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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데로 가는 교회
욥기 38장 1- 10절, 누가복음 5장 1- 11절
한 문 덕 목사
[두 가지 길]
1873년,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한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양피지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디다케”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제목으로 보았을 때, 열두 사도들의 교훈이 담긴 책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100년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편집한 규범서입니다. 이 책 덕분에 100년경의 작은 시골교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신앙의 지침과 교회 예식들, 교회의 규범, 예수의 재림 등 교회 전승들을 모아 만든 교회의 규범서입니다. 그리고 이 규범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과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길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Ὁδοὶ δύο εἰσί, μία τῇς Ϛωῇς καὶ μία του θανάτου, διαϕορὰ δὲ πολλὴ μεταξὺ τῷν δύο ὁδῷν.)
우리교회도 교회의 운영과 활동에 관한 정관이 있고, 정관을 보면 생명사랑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무엇을 추구하는 교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교회의 내규인 정관에 따라 살기로 다짐하며 생명사랑교회 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100년경의 시리아 지방의 작은 교회에서도 이 규범서를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세워 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 살아가는 길을 딱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또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런 이원론적 구분방식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애매모호함이 없습니다.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예레미야 21:8)도 이것이었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설교합니다.(신명기 30:15이하)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9)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에게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요청하는 것도 하나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작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만, 인생의 가장 큰 선택은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를 고르는 일입니다. 이길 저길 헤매지 않고 내 인생에 오직 한 길만 남겨 두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들어가려면 한 번 큰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 결심 없이는 믿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절대적 자유도 맛보지 못하고 참 생명의 물줄기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평안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하고 나하고 결판을 내는 일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나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인가? 내게 주어진 하늘의 사명은 무엇인가?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평생을 돈 버는 기계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목숨 부지하려고 아귀다툼 하면서 땅 한 평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삶인가? 한 평도 안 되는 땅에 빈손으로 묻힐 거면서, 뭐 그리 많이 차지하겠다고 움켜쥐는가? 한 줌의 재로, 바람 불면 흩날릴 티끌로 돌아갈 거면서 뭐 그리 으리으리한 것을 얻어 보겠다고 애를 쓰는가?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그만인 만족한 돼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가서 내 인생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신앙과 믿음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설렁설렁 한 것이 아닙니다. 대충대충 하는 것 아닙니다. 정말 이 한 몸 전체를 바쳐서 따져 묻고 도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의 주인공인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고(욥 1:1) 성서는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이 닥쳤을 때 욥이 어떻게 합니까? 허무에 빠져 모든 것이 부질없다면서 인생을 포기합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는 아내의 말에 순순히 넘어가서 하나님 없다고 배신합니까? 욥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생명을 택하기 위해 고통과 고난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동시에 욥은 기존의 상식이었던 인과응보의 가치관에 항거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심한 고통 속에서도 죄 없는 자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며 정정당당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부르짖습니다. 오로지 하나님하고만 대면하여 이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친구들의 충고도 소용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없는 종교는 가짜 종교이고, 생명 없는 진리가 거짓이듯이, 하나님 없는 생명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욥은 하나님과 깊은 씨름에 들어갑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그러했듯이, 답을 얻기까지 절대 놓지 않습니다.
욥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욥과 대면해서 마치 논쟁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바로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그 물음에 대장부처럼 답변하겠다고 나서는 길이 신앙인의 자세이고, 그럴 때만이 욥처럼 주님을 눈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42:5)
[주님을 만난 베드로]
이제 베드로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자마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번째로 부름을 받은 제자는 두 집안의 형제들입니다. 하나는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또 한 집안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고기 잡는 이들을 발견하였고, 그들에게 다가가 제자로 부르자마자 이들은 그물과, 부모와 일꾼들을 내버려두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말씀만으로는 베드로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도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누가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와 말씀들 그리고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하게 정리해서 로마의 관료인 데오빌로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좀 더 자세히 적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고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모든 유대인들은 위대한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국가적 수치이자, 굴종적인 삶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의 식민지라는 것은 종교적 모욕이자 삶의 의미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영적인 갱신을 외치며 대중들을 이끌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의 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함께 동참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있었습니다.(요 1:35-42, 특히 40절 참조)
아마도 예수님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한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들로 서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처형된 뒤, 세례 요한의 운동을 누군가가 이끌어 가야 했을 것입니다. 헤롯과 로마 당국은 반란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례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을 해산시키고, 중요한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들을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던 안드레는 자신의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고, 예수님 또한 나사렛으로 가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기 시작하자(마가 1:14), 안드레는 이제 새로운 지도자인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합니다(요한 2:40-41). 그리고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어쩌면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지도자로 스승으로 모실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누가복음과 같은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배를 내어 주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반한 첫째 사건은 바로 예수님께 배를 내어주고 나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빌려 뭍에서 조금 떼어 놓고, 거기에서 호숫가에 앉은 무리들을 가르치십니다. 어떤 내용의 말씀이 펼쳐졌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하여 산상수훈이나, 비유의 말씀, 또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등이 펼쳐졌으리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데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전문가이고 예수님이 초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 베드로를 움직일 만한 근본의 말씀, 존재를 흔드는 말씀이 들어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깊은 말씀으로 인해 베드로는 자신이 밤새도록 애를 썼어도, 그래서 오늘은 고기를 더 이상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다시 한 번 그물을 던지러 나갑니다. 그리고 결과는 여러분이 모두 아시는 대로 입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으로 고기를 가득 싣게 되었지요. 베드로의 배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도 고기가 가득 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을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자신과 평생 함께 할 제자로 부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그 배를 고기와 함께 뭍에 내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가 된 첫 단계에 베드로가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배를 예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 베드로는 이미 제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그 배야말로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배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저 그물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호수로 걸어 들어가 그물을 던지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배가 있습니다. 오랜 투망질로 벌어들인 돈을 모아 배를 샀거나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배에는 베드로의 모든 꿈과 추억,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함께 하였고, 그 배로 가족을 먹여 살렸을 것이고, 심지어 장모님까지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그 배를 예수님께 내어 드립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그냥 가버리면 배를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고 맡깁니다. 베드로가 맡긴 바로 거기에서 말씀이 울려 나옵니다.
