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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6편 - 원(元)의 명령-일본정벌을 준비하라!
방송일: 20110403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336편>
원(元)의 명령-일본정벌을 준비하라!
방송 : 2011년 4월 3일(일) 00:05~01:00 (한민족방송)
4월 2일(토) 00:05~01:00 (제1라디오)
극본-이상락 연출-김연미
<
나오는 사람들>
김수
원종
신하
여자1
여자2
김방경
대신1
대신2
대신3
흔도
이분희
여자3
쿠빌라(이)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인사)
고려 원종 14년, 서기로는 1273년 4월에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은 제주도를 평정함으로써 삼별초의 항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제주 도로 원정을 떠났던 여원연합군이
삼별초군을 무찌르고 최종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세웠던 날은 4월 28일이었는데, 그 소식이 개경의 고 려조정에 보고된 날짜는 5월 24일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효과> (군사들 몇 사람, 말 타고 달려와 멈추고)
김수 나는 제주도에 출정하였던 장군 김수(金綬)다, 대왕폐하께 보고 드릴 일이 있으니 아뢰도록 하라!
<해설> 5월24일에 개경의 궁궐에 나타난 이 김수라는 사람은 여원연합군 의 고려군 원수인 김방경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원종 장군 김수는 지체 말고 편전으로 들라!
김수 (안으로 들어와서)소장, 대왕폐하께 제주도의 전황을 아뢰라는 고려 군 원수의 명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원종 그래? 말해보라. 제주도의 삼별초 잔당은 어찌 되었는가?
김수 지난 사월 스무 여드렛날에, 제주도에 들어가 있던 역도들을 모두 처치하고, 온 지역이 평정되었사옵니다. 이 소식을 폐하께 아뢰라는 명을 받고 그 날로 길을 떠나 오늘에야
도성에 이르렀사옵니다.
원종 잘 하였다, 정말 장하구나. 과인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 가! 그래, 반역의 괴수 김통정과 그 일당은 어찌 되었는가?
김수 우리 군사들이 외성을 넘어 그들의 본거지로 들어가자 반적(叛賊)의 괴수 김통정은 7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성을 빠져나가 산중으로 도망하였사옵니다.
원종 그럼 그들을 놓친 것이 아닌가?
김수 장군 송보연과 중랑장 강사신 등에게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 2백 명을 거느리고 탐라에 주둔하게 하였사오니 김통정 일당의 목 을 베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옵니다.
원종 알겠느니라. 수고하였다. 헌데, 과인이 그대를 원나라 조정에 보내려 하는데 지금 행차가 가능하겠는가?
김수 페하, 원에는 무슨 일로…
원종 역당 삼별초를 소탕하였다는 과인의 표문을 원나라 황제에게 가져 갈 사신을 그대가 맡아주었으면 한다.
김수 어명에 따르겠사옵니다, 폐하.
낭독자 유월 초하룻날, 왕은 대장군 김수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탐라도의 역 적을 평정한 것을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해설> 이렇게 해서 김방경의 아들 김수는 원종의 표문을 들고 원나라로 떠 납니다. 원종이 보낸 표문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원종 (에코)황제께 아뢰오. 바다 건너 탐라로 도주한 역적들의 기세가 치열하여 그 동안 온 나라가 크게 걱정하고 있었는데, 황제폐하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위력을 발휘하여 결국 적을
격멸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만리(萬里) 바닷길은 험하고도 어려운 터라 3군이 바닷길 로 원정하는 일을 두고 걱정이 없지 않았습니다. 헌데, 5월 24일 에 김방경이 사람을 보내
제주도가 완전히 평정 되었다는 승전 보고를 해왔습니다. 황실의 영혼과 하늘의 도움을 받아서 병선들 이 순풍을 얻고 진격하여 반적의 무리를 마른 잎사귀 쓸어버리 듯이 숙청한
것입니다. 승리의 보고가 전하여지자마자 온 나라 사 람들은 기쁨으로 충만되었습니다. 이제 흉악한 무리들을 숙청하였 으니 저는 당신의 은덕이 심후함을 느끼오며 우리나라와 인민을 길이
보전하고 갱생(更生)하여 일편단심으로 직분을 다할 것입니 다.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해설>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보낸 표문을 통하여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완 전히 무찌른 데 대하여 고려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승전보를 접하고 아마 백성들보다
더 크게 기뻐했던 쪽은 바로 원종 자신이었겠지요. 그렇다면 고려라는 국가의 입장에 서 볼 때 삼별초가 멸망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로부터
들어보기로 하죠.
