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리안저널 Vol.7 No.5 2005년 5월1일
"나는 인생의 밭을 가는 허름한 농부"“하루 일과가 끝난 뒤 우리 내외는 돋보기를 걸치고 마주앉아 손에 박힌 장미가시를 빼내주며 서로를 위로하지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처럼 좋은 직업이 없다고요”로스엔젤스에서 하이웨이 5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내려가다 보면 샌디에고 조금 못 미쳐 훨부룩(Fallbrook)이란 조그만 도시가 나온다. 보석처럼 푸르른 태평양해(海)와 구비 구비 흐르는 계곡의 시냇물, 낮으막한 구릉들이 한데 어우러져 일대 가경(佳景)을 이루는 이 전원도시엔 장미농원을 가꾸며 영혼(靈魂)의 시(詩)를 쓰는 시인(詩人)이 살고 있다. 정용진 시인.. 20에이커가 넘는 광활한 산등성 평지 위에 2에이커의 그린하우스를 지어놓고 장미를 기르는 그를, 흔히들 장미시인이라 부른다. 노란 장미, 흰 장미, 분홍 장미, 붉은 장미, 보라색 장미, 레이디 다이애나 장미..... 6만여주(그루)의 장미나무에서 각양각색의 색깔 과 향기로 피어나는 꽃들은 주인이 짓는 영혼의 노래를 들으며 꽃 봉우리를 맺는다. 영혼을 노래하는 장미시인‘잠든 영혼이 눈을 뜨는/ 이른 아침/ 장미의 뜨락을 거닐면/ 소록소록/ 마음을 열며/ 피어오르는 사랑의 숨결/ 더러는/ 눈길로 말하고/ 더러는/ 향기로 부르며/ 삶의 진 실과 번뇌를/ 고백하는/ 여신의 숲엔/ 생명의 늪으로 빨려드는/ 무수한 영혼의/ 빛과 소리들....../ (장미 밭에서의 일부, 정용진 지음)' 그의 시(詩)가 말하듯 그는 장미를 기르며 삶의 소중함과 영혼의 신비를 깨닫는다고 한다. "이른 아침 온실에 들어서면 밤새 이슬을 머금은 장미꽃들이 함초롬히 나를 맞아주는데 그처럼 아름답고 싱그러울 수가 없어요. 농원을 가꾸다가 어렵고 고달픈 일이 생겨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마음속에 쌓여있던 고통과 번뇌가 일순 사라지는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지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다 그렇지만 장미를 통해서 삶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거든요.” 시인의 눈으로 보아 설까. 그는 꽃들도 인간과 닮은 면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 속에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있듯이 꽃들에게도 삶과 죽음, 희열과 고통이 있어요. 똑같은 사랑과 정성으로 가꾸었는데도 곧은 가지 위에 당당하게 뽐내며 피어있는 꽃이 있는가하면 가지가 휘고 꺾여 보기 흉한 꽃도 있고, 매혹적인 향기를 발산하며 유혹하는 꽃이 있는가하면 종이꽃처럼 무향무취해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꽃도 있지요. 이런 꽃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을 생각하게 돼요. 우리의 삶에도 결코 플러스만의 인생이나 마이너스만의 인생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삶의 철학을 깨닫게 되는 거얘요.”집념으로 일군 장미농원 정 시인이 훨부룩에 에덴 장미농원(Eden Rose Farms)의 간판을 세운지는 20여년전의 일이다. 경기도 여주농고와 성균관대학 법대를 졸업한 그는 71년 미국으로 유학왔다. 한국에서는 법관이 될 작정으로 법대에 들어갔으나 미국에 유학 와선 우드버리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대학졸업 후엔 잠시 그로서리 사업을 하다가 로스엔젤스 근처 온타리오에 30에이커의 채소밭을 일구고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배추, 무, 열무, 고추 등의 채소를 재배했다. 그 때가 1977년.. 채소 기르는 재미는 꽤 솔솔 했다. 학창시절에 배운 농업기술을 살려 켈리포니아 사막 땅을 옥토 전(沃土 田)으로 개발해서 품질 좋은 채소를 길렀고 수확도 좋았다. 한 때는 그로서리점마다 서로 그가 재배한 채소를 원해서 공급이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시.. 장사가 잘되자 너도나도 채소밭을 경작하는 바람에 한인들끼리 경쟁이 붙었다. 같은 민족인 한인들과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채소 농장을 처분하고 장미 밭이 있는 아름다운 훨부룩에 이사했다. “83년도에 왔는데 전(前)주인인 미국인이 취미로 하고 있던 장미 밭을 샀기 때문에 처음에 시작할 때는 농원이 조그마했지요. 집사람과 함께 대여섯 명의 일꾼을 데리고 열심히 일궜어요.” 부부가 억척으로 일한 결과 장미나무는 6만주로 불게 되고 고용인도 열다섯 명이나 되는 대 농원으로 불어나서 인근 농장주들을 놀래 켰다. 놀고 있는 땅에는 대추나무, 단감나무, 후지사과나무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과실수를 심어 과수원을 만들었고 무궁화도 기르며 고국에의 향수를 달랬다. "사람들은 장미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즐기지만 척박한 땅을 거두어 나무를 심고 풍성하게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아요. 장미는 기온과 병충해에 민감해서 손이 많이 가거든요. 원래 노동이란 것이 다 힘들지만 원예는 무척 힘들어요. 책도 많이 읽어야 되고 지식과 경험도 많이 쌓아야 되지요.”집에서 나무를 길러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야생목이 아닌 장미와 같은 꽃나무를 가꾸는 일은 만만치 않다. 간혹 나무든 채소든 무엇을 심어도 풍성한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그린 썸(greem thumb)을 주위에서 볼 수 있지만 어디 아무나 그린 썸이 되랴. 그들도 그만큼 신경을 써주고 정성을 쏟아주기에 그린 썸이 되는 것이다. 정 시인의 장미농원은 최신식 첨단시설을 갖춘 농원이다. 환경에 민감한 장미를 위해 통풍장치가 설치되었고 온실 내부는 항상 섭씨 15도 정도로 유지시켜 준다.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스프링클러가 물도 뿌려주고 해충약도 뿌려준다.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주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꽃이 알맞게 봉우리를 맺으면 가지를 잘라 한데 묶어서 화매 조합에 넘겨준다. 장미가지를 자를 때 가끔 사나운 가시에 찔릴 때도 있지만 정 시인과 그의 부인 정선옥 여사는 여직 기쁜 마음으로 농원을 가꿔왔다. "장미는 사랑의 꽃이 아닙니까. 발렌타인스 데이나 결혼기념일이나 생일날에 연인이나 남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팔에 안겨주는 꽃이 장미이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결혼식의 신부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꽃이 장미입니다. 우리가 정성들여 재배한 꽃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는 생각을 하면 고생은 되더라도 기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우리 내외는 돋보기를 걸치고 마주앉아 손에 박힌 장미가시를 빼내주며 서로를 위로하지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처럼 좋은 직업이 없다고요.” 에덴 장미농원을 경영하면서 그는 조상이 다른 여러 민족의 사람들과 교류를 맺어왔다. 그가 본 민족성을 살펴보면 꽤 흥미 있다. 