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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동(新岩洞)의 유래
그 발원은 옛부터 "한골"이라는 자연부락으로 불리어졌는데, "한골"이라는 것은 골이 깊은 계곡 대곡리(大谷理)라 해서 그 명칭이 "한골"이라고 불리어진다. 새로 생긴강 새내, 즉 신천이 흐르게 되었는데 그 아래 바위가 많은 곳이라 하여 "신암동"이라 불리어진다.
처음에는 동산새태, 새태마을(흑은 새터마실) 신기동이라 했다. 현 신암1동 동사무소 부근이 중심이 되며, 새태마실이라 불리운 것은 그 아래쪽에 많은 마을이 들어서게 됨으로 하여 이를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부르게 되었다.
쇠머리
1975. 10.1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신암2동 일부(신암로 북편)가 대현3동으로 되기 이전 현재의 대현3동사무소 뒤편 일대 경사지의 형상이 소의 모습을 닮았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소머리 부분의 윤곽이 뚜렷하여 쇠머리라 부르게 되었 다고 한다. (신암동 동편 - 동촌, 안심, 공산 주민들이 대구시내에 들어 올려면 이곳 쇠머리 마을은 시내 진입 관문으로 그 기능을 했다.)
감나무촌
6.25 전쟁 이후 대구시내 일원(칠성시장주변)에는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밀집하여 시에서 신암2동 감밭(현재의 강남아파트) 외 몇개소를 피난민 거주지역 지역으로 지어, 시내 곳곳에 산재한 난민들을 시지정 장소로 이주시켰다. 당시 강남아파트 일대는 야산을 개간하여 과수원으로 감나무를 많이 심었으며 동신 초등학교 서편 경사지는 복숭아나무를 재배하였다. 대구시의 계획에 의거 시내 중심지의 피난민들이 감밭으로 이주함에 따라 자연부락이 형성되었고 이 마을을 감나무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쌍둥이못
송라지(현재 동신초등학교와 송라아파트 부지 전체가 하나의 못)가 경부선 철도의 현위치 이전에 따라 큰 못이 두 개로 나누어져 이를 쌍둥이 못으로 부르게 되었다.(현재는 없음)
기와골
현재 신암2동사무소 부지 일대는 본건물 신축이전까지 기와를 굽는 기와 공장으로서 이를 기와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新川洞)
신천동(新川洞)의 유래
조선시대 정조3년 대구판관 이서가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던 하천에 제방을 쌓고 현재의 신천동 물줄기를 돌려 만들었는데, 새로난 하천(신천)의 가장자리에 있다하여 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천
대구시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하천으로 남부 산지인 비슬산 최정상에서 시작하여 용계동(가창면 소재)에 이르러 팔조령 부근에서 시작하는 대천과 합류하여 대구 시가지를 가로질러 침산동에서 금호강으로 합류된다.
주류의 길이 12.5KM, 유로 전체길이 27KM, 유역면적 165.3㎢의 준용하천이다.
서부 구릉지와 동부 구릉지 사이에서 여러차례 유로를 이동 흑은 분류하면서 큰 선상지를 형성하였고 이 선상지 위에 대구 시가지의 중심부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의 위치로 강줄기가 잡히기 전에는 용두산 밑에서 효성타운 - 수도산 동쪽 - 반월당 - 구암서원 앞 - 동산파출소 - 달성공원을 통과하여 달서천으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금호강과 합류하는 강이며, 비가오면 시가지 침수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물난리를 막지 못하다가 영조 52년 7월 판관 이서(李逝)라는 분이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임기 3년째인 정조2년(1778) 사재를 털어 시가지로 물이 유입되지 않도록 제방을 쌓으니, 물난리를 면할 수 있었고, 이 때 물줄기의 형태가 변해 새로이 생긴 곳이라 하여 신천(新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천의 상류부 오동(梧洞)에는 상수도용 가창저수지가 만들어져 대구시의 상수원이 되고 있으며 상류 산간 계곡은 대구시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한골
난리골의 뒤쪽이라 한다. 명칭의 유래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으나 현 광명 아파트가 있는 곳이 큰 골인데 그 곳과 난리골의 뒤쪽이었다.
