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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 ) 안에 부연 설명을 하는 토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도 어려우면 '댓글'로 질문을 주시면, 내가 아는 만큼만 답을 올리겠습니다.
일상과 예술, 그리고 수필.
이동민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평상시의 생활을 말한다. 개개인의 일상은 그 사람의 삶이다. 일상이 모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된다.
우리는 흔히 체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일상이다. ‘일상의 체바퀴’란 우리가 얽메여 있는 삶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우리는 일상에 얽메여 있고, 일상이 곧 내가 사는 방식, 즉 형식이다.) 일상이란 되돌아옴이 끝없이 반복한다는 것을 뜻한다.(오늘은 어제의 반복이고, 내일은 오늘의 반복일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회귀’라는 말을 사용했다. 회귀는 반드시 ‘같은 것’을 전제하여 성립한다. 인간의 삶이 회귀한다고 할 때 인간의 자기 동질성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매일매일의 삶이 같다는 것이다. 같음으로 인하여 나의 특성이 만들어진다.)
일상에 관여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시간이다. 같은 것이란 일회성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되돌아 올 때는 시간이라는 배를 타고 돌아옴으로 이미 동질성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 사람은 하이데커 이다.(어제의 아침 시간과 오늘의 아침 시간은 이미 다르다.) 그는 '거기에 있다(Dasein)'라고 말함으로 되돌아 올 때는 다른 목습이 되어 있다고 했다. 왜나면 시간 속의 나이기 때문이다.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의 나는 시간이 조화를 부리므로 그때, 그때마다 다른 나이다. 다른 나이지만 삶의 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인 해석이 들어가니까 글이 어려워집니다. 같은 것이 되돌아와서 반복하더라도, 되돌아 올 때는 처음에 올 때와 시간이 다르므르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을 두고 니체와 하이데크는 다르개 해석한다. ‘같은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삶/형식 이라는 틀을 생각해보자. 그 틀을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한다.(*문화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 모두를 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음식문화니, 놀이문화니 심지어는 출퇴근하는 방식까지도 문화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생활을 문화라고 한다.) 우리는 어차피 문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져 있다.(삶 자체가 문화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실제로 드러나게 하려면 삶의 형식(문화)이 필요하다. 나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바뀌지 않는 삶의 기본 틀이 형식이고 문화이다. 형식은 그 자체로서 변화에 저항하면서 경직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사는 방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출근하는 길도 늘상 자기가 다녔던 길을 고집하고, 등등 여러 가지가 모두 그렇다.) 삶의 형식이 지나치게 굳어져 있다면 삶의 변화는 지속하지 못하고 옛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옛날 방식을 그대로 반복한다.) 되돌아오더라도 동물적인 삶(본능이 지배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유기적 생명체이므로 기계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돌아 올 때는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본능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삶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사유하고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똑 같은 방식으로 반복을 한다지만, 기계가 아니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매일매일 반복하는 일상도 조금의 차이가 있더라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형식은 자유로운 정신(삶)을 억제하는 구조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일상을 시간과 함께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반복은 하되 차이가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수필을 생각해보자.
삶/형식을 예술/형식 또는 수필/형식이라는 틀을 대비하여 생각해보자. 전통적으로 수필을 규정하는 형식은 ‘붓가는 대로 쓰기’ 였다.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자유롭게 쓰기’ 이다. 자유롭게 쓰기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이유는 자유에는 개성과 자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자유는 모든 책임이 행위자에게 돌아옴으로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수필에 자아(진짜배기 자기)를 담아내려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수필쓰기에서 변화를 의식하면서 쓴다고 해도 ‘이것이 수필이냐?’라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면 메뚜기가 아무리 뛰어도 풀밭이듯이 작가도 풀밭(형식 또는 문화)을 벗어나기 어렵다. 말하자면 수필은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식을 탈피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다.
1930년 대에 우리나라에 수필이 태어나 수십 년을 거치면서 발전하지 못하고 쳇바퀴 돌 듯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동안 많은 변화를 시도하였지만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도 형식의 경직성 때문이다.
