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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5 봄집회 No 3 생명의 씨1
씨의 복음, 왜 이 말을 하고 싶었는가? 문제는 씨에 달렸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농부는 많은데, 무슨 씨를 심느냐가 다른 것이다. 무엇을 심고 있느냐가 다른 것이다. 사과 심은 사람은 사과를 거둘 것이고, 포도 심은 사람은 포도를 거둘 것이고, 엉겅퀴 심은 사람은 엉겅퀴를 거둘 것이다. 안 그런가?
그와 같이 예수를 심은 사람은 예수를 거둔다. 예수를 심은 사람은 더 예수를 거둔다. 예수를 심지 않았으니까 예수는 안 나온다. 다른 것은 없다. 씨를 다른 것으로 심었으니까 안 나온다. 배를 심으면 똘배라도 나온다. 맛없는 똘배라도 나온다. 그런데 배를 심지 않으니 배가 나오겠는가? 아주 단순한 문제다.
농부는 많다. 그런데 무엇을 심었는지 안 나온다. 2000년 동안 노력을 했는데 안 나온다. 씨가 노력한다고 바꿔지겠는가? 씨는 바꿀 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배가 감이 되겠는가? 안 되는 것이 씨다.
지금 맛있는 사과를 먹고 씨를 버리면 무엇이 나오는 줄 아는가? 원래 있던 능금이 나온다. 맛있는 것을 먹었는데 씨는 다른 것이 나와버린다. 원래 씨가 그거였으니까 그렇다. 귤을 먹고 씨를 버리면 탱자가 나와 버린다. 참 신기하다. 씨를 바꿀 수가 없다.
여러분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한다. 그러면 천지창조의 씨가 하나님이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없다. 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을 때 나를 건져낼 씨가 있다. 그분이 씨란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말은 내가 잘 모른다는 뜻이다. 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데, 그분의 형상이 안 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면, 그분의 형상이 먼저 나온다. 참으로 모르고 다 자기 생각대로 아니까,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다른 것이다.
예수 심는다고 심었는데 다른 것이 나와 버린다. 맛있는 후지 사과를 먹었더니 나올 때는 그 사과가 나오지 않고 다른 것이 나와 버린다. 나도 그 세계에 있어 봤다.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다고 내놓았더니 다른 것이 나와 버린다.
어제 진실이 간증하는데 첫 번째는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존재가 씨란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이 씨다. 그 사람이 씨인데, 그 사람 빼놓고 다른 것을 아무리 해도 안 나온다. 보기 좋은 예수를 심으면 안 나오고 도로 토종이 나온다.
그러니까 존재, 나는 누구냐? 나는 하나님이 지어놓은 사람이다. 아무리 사탄이 와서 무엇을 만들어 놨어도 나는 여전히 사람이다. 아무도 그것을 못 바꾼다. 사탄은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선악을 아는데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했다. 하나님같이 되는가?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거짓말이다. 예수를 잘 믿으면 이렇게 된다. 뒤로 가보면 안 된다. 그러니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렇게 된다. 뒤로 가보면 안 나온다. 거짓말이다.
기범이가 씨 장사다. 그런데 이것을 심으면 좋다고 해서 가져다 심었더니 나쁜 것이 나왔다. 여름에 나는 풋고추는 참 맛있다. 순전히 안 매운 풋고추를 나는 찾고 있는데, 대구에서는 그것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대구 사람들이 안 맵다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매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매운 것이니까 맵다.
어제도 고추 모름을 해서 처음에 하나 먹으니까 안 맵다. 다음에 한 개 또 먹으니까 입 안이 아프다. 속았다. 모양만 보고 속았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속는다. OOOO 안 된 것이 또 되겠는가? 속는다. 이제는 속지는 말아야지 해도 어떻게 속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 이 사람이면 안 속겠다. 참 싫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라야 안 속는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이 좋겠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제일 싫은데 이 사람이라야 변질이 안 된다. 변질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OO에 너무너무 싫은 사람인 것이다. 왜, 사탄에 속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지 않고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이것이 아담의 진실한 말이다. 그 이후로 아담은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본 적이 없다.
