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Lucy의 진화 외 4편
주경림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어머니,
루시의 인체뼈 모형 옆에 나란히 서 보았더니
루시의 키는 내 허리춤에서 조금 올라온다
루시의 가슴은 얼기설기 엮어진 새장을 닮았고
자궁은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 같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나무타기 하느라
빗장뼈가 야간 솟아올랐다
실은, 풍만한 젖가슴과 커다란 엉덩이를 가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상상했었는데
고작 110cm의 키에 몸무게 29kg,
나비 날개 자궁에서 인류가 쏟아져 나왔다니,
에티오피아 하다르 사막에 살았던 루시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직립보행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잘 살아남았다
이제, 가상인간 ‘루시’로 모델도 되고
홈쇼핑 쇼호스트로 얼굴을 내밀며
몸값을 높이는 중.
새점을 보다
대문 앞에 쌓인 함박눈을 쓸다
목련 우듬지 위의 곤줄박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하늘 향해 까만 부리를 열어 움찔움찔했다
그리고는 포르르 날아올랐다
꼬리 깃털이 펼쳐지며 나무초리를 흔들어
후드득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내 앞까지 굴러온 눈송이는
곤줄박이가 하늘에 물어보고
허공에서 뽑아준 64괘중의 하나,
목련눈꽃송이를 조심조심 열어보았다
“겸허하면 만사형통 하리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데
이내 눈꽃송이는 내 손바닥에서 지고 말았다
눈 쓸어낸 자리에
복채로 찰보리쌀 한 줌 뿌려주었다.
구름문양청자햇무리다완
초가을 이른 아침, 청옥 하늘이 눈부셨다
그때, 하늘 한 자락이 쑤욱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두개골 속으로
새털 구름조각도 요리조리 따라 흘러왔다
오래전에 닫혔던
정수리의 숫구멍이 다시 열린 것일까
이런 일은 처음인데
찰랑찰랑 담긴 하늘이 쏟아질라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때마침, 동쪽하늘에서 막 피어오른 햇귀가 달려와
빛살 한 가닥을 꿰어
숫구멍을 재빨리 시침질 해주었다
하늘을 담은 구름문양청자햇무리다완
새 이름을 얻었다.
허튼 층, 허튼 일
서울 도성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돌들이
레이스 덧댄 치맛단으로 물결친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안에도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둥근 돌이 쌓였다
그러다 작은 돌 하나라도 빠지면
와르르 무너졌다
주섬주섬 허튼 층을 쌓으면 또 무너지고
무너지면 또 쌓았다
돌들의 틈새에서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고
담쟁이는 푸른 댕기를 늘어뜨렸다
화살 겨누던 구멍에는 거미가 집을 지었다
지킬 것이 없으니
무너질 성도 무너질 마음도 없다
메주덩이처럼 제멋대로 생긴 돌
옥수수알처럼 가지런한 돌
정방형 돌, 새로 쌓아 낯빛 하얀 돌들이
레이스 덧댄 치맛단을 흔들며
산등성이 따라 물결치며 올라간다.
사슴 모양 뿔잔 토기
눈매가 천진한 사슴이 뒤를 돌아보며
“주인님, 제 등에 오르세요.”
쫑긋한 귀에, 뿔이 없어 더 착해 보이는
사슴 표정에 그만 끌리어
등어리에 내 영혼을 올려 태웠다
그러자,
나를 태운 사슴이 달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붙어있던 짧은 꼬리가
위로 들렸다가 내리치면서 속도가 더 빨라졌다
사슴 등 위의 V자 모양의 뿔잔이
날개로 펼쳐졌다
함안 말이산 정상, 아라가야의 45호 무덤에서
나를 태운 사슴 모양 뿔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 별자리가
오늘 밤에는,
날개 펼친 사슴 별자리로 보인다.
주경림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2년 『자유문학』 시 당선
시집: 『풀꽃우주』 『뻐꾸기창』 외 2권
시선집: 『무너짐 혹은 어울림』 『비비추의 사랑편지』
한국시문학상, 중앙뉴스문학상, 한국꽃문학상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