조그만 질문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성실히 대답해주는 네델란드인, 오전엔 자기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남의 농장 일을 도와주는 덴마크인, 이웃에 경사가 났을 때면 자기 일처럼 좋아하고 기뻐해주는 그리스인, 농기구와 부속품을 꼭 일본제만 사용하는 일본인들..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사람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3650송이의 장미꽃을 사간 미국인이라고 한다. 시인과 농부새벽 5시에 기상해서 장미 밭을 가꾸고 전날 잘라 묶어놓은 꽃들을 칼스베드 꽃시장에 배달하는 일을 매일하면서 이러한 사소한 일상의 하나하나는 시로 승화되어 뭇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킨다. "육신으론 농사를 짓고 영혼으론 시를 쓰는 셈이지요. 몸은 피곤해도 일을 끝마치고 책상 앞에 앉으면 피로가 풀리고 마음이 안정돼요. 하루 종일 꽃과 씨름하며 꽃의 아름다움에 묻혀 살다보면 사람의 마음도 저절로 아름답게 변화되는가 봐요. 왜 사랑과 고독과 죽음을 노래하던 시인 릴케도 장미를 좋아했다지 않아요. 사랑하던 여인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려고 가지를 자르다가 가시에 찔린 화농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자신을 ‘인생의 밭을 가는 허름한 농부’라고 표현하는 그는 최근에 ‘시인과 농부’라는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이미 81년에 시집‘강마을’과 뒤를 이어 ‘장미 밭에서’, ‘빈 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를 펴냈고, 89년에 에세이집으로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재미작가 9인 에세이'를 펴냈기에 이번 에세이집은 6번째의 책이 된다. 그와 의 형제를 맺은 시인 고은 선생이 ‘시인과 농부’ 서평에서 그의 시 세계와 에세이의 주제는 자연, 산, 시대에의 성실한 귀의와 인간 옹호이다’라고 평했듯 그의 시는 대부분 꽃, 바람, 바다, 섬 등 자연을 주제로 노래한 목가적 서정시이다. 과학문명, 물질문명에 짓눌려 정서가 메말라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을 가다듬어주고 다독여주고 정화시켜주는 따뜻한 시들이다. 하지만 서정시를 쓰는 그가 지난날 유신정권에 대항에서 싸우던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진종일/ 삶의 밭에서/ 불의를 가려내 듯/ 잡초를 추리다가/ 땀 솟은 얼굴을 들어 저문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 가득 차 오른/ 영원의 기쁨/.....’ 밭에서 잡초를 추리듯 피안(彼岸)에서 불의를 가려내는 저항 운동가였던 그는 오는 2003년 한인이민 백주년을 맞이하여 ‘한얼의 횃불을 들며’라는 시를 발표했다. ...../님 들은 민족의 얼 이십니다 민족의 힘 이십니다 민족의 뿌리 십니다 그 기쁨 그 감격 그 영광을 이민 백년을 맞는 오늘 님 들게 드리나니 기뻐하옵소서...../내게 이런 자녀를‘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라는 멕아더장군의 기도문을 좋아하는 그는 자식농사에도 정성을 쏟았다. 큰아들 지신 씨는 UC어바인을 나와 미국경제신문인 ‘비지네스 와이어'의 기자로 있고, 작은 아들인 지민(조셉)씨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월튼 비지네스 스쿨에 재학 중이다. 그의 둘째 자부도 하버드법대를 졸업한 재원.. 현재 증권회사인 골드만삭스의 변호사로 있다. 특히 지민 씨는 훨부룩 고교를 다닐 때 전교수석을 하고 그 학교 개교 이래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던 수재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공부 잘하는 자제들을 두었냐는 질문에 정 시인은 "능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공부에 취미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가 모범을 보여주고 기본 틀만 잡아주면 성공은 언제나 가능하니까 너무 아이들을 닦달 하지마세요.”라는 답변을 해주었다. 농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아이들도 글쓰기를 좋아하며 3부자 문학도이기도 하다. 시대가 정보화하고 기계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정신문화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작금에, 자연 속에 묻혀 열심히 일하며 시를 쓸 수 있는 정 시인이 무척이나 행복해보이고 부럽다. (연락 / 760-723-7673)■박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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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닮은
정용진 시인 2010 1월호 샌디에고 한인뉴스 김미경기자 육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 사물의 세계를 사유 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킨 생명의 언어를 경작 하는 농부! 성실의 모자를 쓰고, 정직의 허리띠를 두르고, 근면의 신을 신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정시인으로 묘사된 정용진 시인. 양손에 흙과 문학만을 움켜쥐고 70평생을 살아온 시인의 가슴에는 우주가 숨 쉬고 있다. 어두움이 채 가시기도 전 이른 새벽, 이슬을 머금은 장미들의 웅장한 사열을 받으며 하루를 여는 시인은 2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 곳곳마다 사랑을 나누는 나무들과의 교감으로 시작한다. 미주문단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인들에게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시인을 글로 형상화 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 고된 작업으로 다가 온다. 정 시인의 수직과 수평을 넘나드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대화는 고전과 한학에서 빛을 발하며 그의 독특한 해석은 강의를 듣기위해 모인 문학도들을 매료시킨다.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한 정시인은 성균관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법관을 꿈꾸던 청년 이었으나 1971년 유학행을 선택하면서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수학하게 됐다. 그는 가장으로서 생계도 책임져야 했기에 그로서리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고 온타리오 인근에서 30에이커에 달하는 대지에 배추, 무, 고추 등을 재배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야채농장의 수익이 증가하자 많은 한인들이 동 업종에 뛰어들게 되고 그는 같은 한인들과의 경쟁을 꺼려해 1983년 폴부룩( Fallbrook) 으로 둥지를 옮겨 거대한 장미농장을 일구게 된다. 