대신 내놓았다. 양으로 내놓고 OOO로 내놓고 송아지로 내놓고 이렇게 대신 내놓았지 자기가 직접 내놓은 것이 없다. 자기 얼굴을 직접 하나님께 보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이 아담이 두렵다. 왜냐하면 자기는 영이요 생명이니까 몸이 없다. 그런데 이 아담은 몸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아담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는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체육대회에 가면, 하나는 눈 가리고 하나는 신문지 말아서 때리고 하는 게임을 한다. 보나 마나다. 한 사람은 보고 때리고 한 사람 못 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기겠는가? 꼭 마찬가지다. 하나님도, “야, 이거 큰일 났네. 저놈이 몸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짜지?” 그래서 깊이 깜깜한데 숨어 계신 것이다. 오죽하면 깜깜한데 숨어 계시겠는가?
그러다가 어느 날 문을 쫙 열고 나왔다. 왜, 무섭지 않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무섭지 않은 사람이 왔으니까 문을 확 열었다. 성소의 휘장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졌다. 왜, 이제 사람을 만났으니까, 자기가 창조한 사람을 만났으니까 문을 열어 놓았다. 겁이 나는데 무엇하러 깜깜한 곳에 있겠는가?
나는 바닷가에 살았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귀신 얘기가 아주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 골목만 돌아가도 여기 혹시 귀신 없나 으슥하다. 어떤 어른이, “아니, 죽은 놈이 산 놈에게 어쩌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나는 살아있고 귀신은 죽었지.” 이 생각으로 상당히 담력 얻었다. “귀신이 무슨 소용 있어? 나는 몸도 있는데, 저건 몸이 없잖아. 여기에 남아도 괜찮아. 한번 해보지.” 이런 담대한 마음이 어려서 생긴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니까 몸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영도 있고 몸도 있다. 사람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 속에 영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의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됐다. 사람들은 모르는데 하나님이 보면 두렵다.
우리도 사실은 인간을 보면 두려운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다. 무슨 이해관계가 깊이 생기면 아담은 금방 친구가 원수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한자락을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조금은 숨겨놓아야 된다. 안 해놓으면 안 된다. 같은 사람끼리도 두렵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는가? 번번이 속는다. 긴장 안 하고 있으면 번번이 속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대하고 있다. 무서운 사람을 대하고 있다. 하나님으로서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원래 사람에게는 영이 있다는데 무섭다. 사람은 영도 있고 몸도 있고 하나님은 영밖에 없으면 누가 누구를 무서워하겠는가? 영밖에 없는 하나님이 더 두려워한다. 사람을 두려워한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오는가? 두려워서 안 오는 것이다.
그런데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고, 봉창문 두드려도 안 되니까 망치까지 가져와서 대문 두드리고 있다. 더 무섭다. 문 안 열어주면 가는 사람도 있고, 때려 부수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때려 부수고 들어온 사람 있으니까 도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면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사람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내보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두려워서 그렇다. 그날이 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고 안 한다. 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오시니까 하나님이 알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늘 예를 들지만, 이몽룡이 향단이를 보내서 춘향이 보고 좀 오라 했다. 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춘향이가 하는 말이,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 딱 그 글자를 종이에 써서 보냈다.
기러기가 물을 따라다니는 것이지 물이 기러기 따라다니는가? 안 그런가? 나비가 꽃을 찾아오는 거지 꽃이 나비를 찾아다니냐? 안 그런가? 아주 유명한 말이다. 춘향전에서 그 말은 아주 굉장한 중요한 문장이다.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 그래서 이몽룡은 그것을 오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손뼉을 치면서 가자고 했다. 그래서 갔다는 거 아니겠는가?
꽃이 있으면 나비가 오는 것이다. 꽃이 있는 곳에 나비 찾아온다. 꽃이 떠돌아다니면서 나비를 찾아가는 것이 어디가 있는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오시는 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오시는 분인데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자기가 먼저 무엇을 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예수를 만나니까 하나님은 그때 안심이 돼서 휘장을 열고 나온 것이다. “야, 이제 내가 지은 사람이 왔구나! 내가 가도 괜찮은 사람이 왔구나!”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경험해 보시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을 알라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그 생각이 안 난다.