송라시장
신암2동 범화맨션 근처는 일제시대에는 검찰청 산하 관청이 모여있던 곳이다. 해방이 되고 20년 후 개인에게 이 지역이 불하되어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동네를 이루었으며, 그 때 행정구역은 대구 동구 신암4구였었다.
이 동네 동쪽의 조그만 골짝기에 남족과 북쪽에 각각 연못이 하나씩 있어서 쌍둥이 못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못은 이덕삼씨의 개인 소유였다고 하나 못둑에는 출처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개인 공적비가 15개 정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없어졌다.
지금은 두 못의 사이에 경부선 철도가 동서로 놓여져 있다. 철도 남족에는 못이 메워져서 처음에는 골목 시장으로 시작하여 해방전까지는 영남시장이라고 했으나, 해방 후부터는 송라시장으로 불리어졌다.
철도 북쪽의 못은 1950년대까지 빨래터로 주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에 메워져 이자리에 지금의 동신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야시골
일제시대(1910년)이후 현재 신천4동 그 일부가 묘지(墓地)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묘터가 야시(여우)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데서 그 유래가 있다.
(孝睦洞)
효목동(孝睦洞)의 유래
원래 지명은 구역내(區域內)에 작은 못이 있어서 소목골 또는 소목곡(昭穆谷)으로 불리었는데 320여년전 조선 숙종재위시 동래정씨(東來鄭氏)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 으며, 이후 동래정씨 11대손인 정종악이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학문에 능할 뿐아니라 일가친척과 이웃간에 늘 화목하게 지내자 숙종대왕께서 정종악의 호(號) 인 효목을 이 곳의 지명으로 하라는 명명(命名)으로 소목골에서 효목리라 불리게 되었다.
뱃가
현재 통행중인 아양교 다리근방을 칭하며 배가 떠 다니는 강의 가장 자리라는 의미로 쓰여졌으며 구체적인 유래는 알 수 없다.
검전동
효목동의 옛지명을 칭하나 구체적인 유래는 알 수 없다.
소목골
효목동 삼삼아파트에서 효목파출소 사이의 소로를 일컫는 지명이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坪廣洞)
평광동(坪廣洞)의 유래
전체면적 80%가 임야로 처음에는 넓은 마을이라 하여 광리로 불리어 오다 일제시 평광이라 개칭하여 8개 자연부락(시랑리.중시랑리.샛터.평리.섬뜸.아랫뜸.큰마을.당남리) 으로 경산군과 인접해 있으며, 추씨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현재는 "단양우씨"가 60%를 차지하고 있다.
실왕리(失王里) 시량리, 시랭이
후백제가 신라말에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의 서울 경주가 함락직전에 신라에서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불로 봉무동소재 파군재에서 접전으로 고려 왕건이 크게 패하고 이 마을에서 임금을 잃은 곳이라 하여 실왕리라 전해오다, 조선말에 수치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시랑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현재 시랑리와 시랭리로 불리어지나 시랑리가 정확한 표기이다.
새터, 샛터, 직지
오래된 마을이나 인근부락에 비하여 늦게 형성되었다고하여 샛터라 이르며, 한자로는 신기(新基)로 표기하고 있으며 또한 직기(直技)라고도 많이 불리어 졌다고 하며 경주 최씨 제실 삼호제가 있다.
아래깍단
시랑리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다하여 아래깍단, 아래뜸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큰마을.큰마.남광
평광동 전체를 광리(廣里)라 부르고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는 큰 마을을 지칭하기도 하며 옛날에는 광리 남쪽마을이라 하여 남광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지금도 평광동 8개 자연부락 중 가장 큰 동네가 큰 마을이다.
평리.북광
시랑리 마을의 북편에 위치한다고 하여 북광이라 불리어지기도 했으며 인근 산지에 비하여 평평하다고 평리라 불리어지고 있다.
