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예종(睿宗)을 이어 즉위한 현종(玄宗)은 연호(年號)를 “개원(開元)”이라 고친
뒤에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齡)과 같은 어진 인재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여파로 혼란에 빠진 국가를
안정시키고 30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개원지치(開元之治)”이다. 개원 연간 동안 현종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의 상소가 올라오면, 그 가운데 긴요한 것을 골라 황금으로 장식한 상자 속에 넣어 두고 수시로 꺼내 읽으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즉위한 지 30년이 되어 연호를 “천보(天寶)”로 바꾼 뒤로는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국정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이임보(李林甫), 양국충(楊國忠)과 같은 간신(奸臣)들이 국정을 농간하더니, 양귀비의
양자(養子)가 되어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절도사(節度使)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순식간에 장안(長安)을 점령하였다. 결국, 현종은
목숨만 부지한 채 지금의 중국 성도(成都)인 서촉(西蜀)으로 허둥지둥 피난하고 나라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 시는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文人) 이규보가 당나라 현종의 일을 소재로 삼아 지은 것이다. 현종이 “개원지치”의 훌륭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신하의
간언(諫言)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귀감(龜鑑)으로 삼아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도성을 빼앗기고 백척간두(百尺竿頭)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은 더 이상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잘못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감계(鑑戒)”라는 말은 일의
성패(成敗)나 잘잘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역사에서 성공하고 잘한 행위만을 자랑스러워하고 패배와 잘못은 숨기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발전을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성공을 자부하고 안주하는 데서 발전하기보다는 과거의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고치는 데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고칠 것이며,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겠는가. 『논어(論語)』에 나오는 “나는 하루에 세 가지
일을 가지고 나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라는 말도 나의 과오를 반성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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