이상하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알아도 항상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 한다. 그래서 그 숨어 계신 하나님 찾으려고, 산길도 다니고 내가 한 3년간
찾아보았다. 찾아보았지만 못 만나겠다. 사람도 숨으면 못 찾는데, 숨어 계신 분을 내가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주일 학교 놀이터 가면 보물찾기 놀이를 한다. 나는 이놈을 하나도 못 찾겠다. 딴 사람은 잘 찾는데 나는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다. 그러니까 나는 땅에 묻힌 보화를 못 찾는 사람이다. 잘 찾는 사람이 아니다. 아주 못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니까, 하나님께서 찾지 않아도 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적절하고 필요하면 오신다 하니까 오신다. 하도 찾아와서 바뻐 죽겠고 쉬고, 싶어도 막 찾아오니 어쩌겠는가?
생각해보면 “아니, 내가 이려러고 있지, 안 그러면 내가 있을 이유가 뭔가?” 이 생각이 드니까 또 나가서 맞이하고, 또 나가서 맞이하고 두 팀 세 팀 만나고 나면 힘이 쫙 빠진다. 참 신기한 세계다.
존재의 세계. 이것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었다. 우리 존재가 거기서 발견됐다. 옛날에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우리는 이 소리에 망했다. 내가 죽으려고 해보아도 안 된다. 어떻게 스스로 죽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죽었다는 사람을 아무도 못 봤다. 죽어야지만 있지, 죽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못 봤다. 여러분 보았는가? “나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죽었네.” 하는 것을 보았는가? 죽어야지 하는 사람만 있지만 죽은 사람은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헛된 말을 잘못 들으면 속는 것이다. 자기도 속는다.
그래서 우리 존재는 예수님 죽음 앞에 와야 발견된다. 다른 곳에서는 발견이 안 된다. 공자님에게 가면 발견되는가? 안 된다. 거기서는 나는 더 배워야 되겠다. 덕을 더 쌓아야 되겠다는 것이 발견되지, 내 존재는 발견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앞에 가면, “아이고 내가 해탈을 빨리 해야지. 좀 더 해야지.” 이렇게 발견되지, “아, 나는 이미 완성돼 있네.” 이렇게 발견이 안 된다. 가서 물어보라.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가서 물어보라. 없다.
예수 앞에 가면 내가 발견되어 버린다. 자기를 알려면 예수 앞에 가야 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예수 앞에 가야 된다. 가지 않고 이리저리 빙빙 돌아보았자 진짜 자기가 발견이 안 된다.
자기가 발견이 안 되면 남을 의심한다. 그러니 그 사람이 가면 가는 곳마다 다 분열이 되어버린다. 모두 의심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하나가 안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너무 외골수다. 그래서는 어떻게 세상과 교통을 하겠는가?
성벽을 헐어라. 이것은 바르트 사상의 근본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말을 들으면 다 듣기가 아주 좋다. 듣기 좋은데 실속이 없다. 혼란만 생긴다. 사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다. 원래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담이니까 흔들린다. 위치를 떠났으니 흔들린다. 당연히 두려워진다.
루터가 말했다 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깊은 두려움이 있다 한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찾는다 한다. 거기서 어떻게 하면 좀 무마될까 싶어서, 인정받을까 싶어서 종교를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루터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롭다고 말했다 한다. 죽을 때 혼자 죽으니까 외롭다.
로미오와 줄리아는 같이 죽자고 했다. 같이 죽으려 했는데 같이 죽지 못했다. 각자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다 한다. 같이 죽을 사람이 없으니까 외롭다. 같이 죽자는 사람 있어도 같이 못 죽는다. 같이 죽자 해도 죽을 때는 나 혼자 죽는다.
그러니까 나를 어디서 찾겠는가? 예수 앞에 가는 것 외에 찾을 수가 없다. 여러분 해보라. 찾으면 거기에 있고, 못 찾으면 예수 앞으로 와야 한다. 못 찾으면서도 거기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안 그런가?
그러니까 존재는 예수의 죽음 앞에 와야 비로소 발견된다. “나는 이거구나!” 이렇게 발견된다. 그러니까 참 싫은데 어쩔 수 없다. 그 앞에 안 가면 내 존재가 발견이 안 된다. 싫지, 누가 좋겠는가? 그것이 예수와 같은 위치면 누가 좋겠는가? 다 싫다. 나도 싫다.
그런데 거기에 안 가면 내가 없는데 어쩌겠는가? 내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거기에 가야 된다. 어차피 가야 된다. 그런데 내가 존재로 발견될 때 나는 이상하게 평안이 온다. 그때야 평안이 온다.
