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통증을 관조하는 시 그리고 시인
-허이서 시인의 신작시 「성호를 긋다」외 4편에 대하여
임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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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시인에게 고통은 시적 원천이 될 수도 있겠다.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내면의 궁핍이나 가난이 야기하는 생의 고통이야말로 시적 재료이면서 주제의 원동력이 되는 모양을 우리는 비근하게 목도하곤 한다. 거기에 더불어 정치적 역사적 이념적 정황이 가미되면 시인의 고통은 사명이 되고 진리가 되고 순교가 된다. 「자화상」에서 던진 “애비는 종이었다”와 같은 충격적인 구절은 서정주의 거침없는 위악적 자기 노출이었다. 가계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매우 일탈적이지만 시적으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일명 ‘저주받은 시인 증후군(?)’의 계열에는 서정주나 오장환을 위시하여 이성복, 최승희 등으로 이어지고 작금에 이르러 황병승, 김민정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수많은 문학도들의 자폐적인 철부지 성향의 습작에서도 강렬한 자기비하의 시를 통과의례처럼 쓰는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정주나 이성복이나 김민정 같은 시인들의 가학적 자기비하는 시적 진정성이라는 아우라가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어 어느 정도 문학적 미학성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이서 시인의 신작 「호한조」, 「꽃그늘」, 「성호를 긋다」, 「돌 속의 심장」, 「푸른 첼로의 족보를 펼치다」는 ‘저주받은 시인 증후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비하를 통해 스스로의 열등감과 빈곤함, 생의 감각에 대한 궁핍 등을 시적 제재로 내세운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다섯 편의 시는 그대로 시인의 시세계를 쌓아올리는 초석으로 읽힌다. 시인과 시를 동일시하는 것에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이번 허이서의 시편들은 출발하는 시인답게 세상으로의 출사로 읽을 여지가 있어 시와 시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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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에 가면 입들은 행복이 넘친다
…중략…
늦은 밤 동창회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세상 하나뿐인 모양과 빛깔로
험한 골짜기 어렵사리 핀 나만의 꽃이
시들시들하더니 이내 꽃잎을 닫는다
그들의 입이 함빡 피어 올린 꽃그늘 아래서
-「꽃그늘」 중에서
허이서 시인은 서정시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하다. 어느 시인은 자연물에 동화되어 전통 서정에 이입하길 강요하는가 하면, 어느 시인은 극한 체험을 통해 선도자적 선동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기본 됨됨이는 강요와 선동보다 관조와 사색에 있을 것이다. 허이서는 어떤 구도자적 문장을 추구하지도 않고 어떤 선도자적 선동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그는 “입이 함빡 피어 올린 꽃그늘”이라는 열등감과 궁핍 속에 그대로 선 채로 있다. 오히려 “꽃그늘 아래서” 유유자적 유영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치욕을 받아내고 설욕을 받아내고 열패감을 곱씹는다. 그리고 내면에 “세상에 하나뿐인 모양과 빛깔로” 핀 “나만의 꽃이” “시들시들하더니 이내 꽃잎을 닫는” 것을 가만히 관조한다. 스스로의 치부를 태연하게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비하의 미숙한 한 면모일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자아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관조가 되고 사색이 된다. “나만의 잎”을 시들게 한 것은 속된 동창들의 “입”일 것이나 종내에는 “입/잎”의 혼동에서 오는 내면의 허약성이 그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면의 허약성이 아니라, 내적 궁핍과 열등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바라보고 곱씹는 “꽃그늘 아래서”의 관조이다. 그리고 그 관조의 범위를 가늠하게 하는 단초를 이번 신작 중에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성호를 긋다」에서 찾을 수 있다.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왔을 땐
늘 그러하듯 十字였다
다시 구름을 허공에 풀어놓으며
못 박힌 것들의 통증을 배회하였다
-「성호를 긋다」 전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조’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관조적인 삶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지향적인 철학 개념이다. 미학에서는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봄으로써 미(美)를 직접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허이서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통은 자의식의 열등과 궁핍에서 비롯된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조’ 개념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고통을 원동력 삼아 창작의 삶을 채워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허이서 시인의 ‘고통’은 ‘행복’과 이음동의어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가감 없이 바라볼 수 있는가’에 대한 시적 사색이 허이서 시인의 중요한 창작론이 된다랄까. 자의든 타의든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왔을 땐” 시인은 “십자(十字)” 위에서 “못 박힌 것들의 통증을 배회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고통이 “통증”으로 인식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일말의 너저분한 변명이나 회한 같은 것은 없다. 시 자체의 절제와 간결함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인이 시인 스스로를 ‘관조’하는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내면의 열등과 궁핍을 관조할 수 있는 자아는 곧 자의식을 통찰할 줄 아는 자아이다. 보편적으로 자의식은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데, 허이서의 자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통증”, 즉 생활의 한 단면이 아니라 삶 전체에 “통증”을 가하는 어떤 불가해한 운명까지도 통찰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딴에는 “통증을 배회”하는 것 자체가 시인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제례의식처럼 보이게까지 한다.