그가 ‘허름한 농부시인으로’ 각인 된 것은 그의 두툼해진 손과 은빛 찬란히 쏟아내는 언어들이 설명해준다. “육신은 농사를 짓고 영혼은 시를 쓴다” 는 정 시인은 자연의 리듬과 함께하는 삶을 살며 ‘강마을’ 장미 밭에서‘ 금강산’ ‘빈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한영 시선집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 ‘설중매’ 등의 시집과 에세이집 ‘마음 밭에 삶의 뜻을심으며’ ‘시인과 농부’ 를 출간했다. 그이 작품에는 자연과 동화된 시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 시인은 ‘시는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이며 육신의 눈으로 바라다 본 사물의 세계를 사유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킨 생명의 언어인 동시에 영혼의 메아리라’고 정의한다. 수필에 대한 그이 지론은 주관성을 초월한 객관성 차원으로 승화되고 격상되는 시와 산문의 성숙된 생활 표현양식 이라고 말한다. 정 시인은 오랜지 카운티와 샌디에고 지역에서 오랜 세월 문장교실을 열고 영혼의 메아리를 울리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과 문학의 밭을 일구고 있기도 한 타고난 농부이다. 그의 농부기질은 자식농사 역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큰아들 지신씨는 UC 얼바인을 나와 미국 경제신문 ‘비지니스 와이어’의 수퍼맨으로, 큰 자부는 미국 경제신문사 Nasdaq수퍼바이져 로, 작은아들 지민씨와 자부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지민씨는 이베이 프로덕트 매니져를 거쳐 인테넷 회사를설립하였고 자부는 골드만싹스 부사장을 거쳐 다지 앤 콕스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으며 지민씨는 폴부룩 고교 졸업당시, 학교개교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전교수석을 차지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정 시인은 “능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들이 공부에 취미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고 부모가 모범을 보여주고 기본 틀만 잡아주면 성공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너무 닦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농장에서 하루 종일 농부의 고된 삶에 충실하고 밤이 내리면 안경 너머로 밀려오는 문학의 세계로 초빙되어 글을 쓰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왔기에 삼부자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진 문학도의 길을 가고 있다. 정시인의 남동생은 ‘치악산시인으로’유명한 정용주 시인이며(시집, 인디언의 여자, 산문집, ‘고고춤이나 춥시다) ‘그림자 된그리움’ ‘단비를 기다리며’‘화단 주인의 취향, 등의 시집을 출간한 정양숙 시인 역시 그의 여동생으로 한국 문단의 한 획을 긋는인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이 농장에는 이른 아침이면 농장 전체를 아우르는 무지개가 걸린다. 아침 햇살을 받아 스프링 클러에서 물안개가 형형색색 무지개로 어깨를 맞대고 소년 같은 정 시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정 시인의 에덴장미 농장은 우주의 긴 호흡이 산이 되고 달이 되어, 자연을 닮은 정시인과, 하나 되어, 매일 밤 산고의 고통으로 물을 거슬러 차오르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이 싱그러운 언어들을 출산하고 있다. <김미경 기자> (샌디에고 한국일보. 한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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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월간 San Diego>육신으론 땅을 경작하고 영혼으로 시를 <인물 탐구> 쓰는 정용진 시인). 2008. 6월호 주영성 부국장
국제시인협회 시인상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시인낮에는 농작물을 가꾸고 밤에는 창작열을 불태워“나는 인생의 밭을 가는 허름한 농부”땅을 경작해 각종 곡식과 과실을 맺는 농부와 영혼의 밭을 갈아 아름다운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그 첫째는 바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는 점이다.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경우는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농부와달리 비록 육신의 땀은 흘리지 않을지는 몰라도 산고와 비길 수 있는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 영혼을 정갈하게 해주는 시를 만들어낸다.두 번째는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농사나 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농부가 밭을 갈 때는 추수 때의 풍성한 수확을 마음 속 깊이 염원하며 1년 내내 마치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 씨를 뿌리고 물과비료를 알맞게 주어야 하며 농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해충을 잡고 잡초를 뽑아 내느라 밤을 지새우는 것을 마치 밥 먹듯 해야된다.시인도 대상이 무엇이 됐던 간에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창작이 불가능할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 바로 시를 짓는 마음의 동기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단편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이런 면에서 농부와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편협할까. 만약 이 같은 기자의 생각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다.바로 샌디에이고 북부카운티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폴브룩에 살고 있는 정용진 시인(69)이다. 원로시인으로 한국은 물론 미국과국제 문단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정시인은 농부이기도 하다. 20에이커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 위에 정열의 꽃이라 불리는장미농장을 경영하였고, 지금은 한국 농작물과 과수나무를 기르고있다.따라서 정시인에게는 따라 붙는 수식어도 다양하다. ‘장미시인’,농부시인’ 등이 대표적이다.“동틀 녘에 온실에 들어서면 항상 청순한 향기를 전해주는 농작물들은은 정말 아름답고 싱그럽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어려운 일이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농장의 꽃과 농작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아름다운 시상들이 절로 솟아나지요.나에게 있어 땅을 경작하는 것은 곳 시를 짓는 일입니다. 이렇게 나를 반겨주는 꽃과 작물들이 있었기에 그 동안 시 창작에 전념할수 있었습니다.”정시인의 문단 경력은 화려하다.