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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중층위의 구조, 귀납추론의 응결
최수연론
권대근
(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우리의 인지시스템은 익숙하지 않는 것은 더 잘 기억하는 법이다. 그녀는 분명 남다른 데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조금의 허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면에서,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올곧은 자세로 반듯하게 행하는 데서 약간 보수적인 면이 느껴지나 마음속이나 머릿속 깊은 곳의 열림과 변화, 관용과 포용을 껴안는 자세로 봐서는 진보적인 면이 더 크게 보인다. 시대를 관통하고, 지구의 안위를 논하고, 젊은 청년들의 삶을, 타자들의 아픔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워낙 크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 또한 크기에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그릇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Ⅱ.
양자 물리학은 파동-입자 이중성 및 양자 얽힘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에 도전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매력과 그것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밝히는 작업을 최수연의 본격수필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찾아든다. 흥미진진하리란 생각에 나도 들떠 있다. 나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파동과 입자 모두로 행동하는 빛의 이중적 특성과 같은 개념에 신기해하면서,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부과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밝히는 것을 수필의 이중구조와 귀납추론의 원리나 주제의 내면화 원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양자 영역의 비밀을 밝히고 이 매혹적인 과학 분야의 경이로움을 최수연의 본격수필 분석영역으로 치환해 최수연 본격수필의 창작원리를 이해하는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에로의 전환에 견주어보면 어떨까. 요즘 공중부양되고 있는 영자역학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 중첩과 같은 개념으로 우주의 운행원리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지식을 부여하고 있다.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본격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수필적 허구, 중층구조와 존재론적 의미화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현대수필의 옷을 입었다.
Ⅲ.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최수연 수필들에 적용해 보려한다.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에 기대어 그 동작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도전하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 최수연 수필의 구조를 재미있게 풀어보겠다.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유명한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빛이 어떻게 동시에 파동과 입자로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촘촘하게 간격을 둔 두 개의 슬릿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파동과 같은 행동을 암시하는 간섭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광자가 어떤 경로를 택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검출기를 배치하면 간섭 패턴이 없는 입자와 같은 동작이 관찰된다. 따라서 빛이 파동-입자라는 이중의 성질을 띤다는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수필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도토로프의 중층구조이론으로 풀어낼 수 있다. 수필의 창작이나 이해에 있어서 ‘이중성’의 이론적 배경은 1. 예술의 복합성 원리, 2. 토도로프의 중층구조이론, 3, 언어학의 이중부호원리 4.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란 문학이론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고 하겠다. 최수연의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드높이는 이중구조는 여러 수필, <아버지의 가방>, <앵두>, <노을 >, <수탉의 안부>, <주목>, <움막>, <지지대>, <꿈꾸는 감나무> 등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들 작품을 토대로 구조미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버지의 가방은 환자를 치료하는 기구만이 아닌 사랑의 마음마저 담겨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가방을 열면 병든 육체뿐만 아니라 아픈 마음까지도 어루만지는 시골 의사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울려 나왔던 것 같다. 왕진가방은 생명의 가방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가방 하나씩은 갖고 다닌다. 학창시절에는 미래의 꿈이 닮긴 희망의 가방을 들었다면, 성인이 되어 들고 있는 가방 속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가방 속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리라. 젊은이의 가방엔 탐험 도구도 넣고 다닌다는 말도 있던데, 지금부터라도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는 책 한 권이라도 가방에 넣고 다녀야겠다.