방금 평안이 나와서 자기는 의사로 일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너무 과분하게 칭찬을 받는 것 같다고 그런다. 자기는 의사라서 일했으니까 그냥 담담하다는 것이다. 자기 할 일이었으니까 늘 하던 일 했다는 것이다.
나도 맹장수술을 큰 병원에서도 못한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으면 못한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하면 못돌아 온다고 한다. 폐가 돌아올 힘이 없어서 절대 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겠는가? 그때 평안이에게 연락하니까 와보라고 했다. 그래서 마취과장이 자기가 한번 마지막 방법을 써보겠다고 해서 맹장수술을 했다. 안 그랬으면 그냥 터져 죽는다. 터지면 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수술이 일상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술하는데 이 얘기하면서 한다. 나는 그때 복음을 좀 전하려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그러고 있으니까 할 수가 없다. 정신이 말짱하니까 내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들에게는 일상이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수술하지, 잘못하면 수술을 못한다. 수술할 사람이 긴장해버리면 못 할 것이 아닌가? 아마 그래서 일부러 이 얘기를 한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수술한다. 심각하게 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자리에 오면 일상이 된다. 존재 안에 오면 일상이 된다. 특별하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죽어야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속은 것이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는 것은 속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왜 중요한가? 나를 나되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나를 나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너무 중요한 것이다. 밥이 나오는가 옷이 나오는가?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다. 돈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죽어도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의 것이다.” 한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마찬가지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존재가 나오면, 내가 누군지 알아지면 세상이 딱 달라지는 것이다.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나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딱 일률적으로 이렇다고 할 수가 없다. 존재가 달라지면 분명히 달라지는 것이 확실하다. 나도 경험하고 형제들도 경험한다. 믿어주시라. 그냥 믿어 주시라. 내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모르는 이야기하겠는가?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지 모르는 이야기는 안 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존재끼리 만나야 알게 된다. 예수는 참 보기 싫지만 존재란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앞에 부딪치면 내 존재가 발견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실에 대해 얘기한다. 사실, 예수 사실은 다 같이 연결된 말이지만 사실이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 사실에 아무것도 붙일 수가 없다. 어떻게 하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은 다 헛소리다. 내려올 수만 있다면 왜 내려오라 했는가? 못 내려오니까 못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이라는 것은 정말 엉뚱한 소리다. 사람들이 붙일 것이 없어서 예수를 미화시킨 것이다.
원래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유태인에게는 참람죄로 죽은 것이고, 제자들에게는 실망해서 버림받은 것이다. 당연하다. 유태인도 진실하고 제자들도 진실하다. 예수도 진실하고 다 진실한데, 뒤에 가서 만든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다. 진실하지 못한 것은 뒤에 가서 만든 사람들이다.
사실은 무엇이냐? 이것이(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굳게 서야 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좋든 싫든 사실이다. 왜 하필이면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가? 그 말은 좀 뺐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 죽었다는 말을 왜 쓰는가? 그거 좀 빼면 좋겠다는 사람이 또 있다.
내가 그랬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계속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 나도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없어질 때까지 해야 한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를 빼버리면 무엇이 되는가? 사람은 다 죽는 것이 아니냐.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있으면 그냥 김 빠져버린다. 김 빠져버린 맥주가 되어 버린다. 심심해져 버린다. 안 믿는 사람도 안 그러겠는가? “아니, 그럼 누가 뭐 내려오고 안 내려오고 하냐? 당연히 못 내려오는 건데 그것 가지고 왜 떠드냐?” 이럴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다. 그것도 일상인데, 왜 그것을 또 얘기하는가 하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죽었단 말을 왜 하는가? 죽었단 말을 하지 않으면 듣기는 좋다. 그런데 죽었단 말을 하지 않으면 뒤에 눈 것을 안 닦은 것과 똑같다.
죽었단 말을 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는 사람이 또 생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했다. 이 말만 하면, 어떤 사람은 분명히 의문을 가진다. 내려오지 못한 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죽었다는 말이다. “에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겠노?” 속으로 그렇게 한다. 그 말 좀 뺐으면 좋겠다 한다.
꼭 필요한 말이다. 정말로 아주 꼭 필요한 말이다. 그래서 하는 것이다. 이 사실에 굳건하게 서야 된다. 좋든지 나쁘든지, 내 기호에 맞든지 안 맞든지, 이 사실에 꼭 서 있어야 된다. 그것이 나라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보고, “나도 그렇네. 나도 그래. 나도 그 사람이네.” 그러면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연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실이 만나니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전부 다 변질될 수가 있다. 기독교가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발전한 것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변질되었다. 이것만이 사실이고 다른 것은 사실이 없다.