‘지평선’의 동인으로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크리스천 시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행문회 등의 회원을 활동하면서 미주문학상과 함께 한국 크리스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한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PEN클럽의 회원이며 국제시인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Poets)의 VIP 회원이기도 하다.특히 정시인은 지난해 국제 시인협회가 제정한 ‘우수작품상’을 시상하기도 했으며 그의 시 ‘장미가시’(Rose Thorns)는 국제 시도서관협회(The Library of Poetry)로부터 최우수 시로 선정됐다.정시인이 요즘 정렬을 쏟아 붓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바로 지난 3월 창립한 ‘샌디에이고 문장교실’을 이끄는 일이다. 이미‘오렌지 글사랑 모임’의 창립에 참여하여 오렌지 카운티를중심으로 한인 문학열기가 크게 활성화되는데 기여했던 정시인은 이번에 샌디에이고지역 문학동호인들을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봉사하고있다.“그간 지역 한인들로부터 오렌지 글사랑 모임 같은 문학 동호인회를 만드는 일에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개인 사정상 미뤄왔었습니다.그런데 올해는 육당 최남선 선생의 ‘해에서 소년에게’ 발표된 해로 이를 한국 현대시의 원년으로 치자면 바로 100주년이 되는해입니다. 그래서 3만 여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샌디에이고에도 문학적으로 한층 성숙한 한인사회를 이룩하자는 열망으로문장교실을 열게 됐습니다.”시상이 떠오르거나 집필작업을 할 때는 나이를 잊어버린다는 정시인은 손수 20페이지에 달하는 교재를 만들어 문장교실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시와 수필 그리고 문장작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밤새워 문학과 시를 얘기하고 토론하는 아름다운 자리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정 시인의 말이다.경기도 여주 출생인 정시인은 원래 법관을 꿈꾸던 법학도였다. 성균관대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정시인은 1971년 유학으로 도미해우드버리 대학에서 경영학을 수학하였고 그 후 잠시 그로서리 비즈니스를 하다 온타리오 인근의 30에이커에 대지에 채소밭을 일궈배추, 무, 열무, 고추 등을 재배해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도 했다.그러다가 1983년 폴브룩에 정착, 장미농장을 경영하다 지금은 한국 농작물과 과수나무들을 재배하는 농부로 그리고 밤에는 창작열을 불태우는 시인으로 생활해 오고 있다.정시인은 그 동안 ‘강마을’, ‘장미 밭에서’, ‘빈 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금강산’ 등의 시집과 함께 한영시선집인 ‘너를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Flying A Love Kite For You) 그리고 에세이집인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시인과 농부’ 등을 펴냈다.“앞으로 은퇴후에는 한인 커뮤니티에 도움이 되는 일에 좀더 열중할 계획입니다.물론 한인들의 문학열기를 꽃피우는 일은 제 몸과 정신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생각입니다. 중앙일보 <주영성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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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산다.> 주부생활 <미주판> 1989년 10월 호 (김완신 기자) LA 폴부룩에서 장미농장 경영하는 시인 정용진 우드버리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흙이 좋아 농장을 시작한 정용진씨, 30에이커의 농장에 장미를 키우며 2권의 시집을 발표하기도한 한국인 농부 시인의 살아가는 방법 장밋빛 인생을 이곳에서 찾았습니다 마음의 뜻을 심은 폴부룩 장미농원
LA에서 15번 프리웨이의 남행길을 타고 황량한 벌판을 지나 나지막한 구릉을 몇 차례 오르내리고, 다시 76번으로 빠져가서 개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아름다운 전원이 펼쳐진다. 수십 에이커 규모로 드문드문 펼쳐져 있는 농장들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움과 아늑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런 자연과 어울려 아름다운 장미농장이 있고, 시인이면서 장미농장을 경영하는 농부 정용진씨가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시를 쓰고 장미를 기른다.
잠든 영혼이 눈을 뜨는 이른 아침 장미의 뜨락을 거닐면 소록소록 마음을 열며 피어오르는 사랑의 숨결
더러는 눈길로 말하고 더러는 향기로 부르며
삶의 진실과 번뇌를 고백하는 여신의 숲엔 생명의 늪으로 빨려드는 무수한 영혼의 소리들.... -중략- ,장미밭에서. 1 중에서>
정용진씨의 에덴장미농장이 있는 폴부룩(Fallbrook)의 새벽은 안개로 시작된다. 낮은 구릉이 겹겹이 싸여진 곳에 짙은 안개가 멀리서 대지를 그 포근한 품에 안는다. 안개가 거치면서 아침은 시작되고 언덕 저편에서는 아침의 밝은 햇살이 부 채 살처럼 퍼져 간다. 정용진씨는 폴부룩(Fallbroof)을 추계동(秋溪洞)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곳에 삶의 뜻을 심고 살아간다. “이곳에 살면서 자연을 가꾸며 생활하다 보니, 여기가 고향인 것 같습니다. 안개와 함께 시작되는 새벽이 지나면 따가운 햇살아래 장미를 키우고 밤이면 늑대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듭니다. 가끔씩 학이 날기도 하고 제비가 집을 짓기도 합니다. 남들은 미국에 와서까지 농사를 짓느냐고 하지만, 이곳이 진정 제 마음의 뜻을 심은 곳입니다.“ 정용진씨가 미국에 온 것은 지난71년, 여주농고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한 정용진 씨는 단돈 1백 불을 가지고 유학을 왔고, 미국에 온 후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학교 공부를 마친 후에 LA 다운타운에서 마켓을 경영했던 정용진씨가 흙을 찾아 온타리오 농장으로 간 것은 지난77년, 그때 만해도 채소는 전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채소를 재배한다고 해도 집 둘레에 고추, 미나리, 쑥갓 ,등 을 조금 재배해서 마켓에 가서 필요한 물건과 바꿔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는 것 보다는 한국 사람이 한국채소를 가꾸어서 교포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온타리오 농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용진씨가 온타리오 채소농장을 처음 시작할 때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 2.5에이커의 농지로 시작했는데 말이 농지이지 말을 키우던 빈터였기 때문에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고생 속에서도 정용진 씨와 부인 정선옥씨는 고향의 땅을 일군다는 생각으로 개간을 시작했고, 풍작이 가져다주는 기쁨으로 고생을 잊었다.