- <아버지의 가방>
위 인용문은 수필의 결말부인데, 최수연은 섬에서 의술을 펼쳤던 아버지의 상징이기도 한 가방을 제재로 아버지의 숭고한 인도주의 봉사정신을 잘 풀어내고 있는데, 이 작품의 문학성은 아버지의 가방에는 환자를 치료하는 기구뿐만 아니라 사랑의 마음까지 담겨 있다고 한 부분에서 빛난다. 왜냐하면, 가방에 담기는 것은 유형의 기구뿐만 아니라 무형의 마음까지 있다고 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녀가 아버지의 가방을 열면, 병든 육체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도 나올 것 같다고 표현한 데서도 이중성의 구조가 놓여 있다. 최종적으로는 아버지의 가방을 생명의 가방으로 의미화하고, 수필의 대우성적 특성을 살려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아나가고 있어 이 수필은 설득을 지향하면서 감동을 견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작가는 아버지의 바이오필리아 정신을 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돌아오는 가을엔 고향에서 밤을 따다 나의 아들에게 할아버지의 바이오필리아가 담긴 고귀한 가방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고 생각한다. 작가에게 의사였던 아버지는 작가의 아들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이야기를 통해서 인도주의를 실천하려는 작가의 대를 잇는 가족 사랑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독자들은 감동으로 보답할 것이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우리의 영혼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란다’ 했듯이, 돌이켜보면 그때가 나에게는 색을 입히기 전 도화지 같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령 시험에서 백점 맞은 것은 기뻐하고 금방 잊게 되지만 구십구점 맞은 건 아쉬워하면서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보듯, 앵두가 익어가는 유월이 되면 양철 주전자를 들고 서 있던 그 애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유년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주었던 앵두와도 같던 홍안의 소년은 지금 어디에서 늙어 갈까.
<앵두>
‘앵두’가 담긴 양철 주전자는 작가에게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혀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나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로 수필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첫사랑 소재는 중년의 작가에게 한 번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비집고 나올 만한 이야기다. 순수했던 유년 시절의 상태를 ‘색을 입히기 전 도화지 같은 시절’이라고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보인다. 다시 말해 그녀는 ‘도화지’에 묘사된 기표를 통해 순수한 영혼이라는 기의를 제시하고, 다시 양철 주전자를 들고 서 있던 그 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백지에 묻은 붉은 앵두색의 연상으로 첫사랑의 떨리는 이미지를 재현하면서, 선물 전달이라는 기표로부터 울림과 떨림의 순간이 녹아드는 첫사랑 그 감정을 호명한다. ‘영혼’을 ‘어린 아이’에 견주고, ‘유년의 때묻지 않은 순수’를 ‘색을 입히기 전의 도화지’로, ‘홍안의 소년’을 ‘앵두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그 애의 모습’으로 치환하게 하는 장치의 활용은 이중층위 활용의 다양한 예가 되겠다. ‘앵두’는 첫사랑의 뜨거움과 일방적 짝사랑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라는 이중의 정황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어르신의 노을은 오늘 내가 본 저녁노을과 닮았다. 강렬한 빛을 발하면서 무언가 울림을 주는 노을. 조용히 포용하면서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그런 노을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잘 살아 내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요즘 항간에‘너 젊어 봤냐, 나는 늙어 봤다’는 소리가 나는 여사로 들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 말에는 결코 웃자고만, 얘기가 아닌 뭔가 깊은 내용이 숨어 있지 싶어서다.
그분들의 지혜만 본받아도 노을을 그려나가는 데 실패할 확률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란 무언의 확신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나도 머지않아 그 나이에 도래될 때문이 아니겠는가.
<노을>
노년의 삶을 ‘저녁노을’에 견줌으로써 이중층위를 가지는 이 수필은 저녁노을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내는 작가의 독창성에서 더욱 감동을 주는데, 이를테면 노년이 주는 허무, 우울, 무기력, 등의 이미지를 배제하고, 그녀는 노을에서 ‘강렬한 빛’,‘아름다운 빛’을 찾아내고, 노을을 ‘포용과 순응의 정신’으로 승화하고, ‘울림을 주는 대상’ 이미지로 묘사하여 깊은 사유를 주는 문장으로 디자인했다. ‘노을’에 ‘지혜’를 등식화함으로써 그녀는 기존의 사유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제시하고자 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하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적절환 텍스트를 채굴해서 결말부 앞에 배치하는데, 이를테면 메시지와 관련이 깊은 유명배우의 말이다. “더구나 살면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물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가슨 캐닌의 말을 빌리자면 “젊음은 자연의 선물이지만, 노년은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이다.(youth is the gift of nature, but age is a work of art)”라고 했다. 젊음과 노년을 구분하는 척도가 특이해서 이런 문구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다. 무조건 노년이 아름답다고 하는 건 아니다. 노을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각자의 몫이라는 메시지다.
가정은 희망의 발원지이자, 행복의 중심지라는데, 그게 무너져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혹자는 앓아누워있어도 남편이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는 이야기다. 만약을 가정해 보면 솔직히 나도 자신은 할 수 없지만, 맞는 말인 것은 확실하다. 어느 때보다 남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요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예전에는 수탉이 홰를 치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들이 도망가고 잡귀들도 모습을 감췄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수탉의 위상이 높았다는 이야기리라. 시대가 변했다고, 힘이 약해졌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고 내친다면 감내할 자 누구일까.