*인서트-1. 테입<266> 이익주
(
1:36:26 고려의 입장에서는 1170년에 무신란이 일어났고 1270년에 무신정권이 몰 락합니다. 그러니까 꼭 100년 동안 계속되었던 무신정권이 이제 사라지게 되는 건데 그
무신정권의 마지막 잔존세력이 이때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려정치사의 흐름에서 볼 때는 무신정권의 완전한 붕괴, 이걸 의미하게 되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왕정이 회복되고
국왕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때부터 가능하게 되는 이런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고요. 1:37:04)
<해설> 고려 조정이나 혹은 원종에게 있어서 삼별초가 평정되었다는 것은, 3년 전에 강화도에서 봉기했던 그 반란세력이 토벌되었다는 차원을 넘어서, 100년 동안이나 고려조정을
쥐락펴락해오던 무인정권의 잔 존세력이 궤멸되고 이제 왕정이 회복되었다, 이런 의미를 지닌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제주 삼별초를 토벌했다는 사실이 원나라에는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서트-2. 테입<266> 이익주
(
1:37:04 몽골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략적으로 그렇게 중요시 하던 제주도를 장악했다, 이런 의미를 갖고 그것과 더불어 30년 동안 항전했던 고려의 항몽 세력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주도를 기반으로 해서 이제는 그 일대의 해상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고 고려를 또 일본을 공격하는 데 온전히 동원할 수 있게 되는 이런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쿠빌라이가 가지고 있었던 고려와 일본과 남송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이런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1:37:54)
<해설> 그런데, 삼별초가 그 잔존세력까지 완전히 토벌 당했다는 것은, 고 려의 대몽항쟁이 이제 종말을 고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숙명여대 신안식 교수의 얘길 들어보시죠.
*인서트-3. 테입<265> 신안식
(
54:11 삼별초 항쟁의 실패 이거는 고려의 원나라 종속을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원나라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고려 왕조 입장에서는 삼별초 항쟁을 계기로 해서 원나라 황실의 부마국으로서의위상을 가짐으로 해서 왕실의 안정을 가져오기도 했지요. 또 원나라 입장에서는 고려왕조를
아예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가지고 있던 저항의식, 그런 것이 삼별초 항쟁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한 저항의식은 몽골의 압박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고려가 가지게 된 거죠. 55:06)
<해설> 그러니까 원나라의 장기간에 걸친 군사적 공세에도 고려 왕조가 멸 망하지 않고 부마국의 지위나마 유지하면서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 항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제주 삼별초 토벌 이후, 아주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고려사 세가 편 에 실려 있습니다.
낭독자 왕은 광주 무등산의 신령이 역적 토벌을 음조(陰助)하였다 하여 예 사에 명하여 작호를 더해 주는 의식을 거행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 를 지내라 하였다.
<해설> 여기서 예사(禮司)란 고려시대에 제사 등의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아 하던 관청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조정에서 삼별초 토벌에 공 이 있다 하여 상을 주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광주의 무등 산이었다, 이런 얘깁니다. 삼별초의 본거지가 진도에 있었고, 그들이 제주도로 옮겨간 뒤에도 전라도 지역이 끊임없이 삼별초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번에 그들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산인 무등산의 신령이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년 전 국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에서 무등산 신령의 작호 등급을 올 려서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런 얘깁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인서트-4. 테입<266> 이익주
(
1:35:00 山神 大山 名川에 그런 작호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고려를 단위로 하는 이런 신앙형태에서는 흔히 나올 수 있는 것이죠. 보편적인 종교가 아니고 국가를 단위로 하는
종교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하는 방법은 왕이 작호를 내려주는 이런 명산대천에 작호를 내려주는 이런 건데요, 이거는 뭐랄까 고대적인 신앙형태의
국가중심의 생각이 겹쳐지면서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1:35:40)
<해설> 이제 원종이 삼별초 토벌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내릴 차례입 니다.
원종 장군 김수는 역적 토벌에 세운 공이 크므로 대장군으로 승진 임명할 것이다. 또한 김함을 공부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승진시킬 것 이며 대정 고세화는 선봉에 서서 적진을
공격한 공이 있으므로 벼 슬을 낭장으로 진급시킬 것이다.
<해설> 그리고 고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방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교 지를 내립니다.
원종 (원종)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운 적수였다. 그리 하여 몽골에까지 응원부대를 청하여 이를 토벌하러 나섰던 것이다. 만일 작전 시간이 오래 걸렸더라면 군량의
수송비용이 한이 없었 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는 데에 의외의 변고가 생길 수도 있었 을 터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의 안위가 이번 원정에 걸려 있었 다. 헌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정벌에서부터 탐라토벌에 이 르기까지 전심전력을 기울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군을 독려 하고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앰으로써 도탄에 빠졌던 백성 을 살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 할 것 이다. 그러므로 김방경에게 어떤 상전(賞典)을 내려야 할 것인지 경들은 의논하여 과인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해설> 드디어 김방경은 신하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정1품의 시중에 임명됩 니다. 재상이 된 것이지요. 김방경은 고려에서만 상을 받은 게 아니 라 몽골에 불려가서도 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습니다. 열전편 김방경 전의 해당기사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낭독자 그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 빨리 들어오라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의 다음 자 리에 앉힌 다음, 자신의 음식을 손수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한 금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채단으로 만든 옷과 금, 은 등의 보 화를 주었던 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이전에는 다른 사람이 결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김방경이 귀국하려 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 의동삼사’의 작호를 더해 주었다.
<해설> 여몽연합군의 삼별초 토벌작전을 통해서 김방경은 고려와 원의 조정 으로부터 가히 영웅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그해 윤유월(閏六月)-.
신하 (급히 안으로 들고)폐하, 제주도에서 급히 전령을 보내왔사옵니다.
원종 제주도에서 올라온 전령이라 하였느냐? 무슨 소식을 갖고 왔다 하더 냐?
신하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장군 송보연이 적의 괴수 김통정의 시체를 찾아내었다고 하옵니다.
원종 오, 그래? 반적의 괴수가 결국 죽었구나. 김통정과 함께 산으로 도 주하였던 나머지 무리는 어찌 되었다 하더냐?
