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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나라를 지키는가 XIX
나를 해방한 나라는 누구인가
1. 종이 위에서 자유인이 되다
1895년 초.
연화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어날 때는 노비였다.
지난해까지도 세상은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말했다.
누구의 딸인지.
누구에게 속했는지.
얼마를 주면 사고팔 수 있는지.
도망가면 누가 잡아올 것인지.
그런 것들이 사람의 이름보다 중요했던 세상이다.
그런데 어느 날 법이 바뀌었다.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없앤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을 금한다.
문벌과 양반과 상민의 등급을 없앤다.
연화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다.
너무 늦게 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화는 그 말을 종이에 적어 세 성직자 앞에 놓았다.
나는 이제 노비가 아니다.
가톨릭 신부가 말했다.
“그건 좋은 일 아니오?”
연화가 대답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오?”
연화가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자유롭게 했습니까?
세 사람이 침묵했다.
2. 조선
연화가 먼저 물었다.
“조선이 저를 노비로 만들었습니까?”
장로교 선교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단순히 한 사람이나 한 임금이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선의 법과 사회가 노비제를 오랫동안 유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됐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제게는 그게 중요합니다.”
“…….”
“제가 어렸을 때 어떤 임금이 처음 노비제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연화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제가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조선의 법이 저에게 말합니다.”
연화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너는 더 이상 노비가 아니다.
그리고 물었다.
“왜 이제야?”
3. 너무 늦은 자유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노비제는 그 전부터 많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압니다.”
“노비 신분의 세습도 이미 제한되고 있었고요.”
“그것도 압니다.”
연화가 말했다.
“하지만 약해진 사슬도 사슬입니다.”
선교사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을 조금 덜 사고파는 것과 사람을 사고팔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노비가 줄어드는 것과.”
연화가 말했다.
“노비라는 인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말하는 것도 다릅니다.”
신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4. 그런데 일본군이 있었다
연화가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일본.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신부가 물었다.
“무슨 문제요?”
“이 개혁이 이루어질 때 일본군이 조선에 있었죠?”
“그렇소.”
“궁궐에도 들어갔죠?”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정국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일본이 저를 해방한 겁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5.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장로교 선교사가 먼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사실의 절반만 말하는 셈입니다.”
“나머지 절반은요?”
“조선 안에서도 오래전부터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동학농민군도 폐정을 고치라고 요구했고.”
연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건 제가 압니다.”
“조선 정부도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군사력을 사용해 조선 정치에 개입했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상하군요.”
“무엇이요?”
“조선 사람들도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상황에서 조선 관리들이 노비제를 없앴습니다.”
“그렇습니다.”
연화가 한참 생각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개혁입니까?”
6. 답하기 어려운 질문
가톨릭 신부가 말했다.
“꼭 한쪽만 골라야 하오?”
연화가 신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일본의 강압적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과 조선 내부에서 실제 개혁을 추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이 동시에 참일 수 있지 않겠소?”
“그럼 일본이 한 것도 아니고 조선이 한 것도 아니다?”
“그 말도 지나치게 단순하오.”
연화가 웃었다.
“신부님은 언제나 구별하시는군요.”
“오늘은 특히 그래야 할 것 같소.”
신부가 말했다.
“일본이 조선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한 것과 노비제를 폐지하는 제도 자체가 옳은가는 별개의 문제요.”
연화의 표정이 달라졌다.
7. 악한 손에서 좋은 법이 나올 수 있는가
“잠깐만요.”
연화가 말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무엇이?”
“나쁜 목적으로 간섭하는 나라 때문에 좋은 법이 나오는 것.”
신부가 말했다.
“역사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소?”
“그러면 좋은 법이 나왔으니 일본의 간섭도 좋은 일이 됩니까?”
“아니오.”
“왜요?”
“좋은 결과 하나가 모든 수단과 목적을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연화는 그 말을 적었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모든 과정이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잠시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말은 기억하겠습니다.”
8. 일본인을 미워해야 하는가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저는 일본을 미워해야 합니까?”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나라와 사람을 먼저 구별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사람?”
“그렇습니다.”
“일본군과 일본 백성?”
“그렇습니다.”
“그러면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화가 웃었다.
“그건 저한테 중요한 구별이네요.”
“왜요?”
“저를 노비로 부린 양반도 조선 사람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저를 때린 사람도.”
“…….”
“저를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
“조선 사람입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조선 사람이니까 우리 편’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9. 누구의 우리인가
감리교 선교사가 물었다.
“그러면 연화에게 조선은 무엇입니까?”
연화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말했다.