관리는 까다롭지만 장미는 역시 ‘꽃 중의 꽃’
이런 노력으로 처음 2.5에이커의 빈터로 시작된 정용진씨의 채소밭은 4년 후에는 30에이커라는 대규모로 발전했다. 그러던 정용진씨가 채소농장을 그만두고 장미농장을 시작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제가 처음 채소농장을 할 때는, 별로 채소농장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채소를 교포들에게 공급한다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소농장을 몇 년 하고 보니까 너무 많은 한인 채소농장이 생겨서, 한인들끼리 경쟁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서 같은 한인끼리 경쟁하기 보다는 미국인을 상대로 하는 농장을 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곳 폴부룩의 장미농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장미농장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던 정용진씨가 미국인이 취미로 하던 장미농장을 대규모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83년 부터였다. 흔히 생각하기를 장미를 기르는 것이 낭만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장미를 기르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장미는 기온에 민감하고 병충해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고, 농약과 거름도 정기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또 가시가 있기 때문에 관리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름에는 환기가 잘 되도록 통풍장치를 해야 하고 겨울에는 온도를 적당히 유지시켜 줘야합니다.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에는 연료비만 해도 2만불 정도가 들기도 합니다. 관리가 까다롭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지만, 장미는 확실히 매력 있는 꽃이라고 정용진씨는 말한다. “장미꽃을 기르다보면 장미가 귀족 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그마한 관리 소홀로도 꽃이 시들고, 어제까지도 꽃을 피웠던 나무가 죽어갑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장미 기르는 일은 정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정용진씨는 하루 중에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온실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어제까지 없었던 꽃이 가지에 봉우리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봉우리를 볼 때마다 나날이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의 의미를 느낀다고 한다. 정용진씨의 하루는 새벽 4시30분에 기상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농장에 있는 집에서 기거하는 멕시코 인부5명과 정용진씨의 부인을 포함해 7명이 장미꽃과 함께 새아침을 연다. 새벽에 일어나면 정용진씨는 30마일 떨어져있는 칼스베드에 있는 조합에 꽃을 가져간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9시, 그때부터 꽃에 물도 주고 밤사이에 자란 꽃들을 잘라 묶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분주하게 시작된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은 5시, 5시 이후에는 정용진씨의 사색의 시간이 시작된다. 정용진씨는 하루 중 이 시간에 독서도 하고 글도 쓰면,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자연이 너무도 아름답게만 느껴진다고 한다. “제가 장미농장을 하고 있으니까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활짝핀 장미를 연상 하면서 저희 농장을 찾는데, 저희 농장에는 활짝 핀 장미는 없습니다. 장미가 피기 전에 봉우리가 지면 잘라서 판매처로 보내야 합니다. 완전 개화하면 보기에는 좋지만 상품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공휴일이나 기념일에 정씨 농장은 더욱 빠진다. 특히 발렌타인스데이 때에는 1년 중 가장 장미꽃이 많이 팔리는 시기이다. 1년 내내 장미가 꾸준히 나가기는 하지만 이때가 되면 수요가 늘고, 농장의 일손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용진씨에게 장미꽃을 사간 미국인 중에는 결혼 1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파티 장을 장식하기 위해 3,650송이를 사간 사람도 있고, 줄기가 긴장미를 선물 할수록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깊음을 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줄기가 긴장미를 주문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칼스베드에 집산된 꽃들은 전국 각지로 발송되는데 라스베가스도 결혼식이 많아서 많은 양의 꽃이 판매되어 나간다고 한다. 고향의 자연에서 시인의 마음을 물려받아 10에이커가 넘는 정용진씨의 집은 장미외도 감나무, 사과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무궁화, 포풀라로 덮여있다. 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취미이기도 하지만, 정용진씨가 자신의 집 주위에 이런 나무를 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매년 500여명의 친지들과, 교인 문인들이 저희 집을 방문합니다. 바쁘고 삭막한 도시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저희 집을 통해 고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을 집 둘레에 심었습니다.” 자연에 묻혀서 사는 정용진씨는 자연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그런 배움을 글로 옮기고 있다. 이미 지난 81년에는 ‘강마을’이란 첫 번째 시집을, 올해에는 제2 시집으로 ‘장미 밭에서’를 출간했으며 수필집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도 올해에 출간될 예정이다. 정용진씨가 글을 쓰는 것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갖게 된 것은 고향 여주의 자연으로 부터였다고 한다. “사람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으로부터 친근 한말을 들을 수도 있고 싸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잘 돌보면 활짝 핀 아름다운 꽃송이로 나를 반기지만, 제가 무관심해도 저를 해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런 저항 없이 시들어 갈 뿐입니다. “제가 성장한 여주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수려한 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져, 어린 시절의 저를 감동시켰고 낭만과 시심을 키워주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과 미국에 온 후에 잠시 도시에 살기는 했어도, 항상 제 마음은 고향 여주와 같은 자연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타리오 농장으로 가기로 했고 추계동, 이곳에 오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여기를 떠나지 않을 자정입니다. 이곳에 마음을 두고 살면 이곳이 바로 고향 여주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정용진씨는 미국까지 와서 부인 정선옥씨 에게 힘든 농사일을 하게 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부인 정선옥씨는 장미농장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제는 장미꽃을 기르는 것 외에 일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햇빛으로 얼굴이 마치 흑인처럼 검게 타도 장미를 기르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정용진씨가 살고 있는 폴부룩 지역은 전통적인 농장지대로 수십에이커씩 되는 농장이 많은 곳이다. 특히 원래부터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어서 동양인이 자리 잡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용진씨는 그런 어려움애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들과 함께 친한 이웃, 좋은 이웃으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 동네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항상 부지런하고 주위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바쁜 일과 중에서도 주위 경관을 위해 페인트도 칠하고, 도로 표시판이 없는 곳에 도로 표시판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해왔다. 