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한 2,3-11; 루카 2,22-35
+ 찬미 예수님
말라키서에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3,1)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처럼 홀연히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 성전을 찾아오셨습니다.
레위기 12장에는 산모의 정결례 규정이 나오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위하여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바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 사제에게 주어야 한다.”(12,6) 뒤이어 이런 규정이 있는데요,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12,8)
이처럼 본래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바치는 것이 원칙인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면 양 대신에 비둘기를 한 마리 더 바쳐도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성모님과 성요셉은 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성 요셉은 꿈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연히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봉헌물을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최선이 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두 분께서 가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이사야서에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40,1; 49,13; 51,3; 61,2; 66,13) 등장하는데요,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이 바로 이 말씀을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도로 알아차립니다.
그리하여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4세기 때부터 일상 기도문에 포함이 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저녁 기도 때에, 서방교회에서는 끝 기도 때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여, 말씀 하신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시메온에게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고 이교 백성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었지만, 우리에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 교회이고, 이교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됩니다.
시메온은 이어 성모님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예고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무척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요,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 칼을 ‘의심’이라 해석했고, 에피파니오는 성모님의 순교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순교를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성모님도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성모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함락을 직접 목격하실 거라는 해석도 있었고요, 창세기 3,15의 예언대로 성모님의 발꿈치가 뱀에게 상처를 입으실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보셔야 하는 성모님의 아픔을 예고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경 학자들(R. E. 브라운, J. 피츠마이어, D.L. 복)이 동의하는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돌아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잘라내는 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에제키엘서 14장(17절)의 말씀을 참조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새로운 가족에 포함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르는 칼이라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0,51)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갈라질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제자들을 가리키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결단을 하셨기에 더더욱 예수님의 어머니이신데, 칼은 바로 이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고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형제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은 매일 매순간 결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1독서인 요한1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로 살아가는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지입니다.(디디무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베다)
https://youtu.be/5bfILzt76GU?si=0_zvZzS3o8iWrvlr
헨델, 메시아 중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까 2:6-7; 말라 3,1)
For thus saith the LORD of hosts; Yet once, it is a little while, and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saith the LORD of hosts.
(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
Behold, I will send my messenger, and he shall prepare the way before me: and the LORD, whom ye seek, shall suddenly come to his temple, even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e delight in: behold, he shall come, saith the LORD of hosts.
(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