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내용은 칼럼을 바탕으로 각색된 추리소설입니다.
비가 대지 서서히 젖어 들던 늦은 밤, 국정원 산하 경제안보분석실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수석 분석관 강태혁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쫓고 있었다. 반도체 수출 급감 그래프, AI 스타트업들의 연쇄 도산 리포트, 그리고 워싱턴에서 날아온 비밀 외교 전문까지. 외견상으로는 단순한 경기 침체처럼 보였지만, 태혁의 직관은 이것이 정교하게 기획된 ‘사건’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후배 분석관 연우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선배, 알아내셨습니까? 시장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든 진범이 누구인지.”
태혁은 대답 대신, 얼마 전 세간을 흔들었던 시사평론가 진 커밍스의 칼럼 한 구절을 읊조렸다.
“규제는 균형을 잃을 때 통제의 도구가 되며, 동맹의 신뢰를 깨뜨리는 흉기가 된다.”
“연우야, 범인은 멀리 있지 않아. 이 방 안에, 그리고 저 높은 곳에 있지.”
태혁이 화이트보드로 걸어가 붉은색 보드마카로 세 개의 단어를 쓰고 강하게 동그라미를 쳤다.
[ 시장 통제 ] [ 표현의 자유 제한 ] [ 외국 기업 적대시 ]
“이 세 가지가 이번 사건의 범행 도구다. 정부가 ‘허위정보 근절’과 ‘불공정 거래 시정’이라는 그럴싸한 가짜 명분을 내세워 휘두른 ‘규제’라는 이름의 흉기지.”
연우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배, 정부는 그저 국내 시장의 질서를 잡으려 했던 것뿐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경제 마비라는 결과로 이어집니까?”
“그게 바로 범인의 착각이자, 이 사건의 가장 치명적인 트릭이지.”
태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생존 공식을 잊었나? 우리는 세계 시장, 특히 미국의 플랫폼과 기술 생태계라는 거대한 그물망 위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수출 의존형’ 국가야. 그런데 정부가 국내 시장을 통제하겠다고 그 플랫폼을 규제하고 미국 기업들을 압박했어. 결과가 어떨 것 같아?”
태혁은 파일 하나를 연우에게 던졌다. 미국 상무부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보낸 비공개 서한들이었다.
“외교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이야. 동맹국의 신뢰를 잃는 순간, 보이지 않는 보복이 시작되지. 저들이 기술 협력의 문을 닫고, 우리 기업들의 수출길을 야금야금 좁혀오고 있었던 거야. 정부가 휘두른 규제의 칼날이, 사실은 우리 산업의 목을 찌르는 자해 흉기였던 셈이지.”
연우는 서류를 읽어 내려가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국내 기업들이 무너지고 동맹이 깨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정책 기조 때문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질서를 잡겠다는 집착이 균형을 잃고 독재적 통제로 변질되면서,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인 ‘개방’과 ‘경쟁’의 정신을 스스로 안락사시키고 있는 거지.”
태혁은 담배를 태우려다 말고, 창밖의 어두운 도심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규제의 그림자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듯 드리워져 있었다.
“사건을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태혁의 목소리에 무거운 결단이 실렸다.
“현 정부가 지금 당장 정책 기조를 바꾸고, 기업의 손발을 묶는 대신 혁신을 돕는 방향으로 전면 전환해야 해. 세계 시장과의 협력을 다시 복원하는 것 외엔 탈출구가 없다.”
“만약…… 만약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혁은 서류 가방을 챙기며 차갑게 받아쳤다.
“그때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배의 키를 잡은 주인을 바꾸는 수밖에. 정권 교체라는 가장 거대한 반전만이 이 파국을 막을 유일한 결말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