또한 두 아들도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동네에 알려져 있어, 초청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말없는 꽃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정용진씨 집에 저녁이 찾아온다. 집 뒤편에 보이는 산들이 하나씩 붉은 노을에 휩싸여 가면서, 정용진씨의 시심은 고개를 든다. “자연은 항상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하게 됩니다. 사람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으로부터 친근한 말을 들을 수 있고 싸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 돌보면 활짝 핀 아름다운 꽃송이로 나를 반기지만, 제가 무관심해도 저를 해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시들어갈 뿐입니다. 그런 꽃에서 저는 겸손을 배우고, 제 생활의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또한 정용진씨는 이런 배움을 통해 낮에는 육신으로 농사를 짓고 밤에는 영혼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자연. 자연은 인간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은 문명의 그늘 속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돌아갈 곳으로 위안을 삼는다. 미국이라는 첨단문명의 사회에서 흙속에 삶의 뜻을 키워가는 정용진 씨의 인생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한 그 곳에 이미 돌아가 그 아늑하고 넓은 품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주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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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 여성중앙 1995년 3월호 장미 향기에 시심을 싣고... 장미농장 운영하는 시인 정용진 씨 1995 여성중앙 3월호(미주판) 글/ 김완신 기자
거친 땅에 장미를 피우기 위해 가지를 자르고 물을 주면서 땀을 흘리면 벌써 해는 저물고, 돌아와 가시에 찔린 투박한 손으로 시를 쓴다. 장미농장을 하는 시인 정용진 씨(55). 샌디에고 카운티 북단 폴브룩에 그의 농장이 있다. 낮은 구릉과 근처를 돌아가는 얕은 시냇물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이곳에 그는 삶의 뜻을 심고 살아가고 있다. 해가 저물어 갈대숲에 찬바람이 스치고 회색 구름이 나즈막히 내려앉는 저녁이 되면 그는 향긋한 땅내음이 배인 몸을 다시 추스르며 「자신과의 대화」라고 말하는 시를 마주한다. 그가 도시를 벗어나 산으로 둘러싸인 장미밭에 뿌리를 내린 것도 이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장미농장 이전에 채소를 가꾸던 시절까지 합치면 땅과의 인연은 20년을 이어져 내려온다. 한국에서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71년 유학으로 미국에 왔다. 미국에 와서는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수학했으며 식품점을 하면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그때에는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재배한 일본채소와 멕시코산 고추가 한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에서 여주농고를 졸업한 그는 재학 시에 배웠던 농사기술을 토대로 77년부터 한국채소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를 시작할 때는 한국채소 농장의 희소성 때문에 그가 재배하는 무, 배추의 인기는 대단했다. 몇 개 없던 한국마킷의 주인들이 농장까지 돈을 싸들고 찾아와 채소를 사갈 정도였다. 이렇게 사간 한국채소는 한국마킷에서 한국에서 직수입한 물건이라는 광고로 팔렸다고 한다. 온타리오농장에서 6에이커로 시작했던 농사는 몇 년 후에 50에이커의 농장으로 발전했고 농부로서의 생활은 착실한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경쟁도 심해지고 농사의 어려움도 많아졌다. 농업용수의 가격도 올랐고 여기저기서 한국채소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격의 덤핑도 시작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그는 한국채소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시를 수확하고 창작의 근원이었던 땅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런 중에 우연히 지금의 장소를 알게 되어 장미농장을 시작했다. 원래 장미 농장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전에 살던 사람이 조그맣게 장미밭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근처의 땅을 개간하고 그린하우스를 만들고 장미가시에 찔리면서 늘려간 것이 이제는 20에이커의 장미밭과 3에이커의 그린하우스를 가진 대규모 장미농장이 됐다. 모든 농사가 쉽지 않듯이 장미농사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다」는 말로써 대답을 한다. 그러나 그 대답 속에는 지난 10여년의 고생이 비추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미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 마치 활짝 핀 장미가 주는 신선함처럼 느껴져 온다. 「10년 넘게 하니까 이제 겨우 장미 키우기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은 난방용으로 그린하우스에 설치한 난로에서 일산화탄소가 나와 꽃을 망친 적도 있고 비가 많이 와서 꽃들이 모두 떨어져 수확을 전혀 못한 기억도 있습니다.」 병충해가 많고 적절한 온도에서만 장미가 피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해야 하고 농약비와 난방비로 쓰이는 돈도 수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농사와는 달리 장미농사가 어려운 것은 항상 수요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발렌타인스데이,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어머니날 등에 찾는 사람이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맞추어 개화직전의 장미를 출하해야 하는데 수요가 없을 때 꽃망울이 진 장미를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소용이 없고 한창 시즌에 때를 못 맞추면 재배하면서 했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누구나 장미농장이라고 하면 활짝 핀 장미가 온 밭을 붉게 물들이는 풍경을 연상하고 장미라는 말이 주는 화려한 모습을 기대하지만 정작 장미농장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장미봉우리와 농부의 손을 더욱 거칠게만 하는 가시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장미가 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매력이 있는 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장미를 생각하면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마음에 다가오고 장미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한 빛깔과 향은 다른 어느 꽃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피었다가 지는 꽃이 아니라 장미가 가진 귀족적인 습성은 장미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일생의 중요한 일에 그 화려한 색상과 아름다운 자태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가 갖는 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늦은 밤 그린하우스의 온도를 점검하고 정해진 때에 물과 약을 주어야 하는 단조롭고 힘든 일 중에도 그의 마음에 만개하여 그 누구에게 꽃송이만큼이나 큰 사랑과 행복을 전해주는 장미를 떠올리면 고된 노동도 생활의 즐거움이 된다. 장미농장을 하면서 기억 남는 일이 있다면 한 미국인으로부터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3천6백51송이의 장미를 주문 받은 일이다. 그 미국인은 이렇게 사간 장미를 그들 부부의 10주년 결혼기념일에 찾아온 축하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미농장을 통해 미국인들의 문화를 배우는 것도 그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장미는 예로부터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할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는데 미국인들 중에 특별한 날, 이혼한 부인에게까지 장미를 선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장미를 많이 출하해야 할 시기가 되면 부인 정선옥씨도 농부의 아내가 되어 손에 가시가 찔리는 것도 잊고 남편의 일을 돕는다. 