신하 반역 무리의 장수 김혁정과 이기 등 70여 명을 수색 체포하여 홍다 구에게 보냈는데 홍다구가 그들 모두의 목을 베었다 하옵니다.
<해설> 이렇게 해서 1270년 6월에 강화도에서 봉기했던 삼별초는 3년 만 에 완전히 궤멸된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앞에서 삼별초의 토벌에 공을 세운 김방경이 고려와 몽골의 조정에 서 포상을 받고 극진한 환대를 받는 모습을 사서의 기록을 통해서 알아보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김방경의
이러한 활약을 칭송해야 할까요, 아니면 원나라, 즉 몽골이라는 외세에 저항하여 싸웠던 삼 별초의 항전을 의로운 싸움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사학자 민현구는 1991년에 발표한
‘몽고군 ? 김방경 ? 삼별초’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삼별초의 난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그것이 고려 무인들 의 외세를 배척한 자주적 정신을 보여주고, 고려가 몽고의 간섭 아 래 독립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 되지만, 동시에 ‘삼별초의 난’으로 귀결되기까지의 사태 진전은 최 씨 무인정권의 독단적, 위압적, 폐쇄적 정치 행태 및 대몽항전과 정권의 이해관계와의
연결이 기본적인 이유가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삼별초의 난을 반역으로 규정한 왕조시대의 인식방법 이 그릇된 것과 마찬가지로 대몽항쟁만을 몽고의 침입에 대응한 정당한
자세로 보고 그것과 대결한 김방경과 고려 조정을 부정적 으로 파악하는 것도 결코 타당한 입론이 될 수 없다.
<해설> 이해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내용인데요, 민현구는 이 논문에서 삼별 초에 대한 흑백논리 식의 해석을 경계하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프로그램 제326편에 서 삼별초의 성격규정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한 적 있 습니다만, 이번 회에 삼별초의 멸망을 다룬 김에 정리하는 의미에 서 삼별초에 관한 학계의
시각들을 한 번 더 짚어보도록 하겠습니 다.
*인서트-5. 테입<265> 신안식
(
48:00 몽골제국을 평가할 때 세계 전대미문의 대제국이었다. 그런데 그 대제국 속에서 고려가 왕조를 유지했다는 건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고려왕조가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 한편에는 대몽항쟁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 대몽항쟁의 중심에 삼별초라고 하는 군대가 있었다는 거죠. 물론 이 삼별초가 무인정권의 몰락을 기점으로
또다시 봉기했다는 이 원제국 속에서 고려의 위상을 또 한편 보여주는 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려라고 하는 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마는 쉽게 지배할 수 없다,라고 하는
이런 인식을 몽골인들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하나의 토대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48:53)
<해설> 전대미문의 군사대국이었던 몽골제국에 맞서서 삼별초가 끈질긴 항 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부마국이나마 고려 왕조가 멸망하지 않 고 독립왕조를 유지했겠느냐, 따라서 삼별초의
봉기와 항전은 외세 에 맞선 투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숙명여대 신안식 교수의 의견이 그렇습니다.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 역시 삼별초의 대몽항 전을 평가하면서도 또 다른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합 니다.
*인서트-6. 테입<266> 이익주
(
1:24:54 삼별초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서 끝까지 항전한, 그런 세력입니다. 대외항쟁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역사학계의 시각에서는 삼별초의 대외항쟁이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의 상황을 본다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이런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삼별초는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아서 이것이 사실은 그 당시 일반 민의 항쟁을 최우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데요. 1:25:46)
<해설> 무신정권 시절 무인집정자 최우가 무슨 목적으로 삼별초를 두었는지 는 고려사절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낭독자 과거에 최우는 도성 안에 도둑이 많으므로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돌아다니며 폭력을 금하게 하였는데 여기서 야별초(夜別抄)라는 이 름이 생겼다. 도둑이 여러 도(道)에서
일어나므로 야별초의 군사들 을 나누어 보내서 도둑을 잡게 했는데, 이리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갈라졌다.
<해설> 여기에다 몽골로부터 도망쳐온 사람들로 신의군을 만들었는데 이 셋 을 일컬어 삼별초라 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삼별초가 잡았다는 ‘도 둑’은 다름이 아니라 무신권력자들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해서 들고 일어난 일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서트-7. 테입<266> 이익주
(
1:26:53 최우가 대몽항쟁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국가를 지키겠다는 목적 이외에 자기 정권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라고 하는 부대가
한편으로는 민을 억압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최우정권을 보위한다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해봐야 된다는 것이죠.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지고 당연히 그
당시까지 항몽을 주도해왔던 무신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을 민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느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자기를 지켜주던 정권이 붕괴된 데 따른 보복에 맞서서 군사를 일으킨 것이냐. 1:26:51)
<해설> 삼별초가 무인 집정기에 집권자들의 권력 유지에 이용되어서 백성들 을 탄압하고 다른 군인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으니 ‘무신 권력 자의 사병(私兵) 노릇을 했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대외적으로는 몽골과 싸웠으니 국가의 군인 즉 공병(公兵)의 역할도 분명히 했던 것이죠.
