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의 절친한 친구 한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지혜롭고 성실한 그는 유능한 치과의사로 명성을 얻었고 다방면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모두들 그를 좋아하였습니다.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아프리카 케냐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현지에서 자동차 전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각자의 생각대로 그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래도 살다보면 좋을 일이 생기겠지요.”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길 테니 그때까지만 잘 참아내세요.”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좋은 일 많이 했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대?” “무얼 잘못했기에 그런 슬픈 일을 당했지?”
아들을 많이 사랑했고 또 그 아들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그 친구는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부러울 것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슬픔 가운데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가장 귀한 보물로 여겼던 아들을 떠나보내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고 절망했지만 주님의 실체를 체험하고 또 그 분의 역사하심을 강렬하게 느끼고는 곧, 구약성경 속 인물인 욥이 간증했던 것처럼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장 5절)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그 형제는 오래 동안 중단했던 치과진료를 다시 시작하였고 분명한 사명감을 갖고 예전보다 더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 각자의 처지에 따라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인생도 많습니다. ‘왜 사세요?’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딴 질문은 왜 하냐며 질문을 피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유에 대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식농사 잘 지으려고’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의 조건이 충족되면 우리 인생은 행복하기만 할까요? 송충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 왜 그렇게 열심히 잎사귀를 갉아먹고 있니?” 송충이가 대답합니다. “힘내려고.” 다시 송충이에게 묻습니다. “힘내서 뭐하려고?” 송충이가 대답합니다. “잎사귀 갉아 먹으려고.”
길어봐야 100년인 유한한 삶을 그저 송충이처럼 잎사귀 갉아먹으려고 사는 걸까요?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면 과연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요? 돈 많으면 행복해 질까요? 학벌이 좋으면 행복해질까요? 건강하면 행복해질까요? 도덕적으로 산다면 행복해 질까요? 종교적인 행습을 잘 지키면 행복해질까요? 과연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을 무엇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요? 개선과 변화의 에너지가 과연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 먹을 빵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입니다. 철학적 진리, 열심히 살아서 성실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노력, 의지할 만한 인맥과 권력, 학벌, 돈, 그 어느 것으로도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율법, 도덕, 윤리는 인간의 죄와 부끄러움을 가리는 포장지에 불과하며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인간이 자기 의를 만들어 보고 증명해 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방법이나 노력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인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1-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