또한 이들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에 열중하고 있다. 주로 먼 거리를 다니는 일이 많아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이럴 때마다 차안에서 듣는 설교테입과 찬송가는 주위의 풍경과 어울려 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는 기회가 된다. 하루 일과는 오전 4시에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짙은 안개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대지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시간에 전날 준비했던 장미를 싣고 폴브룩의 새벽길을 헤치면서 장미경매장이 있는 칼스배드로 간다. 7시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단을 묶고 저장을 하면서 지난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일들을 한다. 꽃이 아름다운 만큼 재배가 힘든 장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날 때도 됐는데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고 마치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세심한 정성과 주의로 약을 뿌리고 온도를 맞추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하루를 보낸 후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대하면 벌써 해가 산중턱을 내려가고 있는 저녁이 된다. 지난 71년 「지평선」동인으로 시작활동을 시작한 후 81년도에 처녀시집 「강마을」을 펴냈고 89년에는 시문학사에서 두 번째 시집 「장미밭에서」를 출간했다. 시 외에도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를 비롯한 에세이집을 발표했으며 제3시집도 원고가 완성돼 출판예정에 있다. 또한 미주한국문인협회에도 관여하여 이사장과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UC어바인과 하버드대학의 영문과에 각각 재학 중인 두 아들도 시를 쓰는 부친의 영향으로 이미 시인과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를 작정했다. 그는 자신의 시의 출발을 「자연 속에서 연상되는 지난날의 추억」이라고 하며 「자연과 더불어 엮어가는 삶 속에선 농부로서 육신의 양식을 얻고 시라는 사유의 결정체를 수확한다」고 말했다. 「시를 쓰면서 농장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항상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을 파기 때문에 계절을 어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고 이런 변화가 시를 쓰는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다. 도시에 살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시를 쓰면서 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문득 창밖으로 던진 눈에는 짙게 내려온 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다. 여름에 노란 유채꽃으로 현란한 자태를 보이던 산에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와 황량한 중턱에는 구름뿐이다. 내일이 되면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제 비가 오면 장미밭을 가꾸던 그는 또 다른 장미를 종이위에 그려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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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사포커스( Sisa Focus) ㅁ책소개 2007 07, 15 신윤정 기자
“오늘도 나는 연연한 사랑의 실타래를 풀어 절절한 사연을 하늘 높이 띄운다.“ -본문 중에서- 정용진 한영 시선집 그림 김난옥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
한국의 대표적 문호 정용진 시인이 내린 시의 정의다. 그는 193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법정대학 법률학과를졸업하고,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및 회장을 엮임 했으며 현재 한국크리스쳔 시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행문회회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강마을> <장미 밭에서> <금강산>등의 작품을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문필을 자랑했던 그는 제 10회 미주문학상을 수상, 제8회 한국 크리스쳔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미국의 시 전문지 'The International Library Of Poetry'에 의해 “The Best Poems& Poets 2005”에 그의 시가 첫 페이지로 선정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시인으로 자리잡았다.현재도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최근 새로운 작품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를 발표하며 또 한번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는 정용진 시인이 그동안 써온 500여편의 시 중 사랑을 주제로 한 71편의 시를 추려완성한 작품이다. 또한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중인 두 아들을 포함해 가족들과 함께 1년 가까이 직접 영역을 하면서 남다른 애착을갖고 있는 작품이다.한글과 영어로 이루어진 짜임새 있는 구성 외에도 정용진 시인의 담백한 필체와 더불어 시연 김난옥 화백의 고풍스런 그림이 몇 갑절 곁들여져 더욱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국전특선작가 김난옥 화백은 수차례 개인전을 거치고, 무등미술대전대상, 인천시전대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 뿐 아니라, 현재는 각종 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김화백은 이번 한영시선집<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를 통해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의 시집보다는 다양한 색감의그림을 넣어줌으로서 더욱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한 아름다운 시와 그림 감상 외에도 한글과 영어가 같이이루어져있어 영어공부에도 더없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이처럼 다양한 요소로 기대를 주고 있는 한영시선집<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는 정서가 메말라가는 이 시대에 사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써 많은 이들의 가슴에 다가갈 것으로 기대된다. 시사포커(SISA FOCUS) (07.1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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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인> 白螢雪(재미 언론인) News & People 1991.12.13일 <시사 주간지> 美洲문인협회 9대회장 정용진
“육신으론 농사를 짓고 영혼으론 詩를 쓰죠“ 샌디에고 근교에 3만평 농장 장미 가꾸는 “농부시인”