당남리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으며 지금도 거주하는 6가구가 전부 경주 김씨이
다.
평광지
평광동 지역에서 면적이 제일크고 유일하게 먼저 설치된 못.
갈마골
갈령제 산이름을 따 그 골짜기를 갈마골이라 함.
(道洞)
향산
천연기념물 제1호인 측백수림 (側柏樹林)이 있어 동민 모두가 문화재 감시자 노릇을 하고 있다.
용암산
도동 산 36번지 해발 380m 가파른 절벽위 큰 바위가 용처럼 생겼다하여 용암산이며 주위의 토기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안심.하양읍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교통.군사적으로 상당한 요충지대로 용암 산성이 있다.
문암산
도동 산 5번지 해발 431m 도동에서 평광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주위가 바위로 된 절벽으로 흡사 대문처럼 생겼다하여 문암산으로 전하여 진다.
달동지
도동 747번지 일대로 옛부터 달동이란 마을로서 이 곳에 못을 막아 농업 용수로 사용하면서 이름이 달동지라 하였다.
다리지
도동 산 27번지 골짜기가 옛부터 다리골이며 그 곳에 저수지를 막아 농업용수로 사용하며 이름은 다리지라고 전하여 진다.
상곡지
도동 산 191번지로 향산주위 마을이 도동 마을이고 이 마을 위에 못이 있으니 상곡지라고 부르고 있다.
갓골
도동 787-2번지 일대로 향산 동편 골짜기 밑에 자리한 마을이라 갓골이라 부른다.
신기리
도동 978-293번지 청구아파트 및 11통.5통,6통 일대가 하천 및 모래밭으로 황무지를 정리하여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하여 신기리라 전하여 지고 있다.
바리고개 도동에서 둔산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바리고개가 아니고 발리 고개로 도동에서 처음 출발한다는 뜻으로 둔산과 반야월 하양등으로 출발하는 고개란 뜻으로 전한다.
(不老洞)
불로동(不老洞)의 유래
왕건이 동수전투(일명:공산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鳳舞洞)
봉무동(鳳舞洞)의 유래
봉무동 836번지 현 봉무정에 호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니 땅속에서 봉이 나와 북쪽으로 날아갔다 하여 봉이 춤추는 동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왕건이 앉았다는 독좌암에서 딴 이름 "독암" 금호강 동쪽마을 이라는 강동마을과 단산,위남등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단산지
붉은 흙이 나왔다하여 단산(丹山)마을이라 하였으며, 그 마을의 지명을 따서 단산지(丹山地)라고 불렀다고 함.
신기
신글이라고도 하며 현 경북농산물 위쪽에 일직 손씨들이 새로운 터를 잡아 집성촌을 이룬데서 유래
강동
금호강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강동(江東)마을이라고 한다 함
위남
수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위남(渭南)이라 함
구촌
구성촌(九成村)이라고도 하며, 강동마을 남쪽에서 고분공원까지 산봉우리가 아홉봉이 봉무뜰을 막아선 형국에서 그 지역을 구촌(九寸)이라고 함
(枝底洞)
지저동(枝底洞)의 유래
본래 지저동은 K-2 비뱅장 산 밑 마을이었다. 그곳이 동촌비행장으로 편입되는 까닭에 그때는 논밭이었던 현 지저동으로 이주하여 왔는데 지역은 바뀌어도 명칭은 그대로 불렀다 한다.
지저동은 본래 명칭은 갖밑마을이다. 과수원이 많았는데 나무가지 밑의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명칭이 불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노무촌
해방 직후에 K-2 미군들이 한국인 노무자들을 모집 노동을 시킬 때 공군부대 후문에 위치한 집결지로써 이후에는 집단하숙촌이 들어서서 많게는 한집에 19가구가 생활 하는 등 마을을 이루다 K-2 부대에서 노임을 지급하던 곳으로 당시는 노무처 라 불리던 곳이 지금은 대구공항 확장부지로 편입되고 현재 후문상회만 남아 있다.