권위가 떨어진 수탉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까. 그러고 보면 남편들의 위상도 아내들이 세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의 울타리는 짐승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이 아침 수탉의 안부가 걱정된다.
<수탉의 안부>
‘수탉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수필이다. 닭들의 이야기이지만 결코 닭들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인생의 불편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약간 우화적인 면이 있다. 남자의 권위 또는 가장의 권위가 꺾일 때의 모습에서 이해관계를 통해 이합집산을 일삼는 사회조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유교주의는 거센 서구 물질문명의 도전에 힘을 잃어가고, 여기에 여성주의의 득세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가장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무너뜨리는 정황 제시라면 수필은 이야기 정도에 불과해서 큰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 수필은 권위가 떨어진 수탉을 무시하는 암탉들의 비정한 행위와 권위가 떨어져 자존심이 상한 수탉이 가출을 해버렸다는 이중구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작가는 수탉과 암탉의 수직적 관계를 가정에 견주는데, 여권주의에 대한 약간의 견제다. 작가는 결말부에 가서 “그러고 보면 남편들의 위상도 아내들이 세워주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여성상위 시대의 부작용에 우려를 표한다. “행복한 가정의 울타리는 짐승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이 아침 수탉의 안부가 걱정된다”는 진술을 통해 그녀는 최소한 인간적인 배려, 부끄러워하지 않을 권리, 즉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굽히지 않은 당당함, 그러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은 겸손함을 엿보게 한다. 후미진 골목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내면을 갈고 닦은 결과이리라. 더구나 몸에 지닌 탁솔 성분은 이미 항암물질로도 인정받았다니, 오늘날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은 이렇듯 거듭나서 얻게 된 타이틀이 아니겠는가.
‘주목朱木’의 뜻을 달리하면 ‘주목注目’에 이른다. 그 의미에 나는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나의 삶도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여 보거나 살필 때라야, 좀 더 값진 인생이 되리라. 우리는 기껏 더해도 ‘백 년’ 아닌가.
<주목>
문학의 묘미는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에서 나온다. 가끔 작가가 언어유희를 통하여, 낯설게 하기를 하면, 수필의 맛을 더 낼 수가 있다. 위의 수필도 이중구조가 숨어 있다. ‘후미진 골목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을 ‘주목朱木’에 견주고, 다시 그 주목을 ‘주목注目’으로 변용하여, 주목의 의미를 낯설게 한 전략이 매우 돋보인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제시되는 근원영역의 ‘주목注目’은 일상적으로 보아온 낯익은 사물에 신선한 감각을 부여한다. 이렇게 전이된 어휘는 기존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전달한다. 따라서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는 작업은 대상의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전이가 없는, 본 것 위주로의 사실적 언술은 전형성을 띤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상투성이라는 한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시지각 안에 들어온 주변의 익숙한 장면을 손쉽게 포착한 뒤, 별다른 고민없이 그것을 진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장에 맛을 내려면, 최수연 작가의 경우처럼 관찰, 수사, 시선의 새로움을 변용하는 기법을 통해 기존의 낡은 감수성과 감각으로부터 탈피해야 할 것이다.
아기 주먹만 한 자물통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몇 달 사이에 움막 비닐은 갈기갈기 찢겨 꽃샘바람에 진혼굿 하듯 너울너울 춤을 춘다. 을씨년스럽다. 사람이 거주할 때는 온기라도 돌았는데 화사한 봄이 무색하다. 청년은 어디로 떠났을까. 그래도 이웃인데 인사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나 보다.[발단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스콧 니어링(1883-1983)은 죽어가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래를 읊조렸다고 한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처럼 정해진 집이 없는 사람들도 희망을 품고 이 글처럼 살았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오두막이든 움집이든 모두 임시거처일 뿐이다.
