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부활신앙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창 22:1-2) / 김종호 목사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1. 자기 생각대로의 삶을 버리는 고통을 통해 부활신앙이 확인된다.
창 22:1은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 후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은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 후에”란 이미 앞의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은, 직접적으로는 바로 앞장인 창세기 21장에 나타나는 사건을 뜻합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낳았다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으로 주어진 아들이 “이스마엘”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아브라함의 생각대로” 낳은 아들을 내버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 후, 우물로 인한 토착세력과의 충돌로 인해 아비멜렉과 상호 불가침의 언약을 맺고, 우물 판 증거에 대한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사건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모든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의 흐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12:1)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았습니다.
(창12:8) 택함 받은 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창13:9) 택함 받은 자로서 분리되어야 할 조카 롯과 헤어짐을 겪었습니다.
(창15:6)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창16:15)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 육신의 아들을 낳는 불순종을 행했습니다.
(창17:5)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창17:10)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18:1) 하나님이 삶의 터전에 찾아오심과, 그를 대접함을 경험했습니다.
(창18:17)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경험하였습니다.
(창18:25) 중보기도시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를 행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창19:29) 기도 응답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결과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창20:9) 삶의 터전에서 인간적 계획이 실패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창21:2)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창21:10) 사랑했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깊은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창21:33) 삶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고백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창 11:27로부터 창 21:34까지의 사실들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자녀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자로서 지니고 있지 말아야 할 것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창세기 21장에 올 때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세상을 향한 버림의 과정이 연속되었습니다. 창 21:33의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그 믿음과 순종의 결정판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믿음의 자녀가 버릴 것들을 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고백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오로지 영생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결단 가운데 나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일”이라는 환경을 통해 우리의 생각대로 살아오던 방식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우리의 생각대로 취해 왔던 삶의 모습을 하나씩 버리게 하십니다. 이것들을 버릴 때 하나님의 택하심을 알며, 하나님의 약속을 알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여겨 주심을 알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부활신앙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우리로 우리의 생각대로 행해 오던 삶을 버리도록 다양한 환경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맞이하는 환경들은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업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 환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 부활신앙을 지닌 성도가 됩니다.
2.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통과한 자의 부활신앙을 시험하신다.
우리의 생각대로의 삶을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본문의 첫 문장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시작합니다. 이 첫 문장은 창 22:1-19의 사건의 성격을 결정짓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본문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짓는 문장입니다.
본문 자체는 메시야를 위한 모델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을 시험한 사건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해석의 일차적인 열쇠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알아보기 위해서 행하신 시험이었는가?”를 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과한 사람에게 “시험하시는 사건”을 전개시킬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상 아브라함은 “그 일”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의 훈련 계획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창 11:27부터 아브라함의 훈련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훈련을 통해 버릴 것들을 버리며, 믿음이 성장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의 결과가 창 22:1의 하나님의 시험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의 하나님의 시험은 “그 일”을 통과한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창세기 22장의 하나님의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22장에 이르기 전에 “그 일”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시험하다”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이곳에 처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들은 시험이 아니라 이곳의 시험을 받기 전에 지나와야 했었던 믿음과 순종의 훈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 계속하여 훈련을 받아 왔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 이방 땅에서 사라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을 것을 두려워할 때, 롯의 곁을 떠나야 했을 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할 때, 하갈과 그의 아들을 추방할 때, 이스마엘과 최후의 이별을 할 때, 늙어서 까지도 후사가 없었을 때 받은 훈련 등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그는 믿음과 순종으로 훈련 과정을 통과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택하여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불렀던 그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받아야 할 다른 훈련들이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아브라함을 불러 그 다음 과정을 진행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 일”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부른 “여호와의 이름”의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하나님의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지나온 삶들을 돌아보며, 그 가운데 함께 하셨던 주님을 향해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훈련은 하나님의 시험으로 바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있다면, 주님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주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부활신앙의 증거를 지니게 하기 위하여 이해할 수 없는 시험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시험하신다.
