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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 이야기 (2)
퇴계 선생의 고매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2일] 4월 5일(화) 동호(옥수동) 두뭇개공원→ 봉은사 (7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5일 퇴계 선생]
○ 퇴계 선생은 기유일(음력 3월 5일)에 동호의 두뭇개에서 배를 타고 동(東)으로 가서 봉은사에 잤다. 선생이 떠나는 것을 모두 애석하게 여겨 나루에 나와 만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 나와 전송하였는데, 좌중에는 흐느끼는 이도 있었다. 선생은 비록 호연히 떠나지만 작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선생이 봉은사에 머문 것은 ‘떠나는 발길이 더디다’는 뜻이 있었다.
○ 두뭇개나루터까지 나온 명사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하고 나와서 전송할 때 각기 이별의 시를 지었고, 선생도 시(詩)를 지어 화답하였다. — 이상《퇴계선생연보》
○ 봉은사로 가는 배 위에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먼저 송별시를 지었다.
江漢滔滔萬古流 강한도도만고류 한강수 도도히 만고에 흐르는데
先生此去若爲留 선생차거약위유 선생의 이번 걸음 어찌하면 만류할꼬
沙邊拽纜遲徊處 사변예람지회처 백사장 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
不盡離腸萬斛愁 부진이장만곡수 이별이 아픔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이어 박순(朴淳, 1523~1589)이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일행이 모두 시를 읊었다.
鄕心未斷若連環 향심미단약연환 고향 그리는 마음 이어진 고리처럼 끊임없어
一騎今朝出漢關 일기금조출한관 필마로 오늘 아침 한양을 나오셨네
寒勒嶺梅春未放 한륵영매춘미방 추운 날씨가 도산 매화 붙잡아
봄날인데도 아직 피지 않으니
留花應待老仙還 유화응대노선환 매화도 노선을 기다리겠지.
— 박순(朴淳) 《사암집》〈送退溪先生還鄕〉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시를 지었는데, 선생이 모두 응수할 수 없으므로 기대승(奇大升)과 박순(朴淳)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는 시(詩)를 지었다. 다음은 기대승의 시에 차운한 선생의 시이다.
列坐方舟盡勝流 열좌방주진승류 배에 둘러앉은 사람 모두가 훌륭한 인물들
歸心終日爲牽留 귀심종일위견류 돌아가려는 마음인데 종일 붙들려 머물렀네.
願將漢水添行硯 원장한수첨행연 떠나는 사람 벼루에 한강 물을 부어
寫出臨分無限愁 사출임분무한수 헤어질 때의 가없은 시름 적어내리라.
이어서 박순(朴淳)의 시에 차운한 선생의 시는 이러하다.
許退寧同賜玦環 허퇴영동사결환 휴퇴라 결환 내려주신 그 일과는 다른 건데
羣賢相送指鄕關 군현상송지향관 고향을 가리키며 뭇 어진이 전송하네.
自慙四聖垂恩眷 자참사성수은권 네 조정 후한 은혜 스스로 부끄러워
空作區區七往還 공작구구칠왕환 일곱 차례 내왕에 보답한 일 무어더뇨.
—《退溪集》(東湖舟上 奇明彦先有一絶 朴和叔繼之 席上諸公 咸各贈言 滉臨行 不能塵酬 謹用前二絶韻 奉謝僉辱相送之厚意云) * 玦環(결환)
○ 기대승과 박순은 선생의 제자들이다. 기대승은 선생과 8년간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변’을 벌였다. 기대승은 훗날 선생의 묘소의 비석글[墓碣文]을 짓는다. 박순은 대제학에 임명되자 스승 퇴계를 천거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야 합니다. 연세가 높고 학문이 깊습니다. 바라건대 저와 바꾸어 주소서.” 하며 양보하였다. 그는 선생의 별세 뒤에 묘소 속에 묻어두는 글[墓誌銘]을 지었다.
○ 선생을 배웅하러 나온 장안 명사와 선비들이 동호 앞 ‘저자도’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모래섬인 저자도는 지금의 강남의 도시개발을 위하여 모래[골재]를 파내고 한강 하류에 수중보를 설치하는 바람에 지금은 자취가 없다. 본래 두뭇개에서 강에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으로 버드나무와 닥나무가 우거져 시인묵객들이 바람을 쐬거나 멀리 떠나는 객을 전송하는 전별연이 자주 열렸던 곳이라고 전한다.
○ ‘저자도 전별연’(餞別宴, 환송연)에는 많은 명사들이 참석하였다. 이들 중 송별시를 남긴 이들은 기대승과 박순 이외에도 김귀영, 윤두수, 김성일, 권호문, 구봉령, 오건, 이순인 등이 있다. 이담과 성혼과 정철은 뒤늦게 송별시를 지었고, 정유일은 선생의 귀향을 환영하는 내용을 담은 시를 보내왔다.