그 전에는, 나도 복음서를 보기 전에는, 신약성서는 바울이 거의 다 썼다. 바울을 받아 쓴 사람들이 거의 다 썼다. 그런데 거기서 참 예수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지만 우리는 모른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냐? 이런 의문이 항상 남는다.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바울 이야기도 보다 보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바울이 희랍 세계를 떠나 로마로 간 후에 바로 사람이냐 신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지주의로 발전했다. 영지주의가 여러 가지지만 이 경우는 사람도 됐다가 신도 됐다는 말이다. 필요한 대로 합해지면 신이고 합해지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는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한이 30년 후에 교회를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것을 시정하려고 나온 것이 요한 1, 2, 3서다. 요한복음서다. 그러니까 예수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다 변질돼 버린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 아니고 그렇게 될 길밖에 없다. 변질로 갈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어떻게 한다 해도 사실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서 세월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다 변한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도 다 달라졌다. 순교까지 했다. 그런데 로마에 간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는가? 희랍에 있을 때 바울이 증거한 것과 다르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무엇인가 씨를 열심히 뿌렸는데 이것이 서로 일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정치적 산물이 나오게 된 것이다. 타협이 된 것이다. 인생도 진실은 없고 타협만 있다. 그래서 정치가 사람의 꽃이라 한다. 인생의 꽃이어서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협상이라 한다. 협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가 못 된다. 협상을 잘해야 그 사람이 정치가가 된다. 그런데 외골수로 가는 것은 정치가가 아니고 혁명가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로 되겠는가? 타협해서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복음이 돼야 한다. 사실에 근거해야 영원한 복음이 된다. 참 싫지만, 이 사실은 정말 오도 가도 못하고 싫지만 그래도 여기에 근거해야 된다. 여기에 뿌리를 박아야 된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어렵다. 하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안 되고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한 말씀, 사실에 근거한 복음만이 영원하다.
마지막으로 거룩, 거룩한 사람이 된다. 거룩은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왜 못 서는가?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더럽고 좀 부정하다고 해서 못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에 근거한 이 사람은 부정이 없다. 늘 거짓말만 듣고 사니까 부정해지니 소용이 없다. 참말만 있고 사실만 있으면 구별되니 부정하겠는가?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볼 때 구별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전혀 부끄럽지 않게 쓰는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쓰려면 부끄러워 거룩하지 못해서 못 쓴다. 이제는 한 사람 앞에 거룩하지 못해서 못 쓸 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밀고 살 수가 있다.
어제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얘기했다. 아주 똑똑하게 갈라서 말했다. 나는 부연 설명한 것밖에 없다. 오늘 내가 새로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어제 진실이가 한 말을 나는 부연 설명한 것이다. 내 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라는 생각이 멀어지고 다른 아버지다. 나도 딸이라는 생각보다 다른 딸이다. 신기하고 이상한 세계다.
누가 이것을 해보지 않고 알겠는가?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참 싫지만, 내가 그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경우에 시인하는 것만이 지혜다. 예수는 특이한 사람이다. 길을 물으면 내가 길이다. 생명을 물으면 내가 생명이다. 하니 이 사람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른 방법으로 알 수가 없다.
공부를 한다고 알겠는가? 이 문제 자체가 공부를 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공부로 해결된다면 나는 못한다. 나보다 공부를 몇 배나 잘 하는 사람이 많은데 되겠는가? 공부를 할 일이 아니다. 공부로는 할 일이 있고 하지 않을 일이 있다. 아기 낳는 것은 공부해서 하는가? 여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아기를 낳으려고 공부를 하는가? 왜나하면 여자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다. 쓸모없는 주머니는 없어도 되는데 달고 다닌다. 딱 아기를 낳을 때만 필요한 주머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온전하게 우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가 거짓말에 속아서 곁길로 갔다. 그렇게 가는 것이 정상인 줄 알고 살기 때문에 인생 문제는 끝이 없이 나온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다른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했는데 또 걸려들 수 있다. 나에게 “왜 쫓아내냐?”고 말을 하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실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말하다 보면 걸려들어서 내가 할 말을 못하고 말았다. 할 만큼 했으니까 모르겠다. 하여간 그 인간의 불평과 불만에 말려 들면 죽을 때까지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예수 사건만 이야기해야 한다.