본문에서 “시험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싸”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의 질을, 종종 역경이나 고난을 통하여 시험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입증하다”라는 단어의 강조형으로서 단단히 철저하게 시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시험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창세기 21장까지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그 일”이 확실한 결과에 도달했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삶인지,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부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고백이 확실한 믿음 위에 서 있는 것인지 확증하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어떤 믿음, 어떤 신앙인지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종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아브라함에게 확증해 주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시험받는 자 곁에 서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험받는 자가 당하는 시련을 견디도록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동기가 그들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 중 창 22:1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마지막으로 시험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외형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을 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그 충격을 좀처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결말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은 약속과 배치되는 것이기에 훈련이 아닌 “시험”인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하면 언약을 헛되게 하고, 불순종하면 명령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외견상 유복한 사람이었으나 일생 동안 큰 시련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후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서 후사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나 성취되지 않고, 인간이 보기에 이루어질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시련을 견뎌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이러한 일들을 통한 시련이 있고 난 후였습니다. 즉, 앞선 시련들을 통해 확증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확증시켜 주기 위한 시험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최종적인 확증이 “부활”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신앙의 확증도 “부활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확증도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알아보기 위해서 행하신 시험이었는가?”가 분명해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부활신앙을 통해 확증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시험 목적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시험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증거를 지니도록 우리를 시험의 현장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 약속을 파괴해야만 하는 괴로운 명령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미래적인 약속과 하나님의 현실적인 명령의 충돌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는 현실적인 명령을 믿음과 순종으로 따르며 미래적인 약속을 보장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약속만을 붙들고 현실적인 명령을 어기다가 둘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부활신앙을 확증하기 위한 시험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약속과 명령의 충돌선상에 있다면 부활신앙을 확증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 대상입니다. 목회자로 부름 받고 약속을 받았는데, 목회사역이 아닌 생업 현장에 나가도록 명령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부활신앙의 확증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에의 약속을 주시고, 비전을 주셨는데, 자꾸 그 약속에서 멀어지는 방향을 향하게 하는 현실적인 명령들이 주어진다면 부활신앙을 확증하시는 시험일 수 있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어떤 것인지 부활신앙의 확증을 통해 알아보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 가운데서, 약속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4. 부활신앙의 대상은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시험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창 22:1은 그 하나님의 성호를 “엘로힘”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엘로힘”은 참 하나님을 나타낼 때 인간에게 계시된 모든 신적 활동의 주체이자 인간에게서 받는 모든 참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의 역할을 합니다. 칭호로서의 “엘로힘”은 그의 창조 사역과 관련되며,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낼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크고 능하시며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 22:1-10절에 “엘로힘”이란 성호가 사용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이가 창조주 “엘로힘”이심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엘로힘”은 사람의 생사 문제에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창 22:11-19절에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는 이는 “여호와”란 성호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와”는 약속의 아들과 관계된 분으로 인간에게 알려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아들을 죽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엘로힘”이란 성호와 “여호와”란 성호는 각각 문맥에 따라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엘로힘”은 본문의 바로 앞인 창 21:32에 보여지는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로 앞에서 아브라함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부른 후, 이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백과, 부름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는 응답입니다.