*인서트-8. 테입<265> 신안식
(
49:50 교과서에서 삼별초 항쟁은 국란극복 사례로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었던 그런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별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있습니다, 물론 이 삼별초가 무인정권을
떠받치고 있었던 公兵的 私兵이라고 하는 이런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죠. 그렇지만 대몽항쟁으로서의 삼별초는 여전히 긍정적인 면으로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 또 일반적인 시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크다고 할 수가 있겠죠. 50:30)
<해설>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자면, ‘삼별초는 이렇듯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 서 그 성격을 무어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 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성격규정이 간단치 않은 이 삼별초를 두고 시대마다 그 평 가가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를 이익주 교수와 함께 살펴보기로 하죠. 우선 삼별초에 관하여 처음 발표된
논문을 쓴 사람은 김상기 인데요, 그가 일제말에 발표한 글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낭독자 묘청이나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 하였으나 삼별초 의 난은 복잡한 내부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 동이었다.
<해설> 김상기는 삼별초의 항전을 ‘삼별초의 난’이라고 칭하면서도 민족자주 성을 지키기 위하여 외세에 항거한 투쟁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김상기의 이러한 관점은
해방이후에도 같은 맥락으로 이 어집니다. 1949년에 발표한 손진태의 논문 중 한 대목을 볼까요?
낭독자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가 원나라의 신하국으로 복속 하는 민족적 모욕에 반대해서,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이끌고, 왕족 인 왕온을 국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몽고에 대한 항 쟁 사상에 의함이었다.
<해설> 여기서는 삼별초의 부정적인 면을 거론하지 않은 채 민족적 항전이 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서트-9. 테입<266> 이익주
(
1:31:20 1930년대 우리가 식민치하에 있었고 어떤 민족적인 자부심 자긍심 이런 것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정당한 일이었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에 가면 박정희의 군사독재 시기죠. 이 시절에 국론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많이 얘기가 되던 시절입니다. 국론통일과 총력안보 이런 구호들이 막
유행하고 있었죠. 난무하고 있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삼별초의 이런 아주 치열한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국가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그런 역사적인 사례가 됐던 것이죠.
그러다가 1980년대에는 또 민중사학이 등장을 합니다.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봐야 된다고 하는 이런 시각이죠. 이랬을 때 삼별초라고 하는 것이 그 이전에 民을 탄압하던
특수부대다, 이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삼별초 항쟁에 대해서 반민중적인 것이 아니냐, 이런 해석이 나오게 됐던 것이죠. 1:32:43)
<해설> 참고로 교과서에 실린 삼별초 관련 기술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고려 무신들의 핵심체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는 최후항쟁 을 부르짖고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 반몽 무인정권을 수립하 고 몽고에 계속 항쟁하였다.
<해설> 이상은 1969년에 교학사에서 펴낸 인문계고등학교 국사책에 실린 내용인데요, 이번에는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996년판 중학교 국 사 책에 기술된 삼별초 관련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낭독자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 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항쟁을 계속 하였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해설> 교과서에서는 삼별초의 반민중적인 면은 잘라내고 대외항쟁만을 강 조해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삼별초의 반민중성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글로는 이이화가 한길사판 ‘한국사
이야기’에서 기술한 내용 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낭독자 삼별초는 선택된 군대로서 특권의식에 젖어서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자세로 거들먹거렸다. 삼별초의 항쟁은 민족 정신사에는 남겠으나 현재적 실익은 아무 것도 없었다. 197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 서 어용학자들은 무신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높이 평가하여 삼별초의 활동을 국난극복의 사례로 꼽았다. 군사독 재정권의 민족주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역사조작의 한 사례 였다.
<해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삼별초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인서트-10. 테입<266> 이익주
(
1:33:46 북한의 경우에는 초기에 1945년 이후 초기에는 계급문제로 역사를 설명을 했습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민족문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주체사상이
나오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역사학, 주체사관이라고 하는 게 등장하면서 민족주의가 강조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삼별초 같은 이런 대외항쟁 이런 것이 남한의 1960년대 70년대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강조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34:24)
낭독자 항전군의 주력은 농민들이었으며, 그들은 노예적 처지에 있는 사람 들이었다. 따라서 항전군의 기본 동력은 노비와 양인농민 등 피착 취 신분 계급이었고, 이들은 항전의 전(全)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 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이 희생적으로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만일 그들이 외래 침략자의 압박 하에 들어가는 경우, 2중 3중의 보다 가중한 수탈을 당할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해설> 북한의 김재홍이 1963년에 발간한 ‘원 침략자를 반대한 고려인민의 투쟁’이라는 저서의 일부 내용을 들려 드렸는데요, 어떻습니까? 삼 별초의 항쟁을 계급 투쟁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 니까. 삼별초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한 김에 일본 학자인 하타 다 다카시(旗田巍) 교수가 1965년에 발표한 논문 내용 일부를 살펴 보도록
하죠.
낭독자 삼별초는 몽고의 일본 침략을 방해했던 용사들이다. 삼별초의 항전 이 없었더라면 몽고는 훨씬 일찍 일본에 출병하였을 것이다. 일본 원정을 위한 둔전군은 삼별초 때문에 움직이지
못 하게 되었으며 삼별초 토벌에 전용될 수밖에 없었다.