자길이 형제는 무식하다. 그래서 사람은 살린다. 원래 무식 사람이 아니다. 계대 특설반 나오고, 경대 사대 영어교육과를 나왔다. 사람이 멍청해져 버렸다. 나는 이 신기한 세계에서 여러분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너무 축복이다. 이 말을 듣고 아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나에게 행복인지 모르겠다.
오늘 시간이 되면 나는 앙케이트를 조사해 보려고 한다. 안다 모른다 아니다 그렇다, 이것을 아주 솔직하게 말하는 앙케이트를 조사해 보려고 한다. 해도 어차피 돌아올 것이니까 괜찮다. 그런데 손 들어보라고 하면 안들 것이다. 잘 모르겠다고 손 들어보라고 하면 안들 것이다. 이름이 없으니까 앙케이트 조사하면 딱 나올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집회의 주제, 이 씨가 확실히 나에게 알아져야 한다. 씨가 확실해져야 한다. 농부가 확실하면 되는데 농부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씨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무슨 씨를 가지고 왔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는가? 호박을 심으러 왔는지, 가지를 심으러 왔는지 알아야 한다. 내일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
이번 집회에 자매들만 쭉 배치해 놨다. 재미있는 말이 자매들에게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핵심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씨, 생명의 핵심인 씨, 변치 않는 씨, 이 씨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러분 우리 교회 건너편과 뒤쪽을 아시는가? 가다가 자세히 보시라. 벚나무가 그쪽에만 딱 야생한 벚나무가 있다. 다른 산에는 없다. 우리 교회 뒷산에서 건너편 산 쪽으로 도랑도랑 벚나무가 있다. 그런데 야생종이 나왔다. 우리 교회에 있는 것처럼 송알송알 된 것이 아니다. 뜨문뜨문 피니까 보기에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그 OO 안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개량했다. 어떻게 개량을 해서 덩어리가 많다. 덩어리는 보기가 좋다. 새들이 그것을 먹고 가서 똥 싸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근처에만 난다. 여러분 한 번씩 자세히 보라. 유심히 보면 딱 그 지역만 벚나무가 있다.
씨는 안 변한다. 절대로 안 변한다. 어디 가도 도로 그 씨가 나온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간, 그 씨는 안 변한다. 변종한 것을 가져다 놓으면 또 변종한다. 이번 두 번째 나온 벚나무는 접꽃으로 씨가 없다. 이것은 변종된 것이다. 씨 없이 꽃만 피도록 바꾼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교회로 들아가는 자리에 있다. 맨날 핀다. 그렇지만 꽃만 피면 아주 아름다울 텐데 잎이 먼저 나와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교회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꽃이 좋으니까 다 꺾어 가 버렸다. 지금은 앙상하게 남아서 뼈만 남았다. 벚나무는 한번 꺾으면 그 자리에 다시 나지 않는다. 전지해버리면 그 자리에 다시 안 난다.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 다른 나무는 자르면 또 나오는데, 이 벚나무는 자르면 안 난다.
무궁화는 잘라주면 해마다 많이 핀다. 우리 집 앞에 있는 무궁화 나무는 뜨문뜨문 피어서 별로 보기 좋지 않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심어놓았는데 잘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 싹 거의 반으로 깎어버렸다. 금년은 좀 너무 늦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볼 때 전부 꽃이 확 핀다. 그래서 해마다 한번 나무는 잘라주어야 한다. 우리 교회 옆에도 심어놓은 것이 있다. 그렇게 키우라고 해마다 잘라준다. 키는 그대로 크지 않고 퍼지고 퍼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깎아줄 놈은 깎아주고, 그냥 놔둘 놈은 그냥 놔두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안 변한다. 사람이 바꾸어 놓아도 돌아온다.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도 돌아온다. 갈 데가 없다. 답을 찾으려면 갈 데가 없다. 그냥 그대로 살다 죽겠다면 몰라도 답을 찾는 사람은 돌아온다. 답이 없는 곳에 계속 있겠는가? 답이 있는 곳으로 온다.
씨가 확실하면 그 사람들이 오기가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확실해지는 것이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 된다. 그러니까 모두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그날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가? 말을 하다보니 끝이 없다. 그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