○ 이 가운데 김성일(金誠一)의 시는 기대승(奇大升)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仙舟一葉遡江流 선주일엽소강류 신선이 탄 일엽편주 강 거슬러 떠가는데
風送歸帆不暫留 풍송귀범불잠유 바람은 가는 돛배 쉬지 않고 보내누나.
進退行違元筭定 진퇴행위원산정 나아가고 물러남은 본디부터 정한거니
臨歧莫用枉生愁 임기막용왕생수 가는 길에 속절없이 시름일랑 짓지 마소.
末路無人退急流 말로무인퇴급류 말세라 벼슬길에서 물러나는 이 없거니
名韁挽得幾人留 명강만득기인유 명리 굴레 벗어난 이 몇몇이나 되리로
此行繹繹無餘憾 차행역역무여감 여유롭게 떠나심에 남은 미련 없으니
一念猶關去國愁 일념유관거국수 한 생각 여전히 도성 떠나가는 시름일레.
—《鶴峰集(학봉집)》 (江上次奇高峰大升韻 伏呈退溪先生行史二首 己巳)
○ 이와 함께 이후 명사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膾炙)한 시가 있다. 이순인(李純仁, 1533~1592)이 지은 시인데, 퇴계 선생의 시에서 차운한 것이다.
漢水悠悠日夜流 한수유유일야류 한강 물 유유히 밤낮으로 흐르는데
孤帆不爲客行留 고범불위객행유 외로운 돛단배 나그네 행차 위해 머물지 않네
鄕關漸近終南遠 향관점근종남원 고향은 점점 가까워지나 종남산은 멀어지니
可是無愁還有愁 가시무수환유수 시름 없을 것 같건만 도리어 시름 있도다.
—《孤潭逸稿(고담일고)》 (江上송退溪先生 己巳三月)
이 시에 대하여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은 그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퇴계 선생이 남쪽으로 귀향하였을 때 일시의 명사들이 한강에 나와 전별하면서 이별하는 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순인(李純仁)의 시가 가장 가작이었다.”고 적었다.
* [2022년 4월 5일 귀향길 재현단]
▶ 오늘은 귀향길 여정의 제2일이다. 오전 8시, 귀향길 걷기 재현단은 두뭇개공원에 집결했다.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이 퇴계 선생이 하룻밤을 지낸 두뭇개나루의 몽뢰정(夢賚亭)과 그 주인 정유길과 퇴계 선생의 우의를 말씀하신 후, 출발에 앞서 두뭇개나루터공원에서 선현들이 주고받은 시(詩)를 읊었다. 전 안동문화원 원장 이동수 박사가 퇴계 선생과 명사들이 주고받은 시를 창수하고, 퇴계 선생의 시를 완역한 이장우 박사가 한시 해설을 곁들였다. …
오늘 귀향길 제2일의 시작은 〈도산십이곡〉 제1곡을 다함께 부르는 것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퇴계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에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후진을 양성할 때 지은 시조로서 총 12수로 되어 있다. 앞의 6수는 ‘언지(言志)’라고 하여 자신이 세운 도산 서원 주변의 자연 경관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읊은 것이고, 뒤의 6수는 ‘언학(言學)’이라고 하여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는 태도를 노래한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퇴계 자신의 자연 친화 사상과 함께 후학들에 대한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곡씩 부른다. 오늘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제1곡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렇다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리오
이 시에서 ‘초야우생(草野愚生)’은 시골에 은거하고 있는 어리석은 선비라는 뜻인데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천석고황(泉石膏肓)’은 자연[泉石]의 아름다운 경치를 몹시 사랑하는 성벽[膏肓]이다. 사람 사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은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을 추구하겠다는 소신을 드러낸 작품이다. ☆
한강의 물길을 따라서 걷다
▶ 1569년 이 날, 퇴계 선생은 배를 타고 저자도에 이르러 송별연을 하고 봉은사로 가셨다. 귀향길 재현단의 김병일 단장, 선비단 기수인 이한방 교수를 필두로 이동수 원장, 이장우 박사, 김덕현 박사, 도산서원 이태원 별유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강호 지도위원 그리고 이상천, 오상봉, 김영희, 송상철, 조민정 님 등 30여 명의 재현단은 동호대교 우측의 보도를 따라 한강을 건넜다. 이번 재현단의 진행을 총괄하는 이동신 별유사가 대열의 앞에서 향도를 하고 오상봉 님이 후미의 기수가 되었다. —
동호대교 남단에서 한강시민공원으로 내려가, 한강변의 따라서 조성된 바이크로드-인도(人道)를 따라 동쪽을 향해 걸었다. 올림픽대로 옆, 비탈에는 개나리가 만발하고 강가의 벚나무에는 이제 막 뽀얀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일행은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그리고 청담대교 아래를 지나서, 한강에 합류하는 탄천 하구에 이르렀다. 재현단 일행은 탄천을 따라 걷다가 봉은교 앞에서 강남구 봉은사로(奉恩寺路)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서 오늘[귀향길 제2일]의 도착점인 봉은사(奉恩寺)에 도착했다. 1569년 퇴계 선생이 마지막 귀향길에 이곳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과 봉은사
▶ 퇴계 귀향길 참가자들이 봉은사에 들른 것은, 퇴계가 귀향길 둘째 날 봉은사에서 묵은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 ‘억불숭유의 나라, 조선’에서도 성리학 최고봉으로 꼽히는 퇴계 선생이 왜 봉은사에서 묵었을까.