오늘은 장대비까지 내려서 흠뻑 젖은 움막이 더욱더 초라하다. 마치 우산도 쓰지 않은 그가 서 있는 듯하다. 길고양이도 집주인이 떠난 것을 아는지 구슬프게 울며 비에 젖은 낡은 지붕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결말부]
<움막>
이 직품은 매우 전략적으로 쓰여져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적발과 직시, 사회적 발언이 설득력있게 전개되어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예리한 진단과 증언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작가의 여망을 문학적 담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움막’이란 제재를 통해서 한국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집문제와 청년문제를 이중적으로 동시에 터치하고 있다. 집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한마디, 집에 대한 작가의 개념 정의는 ‘젊어서 나도 정원이 있는 저택을 꿈꾸었다. 친척과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다. 어느 정도 나이테가 쌓이면서 집에 대한 의미가 달라졌다.’라는 반성적 성찰이란 전제가 있어서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이 수필의 결말부, ‘우산도 쓰지 않은 그가 서 있는 듯하다’와 같은 은유적인 표현은 정서의 상징화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장대비’ ‘흠뻑 젖은 움막’ ‘길고양이’ ‘떠난 집주인’ ‘구슬프게 울며’ ‘젖은 낡은 지붕’ 등은 일종의 상징들로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처럼 정서에 단어를 부과하여 재경험할 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문학은 이처럼 의미발견, 의미부여에 의해서 생명을 갖는다.
이 수필은 결말부에 왜 비 오는 장면을 배경으로 깔았을까. 생각해 보면 ‘비 오는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잘 이해되는 사건과 분위기가 있다. ‘날씨’는 작품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소년과 소녀의 애틋한 첫사랑이 그토록 가슴 설레는 느낌으로 시작될 수 있었을까. 이렇듯 문학작품에서 날씨는 분명 ‘날씨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씨는 줄거리에 개연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기분을 강하게 부각시키기도 하며,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심화시키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차원에서 작가는 비가 오는 날을 전략적으로 배경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움막>의 문학적 성취는 단순히 시골에 남은 움막 한 채를 통한 도시화나 문명 비판이 아니라 청년의 문제를 이슈화한 데 있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주말은 가족과 함께’라고 하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나 휴일을 우리 사회가 규정해 놓은 단일한 모습의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지 않다. 그나마 시골에 남아 있는 움막 한 채에서 노모와 함께 살던 청년도 어머니를 저 멀리 보내고 말자, 집을 떠나고 마는 현실이다. 이런 ‘이별’과 ‘부재’ 그리고 ‘떠남’과 ‘허무’의 착찹한 분위기와 암울한 상황을 비 오는 날에 더하여 낡은 지붕과 불안한 고양이 울음소리에 포개어 잘 묘사했다.
요즘 양자역학이 공중부양되고 있다. 양자역학이론을 문학의 이중구조화에 응용해 보면, 어떨까싶다. 고전역학의 핵심이 미래예측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면,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수필의 창작전략도 제목이나 발단부 전개부를 읽고 내용을 미미 다 알아버리면 안 된다. 결말부까지 읽고나서 메시지를 파악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수필에서의 귀납추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문학의 주이야기, 글감 하나로 글을 쓰면 단순구조라서 복잡성을 갖지 못하고, 스토리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예술성이란 복잡한 구성에서 나온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문학이 감동을 견인하는 문학성을 가지려면 하나의 이야기를 덧씌워 이야기를 이중구조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입자라면, 여기에 파동을 덧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빛은 알갱이면서 파동이다. 빛의 이중성을 수필 글의 구조에 적용시켜 보자는 것이다. 즉 수필의 이중성이란 원자와 전자의 관계이거나, 입자이면서 파동으로 이해된다. 최수연의 <지지대>는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해마다 우리집 텃밭에는 오이, 참외 등이 자란다. 처음에는 농사를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지지대를 세워주었더니 그대로 두는 것과 결실이 달랐다. 식물이 지주를 어떻게 감지하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앙팡지게 붙잡고 안정감 있게 꽃을 피우는가 싶었는데 금방 열매를 매달았다. 그걸 보면서 나도 아들과 며느리에게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알아서 잘 살아가겠지만, 부족한 대로 육십 년 넘게 풍파를 경험하면서 얻은 생활의 지지대를 세워주면 그 또한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다 나약해져서 내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아들과 며느리가 나의 지지대가 되어주지 않을까, 살면서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부모들의 소망이리라. 어두운 표정은 누구한테도 들키기 싫지만, 혹시 아들과 며느리가 보게 된다면 나이 드니 공연한 일로도 서글퍼지는 날은 있더라는 걸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지지대>
