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1
고대 한중역사서에 남아있는 한국관련 사실(史實)이 문헌으로 남겨저 있다는 것을 인식히는게
우리나라 영토사에서 중요하다. 과거의 지워지고 묻힌 얼국진 역사를 바로잡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까지 새로 알려진 사실을 포함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영토사를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교과서에 등재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서둘러 수정 또는 추가하여 중국의 성급한
동북공정에 대응해야 한다.
태고에 한반도는 동북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인류가 정착하기 좋은 환경으로서 일류의 초기 이동 루트
인 남방인이 이동하여 정착이 시작되였다. 한반도에는 구석기인이 살아오며 신석기 시대로 내려
오면서 본격적인 인류문화 생성을 시작한 목축과 농업혁명의 토착인이 살아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 동굴생활(청천강 이남)을 거치는 동안, 인류는 제한된 동굴환경에서 야외 출장
을하며 수렵 채취 목축 등 고도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냉혹한 경험을 통해서 지능수준이 크게
고양되면서 이후에 동굴생활을 벗어나면서 농업혁명이란 인류문화의 기원이 되지않았나 보고 있다.
10,000년 이전 황해는 육지였고 한반도는 대륙에 접해있었으며 '황해 대평원'은 구릉(靑丘) 상태였다.
9,000여년 전에 한반도 주변의 토착인들이 황해 수몰을 피하여 발해연안 산동반도~요하지역으로 이동한
후 중앙아 천손족이 들어와 만나면서 환웅 배달 신시(청구)를 건설하였다. 홍산문명이 태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적봉시 홍산에서 적석총 대형재단 여신상과 신전터가 있는 홍산문화
유적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5천년 이전 세계최초왕국이라며 세계 고고학계는 뜻밖의 이 고고학적 사실
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주먹도끼를 비롯한 석기들, 동굴유적, 암각화, 최초의 포경, 선박, 최초의 재배용 볍씨와 기장 콩 조
등의 5곡류, 공룡의 발자국을 비롯한 고생대 동식물의 화석. 해안에 패총들은 모두 석기시대 유물이
며 한반도와 남만주 일원에 분포한 고인돌은 세계 고인돌의 40%가 넘는다고 한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인류최초의 것으로서 남방계 서방계 거석고인돌 문화 보다 훨씬 앞서 기원하고 있음이 밝혀젔다.
거대한 고인돌은 금속가공력과 제의(祭儀)등이 상고대의 초기 국가급의 효시로 보이는 것이다.
전곡리 돌도끼는 10만년전부터 한반도에 정착한 안류 초기 정착 흔적으로 보이는 중요한 단서이며, 특히
소로리에서 출토한 재배용(순화형) 볍씨는 15,000년 전의 인류최초의 것으로 "한국의 고대벼"라는
학명으로 세계학계에서 공인되고 있는데, 홍산문명 이전의 유적으로서 남한강유역에서 인류의 벼농사가
기원하였다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학계에서는 심층있는 고증이 더욱 요구 된다.
홍산에서 기장농업을 시작하면서 집단생활로 생성된 한민족(웅족)의 원어가 9.000여 전 중앙아인
(천손족)의 언어와 융합되어 '트랜스 유라시아어'(범어)로 바뀌게 되였다.
최근 트랜스 유라시아어(한 일 몽 중앙아 튀르쿠 통구스어 등 98개 언어를 통칭함)의 기원이 9,000년
전 서요하의 기장농업을 시작한 곳이라고 발표했다.(독일막스-플랭크 인류사 연구소. 마르티너 로베
이츠교수)상고대 한국인은 고대 범어를 쓰면서 상형문자ㅡ>갑골문자ㅡ>표의문자(예서.한자)를 진화
시켰다. 한국어는 중국어와 달리 교착어로서 한자의 기호와 상형문자를 적용하여 풍부한 언어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대 언어학계의 연구 결과 홍산인은 기장 농사를 시작하며 트랜스 유라시어 진원지가
되였고, 황하 지나인은 조 농사를 시작하면서 중국어로 분리되였다고 규명하고 있다. 기장은 단위 수
확량이 적어 근거지를 확장하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근세조선에 이르러 표음문자인 한글이 창제
되고, 20세기 세계화에 이르며 한글의 뛰여난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국제영어와 함께 현대 문명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최근 네이처지에 농경가설을 계재하며 요하문명이 일어났다는 지역에서 시작하여 동
서로 퍼저 나갔다고한다. 네이처에서 "마르티너 로베이츠"가 유목민가설을 주장하면서 요하문명의
원류는 한반도남부로 농경과 함께 언어(제의, 문화)와 인구가 이동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하문명인이 한반도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면서 요하문명은 한반도와 무관하다는 농경민가설의 중국측
설과 한국강단사학설은 네이처에 계제된 논문에 의해 완전히 논파되였다고 볼수 있다.
10,000년 이전 빙하기 동굴 주거를 끝내고 한반도에 정착한 신석기 때에 일부 부족이 요하유역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 서역인이 유입하며 원주민과 융합하는 집단이 생겼고 목축과 경작농업 혁명의 토대가
되였다.
(1). [태고대] 10,000년~5,000년 전 원주민 웅족과 천손족이 융합하여 환웅 천제가 요하유역 홍산지역을
중심으로 신시 배달(청구)를 개천한 곳으로 주위에 크고 작은 소도를 관여한 신정국체제이고 청동기이전의
옥기문명기이다. 천지인의 삼신일체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다스리는의 신정체제는 제정(祭政)일치+신앙
(巫 선풍류)+농경집단 규범을 갖추게 되는데 일류 최초로 높은 수준의 요하(홍산)문명을 창조하였다.
