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단 한 발의 수류탄 폭발음 이범영 일병의 일기 『1965년 10월 4일. 오늘은 내 일생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큰소리로 수류탄 투척 요령을 일러주시던 강재구(姜在求) 중대장님이 불과 몇 분도 되기 전에 부하 중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내 동료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려다 그만 실패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사랑하는 부하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낸 인간 강재구 대위님. 나는 그 위대한 희생정신을 하늘같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전 맹호사단 재구대대(在求大隊) 제1진으로 참전한 젊은 병사의 내적 갈등이 사실적으로 기록된 이 일기는, 파월 준비 기간이던 1965년 9월 24일부터 시작해 1967년 5월 14일까지 씌어졌다. 이범영 씨는 앞장서 전장(戰場)을 지휘한 장교도, 장군도 아니었지만 그가 쓴 기록은 ‘작은’ 현대사를 굽이쳐 온 지류(支流)일지 모른다. 그가 진중일기(陣中日記)를 월간조선에 전달한 사연은 이렇다. 2014년 3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경석 예비역 장군’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이범영 씨가 장문의 편지를 신문사로 보내왔다. 박경석 장군은 지난해 국립묘지 사병 묘역에 안장된 고(故) 채명신 파월사령관의 전기(傳記)를 쓴 인물이다. 박경석 장군은 "장군은 봉분 있는 8평 자리에 묻고, 대령 이하 장교와 사병은 화장해 1평짜리 묘에 안장하는 규정은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고 말했었다. 채명신 장군은 스스로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1평 묘역에 묻히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이범영 씨는 “그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정말 감격스러웠다”며 “당시 박경석 장군님은 제 대대장님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전쟁터에서 쓴 일기가 있다”고 전해왔고, 월간조선은 약 50년 전에 기록된 빛바랜 일기장을 입수할 수 있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과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해 갔어요. 땀과 비에 젖은 종이를 참호 속에서도 잘 지켜 작전이 끝나면 일기장에 옮겨 적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마치 기적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한 마지막 훈련 도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보고 몸을 던져 산화한 고(故) 강재구 소령에 대한 기억도 실려 있다. 1965년 10월 4일의 일이다. 이범영 씨는 바로 곁에서 참상(慘狀)을 지켜봤다고 한다. "제 옆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수류탄이 터지고 하늘로 검은 물체가 튕겨 올랐는데, 가만히 보니 강재구 대위님의 다리였어요. 그래도 사고 직후엔 살아계셨어요. 신음을 하고, 대원들이 달려가 지혈을 했지요. 그분은 동료 부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깔고 앉으려 했어요.” -월간조선 기사 발췌-
1965년 10월 4일 파월 전 나는 진해 육군대학 대부대학부 교관으로 영관급 정규과정 학생 장교에게 강의하고 있었다. 강의가 한창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수부장 백문오 대령이 교실에 들어와 강의를 중단시켰다. 40여 명의 학생 장교와 나는 놀라는 기색으로 교수부장을 바라보았다. "박 중령, 강의는 나에게 맡기고 당장 총장실로 가보시오" 말하는 기색으로 보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대답과 함께 총장실로 향했다. 총장실로 들어서자 총장은 웃음 지으며 나를 반기더니 " 축하해, 파병 맹호사단 보병 대대장으로 선발됐네. 만사 재치고 곧바로 홍천 맹호사단 사령부로 가보게. 어려운 선발 과정을 거쳤으니 영광 아닌가?" 나는 그러잖아도 은근히 맹호 제1진 대대장으로 선발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6.25전쟁 화랑무공훈장, 제1사단 15연대 2대대장 경력,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 미국 보병학교 졸업 등 모든 선발 기준에 부합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총장실을 나오자 즉각 숙소로 가서 대충 가사를 정리하고 강원도 홍천 맹호사단 사령부로 직행했다. 다음날 사단사령부에 도착한 나는 사단장실을 찾아 사단장 채명신 소장에게 전입 신고를 마쳤다. 채명신 장군은 6.25전쟁 최고의 영웅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직속 부하가 된 것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날이 1965년 8월 초였다. 육군본부 인사명령에는 9월 4일로 돼 있지만 명령 발령 전 사전 부임한 셈이다. 제1연대장 김정운 대령에게 신고를 마치고 제3대대 숙영지를 찾아갔다. 대대 막사에 도착한 나는 묘한 인연에 내심 놀랐다. 블록 단층 건물인 대대본부 및 중대 막사가 1962년 4월 6일부 첫 대대장 근무 시 제1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바로 그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3년 만에 소속 사단은 다르지만 같은 건물 대대장실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강재구 대위와의 첫 만남은 대대장 부임일로부터 한 달만인 8월 30일이었다. 검은 얼굴에 키도 크고 언뜻 보기에 야전형의 씩씩한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전입 신고를 받고 담소하는 가운데 강 대위는 서울고등학교 출신에다 육시16기라고 했다. 이미 사흘 전에 부임한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와 서울고, 육사 동기임을 알았다. 그 또한 드문 인연이 아닌가. 장교 전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선발권에서 빠져 다른 사단으로 전출되는 기존 기간 장교의 쓸쓸한 모습에 가슴에 동정의 연민이 울렁이었다. 