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오셨다
<고생 끝에 얻은 깨달음을 지금 또 어떻게 설할 수 있겠는가. 탐욕과 분노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진리는 미묘하고 심원한 것이기 때문에 탐욕과 암흑으로 뒤덮여있는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아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후 하신 말씀이다. 비록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이 심오하고 끝없는 진리를 어떻게 중생에게 설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마지막 고뇌다. 다 깨달았어도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부처님 개인의 철학적 문제고 내관(內觀)의 문제라 세상의 이치를 어떻게 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부처님은 이 점에 착안하여 온전히 깨달았다한들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걱정을 하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절반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늘 말하고 나면, 당시에는 그럴 듯하게 잘 했다고 자찬했건만 하지 못한 말,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이 너무 많이 남아 아쉬움을 더한다. 피차 가치관[내관]의 문제는 간섭하기 어렵다. 서로 환경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어떤 이는 학문조차도 이롭다 하고, 어떤 이는 해롭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워 행복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재물이 창고 가득히 쌓여도 부족하다 한다. 하물며 생각이 다른 바에야 행복이고 불행이고, 만족이고 불만족이고가 어디 그리 쉽게 이해되고 합의되는 문제인가.
이때 ‘세계의 주재자’인 범천(梵天)이 ‘이 훌륭한 깨달음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설할 것을 권하고 부처가 이를 따르게 된다. 범천이 부처 앞에 나타나 이를 권했다는 것은 불교에서 최고의 신인 범천을 부처보다 아래에 둠으로서 부처를 우러르게 할 의도가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범천은(梵天)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天部) 중 하나이니 인간으로 태어난 부처와는 비길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런 신이 부처의 깨달음을 그런 이유로 묵혀둘 수는 없다고 나서서 부처가 비록 인간이기는 하나 ‘깨달음을 얻은 우월한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신이라고 해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도 있고, 알지 못하는 것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범천의 격려에 힘입어 설교를 시작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다. 불기로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지 꼭 2561년이 되었다. 말하자면 무려 2000년하고도 500년이 지나는 동안 중생을 구도하느라 애쓴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을 꾸려 올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한 사람의 깨달음이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사바세계에 파문을 일으켜 경종을 울리고, 정화에 정화를 거듭한 것이다. 그 파문은 시시때때로 일어 인간의 땅을 불교정토로 이끌고 있다. 불교정토건 기독교정토건 목마름에 필요한 것은 물이지 그 물이 어디서 솟았는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물이 어찌 한 곳에서만 솟겠는가.
어렸을 때는 울긋불긋한 등도, 반짝거리는 전구도 모두 무섭고 싫더니만 그 불빛이 모두 진리로부터 시작된 불빛이며, 진리로 이끄는 불빛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불나방이나 된 것처럼 반갑기만 하다. 마침 연휴이기도 하고 어버이날이 낀 덕분에 딸 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근처에 있는 소요산을 둘러보자고 하는데 그곳에 자재암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니 절터에 낀 이끼만 보아도 고개가 숙여진다. 불심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 산보삼아 가는 길인데 ‘부처님 오신 날’과 겹쳐 차나 댈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말이 빗나갔지만 부처님은 드디어 “나는 일체를 깨달은 사람이다. 일체의 사물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망집(妄執)에서 벗어난 해탈(解脫)자이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정각(正覺)자이다. 모든 번뇌를 버린 사람은 나와 같이 세상의 승리자이다. 미혹의 세계에서 감로(甘露)의 북을 치며 법륜(法輪)을 굴리기 위해 나는 바라나시의 거리로 향한다.”고 일갈하고 대중설법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도 어려우니 이를 어쩌랴! 말씀도 어려운데 행함이야 오죽하랴. 깨달음이란 주관적이어서 논란의 여지도 있고, 온전히 전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인간의 말주변이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 전했다고 하나 알아들었는지도 확신키 어렵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말을 자제하고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입이 가만히 있지를 않아 늘 말썽이다. 언제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요(마태복음 15장 11절), 문젯거리가 되는 것이다.