(수필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글쓰기의 방법이 오히려 우리 수필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수필쓰기에는 많은 제한이 있다. 이것이 수필쓰기를 쳇바퀴 돌 듯이 하게 한다.)
우리는 형식을 너무 강하게 경직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히 생각하면서 찾아내야 한다. 찾아만 낸다면 개선의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 수필이 너무 획일화 되어 있다는 비평을 받는다. 우리는 수필의 다양성을 주장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필의 변화를 부르짖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필의 틀 또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에서 ‘해리 포터’가 왜 대성공을 거두었을까? ‘해리 포터’는 문학의 장르로 본다면 소설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허구이지만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허구, 또는 현실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허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해리 포터는 현실 사회에서 실현이 가능하지 않고, 만날 수도 없는 허구이다. 허구를 환상이나 공상이라는 영역까지 확대하면 소설의 장르로서 손색이 없다. 수필에서 그려내는 ‘유년 시절’, ‘고향’이 해리 포터의 모험세계와 유사성은 없을까? 유사성이 있다면 해리 포터의 기법을 수필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수필은 사실을 써야 한다는 형식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소설은 허구이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허구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해리 포터의 허구는 환상임으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허구이다. 수필의 경우는 ‘사실’이어야 하지만, 사실이면서도 실제의 사실과는 다른 어떤 것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예술작품은 현실의 한 조각을 떼어내어 예술 장르의 고유한 질서를 부여하면 독립적인 작품이 태어난다. 해리 포터의 모험은 우연이 마치 필연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 내는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일상은 우리의 삶을 만든다. 삶은 온전성/모순성으로 야기되는 긴장과 갈등이다. 동시에 긴장과 갈등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역동성을 두고 사유를 함으로 예술의 문을 드드린다. 일상이 예술 작품 속으로 들어오는 이유는 작품이 야기하는 감정이 실제적으로, 또는 잠제적으로 수용자(독자)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을 예술의 형식으로 얼마든지 차용할 수 있다. 일상의 삶의 형식은 공동체 사람이 감정을 공유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설명이 안 되는 모순성도 있다. 설명이 안 되는 모순성을 독자에게 설명이 되는 방법을 찾아서 설득하는 것이 작품이 된다.)
수필의 소재는 거의가 일상에서 얻는다. 이런 이유로 신변잡기라는 폄하성 말도 듣는다. 가장 대표적인 일상인 ‘식사’를 보면, 배고픔을 단순히 영양분 섭취한다는 동물적 본능의 이유로만으로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들이 모여서(또는 사회적 모임에서 함께 식사하는 경우도) 먹고 마시면서 식사 예절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함께 식사하기) 수행함으로 본능적인 삶과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한다. 식사 예법이라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각자(개인)가 함께(가족과 통합 또는 직장 동료라든지------.)하는 장(場-공간-field라는 뜻)을 만들어 낸다. 사회학자 짐멜은 이것을 ‘사교성’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감정이 사교성의 충족으로 바뀌게 된다. (*사교성이란 각자가 만족-기쁨, 도움, 활력을 얻는 만큼 상대도 얻어야 한다. 사교성이라고 할 때는 나 이외의 동반자가 있기 때문에 참여적 동반자가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고유한 양식을 통해서 현실을 변용시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교의 장을 만든다.
예술이 일상을 자신의 양식을 통해서 어떻게 변용시키는지를 보자. 자연은 살아있는 세계이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물도(사람, 사건 등등등) 나와 유기적 관계를 맺으므로 오브제로서의 역할을 한다.(어떤 사물이 만들어진 용도로 사용하면 용기 또는 도구이지만 다른 의미로 전용되면 오브제라고 한다. 뒤샹의 변기는 변기이지만 미술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변기가 아닌 다른 뜻으로 전용되어야 한다.)