<해설> 그런가 하면 1996년에 나온 ‘상해 일본사(詳解日本史)’를 보면,
낭독자 원나라가 일본을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로서 일본군의 분전도 있었 지만, 고려 삼별초의 난에서 보이는 것처럼, 동아시아 사람들의 원 나라에 대한 저항이 각지에서 있었던 것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설> 이런 구절도 눈의 띕니다. 철저히 일본을 중심에 놓고 삼별초를 논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평가하는 주체가 어느 시대에, 어디에 사는, 누구냐에 때라서 삼별초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인서트-11. 테입<266> 이익주
(
1:32:44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평가도 각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역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
상황에 맞는 해석이 옳다, 이런 것은 아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역사가 국가의 입장에서 평가되는
것은 좀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실제 살고 있었던 우리들의 입장에서 민중의 입장에서 평가를 해야 된다는 것은 꼭 민중사학이라서가 아니고 역사 본연의 자세가 그래야 되는 게
아닌가. 1:33:29)
<해설> 그렇다면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삼별초는 어떤 모습이며, 삼 별초가 몽골과 고려정부를 상대로 싸웠던 그 투쟁에 대해서는 또 어떤 평가를 내리시겠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제주도의 삼별초가 일망타진 되고나자 이제 원나라는 고려에게 노골 적으로 일본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도록 채근합니다. 그보다 먼저 고려사 세가 편 원종 14년 12월조에
올라 있는 짤막한 기사 한 토 막을 재미 삼아 구경하고 지나가도록 할까요?
<효과> (거리, 개들 수십 마리 요란하게 짓는)BG
(사람들 웅성)BG
여자1 아이고, 저 많은 개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여자2 어디긴 어디야? 개 끌고 다니는 놈들 머리 하고 다니는 행색이며 옷 차림을 봐. 원나라 오랑캐들이잖아.
여자1 원나라 오랑캐들이 왜 하필 개를 끌고 오느냐구. 곧 일본으로 쳐들어 간다던데 전쟁터에 개도 끌고 갈 셈인가?
여자2 그게 아니라, 범을 잡으러 왔다던데?
여자1 무어? 범을 잡아? 호랑이 말이야? 개가 어떻게 범을 잡아?
여자2 저거 봐, 원나라 개가 얼마나 크고 사납게 생겼는지. 저놈들 여러 마리가 짖고 덤비면 제아무리 큰 호랑이래도 곰짝없이 당한다더라 니까.
여자1 원, 별소릴 다 듣겠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단 얘긴 들어 봤어도…아, 개한테 잽히면 그것이 어디 범인가? 노루나 사슴이지.
<해설> 고려의 범을 잡겠다며, 원나라의 호랑이 사냥꾼들이 사냥개를 끌고 나타나서 백성들을 놀라게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호랑이를 몇 마리나 잡아갔을까요?
낭독자 원나라에서 범 잡는 사람 아홉 명을 고려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개 백 마리를 이끌고 왔다. 드디어 개들이 범을 몰고 쫓았는데 많은 개가 범에게 물려 죽었을 뿐 범은 한
마리도 잡지 못 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고려의 범은 개를 가지고는 잡을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돌아갔다.
<해설> 고려는 범을 잡으러 온 원나라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서 돌려 보냈으나 문제는 사람을 잡으러 온 원나라 관리였습니다.
해가 바뀌어 원종 15년, 서기로는 1274년 정월-.
김방경 (들어오며)폐하, 신(臣), 시중 김방경이옵니다.
원종 김 시중, 어서 드시오. (들어오고) 어제 원나라에서 온 총관 찰흘이 라는 사람이 홍다구와 함께 과인을 찾아왔기에 인사를 받긴 했는데 황제가 그 자를 왜 보냈는지 알아보았소?
김방경 예, 폐하. 대선 3백 척을 건조하라는 명을 받고 왔다 하였사옵니다.
이미 원나라 황제는 대장군 홍다구를 감독조선관군민(監督造船官軍 民) 총관으로 임명하여 고려에서의 선박건조를 총감독하게 하였사 옵니다.
원종 대선(大船)이라면 대형 전함이 아니오?
김방경 그렇사옵니다, 폐하. 배 짓는 데에 동원될 장인들을 속히 징발하라 는 명을 내리셔야 할 것이옵니다.
원종 허허, 이거 참…. 알겠소. 일단 김 시중께서 동남도 도독사의 임무를 맡아서 선박건조 사업에 협조를 하도록 하시오.
원종 알겠습니다, 폐하.
<해설> 그런데, 쿠빌라이로부터 선박건조의 총책을 맡은 홍다구가 제 마음 대로 정월 15일을 전함 건조 공사의 착공날짜로 정해놓고서 불같이 독촉을 해댑니다. 단 며칠 이내로 전함
건조에 종사할 기술자와 인 부들을 징발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원종은 부랴 부랴 각 지역의 책임자를 임명해서 내려 보냅니다.
낭독자 왕은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 도지휘자로, 우복야 홍록주를 나주 도 지휘사로 임명하였다. 또한 대장군 라유를 전라도에, 김백균을 경상도에, 박보를 동계지역에, 국자사업
반부를 서해도에, 장군 임 개를 교주도에 각각 보내서 부부사(部夫使)로 임명하였다. 그리 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함건조에 종사할 장인 3만5백여 명을 징집 하여 조선소로 파송하게
하였다.