“엘로힘”은 창세기 첫 부분에 나타나는 “엘로힘”(창 1:1-2:3)과 같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여호와 엘로힘”이신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로 부르는 아브라함에게 창 22:1-10에서 “엘로힘”으로 나타나셔서 창 22:11-19에서 “여호와”로 응답하십니다. “영생하시는”이란 미래적으로 계속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이 전제돼야만 하는 칭호로서, 부활의 예수님과 아브라함 자신의 부활 후의 영생의 의미가 반영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 후에”라는 것은 이전의 모든 약속과 시련 후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고 여러 날을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지내며 기다린 후를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의 시험받음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 대한 확증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인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대상은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셔서 사역을 완성하시며, 아브라함의 부활까지도 이루시는 하나님, 영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시고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삶 가운데 만나는 모든 환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이 엘로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명령과 약속의 충돌로 인해 불순종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엘로힘 하나님이 바로 약속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신앙 가운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령대로 죽음의 길을 걷는다 해도,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의 영광 가운데 서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의 대상 되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들을 대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5.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시험하시는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먼저 그를 불렀습니다. “부르시되”로 번역된 “아마르”라는 단어는 밤에 현몽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에 아브라함이 경험한 바와 같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이 한 단어의 부름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부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던 아브라함에게, 그분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 부름은 그의 마음에 새로운 도전을 준 부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 놓고 부르며, 예배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판단에 의해 기쁨을 누리는 상태였습니다. 그때까지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자라는 충만함이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정서적인 상태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와 닿는 부름의 목소리는 아브라함에게 소망을 주는 부름일 수도 있다. 또한 낙담케 하는 부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름은 참으로 긴장된 순간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들려지는 부름은 두려움을 더하게 합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부름은 소망을 더하여 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부름이 들려질 때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여 왔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준비된 아브라함에게 들려진 부름은 아브라함에게 산 소망을 주기에 충분한 부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벧엘 동편 산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처음 부르며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이제 순례의 길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순례의 끝이라고 여기며 정착하기를 원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들려지는 또 한 번의 부름은 어쩌면 아브라함의 인간적 정착 심리에 폭탄을 던지는 듯한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준비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부름에 민감하게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미 준비된 상태에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또 다른 순례의 길일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하며, 삶의 터전에서 고백하며, 준비되어 온 아브라함은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대로 믿음으로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삶 속에서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경험을 하며 살지 않는 자에게 이런 부름이 내려진다면, 그는 분명히 귀를 막기를 원할 것이고, 눈을 돌리길 원할 것입니다. 또는 통곡하며 자신의 죄악된 모습, 불순종의 모습, 더러운 모습을 보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합당하게 살지 못한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응답에는 그러한 모습이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며,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 드릴 수 있는 응답이었습니다.
6. 부활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름에 담대하게 응답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응답은 보통의 응답이 아닙니다. 정확히 원문대로 당시의 상황을 넣어 번역하면 “보십시오,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보라(behold)”라는 단어의 번역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감탄사 뒤에 접미사가 붙어서 사람을 지적할 때 사용되는 문투인, “보십시오,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의 의미입니다.
이 응답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 상태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자의 담대한 응답입니다. 이것은 교만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 주어지는 담대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있는 상태 그대로 응답하였습니다. 담대함이 있는 응답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면하며,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담대한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한마디 응답 속에 아브라함의 모든 준비 상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지시와 명령이라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준비가 되어진 상태를 드러내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러한 아브라함을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준비를 확증해 주기 위해서 시험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이루어 주시고 동행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미래적인 소망이 있기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부활을 보장받은 자가 지니는 미래적인 소망의 강한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지금 응답하는 위치에 섰으며, 미래에도 부활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십시오,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답변할 수 있도록 부활의 소망을 지닌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삶을 위해 우리 생각대로의 삶을 버리는 고통을 감수한다면 하나님의 부름에 담대히 응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부활신앙 가운데 응답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름에 담대하게 응답하게 합니다.
7. 부활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시험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경멸받고 저주받아야 할 이방 풍속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이삭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놀라고도 남을 만한 큰 사건입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게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하고자 했던 브엘세바에서 당장 쫓겨날 수도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닌 명령입니다. 사람 중에서도, 바로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았다고 생각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통하여 대대로 이어질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자손을 다시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말에는 빠져 있으나, 하나님은 명령을 하시며, “이제”라는 감탄사를 사용하십니다. 이 감탄사는 정중하고 간절한 부탁이나 애원, 간청, 혹은 권고, 충고, 훈계를 나타내는 “자! 제발”의 의미이며, 기원을 묘사하는 명령형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 후에 나오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그만큼 간절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 대해 반복적인 수식어를 달고 있습니다. 바로 반복적인 수식어처럼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이삭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들, 너의 사랑하는, 너의 독자”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부연 설명합니다. 이삭은 다른 사람의 아들이 아닌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노년에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기에 아브라함의 모든 사랑이 집중되었을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그렇게도 사랑하던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아픔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때일 것입니다.