“태어난 곳.”
“그뿐입니까?”
“말을 배운 곳.”
“또?”
“어머니가 살았던 곳.”
“또?”
연화가 멈췄다.
“저를 노비라고 부른 곳.”
침묵.
“도망가면 잡아오던 곳.”
침묵.
“양반의 딸과 제 목숨의 값이 다르다고 가르친 곳.”
연화가 말했다.
“그것도 조선입니다.”
10. 이순신의 조선
그리고 연화가 이름 하나를 적었다.
이순신.
“그래서 장군 이야기가 어려워집니다.”
신부가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조선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렇소.”
“훌륭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연화가 물었다.
“그런데 어떤 조선을 지킨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있는 조선?”
“…….”
“양반이 있는 조선?”
“…….”
“노비가 있는 조선?”
“…….”
“사람을 사고팔 수 있는 조선?”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외적에게 나라를 지키는 것과 그 나라의 모든 제도를 승인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연화가 즉시 물었다.
“그러면 장군은 무엇을 지킨 겁니까?”
11. 나라와 백성
“백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연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 같은 백성도요?”
“그렇습니다.”
“노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저는 다시 노비입니다.”
선교사가 침묵했다.
연화가 말했다.
“왜군에게 죽지 않도록 저를 구해준 뒤.”
“…….”
“다시 주인집으로 돌려보냅니다.”
“…….”
“그러면 저를 구한 겁니까?”
그 질문에는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12. 자유의 정도
가톨릭 신부가 말했다.
“죽음에서 구한 것은 구한 것이오.”
연화가 신부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구원이었다는 뜻은 아니오.”
연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계속하세요.”
“왜군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사람을 지키는 것은 선한 일이오.”
“네.”
“그 사람이 노비라고 해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지.”
“네.”
“하지만 목숨을 구한 뒤 다시 노비 상태로 돌려보낸다면.”
신부가 잠시 멈췄다.
“그 사람의 인간다운 자유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겠지.”
연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13. 일본의 역설
연화는 다시 일본이라고 적힌 종이를 보았다.
“그러면 더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게서 조선을 지켰습니다.”
“그렇소.”
“그 조선에는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렇소.”
“삼백 년 뒤.”
연화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노비였던 제가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는 순간에는 일본군이 조선 궁궐을 점령한 뒤였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연화가 말했다.
“그러면 제가 일본을 원망해야 합니까?”
“…….”
“고마워해야 합니까?”
“…….”
“조선을 사랑해야 합니까?”
“…….”
“미워해야 합니까?”
14. 신부의 대답
신부가 말했다.
“모두를 한 덩어리로 묶지 마시오.”
“또 구별입니까?”
“그렇소.”
“해보세요.”
“노비제를 폐지한 것은 옳은 일.”
연화가 적었다.
“일본군이 다른 나라의 궁궐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정치에 압력을 행사한 것은 별도로 판단해야 할 일.”
연화가 적었다.
“조선이 오랫동안 노비제를 유지한 것도 별도로 판단해야 할 일.”
연화가 적었다.
“그리고 조선 안에서 그 제도를 바꾸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연화가 적었다.
네 문장이 놓였다.
연화가 말했다.
“역사는 참 불편하네요.”
“왜?”
“제가 미워할 사람과 고마워할 사람을 간단하게 나눠주지 않으니까요.”
15. 감리교 선교사의 질문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런데 연화.”
“네.”
“일본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영원히 노비제를 없애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대답입니다.”
“왜요?”
“이미 조선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연화가 말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 다릅니다.”
선교사가 연화를 바라보았다.
“양반에게 십 년은 개혁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
“노비에게 십 년은.”
연화가 말했다.
“십 년 더 노비로 사는 시간입니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16. 개혁의 속도
연화가 계속했다.
“그래서 저는 개혁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화가 납니다.”
“왜요?”
“천천히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
“백성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연화가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팔려갈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
“맞을 사람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
“…….”
“딸이 주인에게 팔려갈 어머니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래서 일본이 싫으면서도.”
그녀가 일본이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법이 바뀐 것이 싫지는 않습니다.”
17. 모순인가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건 모순이 아닙니다.”
연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의 정치적 목적을 경계하면서 노비제 폐지를 환영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그렇습니다.”
“조선을 사랑하면서 조선의 노비제를 저주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일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일본 정부의 침탈을 비판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러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선교사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라를 숭배하기 시작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연화가 그 말을 적었다.
18. 나라가 하나님이 될 때
가톨릭 신부가 종이를 보았다.
“그건 중요한 문제요.”