(2). [상고대] 4,500년~2,500년 전에는 환웅이 웅족과 결혼동맹하여 출생한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였다.
단군임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내몽고 남만주 요서 산동과 한반도를 영토로하는 구이(九夷)족으로서 진한
번한 마한 3한으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진한은 남만주에서 단군이 다르리고 번한은 북경부근에, 마한은 한반평양
부근에 부단군이 다스렸다. 3한내에는 소도를 세워 70여 거수국이 연맹을 이뤘다. 각급 소도가 있는 거수국은 제
사장을 중심으로 자치를 하면서 단군의 신정체제를 따르는 느슨한 연방체였다. 거수국들이 단군에게 조공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 하였다. 조공(朝貢)이란 지방거수국이 조정(朝廷)에 예물을 바치는 절차를 말하는데,
여기서 조정이란 단군조선의 임검이 정치하는곳 을 말한다. 이것이 후에 중국에서 본따서 제후국이 황제에 바치는
예라 하였고, 상(동이족)나라가 멸한후, 한(漢,하회족)대에 이르러 중화(존화양이)정신에 따라 변방 이웃나라들의
중국(천자국) 방문외교를 조공이라 칭하게 되였다.
다시 진한은 장단경 아사달로 옮기고 대부여로 국호를 바꿨다. 번조선 아사달은 유주 요서 노룡에 두었고.
막조선(마한)은 산동과 요동 및 한반도에 걸처 분포하며 평양 아사달을 두었다. 중국 사서에 아사달은 산동의
곡부(曲阜)라는 설이 있는데 뉘조가 누에농사를 시작한 조선의 도읍으로서 산해경에 천제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서에 있던 번조선 이전에 산동에서 동이족이 활동한것을 지목한것으로 보인다.
[설문해자]에서 아사달 곡부 잠농 신농 뉘조의 농업시원 문자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단군이란 어원은 하늘에 제사하는
제사장을 겸한 왕이란 의미로 임검이라 했다. 후에 중국에서 제사장을 뺀 집권자 즉 제왕이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를 가리켜 불교설화를 빌어 만든 선담이라고 부정적 의견을 내기도 하고 있으나 고증을
통하여 현대에 재해석하여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하 홍산 문명권에서 여신상, 신전, 제천단(천원지방) 석성, 향당이 설치된 피라밋 돌무덤, 곡옥, 빛살무늬
토기, 비파형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이 발견되는데 그 수량과 규모가 왕급 국가의 의식용으로 고증
되는 유적이다. 옥은 요동 수암 산으로 강원 고성과 연해주까지 똑같은 옥결이 출토 됨으로서 왕급 권력의
상징물로서 옥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또 도철문(도깨비)등 치우의 철기문화의 시원 유물이 다수 나왔다.
예장옥벽, 옥웅룡, 옥저룡,옥잠룡, 옥고, 옥결, 곡옥류, 옥패, 운문옥. 옥검, 옥기, 토템용옥수. 용봉 등이
분포하고 있다. 굽높은 제례기(俎豆), 제례악기인 석경 피리(骨笛) 북(腰鼓), 책력을 작성한 천문관측대가
있으며, 양잠과 비단, 배(船), 청동폐(명도전) 등 생활문화용품이 나타나고 있고, 중국 고대사서에 단군조선
을 가리켜 '동방예의지군자국'(東邦禮儀之君子國)이라는 기록이 고대사서에 나타나 있는데, 위에 나열된
유물의 존재가 환웅 신시배달과 단군조선 역사를 생생하게 고증하고 있다.
(3) [고대] 2,500년~2,000년 전은 북부여 시대로 변하는데 중국중원 세력과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고대 스메르인 유입이후 서역의 푸리기아 기마유목인(태양족)이 유입되며 단군조선 천손족과 융화되여
"천손-태양"족 즉 부여족으로 잇게 되였다.
만주 한반도에 부여 예맥, 요서에 숙신 동호, 오르도스와 몽골에 흉노 돌궐이라는 부족국으로 갈려나갔다.
홍산인이 오르도스 도사를 거처 산서와 하북 산동에 이동한 단군조선 인이 동이로 불리면서 하(夏)와 상(商)
왕조를 건설하였는데 하화(夏華)족인 주(周)왕조때부터 동이(東夷)족을 동방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단군
조선을 이어받은 북부여는 서방의 중국측 왕조와 대치하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의 태동지가 되였다.
또 부여족 일부는 시베리아, 유럽 ,아메리카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동호족 일부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편
입되고, 그 일부는 중국측에 편입되였다. 그리고 흉노는 훈과 돌궐이란 이름으로 몽골 중앙아 유럽으로
대이동하여 멀리 퍼져나갔다.
중국 화북 요서의 고죽조선은 연(燕)에 편입되였고, 연과 인접한 번조선은 한나라의 침공으로 낙랑군으로 이어
젔다. 만주의 진한은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게 되고, 산동 일부와 한반도는 마한으로 존속하다가 백제, 신라의
배후지가 되였다. 단군조선 이후에는 철기기마무력이 발생하면서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인구 이동이 크게 일어
났다. 한, 중, 일 3국은 고대 동북아 역사의 전개로 일정부분 서로 얽히고 축적되며 각기 고유국가로 형성된
것이다.
[출처] 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1|작성자 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