이 첫 장면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생명을 얻는 일은 자신이 밥줄을 생명을 주실 분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배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밥줄이 끊기게 됩니다. 자신의 밥줄을 믿고 너무 욕심 부리다가는 그 욕심으로 잠깐 부유함을 맛보겠지만, 곧 그 부와 함께 밥줄도 끊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맡기자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지만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알게 됩니다. 배가 더 이상 나의 밥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기에 가득 실려 있는 물고기가 내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신앙은 결단입니다.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길 때 내 욕심으로 망칠 내 인생이 결실로 가득 찰 뿐만 아니라, 육신의 결실을 좇던 삶에서 거룩한 영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 길로 가는 첫째 일은 바로 자신이 밥줄로 삼았던 그것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그 밥줄에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베드로!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다]
두번째 베드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어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거나 목수의 아들이며, 기껏해야 농사를 좀 지어본 사람일 것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로부터 대략 35km나 떨어져 있고, 차로 달리면 40분 정도 걸리고 언덕보다 훨씬 높은 마을도 세 개나 지나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지형이나 생태환경을 잘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갑니다. 그런데 그 가는 곳이 “깊은 데”입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을 정말 호수가 깊은 곳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가보지 않았던 곳, 베드로가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굳이 가야할 이유가 없었던 곳, 아니면 전문가라고 해도 넘기 어려웠던 한계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교인들에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곳은 어디입니까? 제가 여러 모양으로 말씀드렸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그리스도교의 깊은 진리의 바다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유교적 습관으로 일상을 살다가 죽은 이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나 천당을 꿈꾸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불러서 액땜을 하고 복을 비는 형식에 익숙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어도 점집에 가고, 유교적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불교의 극락세계나 아수라 지옥 또는 천당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깊은 데는 커녕 깊은 데 근처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정말 그곳으로 나아가 잡아야 할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더 깊은 데로 나가야 합니다. 개인의 안위를 바라는 자리에서 역사와 사회가 원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유익을 바라고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질적 축복만을 꿈꾸지 말고, 높은 정신의 경지에 이를 희망으로 부풀어야 합니다.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일개 무당처럼 여기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천국 가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것을 교회당이나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 씨앗을 잘 키우면 우리는 창조주가 하실 일들을 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아끼고 사랑하여 돌보시듯이, 우리 또한 그러하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써 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셨듯이, 우리 또한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우리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씨앗은 아직 자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의 후손이 아니요, 어둠의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불씨가 모든 생명을 북돋게 하는 태양이 될 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약 21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가 있습니다. 2008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19살 스웨덴 청년 ‘미카엘 에크발’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장실에 빨리 가야 할 것 같은 강한 신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화장실로 직행하는 대신, 그대로 바지에 실례를 한 채 계속 달렸습니다. 계속되는 복통과 설사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결국 완주를 합니다. 결과는 21위! 그의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되었고, 이후 그의 별명은 “똥 싼 남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레이스를 마친 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화장실에 가지 않고 계속 달렸나요?” 그러자 미카엘 에크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번 멈추면, 또 그 다음에도 멈추게 되기 쉬워요. 그러면 습관이 될 거예요.” 에크발은 이듬해 같은 대회에 출전해 9위를 기록하고, 2014년 3월 덴마크에서 열린 하프마라톤 대회에서는 스웨덴 신기록을 세웁니다.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 스웨덴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2016년 올해 열리는 브라질 올림픽에 스웨덴 국가대표로 나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달려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출처] 똥싼남자, 미카엘에크발, 마라토너이야기 - 2016년 3월 6일 일요일 여행을 떠나요 5부 "사색으로 떠나는 여행", 작성자 방송인 최진)
우리가 달린다면 바람을 맞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바람이 무서워 멈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을 가르며, 오히려 바람을 즐기며 계속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달려 나갔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 한 번 설교에 3천명씩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켰으며, 스스로 죄인임을 알았던 그는 결국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베드로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아니라고 여기시는 분이 계신다면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씨앗입니다. 이제 곧 큰 나무로 자라고 거기에서 결실을 따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 우리는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에 동참시키시고, 더 깊은 데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이곳에 세우셨으니, 우리 또한 이곳에서 할 일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도자를 세우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모든 일들이 사람을 얻고 당신의 몸인 참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며, 희망을 간직하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옥토에서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줄로 믿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그물을 내리고 생명의 열매를 얻으려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