<해설> 도대체 쿠빌라이는 왜 이렇듯 갑자기 고려로 하여금 일본 정벌에 필 요한 전쟁 준비를 하도록 몰아친 것이었을까요? 광운대 김인호 교 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2. 테입<267> 김인호
(
02:04 학자들이 보기에는 결국 일본정벌 자체가 남송을 고립시키는 전략의 일부고요 사실 이것은 1265년 그 이전에 고려 사람이었던 조의가 원에 와서 건의를 하거든요. 일본을
정벌합시다, 라고 건의를 합니다. 그래서 원래 그 전에 일본 쪽에다 몇 차례 사신을 보내서 국서를 전달했고요. 통교를 요청했는데 일본이 거절을 하지요. 이런 일본 정벌에 대해서
고려 측이 전담한 부분은 몽골에서 남송 공략 등으로 물자를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부 이걸 전담하도록 맡기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몽골이 항상 해왔던 점령정책의 일환인 거죠.
그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해서 다음 공략을 준비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02:52)
<해설> 그 동안은 쿠빌라이가 일본정벌에 필요한 군량이며 전함 건조를 요 구할 때마다 원종은 삼별초를 핑계로 어려움을 호소했었지요. 그런 데 제주 삼별초가 평정된 마당에 일본정벌을
더 이상 미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쿠빌라이가 전함건조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숙명여대 홍영의 교수는 쿠빌라이가 일본원정을 서두르는 것은 당 장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목적에서라기보다는 일본이 남송의 배후로 연결될지도 모르니까 그 연결고리를 단절하려는 것이었다고
얘기합 니다.
*인서트-13. 테입<268> 홍영의
(
02:11 고려에 그러한 막대한 전비부담을 시킨 것은 결국은 고려로는 또 어쨌든 元에 복속응 되었지만 결국은 또 원을 반발하는 그러한 문제들이 생겼기 때문에 흔히 얘기하는
以夷制夷의 방법으로 일본도 정벌하고 그러한 경제파탄이나 정치적인 그런 것을 통해서 약회시키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배후에 남송을 지원하는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것을 추진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02:57)
<음악> (브릿지)
<효과> (대신들 회의, 웅성거리는)BG
<해설> 일본정벌 준비를 위한 몽골 측의 채근이 나날이 심해지자 고려 조 정의 대신들 사이에 불만과 한숨이 터져 나옵니다.
대신1 금년정월 초이튿날에 원나라의 중서성에서 김방경 시중한테 지시를 내리기를 큰 배 3백 척을 전라도하고 탐라 두 곳에서 만들라고 했 는데, 나흘 뒤에는 홍다구가 편지를 보내서
전국에서 배 만드는 장 인들하고 인부들을 당장 징발하라고 닦달을 해왔어요.
대신2 도대체가 대형전함 3백 척을 건조하는 일이 아이들 장난감 만드는 일도 아닌데 그런 거창한 공사를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렇게 며칠 간격으로 마구 몰아치는 법이
어딨습니까!
대신3 사람 뽑아서 배 만드는 것이야 시키는 대로 한다지만 문제는 군량 입니다, 군량!
대신1 아무리 상국(上國)이라고는 하지만 (서찰 펼쳐보이며)원나라 중서성 에서 보낸 이 서찰을 좀 보세요. 별고의 토지세를 거두어서 군량에 충당하라…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 고려는
어떻게 하라고요!
<해설> 고려사에서는,
낭독자 원나라에서 고려에 명하기를 별고의 토지세를 거두어 군량에 충당 하라 하였다.
<해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별고(別庫)란 한자 뜻 그대로 풀 일하면 ‘별도의 창고’라는 뜻인데 국가에서 갑작스런 재난이 닥치거 나 환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서
편성해놓은 특별예산 같은 것입 니다. 그것까지 다 털어서 원나라가 일본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량 으로 내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신2 원나라에서 요구한 대형 전함 3백 척을 만들려면 기술자들과 잡역 부들을 통틀어서 몇 명이나 동원해야 하는지 아세요?
대신3 인부가 3만 명이 넘는답니다. 줄잡아 3만5백…
대신1 3만 5백 명의 인부가 하루 세 끼를 먹으면서 석 달 동안 작업을 한 다고 치면…누가 계산 좀 해보세요.
대신2 3만4천3백12석 하고도 다섯 말입니다.
대신3 그걸 전부 우리 고려보고 조달하라는 것 아니오.
대신1 그것뿐인 줄 아세요? (서찰 또 꺼내고)지난 19일 날 중서성에서 온 이 공문 좀 보세요. 원나라 장수 흔도가 군사 4천5백 명을 데리고 곧 금주로 내려갈 것인데 거기
필요한 군량 1천5백 석도 우리보고 내라, 홍다구 총관이 거느린 군사들의 군량도 우리가 내야 한다…
대신2 지금 거론한 얘기들은 원나라 군사들 얘기고,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설 우리 고려군은 그럼 밥 안 먹고 삽니까?
대신3 제주도에 남겨두고 온 우리 고려군과 원나라 군사들의 식량은 또 어 떡하고요!
<해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고려 조정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 국왕 명의의 표문을 보내서 원나라 황제 쿠빌 라이에게 호소를 해보는 방법밖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원종은 이런 저런 어려운 사정을 세세하게 표문에 적어서 쿠빌라이에게 하 소연합니다. 원종의 표문에는 원나라 군사들이 경략하고 있는 둔전 에 관한 내용도 포함 돼
있습니다.