“왜요?”
“그리스도인에게 국가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왕도?”
“아니오.”
“민족도?”
“아니오.”
“조선도?”
“아니오.”
“일본도?”
“당연히 아니오.”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나라가 잘못하면?”
“비판할 수 있소.”
“나라가 사람을 노비로 만들면?”
“그 제도는 비판받아야 하오.”
“외국이 그 제도를 없애라고 압박하면?”
신부가 말했다.
“무엇이 옳은지와 누가 그것을 요구했는지를 구별해야 하오.”
연화는 다시 그 말을 적었다.
19. 논개
그때 장로교 선교사가 문득 물었다.
“연화.”
“네.”
“지난번부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논개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연화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알면 이상합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순신 장군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어도, 당신이 논개 이야기를 꽤 또렷하게 알고 있어서요.”
연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동학군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경상도에서 온 늙은 여자였습니다.”
20. 지난해의 모닥불
1894년.
밤.
패잔병과 농민들이 뒤섞여 있었다.
누가 동학군인지.
누가 피란민인지.
누가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연화는 모닥불 앞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가 말했다.
“진주에는 옛날에 논개라는 여자가 있었다더라.”
“논개?”
“왜장이랑 같이 강으로 떨어져 죽었다지.”
연화의 눈이 커졌다.
“왜장을 죽였습니까?”
“그렇다더라.”
“여자가?”
“그래.”
그때 연화는 감탄했다.
“대단한 여자네요.”
노파는 웃지 않았다.
“나는 싫더라.”
“뭐가요?”
“그 이야기.”
21. 왜 여자는 죽어야 이름을 얻는가
연화가 물었다.
“왜 싫습니까?”
노파가 불을 바라보았다.
“남정네는 살아 돌아오면 장군이 된다.”
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집은 죽으면 의로운 여자가 된다.”
“…….”
“남편 따라 죽으면 열녀.”
“…….”
“정절 지키다 죽어도 열녀.”
“…….”
“나라 위해 죽으면 의녀.”
노파가 연화를 바라보았다.
“왜 계집은 자꾸 죽어야 이름을 얻느냐?”
그때의 연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 죽었잖아요.”
노파가 말했다.
“나라는 그 여자에게 살아 있을 때 뭘 줬는데?”
22. 연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계속했다.
“글을 가르쳐줬느냐?”
“…….”
“벼슬을 줬느냐?”
“…….”
“자기 인생을 고르게 했느냐?”
“…….”
“남정네와 같은 사람으로 살게 했느냐?”
“…….”
“그러다 전쟁이 나니까 죽은 여자를 칭찬한다.”
노파가 마른 나뭇가지를 불에 던졌다.
“나는 그게 무섭다.”
연화가 물었다.
“뭐가요?”
노파가 대답했다.
“살아 있는 여자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나라가 죽은 여자에게 영광을 주는 것.”
23. 지금은 이해한다
1895년.
연화는 이야기를 끝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부가 물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소?”
“네.”
“지금은?”
연화가 대답했다.
“조금은요.”
그리고 웃었다.
“제가 살아남았으니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연화가 말했다.
“동학군에 있을 때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했습니다.”
“…….”
“잡히고.”
“…….”
“갇히고.”
“…….”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
“그러다가 살아나왔습니다.”
연화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살아남고 나니까 알겠습니다.”
“죽는 것보다 살아서 계속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24. 논개와 노비 연화
연화가 논개의 이름을 적었다.
그 옆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논개 — 죽어서 의로운 여자.
연화 — 살아남은 노비 여자.
연화가 물었다.
“하나님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왜요?”
“죽음의 크기가 사람의 가치를 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논개가 살아남았어도?”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연화는 그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5. 논개와 조선
그리고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다시 조선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좋소.”
“논개가 지킨 조선에도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렇소.”
“이순신이 지킨 조선에도 노비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같은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렇소.”
“그러면 그 사람들이 조선을 지킨 것이 선한 일이었습니까?”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나라의 모든 제도가 선해야만 그 나라 사람들을 침략에서 지킬 가치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연화가 물었다.
“왜요?”
“침략을 당하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 가운데 약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화는 멈췄다.
그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26. 노비에게도 전쟁은 온다
선교사가 말했다.
“노비제도가 악하다고 해서 일본군이 들어와 노비를 죽이는 것이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조선 왕이 악하다고 해서 조선 백성을 침략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므로 이순신이 백성을 침략에서 지킨 행위와 조선의 노비제를 구별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연화가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노비는 다시 노비.”
“그렇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반쪽.”