그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입니다. “독자”라는 단어는 “유일한 아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 용법을 보면, 친척이나 친지도 없는 무녀독남의 유일하게 낳아진 아들을 뜻하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배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이삭을 향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두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독생자이심과 부활의 주이심에 대한 표현에만 사용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에 대한 본문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히 11:17에서 이삭을 예수님과 동일한 표현으로 “독생자”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독자”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단어임을 알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독생자”이셨듯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독생자”였으며,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독생자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독생자라고 번역한 단어를 이삭에게도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치는 사건과도 같은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 아들은 기적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미래가 이 아이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속자요, 열국의 희망이었습니다. 독자로서, 그리고 그토록 놀랍게 주어진 아들이었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묘사하는 연속적인 용어의 사용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그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상기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이라는 단어는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사랑하게 되어 푹 빠진 상태를 묘사해 주는 결과 완료이기 때문입니다.
연속적인 용어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메시야인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와 같습니다. 즉 이 독자는 “비길 데 없는, 그리고 유례가 없는” 아들이란 개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중심은 독자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변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증하기 위하여 시험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독자”라는 반복적 표현을 통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이 가장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산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요구하실 때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는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확증하고자 하는 시험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실 때 약속대로 돌려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어놓은 그것을 부활의 증거로 삼아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예전의 모습이 아닌 부활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돌려주십니다. 이삭처럼 자녀를 돌려주시고, 욥처럼 자녀와 물질을 돌려주시며, 요셉처럼 명예와 권세를 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축복을 위해 부활신앙을 요구하십니다.
8. 부활신앙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확증된다.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게 모르게 소유권을 주장하며 살아 왔던 유일한 대상이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는 유일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실제 그러한 삶을 사는지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시험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확신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자인지, 그리고 그러한 믿음 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지를 확증하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낳은 독생자,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창 22:2의 “데리고”를 직역하면, “손으로 취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삼아, 그를 끌고 성전을 향해 가듯이, 데리고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땅의 산들 중 한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칼로 죽이고, 불로 태워 죽이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의 연속 중 단 하나도 납득할 수 없고, 시행할 수 없는 듯한 명령입니다. “취하라”는 제물로 쓰이는 동물을 손으로 취하듯이 취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취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산에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한 산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뽑으신 산으로 세겜에 있는 모리아산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땅의 산입니다. 예루살렘 산간 지방을 일반적으로 일컫는 이름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의 거리는 약 80km 정도로, 삼일 길로 표현하였습니다. 대하 3:1에 보면, 모리아산은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 본 곳이며, 솔로몬의 성전이 건립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의 “지시한” 산들 중의 한 산 위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지시하는”은 강력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모리아는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 또는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장소”를 뜻하는 지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리아 땅의 산들 중의 지시하신 한 산을 지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곳뿐 아니라,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장소로 이미 택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삭이 죽을 장소를 지정하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을 그 장소를 지정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한쪽 산 위에 이삭이 죽을 제단이 세워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모리아산은 하나님께 대한 골고다 언덕(요 19:17-18)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갈보리 산(골고다)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이끄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지시하신 모리아산으로 이삭을 희생 제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보리 산인 모리아산은 여호와의 산이었습니다. 이 산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입니다. 갈보리 산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처럼, 모리아산의 이삭의 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리아산은 부활신앙을 지닌 아브라함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목격하고, 체험케 하여 확증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입니다.