원종 (에코)원나라의 중서성에서 우리 고려 조정으로 지시한 바에 의하면 봉주에서 둔전을 경략하고 있는 원나라 군사들의 양식이 매월 2천 47석이 부족하고 소의 사료가 천 석이 넘게
모자라니 우리 고려 로 하여금 지원하라고 했습니다. 둔전 경략 첫 해분의 식량은 이 미 지원하였고 그 다음해 식량 중 부족분도 갖다 줬는데 또 내라 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작년농사는 수해나 병충해를 입은 사실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런 구실을 꾸며대고 있는 것인데, 중서성에서 지시를 내려서 보내라고 하니,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기약 없이 양식을 조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실로 민망한 일입니다. 그 부담을 감면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해설>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에게 고려 국왕인 원종의 얘 기가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파견돼 있 는 홍다구나 흔도에게 고려에서 해야 할
이런 저런 일을 직접 지시 하고, 심지어는 김방경을 직접 원나라로 부르거나 혹은 원종을 거치 지 않고 김방경에게 직접 서찰을 보내서 임무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고려의 국왕은 적어도
고려에서 진행하는 일본정벌 준비작업의 명 령 계통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죠. 홍영의, 김인호 두 교수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14. 테입<268> 홍영의
(
03:48 원종은 무인집권기를 끝내고 왕정복고를 통해서 이루어진 국왕이지만 실질적 권한은 없었지요. 그래서 원종이 복위한 뒤 원에 가서 흔히 얘기하는 혼인정책을 청하고 원에서는
무인정권 타도하고 그 다음에 개경환도를 조건으로 원의 군사력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원에 의한 대외 의존적 자세를 보이는 국왕, 그런 모습을 보이지요. 또
국내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측근세력의 육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취약하게 되지요. 04:41)
*인서트-15. 테입<267> 김인호
(
04:10 원종이라고 하는 고려국왕 자체가 원래 무신정권을 몰아낼 때 원의 도움을 받거든요. 그 상황이 그렇게 전개됐기 때문에 고려의 왕권이라고 하는 건 元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규정이. 그러다 보니까 결국 원의 입장에서 보면 속국인 왕을 움직여서 일을 추진할 필요도 없는 거고요, 속국이기 때문에 자기가 능력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의 어떤
사람이든 데려다가 일을 맡겨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고려 전체 지역의 한 상대적인 왕일 뿐입니다. 고려왕실 자체가 그 밑에 예속이 되는 거지요. 04:48)
<해설> 군사 작전을 할 때는 쿠빌라이가 장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기 때 문에 고려국왕이 간여할 여지가 더욱 없었습니다. 조금 뒤의 일입니 다만 제1차 일본정벌을 미치고 돌아왔을
때 원나라군의 원수인 흔 도와 고려군 원수 김방경이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흔도 김방경 장군, 우리 원나라 황제께서는 나 흔도에게 몽골군을 관할 하게 하고 그대에게는 고려군을 관할하도록 명하지 않았는가?
김방경 그래서 내가 그 명에 잘 따르고 있는데 왜 그러는가?
흔도 우리 황제께서는 분명히 김방경 장군 그대에게 고려 군사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무슨 일이든 꼬박꼬박 당신 네 국왕에게 고하고 왕의 명령을 받으려 하는
것인가!
김장경 허허허, 그야 전쟁에 나갔을 때는 장수인 내가 마음대로 지휘를 하 지만 평화 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야 본래 법이 그리 돼 있지 않던가, 하하하…
<해설> 김방경이 왕을 그나마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고려의 국왕이 소외감 을 조금쯤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얘깁니다. 어쨌든 원종은 별 장 이인(李仁)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자신의 표문을 전하게 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고려 출신으로 일찍이 몽골에 귀부하여 그 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해 온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가 고려에서 병선 건조하는 일을 총지휘하 고 있었는데 쿠빌라이의 큰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세를 믿고서 평소에 고려 국왕에 대해서는 임금 취급을 하려 들지 않았 습니다. 그런 홍다구도 늘 그렇게 꽉 막힌 모습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서기
1274년 3월, 원종은 상장군 이분희를 편전으로 부릅니다.
이분희 (들어와서)부르셨사옵니까, 폐하?
원종 그렇소. 지금 전라도에서 병선 건조하는 일에 동원된 사람이 몇 명 이나 되는지 아시오?
이분희 예, 폐하. 3만 명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원종 그렇게 많은 군사가 조선소에 매달려 있으니 그들이 먹을 양식이 모자라서 멀리 동경과 진주도에서 녹봉이며 식량을 운송해 오느라 고 그 수송 작업에 동원된 백성들까지 애를 먹고
있는 것이오.
이분희 그보다 농사가 걱정이옵니다. 3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조선소에 다 묶어두고 있으니 그들 가정의 전답에 누가 밭을 갈고 씨를 뿌 릴 것이옵니까.
원종 바로 그것이오. 과인이 서찰을 한 통 써줄 터이니 전라도의 조선소 로 가서 홍다구에게 주면서 상장군이 잘 설득을 해보시오. 조선소 에 있는 인원을 절반만 남기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이분희 알겠습니다, 폐하. 최선을 다 해서 설득을 해보겠사옵니다.
<해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낭독자 상장군 이분희를 홍다구에게 보내서 부역 나온 백성의 절반을 고향 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자 홍다구도 그 말을 받아들여 배 한 척마다 쌍정 50명만
남기고 그 나머지 단 정은 모두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해설> 쌍정(雙丁)이니 단정(單丁)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데요, 여기서의 정(丁)은 젊은 남자 즉 장정(壯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단정은 장정 한 사람이고 쌍정은 두 사람이죠.
