 이것이 바로 성막의 움직임이고 오늘은 교회의 움직임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래야 물을 방법이 없고 당신의 뜻을 가려서 알아내보려고 하여도 우리는 역부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막을 세우시고 그 백성 앞에 서셔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이 계획을 세우셔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사실을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안에 영광이 충만한 것과 또 교회를 덮고 있는 구름이 뜨고 앉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런 자리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고 이런 위치까지 저희들을 불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엘리사 같은 능력이 없을지라도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못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이런 성막의 충만한 영광과 회막에 덮여 있는 구름을 볼 수 있는 이런 축복 가운데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구름의 인도함을 따르기를 원하고 이 구름의 인도함 앞에 우리를 복종시키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