군대 생활을 이어지는 동안 돌아가는 장교들의 뒷 모습이 떠오르면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껴진다. 보병 사단의 장교를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약 한 달간에 걸쳐 100% 교체한 경우는 아마 이때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만큼 당국에서 첫 해외 원정군에 대해 중시했던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훈련은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끝자락 실탄훈련이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마침내 운명의 10월 4일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장교식당에서 대대 장교식당에서 대대장을 중심으로 오손도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상호 이해와 협조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출신 지휘관에 의해 장악되는 엄격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미국 보병학교에 유학해서 배운 상하 간의 의사소통의 리더십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얼핏 다른 사람이 그 광경을 보면 마치 친구간의 대화로 오해될 정도로 자유분방한 푸리토킹 장면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날 아침 식사 때 대대장을 중심으로 정보관 권준택 대위, 중화기 중대장 방서남 대위,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 제11중대장 이재태 대위 등이 같은 식탁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그날은 종일 수류탄 투척훈련이 계획돼 있어서 자연히 수류탄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었다. 먼저 제10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이야기를 꺼냈다. 강재구 대위는 대대에 부임하기 전 바로 대대 숙영지인 이곳 1군단하사관학교 수류탄 교관으로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수류탄 투척 훈련 시 병사 하나가 수류탄을 잘못 던져 바로 강재구 교관 근처에 날아오므로 수류탄을 받아 탄착지점 근처에 되돌려 던져 아슬아슬한 경우를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장교들은 모두 오늘의 수류탄 투척훈련에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재빨리 6.25전쟁에서 소대장 으로 공격 시 인민군 수류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로 화제를 끊고 각각 일어서며 수류탄 훈련장으로 향했다. 나는 대대장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지만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살신성인의 숭고한 현장 대대장실에서 작전관으로부터 훈련 성과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들자마자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대대장님 10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을 안고 폭사했습니다. 여기는 수류탄 훈련장입니다" 나는 브리핑을 중단시키고 찝차를 불러 타기가 무섭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훈련장은 대대본부에서 가까운 거리기에 금세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의 중대원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복부와 하체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지만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나는 즉각 강재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뒤이어 달려온 구급차로 제2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 조치했다. 당시 사단을 지원하는 제2이동외과병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신속한 후송이 가능했다. 구급차가 떠난 후 소대장들로부터 사고 경위를 확인했다. 그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중대원 위치에서 거리를 둔 사선에 1개 분대씩 도열, 순서에 따라 중대장 구령으로 1명씩 차례대로 탄착 지점을 향해 안전핀을 뽑고 수류탄을 투척한다. 첫 순서로 박해천 일병, 다음 순서에 이범영 일병 등. 박해천 일병 차례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구호에 따라 안전핀을 뽑은 박해천 일병은 수류탄을 쥔 채 벌벌 떨기 시작한다. 사선의 병사들은 물론 거리가 있는 쪽 중대원들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불안한 자세에서 전방으로 던진다는 수류탄이 반대 방향으로 솟아올랐다. 이때 강재구 대위가 되받아 던지기 위해 수류탄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되받기에 실패했다. 수류탄은 대기중대원 쪽에 떨어졌다. 강재구는 순간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친다. 1965년 10월 4일 10시 37분, 단 한 발의 폭발음 "쾅" 강재구 최후의 순간이었다. 위대한 살신성인(殺身成仁) 역사 창조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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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 장군님
파월 초창기의 열악한 여건 속에
훈련은 많이도 뭔가의
환경이 매우 안 좋음이었겠지요
올리신 글 읽노라니
숙연해지는 마음입니다!
충격적인 사고였죠.
나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모든 어떤 조치도 받을 준비를 했었습니다.
'전화위복'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殺身成仁' 의 위대한 군인정신으로 인정하자 사태는 돌변.
전 국민이 추앙 하는 군신으로 승화하자 국방부에서 在求大隊로 명명, 단숨에 유명대대가 됐죠
백선엽 장군이 너무 자주 가짜 영웅을 생산 함으로 진실이 보장되는 자료를 찾아 게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