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두근
전북대학교 문학사
전주대학교 문학박사
순천제일대학교수 역임
시집 :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등 9권
현: 재단법인 순천문인협회 고문, 순양예술문화재단 이사장.
문예창작의 자세
1. 원초적으로 보기
영화 늑대와 춤을 보자.
남북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진바 중위는 동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다리를 절단하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지루하게 대치하고 있는 적지인 남군 진영을 향하여 돌진하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남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부상한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치료를 받게되고, 서부의 헤이즈 요새로 발령을 받는다.
멀리 지평선이 펼쳐지고 광활한 평원으로 둘러 쌓여 있는 그곳을 홀로 지키며 목가적인 생활을 한다.
그는 요새로 찾아오는 늑대와 어느덧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고 어느 날 밤 늑대와 빙빙 돌며 춤을 추게 되는데
이를 목격한 인디안으로부터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는 요새에서의 기다리는 생활을 박차고 인디안과 버펄로 떼를 찾아 나선다.
결국 평화를 사랑하는 인디언 '수족과 거대한 버펄로 떼를 만나게 돈다.
'잔 던바'는 수족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디안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고,
'머리 속의 바람' '발로 차는 새' 등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백인 인디언인 '주먹 쥐고 일어서'와 결혼하는 등 행복한 생활에 젖어있던 그는 수족의 켐프 이동을 앞두고 남군에게 붙잡히게 되어 교수형에 처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수족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백인(남군)으로부터 수족을 보호하기위하여
그는 '주먹 쥐고일어서'와 함께 수족의 캠프를 떠난다.
북군 중위 '쟌 덤바'를 '늑대와 춤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그는 분명 '잔 단바'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원주민 인디안은 그가 목격이되었을 때의 정황에 따라 그를 '늑대와 춤을' 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목격자의 이름 붙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원주민은 그가 목격되었을 때의 정황에 따라 그를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부른 .잔 던바.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주민 인디안의 눈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원주민처럼 보는 것이 '원초적으로 보기'이다. 영화 '부시맨'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범죄 처벌 폭력 판사 지도자가 없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부시족은 '병'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드려 보고, 병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주술적인 치료의 도구로 쓰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로 목격하였을 때 자기 방식대로 콜라병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 외에도 영화 ' 부시맨'에서는 목격자의 이름 붙이기 등이 많이 보인다.
비행기를 '날개를 움직이지않는 시끄러운 새'라고 하고, 자동차를 '둥근 다리 달린 동물'로, 총소리를 '천둥소리'로 부른다.
이것이 원초적인 보기이다.
원초적으로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늑대와 춤을'의 인디언 수족이나 '부시맨'의 부시족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기존의 가치(잔 던바 또는 비행기나 자동차)를 일체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날개를 움직이지 않는 시끄러운 새나 둥근 다리 달린 (동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2. 제 눈의 안경으로 보기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세조찬위사건(世祖簒位事件)'이라는 것이 있다.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고 그 후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제7대 세조에 등극한 사건을 사학자들으 그리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세조찬위사건'을 소재로 이광수와 김동인이 각각 소설을 쓴 바 있는데, 수양대군에 대해여 서로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는 동아일보에 317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어린 왕 단종을 정통 왕권으로 보고, 수양대군의 찬탈로 왕권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한마디로 수양대군의 찬탈로 왕권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비판적.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한마디로 수양대군을 "천하의 패덕한"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하여 김동인은 1941년 '조광' 64-73호에 걸쳐 연재한 대수양(大首陽)'이라는 소설에서 수양대군을 정치적 역량과 통치자로서의 정치이념이 확립된 위대한 인물로 이해하고 묘사하였다. 한 마디로 "천하의 엉걸"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이 두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이광수는 '세조찬위사건'을 '단종에 대한 슬픈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김동인은 '위대한 수양대군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신봉승이 1992년 발표한 소설 한명회(韓明澮)(1994년 KBS2에서 방영됨)에서 또 이와는 다른 '제 눈의 안경으로 바라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한명회에서 신봉승은 '세조찬위사건'이라는 역사의 수레바뀌를 돌린 것은 수양대군이 아니라 한명회라는 것이다.
또한 1998년 6월부터 2000년 3월까지 KBS에서 방영된 '왕과 비'도 세조찬위사건을 배경으로 극화된 것인데, 남자인 왕뿐만 아니라 여성인 비도 역사의 수레바뀌를 돌렸다는 시각에서 쓴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문학은 '제 눈의 안경으로 바라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새로운 이름 붙이기
글쓰기에 있어서 셋째로 지녀야 할 자세는 대상에 대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이다.
다른 사람들이 두루 쓰는 이름보다는 오직 나 홀로 쓰는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여 이제는 보통명사나 다름없이 무의미하기까지에 이른 이름을 버리고 그 사물에 '빛갈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말한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풋대 끝에
애수는 백로 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위 시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치환은 다른 사람들이 두루 부르는 '깃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그는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텔지아의 손수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치환에게 있어서 '깃발'이라는 이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흔히 ㅁ항상 ㅁ늘 ㅁ예전 처럼' 부르는 이름으로
, 이제는 식상하여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텔지아의 손수건'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깃발'에 대하여 감동적인 정서를 새롭게 환기 하려고 하였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처럼
재재 발렸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는다
이 시는 정지용의<바다>이다. 이 시에서도 정지용은 '바다'를 아니라
'재재 바른 푸른 도마뱀'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바다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감각적인 느낌에서
오는 떨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바다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감각적인 느낌에서 오는 떨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가?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여 그 대상에 가장 알맞은 이름을 붙여주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어
이상에서 문예 창작의 자세에 대하여, 원초적으로 보기 ㅁ 제 눈의 안경으로 보기, 새로운 이름 붙이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셋은 모두 문학이 결국 우리 생의 영역을 확대하고 가치를 증대하고,
인류의 생활을 충실화하고 생명의 기쁨을 인식시킬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로 귀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문예 창자을 할 때 이것들을 얼마나 수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밀턴(John Milton)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것이 사는 길이며 또 이 밖에는 살길이 없다"는 것을 체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인이나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행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