(立石洞)
입석동(立石洞)의 유래
신라말엽(후삼국시대)에 왕건과 견훤의 전쟁이 치열할 때 왕건의 부하장수들이 말총으로 큰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었다고 하며, 전쟁중에 부하장수들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 그 때 이후부터 선돌 즉 입석(立石)이라 칭하였다 한다. 해방이후 입석동에는 영천 이씨, 영양 남씨등 약 300여호가 살고 있었으며, 그 때까지도 어른 3-4명이 앉을수 있는 큰돌이 마을을 관통하여 몇 십미터 간격으로 여러개 있다고 한다.
(檢沙洞)
검사동(檢沙洞)의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패하여 도주하다 금호강변 모래가 비단처럼 빛깔이 좋고 크기가 똑같다 하여 금사로 불리어지다가 검사로 변천되었다.
(芳村洞)
방촌동(芳村洞)의 유래
고려때 격양동이라는 풍요롭고 살기좋은 태평스러운 마을로 불리어지다가 이조 중엽 방촌천 좌우에 버들나무가 자생하여 숲을 이루고 있어 이와 관련 유광촌이라 칭하다가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시 흙이 기름지고 물도 풍부하여 살기좋은 곳이라 하여 현이름이 붙여졌다.
백호동
1952년 휴전시 동촌비행장을 확장키 위해 인근 자연부락을 철거하면서 현 방촌동사무소 근처에 100채 가옥을 지어 철거민을 이주시켜 100가구가 집단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는 지역전체가 개발되어 이름만 남아있다.
용호동
금호강변 현 영남제일관 앞에 용수암 바위가 있어 용수암을정면으로 바라보고 형성된 촌락이라는 뜻으로 붙여졌으나 이름만 남아있다.
(屯山洞)
둔산동(屯山洞)의 유래
조선시대 군영지가 소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아홉동네 아이들이 해안 초등학교에 다니고 구명당으로 불리어오며 유명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명당골이라 하였다.
경주 최씨 12개파 중 원파인 벽파가 살고 있다가 자기들이 제일 으뜸이라 하여 수동이라 칭하다가 빼어났다고 하여 빼골 400년전 옻나무가 많은 공짜기라 옻걸로 칭하다가 부르기 쉽게 변하여 옻골로 되었으며 일명 칠계동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유씨들의 정자인 월청정에서 따온 월천골 골짜기 흙이 많다고 하여 토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동(釜洞)의 유래
마을 지형이 오막하여 가마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新平洞)
신평동(新平洞)의 유래
당초에는 신덕리와 평리로 두개의 조그마한 자연부락으로 있다가 1958. 1. 1부로 달성군에서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서구 평리동과 이름이 같다고 하여 신덕리의 "신"과 평리의 "평"자를 따서 신평동으로 바뀌었다.
신덕마을
신라시대에는 신선이 춤추며 놀던 산이라하여 선무산(仙舞山)으로 명명되다가 신라시대 말기에 사람들이 이주하여 거주하면서 새로운 덕을 얻는 마을이라하여 신덕 마을로 칭하여 현재까지 명명되었다고 한다.
신덕지
60여년전에 조성되면서 신덕마을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신덕지로 부르게 되었다.
평리
마을 이름이 없이 들판에 몇몇 가구가 거주하면서 들마을로 불리다가 일제시대 (1920년대)에 평리마을이라 칭하여 현재까지 불리어오고 있다.
(安心洞)
안심동(安心洞)의 유래
후백제의 견훤은 원래 상주 고을 가은현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백제 왕의 악몽을 갖고 천하를 병탕코자 공산동 수대전을 시정함에 교려 태조왕건이 정기 5천명으로 공산 아래서 맞아 대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장사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제군이 패배함으로 왕건은 난을 피하여 지금의 동내동까지 이르니 적국의 추격이 없으므로 한줌의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게 되니 이 곳을 안심(安心)이라고 불렸다.