이질문화 속에서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고 얼을 찾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문인들의 모임인 ‘미주문인협회“ 제8대 회장으로 선임된 鄭用眞씨(53) 미국 태평양연안 남단 샌디에고 근처에서 ’에덴장미 농원‘을 경영하면서 항상 시와 수필 속에서 생활하는 전원시인이다. LA에서 자동차로 2시간 그가 경영하고 있는 농장에서 LA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쉴 사이 없이 해가 뜨기 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기에 한 단체를 이끌어가는 회장직을 고사했으나 간곡한 권고로 이번에는 임기 2년의 중임을 맡게 된 것. “ 현대의 발달된 문명, 즉 TV나 비디오 등을 통해서 지식습득이 가능하지만, 독서를 통해서는 지식습득은 물론 인생의 수련을 쌓는데도 큰 보탬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비록 작은 단체이지만 글을 사랑하는 문인들의 모임을 통해 동포사회에서의 독서활동을 펼 계획을 그는 갖고 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여주농고와 성균관대 법률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71년에 도미, 우드버리대학에서 경영학을 수학했다. 초기 유학생들이 그러하듯 주유소에서 일하며 고학했고, 곧 뒤따라 들어온 부인 이선옥씨(47)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조그마한 식료품점을 개업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달리며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아들의 재롱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꾸려가며 억척스럽게 살아 왔다. 그러나 힘든 육체노동은 견딜 수 있었지만 숨 막히는 도시생활 속에서 문학과 접촉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간직하며 살아갈 수 없는 압박감으로 조여와 기계소리만 요란한 도시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을 자산으로 LA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온타리오 시에서 3만여 평의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변신했다. 이때 LA의 동포 수는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재배한 배추 무 열무 고추 호박 등 동포들의 입맛에 맞는 채소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처음엔1ton짜리 트럭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LA에 채소를 실어 나르는데, 한국 마켓에서 서로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지요.” 그러나 채소나 과일이 인기품목이 되자 너도나도 많은 농장이 생겨나면서 이 일도 더 이상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농사를 짓는 일이 고달프기는 해도 싫지가 않아 그곳 농장을 후배에게 맡기고 지금 사는 에덴장미농원으로 옮겼으며, 채소대신 이번에는 장미를 가꾸는 농부가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특히 장미를 가꾸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닫곤 합니다. 장미는 알맞은 환경에서는 한 결 같이 자라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 그러다가 때가되면 소멸해 버립니다. 언제나 정직하기에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배신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숨 막히는 도시탈출 그러한 鄭씨도 장미원으로 옮긴 이듬해, 즉 LA 올림픽대회가 있던 84년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흔히 장미는 사랑의 꽃이기에 꽃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어머니날 다음으로 밸런타인스데이에는 그 수요가 엄청나게 된다. 따라서 이때를 대비해서 엄청난 양의 묘목을 심어두었는데, 그해 따라 이상저온으로 두 채의 비닐하우스 중 한 채에 있던 장미가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장미는 예상의 절반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흉작으로 엄청나게 오를 꽃값덕분에 큰 손해는 보지 않았어도 그때에 받은 마음의 충격은 컸으며, 이때의 경험으로 더욱 심혈을 기울여 재배했기에 더 이상의 실수는 없어 이제는 이곳 꽃 시장에서도 알아주는 대농장주가 되었다. 에덴장미농원은 대략 3만평의 넓은 초원이다. 약간의 채소와 과일나무가 있지만 그의 주된 농작물은 장미꽃이다. 5만 그루도 넘는 장미가 대략 3천 평 정도의 온실에서 자라고 있는데, 장미는 섭씨 15도 이상의 온도를 항상 유지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난방에 필요한 가스 값만도 한 달에 1만 달러를 넘게 쓴다고 귀 뜸하기도 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특히 장미를 가꾸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닫곤 합니다. 장미는 알맞은 환경에서는 한 결 같이 자라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 그러다가 때가되면 소멸해 버립니다. 언제나 정직하기에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배신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시인이자 농부인 鄭씨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매일 아침 동녘하늘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노라면 그 광경을 정말 한편의 시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신이 농사를 짓는다면 아마 영혼은 시(詩)를 짓는 것이 아닐지요? 그의 시작(詩作)은 때와 장소가 없이 하나의 생활이기도 하다. 장미들을 차에 싣고 꽃시장으로 가서 이를 도매상인에게 넘기고 오는 것이 매일의 일과다. 이젠 오랫동안 인연으로 이런 모든 일이 기계적으로 되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 소비되는 시간도 상당한 편이다. 그래서 차를 타고 다니거나 장미손질을 하면서도 시나 수필에 대한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메모지에 기록하거나 때로는 얼른 서재로 달려가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ㄹ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노력으로 한참 어려울 때에도 시집 “강마을”(81년 출간)을 펴냈고 지난 89년에는 “장미 밭에서‘와 에세이집”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자유시대사 출간)를 펴냈다. 이 장미원에는 문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럴 때면 도시보다 해가 일찍 져버린 이곳은 옛날 원두막이 있는 농촌의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한 정경이 보인다. 유리문을 열면 그대로 자연과)에 연결될 수 있는 리빙룸에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수페’의 서사곡 ‘시인과 농부’의 음률 속에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까지 곁들여지면서 둘러앉은 사람들은 더 이상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문학과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맨 처음/거부의 손짓이 있어/에덴을 상실한/그 아픔.../ 독실한 크리스천 그의 시 “에덴을 향하여”에서 엿볼 수 있듯이 鄭시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애초에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도미전에 교편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교인 성균관대학에서는 한문에 능통하고 유교학(儒敎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를 데려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전환을 위해 미국유학을 결심했고, 고학생활을 하면서 고독을 잊기 위하여,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인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 LA에 있는 연합장로교회에 나갔다. 구후 사정상 그 교회를 나와 뜻이 맞는 교우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살립, 점점 교회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온타리오와 샌디에고로 이주 했으면서도 2시간이나 운전하며 자신이 설립한 교회를 찾는다. 신앙에 대한 깊은 고찰도 했다. 힘든 노동에 비해 잠이 부족할 때가 많아 항상 먼 거리를 운전하면서 졸지 않기 위해 찬송가나 설교테이프를 듣는다. 과거 채소를 가꿀 때 만나는 상대들은 주로 동포들이었으나 장미를 재배하면서 부터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사소한 질문에도 진지하게 답하는 화란인, 씨앗 농기구 자재를 모두 자기나라의 것으로만 쓰고 있는 일본인, 상오엔 자기 농장에서 일하고 하오엔 이웃 농장의 일을 돕는 덴마크인, 미국의 농촌에 들어서면 각국의 언설어와 인종들이, 산과 들에 많은 나무와 풀들이 저마다 꽃과 열매를 가꾸듯 서로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다. “밭을 갈며 구름을 가는 것이 나의 꿈‘이라며 우리 동족들이 외국 땅에서 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곧 국력의 신장이요, 영토의 확장이며 주어진 신의 준엄한 명령이라고 믿는 정용진씨. 육신은 현실의 거친 밭을 갈더라도 마음은 늘 상 이상의 높고 푸른 구름을 갈 줄 아는, 동포사회에서 보기 드문 농부시인인 그는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시와 예쁜 장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白螢雪 (재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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