그러니까 한 집안에서 쌍정 으로 온 경우, 즉 가족 중 두 사람이 조선소에 부역하러 나온 경우 에는 그 중 한 명만 남게 하고 나머지 한 명은 돌려보냈으며, 집안 에 장정이 한
사람 뿐인데 부역에 동원된 단정의 경우에는 그냥 집 에 돌아가게 했다는 얘깁니다. 홍다구가 모처럼 선심을 쓴 셈이죠. 이때가 한창 밭 갈고 씨 뿌리고 해야 할 음력 춘삼월이었던
것입니 다.
<음악> (브릿지)
<해설> 원종 15년 3월.
<효과> (거리-여자들 웅성)BG
여자1 무어? 나라에서 결혼도감을 설치했다고?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 관 청인데?
여자2 결혼도감이니까 처녀 총각 결혼을 시켜주는 곳이긴 한데….
여자1 이제는 나라에서 시집 장가 못 간 사람 짝 찾아주는 일까지 해주는 가? 하하하…
여자3 웃을 일이 아니야. 원나라에서 만자 매빙사가 왔다는데…
여자1 만자가 뭐야?
여자2 매빙사는 또 뭔데?
여자3 아, 원나라에서 우리 고려에 신부감을 구하러 온 사람인데…
여자1 아이고메, 그럼 고려 처녀들을 몽골 오랑캐 놈들한테 시집을 보내겠 다고 처녀 물색을 하러 왔다 이 말인감?
여자2 에이, 누가 그 오랑캐 놈들한테 시집가려고 하겠어?
여자3 몽골, 아니 원나라 오랑캐한테 시집을 가면 그래도 낫게?
여자2 그게 아니면 누구한데 가는데?
여자3 원나라가 지금 한창 저 남쪽에 있는 송나라하고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잖아.
여자1 그런데?
여자3 그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넘어온 군인들이 백 몇 십 명 된다는데 그 사람들이 마누라가 없으니까 고려에서 여자를 구해서 그 송나라 군인들의 처를 삼는다고…
여자1,2 (여자들 놀라 혼비백산)“그게 사실이야?” “아이고 이거 큰일났네?” 이러다 잡혀가면 어떡해!“ ”얘, 빨리 집에 가서 숨어 있어!“
<해설> 원나라에서 보내온 통첩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생권군 인’이란 생업에 종사하며 출병을 대기하고 있는 군인을 일컫습니다.
쿠빌라 (에코)남송(南宋) 양양부(襄陽府)의 생권(生券) 군인들이 처를 구하 기 때문에 위선사(委宣使) 초욱에게 명주 1천 6백 40단(段)을 주어 고려국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니
이들이 처를 구할 수 있도록 고 려에서는 해당 기관에 명하여 이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해설> 그래서 고려에서는 부랴부랴 결혼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송나 라에서 원나라로 투항해온 군인 140명의 신부감 조달에 나서게 됐 던 것이죠.
*인서트-16. 테입<267> 김인호
(
05:43 남송 양양부에서 투항했던 군인들이 妻를 구해달라고 하는 요청에 따라서 고려에 招聘使를 보내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결혼을 통해서 서로 묶이게 되는 부분이 될 텐데요,
결국은 사실 원나라 입장에서 보면 왜 남송 군인들의 배필을 고려에서 구하느냐, 하는 거는 결국 남송정벌의 일환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투항한 쪽에다가 일종의 떡 같은,
미끼 같은 걸 줘야 되는 거죠. 왜 하필 고려냐 하는 부분은 물론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당시 몽골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을 통해 맺어줌으로써 서로 간에 배신을, 자기한테 배신을 안
하도록 한다는 그런 정책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06:27)
<해설> 차출된 신부에게는 명주 열두 필이 보상으로 주어졌는데, 사서에는 여자 한 사람당 나눠준 그 명주 열두 필을, 얼굴이며 몸을 치장하는 비용 즉 ‘화장값’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신부감이 되어서 원나라로 끌려갔을 까요?
낭독자 원나라에서 보낸 매빙사 초욱은 남편 없는 부녀자 1백40 명을 선 출하라고 고려조정에 요구하였다. 독촉이 매우 심했으므로 급히 결 혼도감을 설치하고 이때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과부나 역적의 처, 그리고 승려의 딸 등을 샅샅이 뒤져서 겨우 그 수를 채웠으나 원망 의 목소리가 높았다.
<효과> (거리-여자들 통곡하는)
낭독자 그들이 북쪽 원나라로 끌려가는데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으며 보는 사람들도 슬퍼서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인서트-17. 테입<268> 홍영의
(
06:35 남송 정벌 과정에서 투항한 남송의 군인들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고려 여인들과 혼인을 시켜서 그들을 회유하는 목적이 첫 번째고 그러한
회유를 통해서 元軍으로서의 化, 원군에 가담시켜서 새로운 원 군대로 육성시키려고 하는 목적, 이런 것이 있었고 또 고려 여인들이 몽골족이나 또는 한족들이 보기에 굉장히 그들의
여성보다 월등히 좀 나았다라고 하는 이런 측면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러한 호기심에 의해서 추진 한 것으로 보입니다. 07:31)
<해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후시그널 & 클로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