반야월
반야월이란 명칭은 여러 가지로 옛날부터 불러왔으나 삼후삼국시대 왕건이 견훤군사에 패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있어서 이곳을 반야월이라 했다고 하며,이조 19대 숙종께서 민정을 관찰하기 위해 전국을 순시하던 중에 이 고장에 이르러 반달이 서산에 기우는 야반중에야 희미한 달빛을 따라 한 동리를 찾으니 이를 반야월이라 하였다.
신기동(新基)
신기동의 옛셋터라 불러왔고 평단한 지면에 북에서 다소 남으로 경사를 갖고 강우량은 모름지기 금호강으로 흘러가며 한양으로 가기위한 반야월역 주변 하주막을 중심으로 샛터를 만들어 영농경작토록 하여 붙어진 이름으로 동래 정씨, 달성 배씨가 많이 살고 있다.
말방샘
청정한 생수가 용출하여 산를 이룬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목욕을 하고 폭서를 식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율하동 1007번지에 보존되다가 매립되었다.
율하동(栗下)
처음에는 팔공산 원수가 청결하여 반계동이라 하다 율하천변 밤나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밤 수확 후 유희 장소로 이용하여 농사경작 금액을 의논하는 장소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지역에는 강갱이라는 샘이 있어 여름에는 차가운 물,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솟아났으며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일명 말방샘이라고도 하였다.
율암동(栗岩)
마을에 큰바위가 9개 있어 구암마을로 지칭하다 마을에 밤나무 밭이 많아 밤율의 율(栗)과 구암의 암(岩)이 합쳐져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3개의 바위만 남아있다.
용계동(龍溪)
금이 났다는 전설마을 금계리(金溪里)와 5정승이 났다는 오용리(五龍里)전설에서 용자와 계자를 합쳐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달성 배씨가 만이 살고 있다.
상매동(上梅)
임진왜란시 성주 여씨가 피난와서 정착한 마을로 원래는 피난온 선대를 따 송하리라 칭하다. 그후 밤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율상리로 호칭하였고 주의의 산이 희다하여 매화 '매'자를 삽입하여 율상리의 '상'자와 '매'자를 합한 상매라 불리어지고 있다.
매여동(梅余)
매화꽃 형태로 주위산이 오목하고 흰모래(마사토)로 형성된 산이 대부분인 관계로 매화 매(梅)와 여(余)를 붙여 매여라 하였는데 지금도 골짜기에는 가마터 흑적이 남아 있다.
돈지봉(豚智峰)
돈지봉 명칭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山(보우리)밑으로 돼지를 주업으로 하는 농가들이 형성되었고, 그 돼지를 생계수단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여 돈지봉이라 불리고 있다는 설이 있다.
내곡동(內谷)
냇가 계곡에 갈대가 무성하여 노곡 또는 노실이라 불려지다 골이 깊다하여 내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복·대림동(司福·大林)
시인과 문한이 많이 배출하였다하여 시동(試洞)이라 불려지다가 동족 (司福·大林洞) 작은시동은 복을 받은 동네하여 사복동, 큰 시동은 동네가 크고 숲이 우거졌다 하여 대림이라 불려졌다.
숙천동(淑川)
맑은 샘이 서너군데 있다 하여 숫샘이라하다 현 숙천초등 교정에 물이 (淑泉洞) 차고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다하여 붙여지게 된 이름이다.
동내동(東內)
팔공산 초래봉 줄기 따라 서편쪽을 신서동, 동편을 동내동(東內洞)이라 하여 불러지게 되었다.
괴전동(槐田)
옛 이름은 괴명골로 조각품으로 쓰이는 괴목나무 밭이 많이 있다하여 (槐田洞) 붙여진 이름이
다.
금강동(琴江)
처음에는 냉천으로 불리어졌으나 금호강의 물이 차고 맑은 동리라 하여하여 (琴江洞) 붙여진 이름이다.