삶이 무슨 대수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살아보니 이것인가 하면 저것 같기도 하고, 여긴가 하면 거기가 맞는 듯하고, 슬프다 했건만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요, 즐거운듯하지만 근심이 연 걸리듯 끝이 없다. 말로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무슨 그릇에 무엇을 얼마나 담았기에 모자라고 넘침을 말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부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도 거기서 거긴데 이교(異敎) 운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남이야 뭘 믿든, 뭘 먹든 상관할 일이 아닐 바에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아무려면 부처나 예수와 같은 인품과 능력을 갖추기야 하겠는가. 두루 존경받아야 할 인물을 두고 우리끼리 편을 나누고 그 편 중에서 다시 편을 가르는 미숙함이 세상을 그르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손자를 안고 부처님께 빌었다. 이 어린 것 그저 건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말이다. 혹시 목사인 제 아비나 어미가 듣기라도 했다면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할아비의 소망은 누가 들어주건 손자가 무탈하게 자라는 것뿐이다. 그 연후에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깨닫고 행동하는 한 인간이 되겠지만 부처님도 고심하신 일을 평생을 덜 깨우친 채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어찌 알아 바르게 행하겠는가. 제 스스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행하는 일이 될 것 같기도 한데 부처님은 웃으시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다. 살아보니 그렇게 느껴진다.
요새 와서 느끼는 바지만 삶이란 게 그러다 마는 것이지 뭐가 특별히 되고 안 되고 할 것도 없다. 물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보면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 삶도 아이 낳아 잘 키우고, 남과 사이좋게 살며, 하루 세끼 먹는 것을 보람으로 알아 감사하고, 남들과 다투지 않으면 훌륭하게 산 것인데 그게 한 가지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이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인 줄 알아 안달복달했고, 세끼를 충분히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밖에 더 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았으며, 남들과 다투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툼은 회오리바람처럼 일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욕심이 과한 덕이었고, 이해나 배려도 하지 않았으며, 좋은 수저로 기름진 음식을 먹되 좋은 집에서 그러하기를 바란 때문이었다.
아직도 손의 경건함을 믿어 음식을 손으로 먹는 이슬람국가 사람들이 덜 행복하고 야만적이라 할 수 없다. 좋은 집에서 좋은 식기에 식사를 한다고 해서 더 행복했다거나, 즐거운 삶이였다거나, 후회 없이 잘 살았다거나, 남들로부터 존경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았건 삶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만 한다. 어떻게 살았건 아무 제약 없이 단걸음에 넘을 수밖에 없는 문턱이 아닌가. 그것은 권력의 문이나, 부를 쌓아두는 곳간의 문이나, 명예의 전당보다도 더 들어가기 쉬운 문이다.
부처님의 노고를 치하하지만 그 깨달음을 이어받지 못해 속이 상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하기는 그래서 당신도 깨달은 후 어떻게 중생에게 전해야 하나 하고 고심하셨던 것일 테니 들어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밖에 나가 꿈지럭거려야 하루 사는 사람들이 불경이며, 성경이며, 코란을 들고 매달려 공부하기는 어렵다. 대충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종교인은 많아도 그 진리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 사람은 드물다. 사는 것이야 거기서 거기다. 부모가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종교가 그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는 것은 혈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부모가 자식 가르치듯, 자식이 부모에게서 배우듯 살면 그것이 곧 종교적 삶이요, 종교가 원하는 삶이 아닌가 한다. 믿음을 갖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연약하고 완전하지 못하니 기댈 담도 때로는 필요하다. 어떤 종교가 되었건 인간을 미혹하지 않게 하고, 교만하게 하지 않는다. 바른 길로 이끄는 종교라면 비타민이 어느 채소에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참된 삶 또한 그것 때문에 건강해지는 것이다. 자재암 가는 길이 불자들과 관광객이 어울려 붐빈다. 오늘만은 너나 할 것 없이 불법정토로 향하고 있으리라.
‘탐욕과 암흑으로 뒤덮여있는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부처님 근심어린 말씀이 귓속에 쟁쟁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말씀이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오늘만큼은 중생이라 해두자-얼굴이 거기서 거긴 것을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당신 말씀 맞다나 설법하기가 난감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범천의 말 맞다나 알아듣건 말건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누구 말이 옳건 탐욕과 암흑으로 뒤덮여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부처님 말씀은커녕 알면서도 걷히지 않는 탐욕과 암흑으로부터 내 마음 바로 하기도 힘이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