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지식의 원전 6. 최초의 수혈 헨리 올덴버그 2023 11 30
(참고 사항) 파란 글씨는 편저자가 쓴 글이고, 아래 검정 글씨는 원저자의 글이다.
고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섭취하면 젊음과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 예도 많았다. 1492년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쇠약해져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사망한 세 젊은이의 피를 섭취하였다고 한다. 어떤 방법으로 섭취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아마도 피를 그릇에 받아 마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비가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뒤로, 공급자의 동맥에서 수혈자의 정맥으로 직접 관을 통해 피를 수혈하는 방법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연구되었다. 1666년 11월 14일 왕립학회의 기록에 의하면,
‘전하와 콕스 경 입회하에 있었던 매스티프와 스패니얼 두 종류의 개를 이용한 수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전자의 피를 후자에 수혈하였는데 매스티프는 출혈이 심하여 죽었다. 수혈을 받은 스패니엘은 매스티프의 피를 받기 위해 자기의 피 일부를 뽑아내었다.’
왕립학회 회원이었던 사무엘 피프스Samuel Pepys는 11월 28일의 일기에 자기는 이 실험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이 실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살아있는 개를 추적한 결과 “이 개가 매우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실험은 로버트 보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나운 개에 온순한 개의 피를 수혈하여 길들일 수 있느니, 수혈을 받은 개가 피를 준 개를 알아보는지 등 수혈의 심리학적 효과에 관해 왕립학회에 문의하기도 하였다.
영국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수혈 실험이 행해진 것은 1667년 11월 23일이었다. 왕립학회는 베들램에 있는 병원의 정신병 환자를 실험에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병원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곤궁한 방랑 신학자인 아더 코가Arthur Coga가 1기니(영국의 옛 금화로 이전의 21실링에 해당함-역자 주)를 받고 지원하게 된다. 학회의 헨리 올덴버그는 보일에게 보낸 편지에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께서 의지하신 바와 같이, 다음 목요일에는 인간에게 행해진 최초의 성공적인 수혈에 관한 보고서가 작성될 것입니다. 학회가 주관하고 많은 의사들의 허락으로 지난주 토요일에 아룬델 하우스에서 있었던 이 실험에는 하워드 경과 그의 두 아들, 살리스베리 주교, 네다섯 명의 의사와 몇 명의 국회의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로어 박사와 킹 박사가 실험을 주관하였는데, 킹 박사가 능수능란하게 실험의 대부분을 진행하면서 환자를 아주 편안하게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전혀 통증을 호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실험 내내 얼굴조차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그 환자의 피를 6.7온스(1온스는 약 28그램- 역자 주) 정도 빼낸 뒤, 대략 8온스에서 9온스 정도 되는 어린 양의 피를 환자의 오른팔 대정맥에 주사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학회지 20호에 발표한 킹 박사의 방법대로 진행되었는데, 수혈을 좀 더 편리하게 하려고 은 튜브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다른 것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수혈하기 약 1분 전쯤 양의 피 12온스를 뽑아 작은 그릇에 담아놓았는데, 그는 작은 그릇에 담겨 있는 피를 보고는 좋아하면서 칼끝으로 찍어 맛을 보았습니다. 그 피가 신선한 것을 확인한 그는 의기양양하게 환자의 정맥에 그 피를 수혈하였습니다. 이 실험 전에 그는 한두 컵의 쌕(영국 포두주의 일종-역자 주)을 마셨고, 실험 후에는 쑥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담배 파이프도 피워 물었습니다만, 그것은 그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로 그를 취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수혈관을 환자의 정맥에서 뽑아 들자, 양의 피가 관을 타고 흘러나와 참석자들 모두는 정말로 피가 그 환자에게 들어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수혈 후 맥박이나 소화 기능이 모두 개선되고 건강이 좋아졌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 그를 관찰하였는데, 잠도 잘 잤으며 수술을 받은 그날 보통 때처럼 서너 차례 용변을 볼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를 보였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회장님(회장님은 바쁘셔서 아룬델 하우스에서의 실험에는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과 제가 수혈받은 환자를 보러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침대에서 잘 자고 있었으며, 킹 박사가 단언한 대로 전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코가는 라틴어로 된 이 실험 보고서를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는데, 거기에 참석한 피프스는 ‘코가가 침착하게 발표를 잘하였지만,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진 사람 같았다’라고 단정했다. 두 번째 수혈은 1667년 12월 12일 14온스의 양 피를 또 코가에게 수혈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코가는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수혈의 방법을 개발했던 몽펠리에의 약학 교수인 장 데니스Jean Denis의 환자 한 명이 1668년 수혈을 받은 후에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이후로 인간의 수혈은 중단되었으며, 1900년 혈액의 항체 항원 반응이 발견되고 혈액형이 구분된 후에야 좀 더 안전하게 수혈할 수 있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최초로 대규모의 수혈이 진행되었다.
왕실의 대신들과 학자들은 왕립학회의 이 수혈 실험을 줄곧 비웃었다. 당시 왕립학회의 수장이었던 찰스 2세마저도 과학자들이 공기의 무게를 재느라고 시간을 허비한다는 소리에(피프스의 표현에 의하면) 자지러질 듯이 웃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과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보잘것없었다(보일의 기체 압력과 부피에 관한 기념비적인 이 실험은 이런 식으로 왕실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1676년 초연된 토머스 섀드웰Thomas Shadwell의 연극 <거장The Virtuoso>에서는 니콜라스 짐크랙 경이 자기가 행한 수혈에 대해 떠벌리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보시오. 나는 인간에게 64온스나 되는 양의 피를 수혈했소. 이 수혈을 한 뒤 피를 준 양은 죽었지만, 피를 받은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의 피와 양의 피가 섞이지 않아서 약간 불편해했지만, 잠시 후 피가 잘 섞이자 매우 편안해했지요. (중략) 편집광적인 미친병에 걸려 발광하던 그 환자는 곧 순한 양처럼 변했소. 그는 끊임없이 음매 소리를 내며 울고 되새김질을 해댔소. 몸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그의 항문, 아니 엉덩이에서 노샘프턴셔 양의 꼬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