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크게 개선된 효과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상쇄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평균적 사람이 1800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자유조차 나쁘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와 친구, 이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복권 당첨이든 끔찍한 자동차 사고든 시간이 지나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비슷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태가 좋아지면 기대도 부풀게 마련이라. 객관적 조건이 극적으로 좋아져도 불만일 수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기대가 작아지기 마련이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행복감은 이전과 비슷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해 심리학자의 숱한 설문지가 필요하진 않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 들은 수천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일 행복이 부나 건강, 사회고나계 같은 객관적 조건에만 좌우된다면,
행복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행복이 주관적 기대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역사학자의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현대인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제와 진통제가 얼마든지 있지만,
안락함과 즐거움은 더 크게 기대하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은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결과 우리가 선조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이런 생각의 노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우리의 정신속에 깊이 박혀 있는 추론의 오류에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재 얼마나 행복하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추측하고 상상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그들의 상황에 대입해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넣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의 풍요 사회에서는 매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관습이다.
대조적으로 중세 농부는 몇 개월간 한 번도 씻지 못했으며, 옷을 갈아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불결하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채로 사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혐오감이 드는 일이지만,
중세 농부는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은 셔츠의 촉감과 냄새에 익숙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다. 적어도 의복에 관해서는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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