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박물관는 부평기지의 역사와 부평미군기지와 함께 했던 부평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헬로우 애스컴시티 굿바이 캠프마켓’ 이라는 주제로 내년 3월 29일까지 특별 기획전시를 진행한다.
미군기지 캠프마켓 반환을 앞둔 시점에서,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애스컴시티’를 재조명하고 ‘애스컴시티’을 둘러싼 부평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이다.
▲121후송병원(1995년) ‘애스컴시티’ 설립시기부터 부평에 있었고 1971년 용산 미군기지로 이전했다.
내과, 외과, 안과 등의 진료과목 있었고, 주로 전방에서 부상당한 미군병사들이 치료를 받았다.
▲부평박물관전경을 관람하는 학생들 모습
‘애스컴시티’는 해방 후부터 1970년대 까지 한국의 모든 미군부대에 무기와 식량을 보급하는 군수지원사령부이기도 했다. 애스컴시티는 일제 강점기 말 일본육군조병창이었던 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기지였다.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지원 사령부가 일제강점기 군수공장인 육군조병창부지에 자리를 잡으며 부평에 미군의 주둔이 시작됐다. 그 자리에 부평미군기지는 약70여 년 동안 부평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했다. ‘애스컴시티’는 캠프마켓, 캠프하이예스, 캠프그란트, 캠프타일러, 캠프아담스, 캠프해리슨, 캠프테일러 등 7개 구역이 형성됐다.
▲애스컴시티 항공사진(1950) 부평역사박물관 사진 제공.
▲인천육균조병창 본부건물(1952) 부평역사박물관 사진 제공.
‘애스컴시티’ 규모는 남북으로 현재 부평중학교 ~ 인천산곡고등학교(약2km), 동서방향으로는 산곡입구사거리 ~ 명신여고(약2.3km)에 달했다. 산곡동과 부평동 일대 세워진 아파트단지가 과거에는 모두 미군기지 였던 셈이다. 그만큼 지역도 넓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1973년 캠프마켓을 제외한 6개의 캠프가 철수, 이전했고, 캠프마켓에는 제빵 공장과 일부시설만 남기고, 도심 속에서 하나의 경계를 이루며 70년을 넘어선 탓에 미군부대의 담장은 하나의 조형물처럼 남았다.
부평미군기지 ‘애스컴시티’가 형성되자 일자리와 물자를 찾아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기지촌도 그 무렵 형성됐다. 한국전쟁 직후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부평은 ‘애스컴시티’의 형성으로 지역경제와 주민들이 생계를 잇는 수단이 됐다.
▲부평 미군기지 음악은 국내 대중음악의 토대가 되었다.
미군부대의 주둔으로 부평은 미군에 의한 폭력과 범죄의 암시장이 형성되었고, 혼혈아라는 새로운 사회문제가 생겨났다. 반면 미국의 대중음악과 한국 뮤지션들의 만남은 한국 대중문화의 큰 변혁을 가지고 왔다. 부평에서 미국의 당시 유행했던 음악들을 받아들인 뮤지션들의 활동과 기지촌의 형성은 새로운 음악, 문학, 등의 새로운 문화태동의 밑거름이 됐다.
1973년 거대했던 ‘애스컴시티’는 캠프마켓만 남기고 축소됐다. 부평미군기지로 모였던 사람들은 미군부대와 함께 떠나고, 그 주변으로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시민들이 캠프마켓을 되찾자’라는 목소리는 커졌고, 시민들의 노력의 결과로 2020년 부평미군기지 반환이 확정됐다. 그 땅을 되찾게 된 것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이번 전시는 ‘애스컴시티’의 캠프마켓으로 이어지는 부평기지의 역사와 함께 했던 부평사람들의 치열했던 삶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박물관은 당시 ‘애스컴시티’에서 1968년 약5년 정도 근무했던 토마스 D, 케이시 (Thomas. D. casey-80)씨는 “당시 주한미군은 모두 김포공항으로 들어와 부평에 모였고, 하루정도 머문 후에 각자 근무지로 떠났다”며 “부평은 미군의 중심 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 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애스컴시티’에서 미군이 사용했던 물품들을 대거 공개하고, 당시 부평기지촌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김혜미 학예연구사는 “시민의 힘으로 되찾은 부평미군기지가 우리의 품 안으로 온전히 돌아올 날을 기대하며, 부평기지와 함께한 부평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시에 담고 싶었다”며 “서로 다른 문화와 말씨 속에서 치열하게 당시를 살아냈던 부평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역사로 기록돼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