우리들도 모리아 땅의 한 산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시는 장소, 하나님의 성전인 장소에서 부활신앙을 확증 받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던 모리아 땅의 한 산처럼, 하나님의 성전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통해 날마다 부활신앙을 목격하며, 체험하며, 회복해 나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부활의 감격 속에 안식 후 첫 날인 주님 부활의 날에 모여 예배하며, 교제하며, 부활신앙을 삶 속에 적용해 나갑니다. 주일에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그 한 산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로 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9. 부활신앙은 미래적 소망을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번제”라는 히브리어 단어 “올라”는 “올라가다, 오르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이유는 그 제물에서 나오는 연기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번제의 제사는 제물을 부분적으로만 태우는 다른 제사와는 다릅니다. 오직 번제만 완전히 태워졌습니다. 부분적으로 태워서 나머지를 제사장들이나 예배자들이 먹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동물 전체가 제단에 올려져서 전부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즉 번제는 전체가 드려지는 “완전한 제사”입니다.
여기서 번제가 “태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 전체 피조물을 “바친다”는 사실에 부수 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세 이후의 자료를 통해 “번제”의 제사 제도를 유추해 보면, 번제는 예배자가 희생 동물을 가져와서 그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이 희생 동물을 가져와서 죽이고 피를 단 사면에 뿌렸습니다. 예배자는 그 희생 동물의 껍질을 벗기고, 씻고, 여러 조각으로 각을 뜨는 일을 하고, 이것을 번제단 위에 놓고, 제사장의 중보로 불에 태워 올렸습니다(레 1장; 레 6:8-13; 8:18-21; 16:24).
번제가 제물 전체를 태워 바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의 완전한 헌신, 즉 성별 됨을 의미하며, 그와 동시에 완전한 파괴를 뜻합니다. 원래의 짐승 중 남는 부분이 전혀 없이 모두 불로써 파괴되는 것이 예배자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자는 죽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그 짐승의 대속적 역할 덕분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살아남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희생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파괴, 즉 완전한 멸망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번제의 제사는 일반적으로 제사를 통하여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준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실 것이라고 보는 의미에서입니다. 즉, 구약의 번제물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드려야 할 “번제”는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참으로 끔찍한 제사입니다. 동물로 드린다고 하여도 끔찍할 정도이기에 죄를 저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자기의 독자를 이렇게 죽이고, 씻고, 각을 뜨고, 태워서 전체를 드리라는 명령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기이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코자 한 것입니다. 명령하시는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마다 하나님의 시험이 담겨 있습니다. 자칫 눈을 돌리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명령들이었습니다. “취하고”, “가고”, “지정된 곳에서”, “번제로”, “드리라” 라는 명령 그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조금이라도 동원되면 결코 따를 수 없는 명령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이 시험을 감당할 자로 택하여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이러한 시험을 맞이할 준비가 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 명령을 받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을 훈련시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에 믿음으로 따라온 아브라함에게 마무리 시험을 하십니다. 이미 이루어진 자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이 바른 것인지 확정시키기 위한 검증의 시험입니다.
“드려라”라는 단어도 “올라가다, 오르다”의 뜻인 히브리어 “올라”라는 단어의 명령형으로서, “(예물을) 위로 가져오다”,“(예물을) 바치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피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속성(창 9:4-6)에 어긋나며, 거듭된 약속 속에서 겨우 받은 유일한 “약속의 씨”인 이삭을 다시 데려 가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창 17:5-6)과 모순 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모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의 양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놀라지 않은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올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미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미래의 소망을 번제물로의 저주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의 독자이며, 소망의 목표이며, 생명 자체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포기는 당시의 주변국의 풍습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단순한 한 인간의 제사가 아닌 미래적 소망의 근원에 대한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래적 부활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삭의 제물 됨에 대해 아브라함이 놀라지 않은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부활신앙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부활신앙으로 준비된 자였기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드림에 의해 이루어지며, 자신의 모든 미래적 소망을 이분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자에게 임하여집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미래적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께만 두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들을 영원한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 날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는 삶, 번제의 삶이 되며,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을 지난 자로서 자기 생각대로의 삶을 버리는 고통의 훈련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환경 가운데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확증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기에 언제나 부활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담대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몸 된 교회 속에서 부활신앙을 경험하며, 모든 미래적 소망을 완전히 예수님 두며 영원히 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