동호·서호동(東湖·西湖)
반야월 초등학교 북편에 작은 호수가 있어 그 동쪽을 동호, 서쪽을 (東湖.西湖洞) 서호라 하였다는 설과 초등학교 동쪽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어 동쪽을 동오, 서쪽을 서오라 칭하다가 음운 변천에 의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각산동(角山)
우암동이라 불리어 오다 송시열 후손이 하양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선조 (角山洞) 와 같은 호라 하여 우를 뿔 각(角) 바위 암을 뫼 산(山)으로 고쳐 불렀다.
신서동(新西)
원래 순 우리말인 덤밑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마을 (新西洞) 동내동 서편에 신촌이란 마을이 생긴 후 동내동을 동곡, 신촌을 서곡이라 부르다 230여년전쯤 문화유씨가 정착한 이후 새로운 서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곡지
이 못은 내상동의 서편 승방골 하단에 위치하여 해방전 착공했으나 완성을 (東谷池) 못보고 해방후 누차 시공하여 1961년 준공을 이룩하였다.
송정
동리 중심부 소나무 정자가 큰 것이 있다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松亭) 이여송이 임난을 진압하고 귀국할시 팔공산 산세를 보고 조선땅에 큰 인물이 날것을 두려워 맥을 끊었는데 끊은 자리에 미륵불이 솟았다 하였으며 지금도 높이 2m 폭 80cm 의 화강암으로 된 석불이 명동 입구 철로 건널목에 있었던 것을 해방 후 농어촌개발공사 자리로 이설 안치하였다.
가남지
옛날 가남사란 사찰이 있었는데 빈대비력이 극성으로 만연 되어 도저히 이를 구축할 방법이 없어 사찰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유지로 이용해 오다가 일제시대 1939년 기유해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당시 공무원이 주축이 되어 지주의 기부금과 주민의 노력동원으로 확장준설하여 금일까지 아무 하자없이 사용하고 있다.
중리
숙천과 내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중리 달성서씨 및 성주배씨가 (中里) 거주한다.
새금지
숙천과 내곡동 경계간에 있는 못이다.
활감지
내곡동의 동난구릉에 위치한 못이다.
초례산
이산은 해발 635.7m로서 안심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환성산맥을 남으로 따라 내려와서 남향으로 위치한 산으로 산정은 소곳끝 모양으로 생겨 사람 몇명이 겨우 앉을 정도이며 산정아래 동.서.남이 급한 경사이다. 옛날에는 산정이 초목이 거의 없고 백산(百山)이었는데 일제시대나 광복후 사방사업을 실시해서 지금은 표면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또 일설에 초례산 산정에는 바위가 나란히 두 개가 서있는데 그 앞에는 편편한 또 다른 바위가 있어 그 곳에서 초례(결혼식)를 올리면 아들을 낳는 다는 설이 있어 초례산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동골
의미는 동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내=동골. 초례봉 줄기를 따라 서편에는 서골, 동편에는 동골이라 불리어졌으며 서골은 현재 신서동으로 동골은 동내동이라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조 중엽쯤 장수 황씨가 개척한 마을이며, 영사재와 동호재의 황씨 재실이 있으며, 황씨의 일가 친척들이 거주하는 집성촌이다.
.(公山洞)
지경
경산군과 달성군의 경계를 이룬다는 뜻과 갓바위에 석조불을 창건 할 당시 (地境) 임금이 머물렀던 지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송정
유인이 밤길을 가던중 마을 뒷산 좌우에 노송이 울창 야경의 소나무 경치가(月松亭) 더욱 멋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도장골
약 1500여년전 신라시대 스님이 몸을 숨긴 지역이라 하여 도장이라 명하고 (道臧骨) 건립한 사찰을 도장사라 하였으나 사찰은 없어지고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이 이름이 현재 불리어오고 있다.
학부마을
팔공산 학수암에는 큰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하여 붙여졌으며 외학부 (鶴 浮) 내학부로 나누어졌으나 내학부 마을은 현재 없어지고 외학부가 학부마을 이루고 있으며 일명 "학봉" 이라고도 한다.