선교사가 잠시 생각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27. 일본은 해방자인가
연화가 일본이라는 글자를 다시 가리켰다.
“그러면 일본은?”
“무엇을 묻는 겁니까?”
“해방자입니까?”
세 사람 모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신부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소.”
“왜요?”
“다른 나라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그 나라 안의 한 제도를 개혁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해서 전체 행동이 해방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저는 실제로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 사실도 지워서는 안 되오.”
연화가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일본의 간섭은 싫습니다.”
“…….”
“그런데 노비제 폐지는 좋습니다.”
“…….”
“조선은 제 나라입니다.”
“…….”
“그런데 저를 노비로 만든 것도 조선입니다.”
“…….”
연화가 말했다.
“어느 쪽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28. 조국은 죄가 없는가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어쩌면 그게 중요한 깨달음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요?”
“사람은 자기 나라의 죄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남의 나라 죄는 잘 보고요.”
“그렇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잘 보는데 조선의 노비제는 못 보고.”
“그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조선의 노비제가 나빴다는 이유로 일본의 간섭을 정당화할 수도 있고.”
“그것도 위험합니다.”
연화는 적었다.
한 나라의 죄가 다른 나라의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그 문장을 세 사람 모두 오래 바라보았다.
29. 이순신에게 묻는다면
연화가 말했다.
“이순신 장군이 여기 있다면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장군님이 지킨 조선에서 저는 노비였습니다.”
“…….”
“그래도 제가 장군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신부가 말했다.
“장군이 그대의 목숨을 침략자에게서 지켰다면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렇다고 조선의 노비제까지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오.”
연화가 말했다.
“사람의 행동도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렇소.”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조선을 전부 옳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렇소.”
“일본의 어떤 개혁 효과를 인정한다고 일본의 간섭을 옳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렇소.”
연화가 웃었다.
“오늘은 정말 구별하는 날이네요.”
30. 나라보다 사람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성경에서도 나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절대적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조선이 하나님 뜻에 어긋나면?”
“조선이 틀린 것입니다.”
“일본이 어긋나면?”
“일본이 틀린 것입니다.”
“왕이 어긋나면?”
“왕이 틀린 것입니다.”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항상 옳지는 않겠네요.”
“그렇습니다.”
“나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까?”
선교사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스도교적으로는 국가가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연화가 조용해졌다.
31. 노비였던 여자의 애국
연화가 물었다.
“그러면 저도 조선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가 웃었다.
“왜 대답을 못합니까?”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사랑을 명령한다고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미워해도 됩니까?”
“미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좋은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연화가 말했다.
“어렵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노비로 만든 나라를 사랑하라고 하면 화가 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군이 들어와 조선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화가 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럼 저는 어느 편입니까?”
신부가 대답했다.
“반드시 두 나라 중 하나를 신앙처럼 선택해야 하오?”
32. 세 번째 자리
연화가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디에 서야 합니까?”
신부가 말했다.
“사람의 존엄이 있는 곳.”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정의가 있는 곳.”
감리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리고 원수까지 인간으로 보는 곳.”
연화가 웃었다.
“셋이 또 조금씩 다르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꽤 가까운 것 같소.”
연화는 종이에 적었다.
조선 편.
일본 편.
잠시 뒤 둘 다 지웠다.
그리고 가운데에 썼다.
사람.
33. 그러나 사람이란 누구인가
연화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사람이 누구입니까?”
“무슨 뜻이오?”
“조선 사람만 사람입니까?”
“아니오.”
“일본 사람도?”
“물론이오.”
“일본 군인도?”
세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연화가 말했다.
“여기서 어려워지는군요.”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인 일본군도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논개가 끌어안고 죽은 왜장도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었겠죠.”
“그랬겠지요.”
“자식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34. 원수도 사람이라면
“그러면.”
연화가 말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이 이제 정말 문제가 됩니다.”
세 사람이 연화를 바라보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합니다.”
“…….”
“조선에는 저를 노비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
“그래서 싸웁니다.”
“…….”
“그런데 싸우려면 일본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
“예수님은 그 일본 사람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35. 세 이름
연화가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첫 번째.
이순신.
두 번째.
논개.
세 번째.
예수.
“한 사람은 원수를 죽이면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한 사람은 원수를 죽이면서 자기 목숨도 버렸다고 기억됩니다.”
논개.
“한 사람은.”
연화가 마지막 종이를 바라보았다.
“원수를 죽이지 않고 원수에게 죽었습니다.”
예수.
연화가 물었다.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6. 너무 쉬운 대답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연화가 웃었다.