수필에서 어떤 대상을 소재로 글을 쓰면(삶의 한 조각을 떼 내어 작품 세계로 가져오면) 그 소재는 오브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브제를 떼내어 액자에 담는 작업이 수필쓰기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상은 예술의 형식에 의하여 예술작품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술은 사교성을 띠므로 작품세계를 통해서 너와 내가 함께 공감하는 공동체(장-場)가 만들어 진다. (*짐멜은 사교성을 사람들이 모임의 특수한 목적과 내용을 넘어서서 상호작용 그 자체, 모인다는 사실 그 자체로부터 오는 고유의 감정과 그것이 제공하는 만족감인 ‘사교성의 충동’을 추구할 때 성립되는 것을 말했다.)
예술 즉 수필에 많은 독자들이 모여들어 공감이라는 만족감을 얻는다면 사교성 충동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일상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만족을 주는 반복이 된다. 까뮈가 반복하여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신을 형벌이 아닌 행복으로 만들어 준 논리이기도 하다.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상을 가공하여 의미가 있는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수필이다.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출근은 일상성이고, 그 사람의 삶이다. 쳇바퀴 돌기이다. 출근이라는 대상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여 수필을 쓰면, 출근이 다른 의미를 가지므로 오브제가 된다. 우리가 쓰는 수필은 이 방법을 시용한다. 출근의 의미는 무엇일까. 밥 먹고 살려는 생존의 방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라면, 우리 가족을 하나로 얽어메어 주는 사랑의 역할을 한다고 의미 부여를(오브제로 만든다:) 하면 수필이다.)
17세기의 네델란드에서는 일상 생활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 이전에는 성스러운 종교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일상의 생활은 그림 속에서 부속적인 내용으로만 그려졌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 그린 그림은 중심 주제로 일상을 가져왔다. 이것은 종교화라는 장르를 제치고 일상이라는 세속을 삶의 중심이 되었다. 미술사가들은 사회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일상을 예찬한 것이다. 일상은 우리에게 종교보다도 우선하는 삶의 중심이 되었다. 소재를 주로 일상에서 가져오는 수필도 일상의 예찬이다. 수필은 일상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수필은 산문 문장으로 쓰여진다.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행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시민사회가 되면서 대중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수필은 일반 대중들이 수용함으로 태어난 문학 장르라는 뜻이다. 그만큼 수필은 대중사회이고, 민주사회인 오늘에 적절한 문학 장르이다.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이 수필의 적절한 소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이고 이유이다.
(시보다 산문은 읽고, 이해하기가 쉬우므로, 많은 대중이 참여하는 문학 장르가 되었다.)
서양 철학이 신과 진리를 찾으면서 수 천 년을 이어왔다.(서양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플라톤의 철학(이성과 진리)과 기독교(신)이다. 신과 진리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자 베르그송은 일상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신의 자리에 인간을, 진리의 자리에 일상의 삶을 놓았다. 일상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 일상을 주로 다루는 수필이야말로 오늘의 문학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철학의 중심에 놓일 만큼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상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즐거움이다.’ 라고 했다. 수필이 일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겠다.
나의 생활에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일이 내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수필로 표현하면 아주 훌륭한 글이 된다
(*서양의 에세이는 일상에서 새로움보다는 신과 진리를 찾아나서는 경향이 있다.)
(*까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시지프가 끊임없이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일을(일상) ‘신의 벌’이라는 것이 그때까지의 개념이었다. 이것을 까뮈는 반복하는 것은 일상이고 삶이다. 즉 삶이야말로 신의 축복이라고 해석하였다.)
(*신이나 철학을 찾던 시대에는 엘리트 지식층만이 참여했다. 적어도 라전어르를 읽고, 쓸 줄 아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특수 계층(선비라고 했다.)이 글쓰기에 참여했다. 이때는 서양이나, 우리나라나, 시가 문학의 주류였다. 시는 짧은 글이기에 짧은 글에 자기의 생각을 담아내려니, 상징으로 표현하고, 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그러나 사유의 세계가 신이나 철학에서 인간사(일상)로 바뀌니, 엘리트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도, 어려운 말로 쓰지 않고, 길게 풀어서 쓰는 산문으로 표현했다. 수필이 딱 들어맞는 장르가 되었다.
따라서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쉬운 말로, 풀어서 쓰는 양식이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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