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용암사지 승탑(晉州龍巖寺址僧塔) / 보물 제372호
-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용암사 터, 승탑과 석조 지장보살좌상 등 문화재는 해주 정씨 문중 사유지 안에 있다.
이곳은 해주 정씨 세거지이다. 이 터를 불교계에서 매입, 용암사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영봉산 용암사 창건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하였으며 창건 때는 삼암사(三巖寺)라 하였다.
고려 국통 무외(無畏)가 머물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까지는 절이 있었으나 언제 폐사 되었는지는 모른다.
(동문선(東文選)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박전지(朴全之, 1250~1325))
절터에 승탑이 있다는 것만 알고 갔다. 주차할 공간이 시원하다.
불교 문화재가 있는 곳에 절이 거의 있거나 아님 공터에 문화재가 있다.
이곳은 절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기(검색)'를 통해 재실임을 알았다.)
솟을 삼문, 비연문(菲然門)이다. 菲然, 문체가 있어 아름다운 모양이란 뜻이다.
귀부와 탑신은 있다. 거북이 목이 떨어져 있어 다른 돌로 받치고 있다. 어느 분의 비석인지 설명은 없다.
진주 용암사지 승탑, 용암사지 서북쪽에 있던 탑을 현재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지금 이 자리가 본디 탑이 있었던 자리.
고려 초기 작품으로 옥개석 밑돌 등은 복원 때 만들어 맞춘 것이다. 팔각형으로 기본에 충실한 승탑이다.
기단에 구름 문양을 만들고 천부상(天部像)을 돋드라지게 조각하였다.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탑 상륜, 석등 일부, 연화좌대 등 여러 부재를 쌓놓은 것 같다.
진주 용암사지 석조 지장보살좌상 / 경남 유형문화재 제4호
수성암의 절벽 사이에 있는 용암사터에 유일하게 남은 불상, 지장보살이다.
머리에 쓴 두건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이목구비가 단정한 타원형의 얼굴은 오른쪽 뺨이 깨졌으나 눈가에 어린 미소가 불성(佛性)을 느끼게 할 만큼 온화하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 옷깃은 두꺼우며,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하여 신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두건 쓴 모습과 더불어 당시의 지장보살상의 실례로 주목되고 있다.
무릎은 비교적 넓고 높직하며, 무릎 위에 두 팔굽을 짚고 두 손을 맞잡았는데,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어서 상체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옷 속에 드러난 신체는 부푼 느낌이 들지만 탄력이나 양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권인 지장보살상은 드물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인터넷 검색. 안내판 등 참조)
농포집장판각, 농포집(농포 정문부의 문집) 목판이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충의사 안 장판각에 있다.
장덕재(章德齋)
충의사(忠毅祠) / 경남 문화재자료 제61호, 가호서원
-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가호서원은 진양호로 수몰되었고 이곳에 새롭게 지었다.
가호서원 옆에는 충의사이다. 충의사는 농포 정문부를 모시고 있다.
정문부(鄭文孚, 1565년(명종 20)~1624년(인조 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서울 출신.
임진왜란 때 함경도(북관)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의병장이었다.
이괄의 난에 연루, 죽임을 당했으나 신원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 승리는 기념한 <북관 대첩비>가 1708년 함경도 길주군에 건립.
1905년 일본군이 약탈, 히로시마로 가지고 감.
1909년 조소앙 선생께서 이 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된 사실을 대한홍학보에 기고.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 선생께서 조소앙 선생 글을 읽고 야스쿠니 신사에 방친된 비를 확인.
1978년 이후 국내 여러 단체에서 이 비의 반환을 위해 애를 씀. 정부 간에 협약, 2005년 10월에 국내로 들어 옴.
2006년 3월 이 비를 북한으로 보냄. 정문부 장관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에 있음.
복제비가 여러 곳에 건립 됨. 국립고궁박물관, 독립기념관, 의정부 흥덕사, 진주 충의사(2013년).
숭의문
가호서원충의사묘정비
북관 대첩비(복제비), 뒤 건물은 가호서원.
농포 정문부 선생 사적비
정문부 농포집 목판 / 경남 유형문화재 제567호. 전각 안에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탱천문, 충의사 출입문이다.
해주 정씨는 여러 파로 분파하였고, 황해도 주위에 집성촌이 많다.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마을은 해주 정씨 집성촌이며 아마 농포공파일 것이다.
성전암(聖殿庵) / 전통사찰
-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신라 헌강왕 5년(879)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은 풍수지리학으로 살폈다.
백두산 정기가 태백산맥을 끼고 내려오다가 한 지맥은 한강 이북인 서울 삼각산에 머물렀고,
한 지맥은 남강을 먹고 있는 여항산(艅航山)에 와서 맺혔음을 알고 이곳에 암자를 짓고, 성인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성전암함.
조선시대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곳으로 피신, 국난타개를 위한 백일기도를 올린 뒤에 등극하였다.
성전암에서는 이를 기려 인조각(仁祖閣)을 세워 오늘날까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임금이 성전암에 머물렀으므로 절 아랫마을을 장안리(長安里)라고 하였다.
2010년 화재로 인해 대웅전, 나한전 등 의 건물이 소실, 인조각과 대웅전 목조 여래좌상은 화를 면하였다.
(인터넷 검색, 성전암 안내판 참조)
여항산과 오봉산(524m)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함안군과 경계란 뜻이다.
느낌은 오봉산 9할 능선쯤 되겠다. 차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200m쯤 남기고 걸었다.
비 2기와 부도 2기가 있다. 이 앞에 주차하였다.
비는 공덕비이고, 부도 주인은 알 수 없고, 만든 시기도 추정하기 그렇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을까?
무량수전 옆에 요사가 있다.
무량수전, 기둥은 원목 모양 그대로 사용하여 운치가 있다.
성전암 목조 여래좌상 / 경남 유형문화재 제350호
복장 유물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만들었다고 한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여래 좌상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본 경치, 진주 시내 방향이다.
인조대왕각, 산신각
나한전, 절벽 아래 나한상이 있다.
휴식할 수 있는 정자, 옆 건물은 공양간 같다.
선원인가 모르겠다.
도로에서 본 오봉산
2022년 12월 30일(금요일)
김해...장유터널...마창대교...이반성면/용암사지, 충의사, 성전암...문산읍 두방사...(걸어서/왕복 3km)...청곡사...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