아슴한 파장에 이끌려 앞에 서면
나 또한 돌의 세계
그 후부터 잡다한 생각이 넘치면 그에게로 가
나를 풀어놓곤 했다
몸속에 아무리 많은 하소연이 쌓여도
내색하지 않던 돌
비바람 치던 밤 추적추적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단단한 돌 속에 미세한 점 들로 찍힌
수백 년 전의 어느 시간이 꿈틀꿈틀 살아
천년 후 그의 몸 안에서 박동하는 것 같았다
아직 귀를 열지 못했는가, 나는
먹먹하기만 한 파장들
빗소리가 대신 소리쳐 울어주는 것처럼 들렸다
-「돌 속의 심장」 중에서
나는 먹구름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
…중략…
외마디 비탄으로 봉인되었던 푸른 묵음
여른 귀 커다랗게 열고 수면 위를 떠도는 새는
누구의 상처를 듣는 걸까
-「푸른 첼로의 족보를 펼치다」 중에서
“나 또한 돌의 세계”라 명명하는 것은 시인 내면의 민낯을 가감 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것은 “수백 년 전의 어느 시간이 꿈틀꿈틀 살아/천년 후 그의 몸 안에서 박동하는 것 같”은 “통증”을 “추적추적 울음소리를 따라”가듯이 관조하는 의식(儀式)의 일환이다. 그리하여 삶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통증”에 “여른 귀”를 “커다랗게” 여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자 진실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허이서 시인만의 시적인 본질이 된다. 가령, “내색하지 않던 돌”같이 “아슴한 파장”에 이끌리는 것이 결국 “아직 귀를 열지 못”한 “나”에 대한 직시이자 바로 봄의 “통증”이라 할 때, “나는 먹구름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되어 “여른 귀 커다랗게 열고” “누구의 상처를 듣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시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를 통해 “몸속에 아무리 많은 하소연이 쌓여도/내색하지 않던 돌”이 되기를 희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돌의 세계”인 시인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곧 가닿고자 하는 시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적 대상은 “수백 년 전의” “돌”이면서 “천년 후의” “박동하는” “돌”로서 시인의 오래된 미래 혹은 잃어버린 미래의 초상화 같은 시간성이 무화된 세계에 “나를 풀어놓는” 데까지 확장된다.
전설새 호한조는
몸에 털이 없는 벌거숭이여서
밤마다 옹송그려 덜덜 떨며 운다고 한다
지극히 가난한 나도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털이 없는 벌거숭이가 되기도 한다
처음엔 새벽을 깨워
간절을 뜨겁게 끓여보고
가능성을 향해 셀 수 없는 집중을 쏘아댔다
…중략…
99도 이하에서 끓다가 식어버리는 생각을
더 펄펄 끓여 익혀보려 했지만
미치거나 못 미치거나 설겅거리기만 했다
나는 비굴과 요령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펄펄 끓인 열망으로
실패하면 생각을 지피고
또 실패하면 의지를 세워
밤마다 시간을 풀어냈지만
진전은 없고 실패로 감겨들 뿐이었다
…후략…
-「호한조」 전문
「호한조」는 나머지 시들을 모두 수렴하고 커버하는 작품이다. 가만히 통증을 관조하는 시인의 자화상을 “99도” 이상으로 “펄펄 끓여 익혀보려” “의지를 세우지만” 끝내 “진전은 없고 실패로 감겨들 뿐”인 자기비하의 시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있는 날것으로서의 내면을 진솔하게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시인의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허이서 시인의 시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완성되는 세계로 나아가려는 모습이 희미하다는 것과 온전함으로 승화하려는 일련의 방법론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거기 그냥 서서 관조하는 것, 그리고 전진도 후퇴도 없는 관조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나’로 되돌아오는 것, 그것은 마치 “전설새 호한조”와 닮아 있다. 앞으로 허이서 시인의 시세계가 어떻게 변모할지 알 수 없지만, 부정적 측면에서 시비를 걸자면 수동적 자아의 의지박약을 지적할 수 있겠고, 긍정적 측면에서 기대를 걸어보자면 역동하는 시적 자아가 태동하는 폭풍전야의 징조로 볼 수도 있겠다. 딴에는 자기비하의 철부지적이고 낭만적인 병리현상을 뛰어넘은 관조로서의 자아 성찰이 이번 시편들에서 어느 정도 감지된다는 점에서 허이서 시인의 눈부신 발전에 판돈을 걸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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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허이서 시인의 강점은 짧고 강렬한 시행에 있다. 「호한조」나 「꽃그늘」과 같이 긴 호흡의 문장은 오히려 번잡하고 궁색해 보이게끔 한다. 내면의 말에 집중하는 시인은 절제와 축약에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나’의 이야기는 ‘나’가 제일 잘 알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나친 호들갑으로 보이게 하거나 지루한 넋두리로 들리게 할 수 있다. “진전은 없고 실패로 감겨들 뿐”이어도 “비굴과 요령을 공부하기 시작”한다는 건 시인으로서 멋진 일이다. 시인에게 열등감과 마음의 빈곤은 훌륭한 영양식이 될 수 있고, 비굴과 요령은 절제된 문장을 연마하게 하는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허이서 시인의 가만히 통증을 관조하는 시가 성공한 ‘저주받은 시인 증후군’ 계열에 들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시는 결국 시일 뿐이다. 경전도 법전도 사전도 아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도 법전에서도 사전에서도 발현시키지 못한 제각기의 절절한 서정을 다시 꽃피워내는 것이 시의 일이다. 거기에 신앙이 생길 수도 있고 도덕적 잣대가 세워질 수도 있다. 심지어 말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힐 수도 있다. 부디 허이서 시인이 노래하는 통증의 언어가 무르익어 읽는 이의 마음마다에 통렬한 고통이 꽃피웠으면 좋겠다. 그 고통의 힘으로 시도 시인도 독자도 그리고 새로이 열리는 말의 세계도 거듭 생동하는 에너지로 약동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