“그건 너무 쉬운 대답입니다.”
“왜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선교사는 침묵했다.
“이순신 장군처럼 싸우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
“논개처럼 원수를 끌어안고 죽이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
“아니면 예수님처럼 원수에게 죽임당하면서도 죽이지 않아야 합니까?”
이번에는 가톨릭 신부도 감리교 선교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37. 연화의 다음 질문
연화는 천천히 붓을 들었다.
그리고 세 이름 아래에 하나의 질문을 적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전쟁터에서도 유효한가?
연화가 말했다.
“다음에는 이것을 묻겠습니다.”
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더 어려워지는군.”
“신부님이 늘 구별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에는 구별한다고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오.”
장로교 선교사가 말했다.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함께 봐야 할 겁니다.”
감리교 선교사도 말했다.
“교회 역사도 봐야 합니다.”
연화가 물었다.
“세 분의 교회가 같은 답을 합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가 웃었다.
“역시 아니군요.”
38. 집으로 가는 길
연화는 혼자 걸었다.
거리 어딘가에는 일본 군인이 있었다.
조선 관리도 있었다.
양반도 있었다.
상민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법적으로는—
노비가 없어야 했다.
연화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어제의 손.
노비였던 손.
오늘의 손.
자유인의 손.
법 한 줄이 바뀌었다고 손의 모양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그 손을 붙잡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던 법은 사라졌다.
그것은 작지 않았다.
39.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연화는 생각했다.
조선에 감사해야 하는가.
너무 늦게라도 사슬을 법으로 끊었으니까.
일본에 감사해야 하는가.
그들의 군사적 압력이 개혁 정국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으니까.
동학군에 감사해야 하는가.
아래에서 세상을 흔들어놓았으니까.
개화파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오래전부터 제도를 바꾸려고 했으니까.
연화는 어느 하나만 고를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고를 필요도 없었다.
40. 자유는 선물인가
연화는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니.”
혼잣말이었다.
“왜 내가 감사해야 하지?”
지나가던 사람이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다시 걸었다.
사람이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게 된 것을 왜 누군가의 은혜라고 불러야 하는가.
원래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노비제 폐지는 누군가가 연화에게 새 인간성을 선물한 것이 아니었다.
빼앗았던 것을 뒤늦게 인정한 것이었다.
연화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41. 조선도 일본도
그날 밤 연화는 종이를 펼쳤다.
조선.
그 아래에 적었다.
나의 말.
나의 어머니.
나의 기억.
그리고—
나를 노비라고 불렀던 나라.
다른 종이.
일본.
노비제 폐지를 포함한 개혁이 이루어진 정국에 강하게 개입한 나라.
그리고—
군대를 끌고 다른 나라의 궁궐까지 들어온 나라.
연화는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어느 쪽에도 절하지 않았다.
42. 논개를 다시 생각하다
그때 모닥불 앞의 노파가 생각났다.
나라는 그 여자에게 살아 있을 때 무엇을 주었는데?
연화는 이제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논개가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나라는 논개 같은 여자에게 어떤 삶을 허락했는가.
이순신이 조선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그 조선은 누구에게 어떤 나라였는가.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개혁했다고 말하기 전에.
또 물어야 한다.
일본은 무엇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냈는가.
43. 세 가지를 동시에 보는 것
연화는 마지막으로 세 문장을 적었다.
조선의 노비제는 잘못이었다.
노비제 폐지는 옳았다.
그 사실이 일본의 강압적 간섭을 옳게 만들지는 않는다.
연화는 세 문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하나만 골랐을 것이다.
조선이 옳다.
일본이 옳다.
동학이 옳다.
관군이 옳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진실은 어느 편의 깃발보다 클 수 있었다.
44. 그리고 네 번째 문장
연화는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적었다.
일본의 죄가 조선의 죄를 없애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줄.
조선의 죄가 일본의 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붓을 내려놓으려다가 다시 들었다.
마지막 문장.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받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연화는 오래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45. 다음 질문
그리고 새 종이를 펼쳤다.
이순신.
논개.
예수.
세 이름을 다시 썼다.
이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아니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이었다.
조선이 침략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 수 있는가.
칼을 든다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이 되는가.
칼을 들지 않는다면 약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이순신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논개는 원수를 죽이며 자신도 죽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는 원수를 위해 죽었다.
연화는 마지막으로 적었다.
“원수를 사랑하면서 원수와 싸울 수 있는가?”
이번에는 세 성직자가
정말로 갈라질 것 같았다.
인공지능 활용하여 작성한 대체역사소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