백안
마을형상이 배모양 같다하여 배안이라 하다 마을호수가 100호 이상 되자 100호 (百安) 모두가 편암함을 기원하기 위해 백안으로 불려졌다.
속골
고려시대에는 큰 소골이라 하였고 숙종때는 둔기고 둔곡이라 부르다 1910 년경 속골로 변하였다.
수태골
이 마을 옆 내가의 물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하여 수태라고 하게 되었다. (水台滑)
용천
마을에 지정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근처 동굴안에 용이 살고 있었으며 이 용이 (龍泉) 굴 앞 용수를 먹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용천이라 불리어졌으며 약 100 여년전에는 갈방 또는 가루뱅이라고도 불려졌다.
국실
처음에는 부인사의 소재지로서 부인동이라 하다 마을 오른쪽 산에 벌봉이라는 (菊室) 봉우리가 있고 벌이 많이 서식하고 들국화가 많이 피어 있어 벌이 국화를 좋아한다는 뜻에서 국곡으로 불리다가 국실로 변하였다.
미대(美垈)
조선 명종때 채송표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미대라 명명하였는데 (美垈) 당시 이 마을에 있었다는 미대사라는 사찰이름도 같은 연유이다.
구암
약 200여년전 현동수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옆에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어 구암이라 불렸다.
지묘동(智妙)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장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자 신장군의 충성심을 알고 왕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자리에 지묘사라는 절을 세웠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송정동(松亭)
마을 중심에 소나무 정자가 큰 것이 있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며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사 이여송이 왜란을 진압하고 귀국할 때 팔공산 산세를 보고 조선 땅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 맥을 끊은 자리에 미륵불이 솟았다 하였으며 지금도 높이 2M, 폭 80CM의 화강암으로 된 석불이 현존하고 있다.
노적봉
노적단(볏섬)을 쌓아 놓은 것같이 생긴 봉우리라 하여 노적봉이라 한다.
성인봉
성인이 내려와 놀다간 봉우리라하여 성인봉이라하며 현재 봉우리에 발자국이 있다 한다.
관봉
멀리서 보는 산형태가 갓모양같이 생겼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옥정동
구슬같이 맑은 샘물이 사시사철 나온다는 유래에서 옥정이라 한다.
중심
신무.용수.미곡동의 중간에 위치한다하여 중심이라고 불리웠다.
상중심
중심의 위쪽에 위치한다하여 상중심이라 한다.
동산마을
현재는 산이었던 흔적만 남아 있으나 동네의 동쪽에 조그만 동산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동산마을이라 한다.
지장지
북지장사 절터를 닦을 때 땅속에서 부처가 나왔다 하며 북지장사에 있는 못이라 하여 지장지라 한다.
자리미
마을 뒷 동산이 자라의 목같이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속골
마을안에서 제일작은 골짜기(小)에서 유래되었다.
모고지
마을앞에 모과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는데 유래되었다고 하고, 일명 목과정이라고도 한다.
중마을
스님가족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데에서 유래되었다.
모래정
모래가 많다는데에서 유래, 일명 거(巨)듬이 라고도 한다.
양방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데 유래되었다.
도마재
산 모양이 도마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성둑 옛성터가 있던곳에서 유래하였으며 현재 성터의 흔적이 조금 있다.
안양배이
안쪽에 있는 양방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큰마
능성부락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인산
어진산에 어진 인재가 많이 난다는데에서 유래되었다.
당동
국수당 고개에 사당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성두뜰(성둑)
지금은 인가는 없으나 옛날에 성의 둑을 쌓은 곳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대왕재(댕재)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격전하다가 패한 후에 그 고개에서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대왕재라고 불렀다.
상리
높은 산 기슭에 입지했다고 상리(上里)라 불이워진 듯하나 일설에는 공산면 서촌에서 제일 먼저 집터를 잡았다하여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