보우선사와 봉은사
○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조선 명종 때 왕실의 원찰이었다. 가까운 곳에 선릉과 정릉이 모셔진 뒤로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본사로 지정되고 보우대사가 주석하면서 성세를 이루었다. 명종의 어머니로 불교를 되살려야겠다고 발원한 문정왕후를 도와 보우(普雨, 1510~1565) 스님이 선·교 양종을 다시 세웠다. 또 승과를 부활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영웅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등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했고, 도첩을 꾸준히 발급해 정식 승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조정대신과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와 온갖 음해 속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불교의 법등은 조선시대를 건너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정을 농단한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도 죽여야 한다’고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퇴계와 율곡의 견해는 달랐다. 퇴계는 소문만으로 막대한 죄를 다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던 반면, 율곡은 보우를 당장 유배 보내라는 상소[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렸다. 율곡까지 나서자 명종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보우 스님은 제주로 유배 가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 퇴계는 학자·관리로서 불교를 반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안동의 용수사나 봉정사에 들어가 공부도 했고 스님들과 교류도 했다. 보우 대사가 문정왕후 사후 전국적으로 유생들의 비판에 직면했을 때 퇴계는 고향의 후학들에게 ‘나서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1569년 퇴계는 바로 마지막 귀향길에, 보우가 주석하던 그 봉은사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봉은사로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때 퇴계 선생의 감회가 어땠을까? 또 당시 봉은사 스님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퇴계 선생의 이런 정신이 제자들에게 이어진 덕분인지 안동 지역에는 지금도 옛 사찰이 그대로 남아 불교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보우대사와 퇴계 선생의 각별한 우의가 450여 년이 지난 지금, 귀향길 재현단에 봉은사에서 환대를 받는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봉은사의 환대
· 14:00~16:30 봉은사 천불당 (봉은사 교무국장 덕산스님과의 대화)
▶ 재현단 일행을 맞이한 봉은사는 구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했다. 그리고 대웅전 옆에 위치한 천불당(遷佛堂)에서 봉은사 교무국장 덕산 스님이 귀향길 재현단을 맞이하여 다담회를 가졌다. 천불당 기둥마다 “봉은사 방문을 환영합니다!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 순례단의 원만 봉행을 기원합니다. / 대한불조계종 봉은사” 라고 환영(歡迎) 표어를 써서 붙여놓았다. 김병일 원장이 이끄는 귀향길 재현단에 대한 봉은사의 따뜻한 환대였다. 무려 3시간이 가깝도록 유학과 불교 등에 관한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유가의 정좌(靜坐) 명상과 불교의 참선(參禪)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김병일 원장은 덕산 스님에게 퇴계선생 16대 종손 이근필 선생의 친필 ‘造福’(조복) 족자와 ‘隱惡揚善’(은악양선) 부채를 선물로 증정했다. … 봉은사에서는 귀향길 재현단에게 저녁식사까지 제공했다.
봉은사(奉恩寺)
봉은사(奉恩寺)는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84년에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1550년 선·교 양종체제가 부활하면서 봉은사는 선종의 으뜸 사찰이 되어 보우스님을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교종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었다. 이후 1562년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이 천장되면서 봉은사는 지금의 위치에 확장·이전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봉은사중수기〉에 의하면 백곡스님이 1670년 경에 다시 중창하였다. 그후 1790년에는 전국 불교를 관장하는 다섯 규정소의 하나로 꼽혔으며, 1856년에는 《화엄경(華嚴經)》 80권 판각을 이루었다. 당시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3일전에 쓴 것이라고 전해는 ‘板殿’(판전)의 편액과 건물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남아있다.
1911년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여 봉은사가 경기도 일원의 8군 78개 사찰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서산대사의 법손(法孫)이 주지를 하도록 하는 ‘봉은사본발사법’을 인가받아 시행하였다. 1925년 한강이 범람하는 을축년 대홍수 때는 주지 청호스님이 봉은사의 모든 재물을 풀어 이재민 708명을 구하기도 했다. 1939년 ‘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소실되고 말았는데, 현재 남은 당우는 1941년 태옥스님이 중창한 것이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대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서울 강남의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사찰로, 외국에 한국불교문화를 전파하는 중심도량이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