진정한 울림을 주려고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방법을 써서 감동을 창출해야 한다. 질 좋은 작품은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그의 정서와 사상을 고양시킨다. 독자의 문학적 상상력은 소재로부터 발생한 기본적인 이미지의 울림, 그것을 미지의 세계로 도약시키는 역동적 이미지의 울림, 그 역동적 이미지를 궁극적 보편적 가치의 세계로 이끄는 초월적 이미지의 울림으로 위계화되는 것이다. 장 피아제에 의하면, 구조라는 것은 전체성과 변형성, 자기 조정성을 본성으로 갖는 구성요소로, 상호간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지지대>란 수필 텍스트가 주는 감동은 그 구조로부터 나오는 미적 울림이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구조화 작업과 미적 울림의 창조원리는 일치한다. 이야기의 구조화 방법으로부터 미적 울림을 창조하는 원리 ->이야기의 메커니즘을 구축해주는 미적 배열의 핵심원리는 스토리를 이중층위로 변형시키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스토리는 작가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글감으로써 아직 미적으로 변형되지 않은 원소재를 가리킨다. 식물에 지지대를 해주니 잘 자라는 데 착안하여, 식물-사람 관계를 도움이 필요한 자녀-부모 관계로 전이시킨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고 하겠다.
올해는 해충이 자두나무, 뽕나무, 살구나무 등에 흰 망사를 씌운 것처럼 달라붙었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초토화하는 것도 모자라, 곁으로 이동해서 나무들을 못살게 굴었다. 감나무는 그 해충도 피했다. 잎이 무성해도 건드리면 지장을 줄까 봐 가지치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가지를 옆으로 뻗어가서 안정감이 든다.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열매도 달리지 않겠는가.
죽은 듯이 보였던 감나무가 움을 틔운 것처럼 손녀가 어렵다는 병을 이겨내고 퇴원하여 내 생일 날 우리집에 왔다. 할머니 생일 축하한다며 종이로 만든 사각 봉지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어린이 반지와 머리띠, 캐릭터 사진과 토마토소스까지 들어 있었다. 손녀가 평소 아끼던 물건들이다. 할머니도 좋아할 것이라 여기고 특별히 선물한 것이리라. 나는 손녀를 꼬옥 끌어안고는 공기가 잔뜩 든 포장재처럼 둥실둥실 떠다녔다.
- <감나무>
수필의 파동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으로 빛나는 시적 언술의 양상에서 도출되는 성질이다. ‘이것’을 ‘저것’으로에서 ‘저것’에 해당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보조관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감정’보다 ‘미적 정서’요, ‘이야기’보다 ‘플롯’에 해당하는 화자의 ‘전략적 표현’이다. 문학의 원리는 메타포의 원리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다. 중층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표층차원에서 작가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이중구조화하는 일이다. 한국현대문학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이다. ‘죽은 듯이 보였던 감나무가 움을 틔운 것’과 ‘손녀가 어렵다는 병을 이겨내고 퇴원했다’는 서사의 미적 구조화에 대한 결과는 곧 작품의 미학성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이중층위 전략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야기의 미적 배열은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의미구조의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감동전략의 핵심을 차지한다.
4. 평가
항상 미래를 보고 걷는 자의 발끝에서 역사는 이루어지는 법이다.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차이와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헌신하여 창작의 열정을 태워 수필가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최수연 수필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발문을 마치면서 입자와 파동이란 이중구조를 통하여 문학적 성취를 견인한 최수연의 본격수필 생성전략이 매우 돋보였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가장 형상화가 잘된 부분을 결말부로 돌려 지배적 정황을 더욱 강화하거나 ‘주제의식’의 국면을 이미지로 재현해서 보다 더 울림이 큰 감동을 전달할 수 있게 한 것도 바람직하다. 만약에 체험을 1차원적인 이야기로 풀어내었거나, 직설적인 발화로 개념적인 언술로 진술했다면 수필은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재’의 의미를 철학적인 의미에 얹어 이미지로 묘사했기에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고 본다. 최수연 수필의 우수성은 바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최수연 수필은 지배적 정황으로 제시된 보조 자료에 힘입어 기존의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전달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다양한 미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감동의 울림통을 디자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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