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 1의 빛
다음날은 오전 내내 비가 왔다. 다습한 공기에 오래된 자취방의 벽지는 한쪽구석 전체가 우글쭈글 해지고 흐린 날씨 덕에 짜개반만큼 들어온 빛은 방안을 평소보다 어둡게 했다.
“띵띵,띵~ 굿~모닝, 띵,띵,띵 굿모~닝, 빠빠빠빠~빠”
음습한 이 공간과는 이질적인 알람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여러 번을 더듬어 핸드폰을 쥔 뒤, 알람을 껐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소리지만 오늘은 알람시간보다 먼저 깨어나서인지 거슬리지 않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에 머리만 조금 아플 뿐이다.
어제는 과음을 했다. 내 주량을 넘어선 맥주 세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다른 날 같음 이른 오후쯤에 일어났겠지만 알람이 울린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생각이 많아지면 찾아오는 불면이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어디 아픈가?’
옆으로 누워있어 들어오는 시선은 책상 위, 책장에 꽂힌 책들이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미진선배 생각뿐이었다. 개강파티에 나타나지 않을 이런저런 경우를 들먹이며 선배를 변호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떠올리면서도 계속 붙잡았던 생각은 나에게 한 말은 분명 잊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런 망상의 더미사이로 회색빛 빗소리가 들려왔다. 지상을 향한 착지가 망설여졌는지 다소 경쾌하진 않은 빗소리였다. 박자도 엉망이고 세기도 일정하지 않은 빗물의 소리는 누군가 나를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 같았다.
“후둑! 후두두둑!”
그 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조심스레 귀 기울였다. 둥, 둥, 둥. 다시 또 울리는 스무 살의 심장소리, 비교적 거센 봄비에 유난히 붐비던 인문대학B동 현관, 이름 모를 배경이었던 3월의 들꽃들, 그리고... 21살의 미진선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구명에 육각 연필을 끼워 늘어난 테잎을 천천히 감듯, 나는 그날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갔다.
3년 전, 3월이라는 달이 무색하게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월요일부터 흐렸던 하늘이 수요일 아침까지 계속 되었고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금방 비를 쏟아낼 것 같은 구름들은 빠른 속도로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보이는 학생마다 입구에서 나눠준 기념품 마냥 비슷한 종류의 비닐우산을 전공책과 함께 안고 있었다. 3일 내내 내리지 않는 빗물과 밀당을 하다 공쳤던 몇몇은 호기롭게 빈손으로 다녔지만 대부분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은 면하고 싶어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구입한 모양이었다. 시계가 정오를 가리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창밖에는 거짓말같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 건물현관에 다다르자 정체된 출근길처럼 여럿이 입구를 서성거렸고 책이나 가방을 가리개삼아 뛰어가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동요되지 않고 현관입구에서 왼손에 있던 네이비색의 장우산을 치켜들었다. 오른손으로 잠금을 풀고 우산을 펼치려는데 귀에 꽂은 이어폰의 한쪽이 들리지 않았다.
“어~이, 빨간 이어폰, 너 사회학과 맞지?”
이어폰을 빼는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다행히 이어폰이 고장 난 건 아니었다. 음악대신 귀에 울린 음성은 다른 쪽에서 들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6번에 어울리는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렇긴 한데... 누, 누구?”
나는 동작은 빨랐지만 표정은 놀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맞구나!, 반갑다 얘, 너 신입생이지? 나는 06학번 장미진.”
그녀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톤으로 대뜸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악수는 했지만 그녀의 무례함 때문인지 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 네, 저는 민철우에요.”
“너 신입생 OT때도 이 이어폰 끼고 있었지? 색이 눈에 띄어서 단번에 알아봤지 뭐야. 그건 그렇고 초면에 미안한데 부탁 좀 할까? 나 저기 해송관 건물까지 우산 좀 씌어줄래? 거기에 친구들 있어서 딱 그곳까지만 씌어주면 되. 후배 좋다는 게 뭐야. 헤헤.”
이런 뻔뻔함은 어디서 배웠는지 그녀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부탁했다. 순간 많이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음... 네, 그렇게 할게요.”
평소 같았음 망설이다 결국 거절했을 내 입에서 예스가 나왔다. 보이진 않았지만 계속 그녀의 무언가가 나를 이끄는 듯 했다. 익숙지 않은 자신감과 함께.
“쓰으으”
“두룩!, 두루룩!”
둘 사이를 감싸는 빗소리가 방해한 탓인지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2분 거리의 코끼리상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옆을 볼 자신은 없었다. 처음 마주했던 해맑은 얼굴을 하나하나씩 기억해보며 걷는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저, 저기... 너 가방.”
“네?”
그녀가 오른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살펴보니 우산의 보호를 받지 못한 내 크로스백이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산은 정확히 그녀를 전부, 그리고 나의 3분의 2를 가리고 있었다.
“아... 괜찮아요.”
괜히 민망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색한 미소에 왼손으로 애먼 가방을 닦으며 답했다.
“아냐, 너무 많이 젖었는데. 철우야, 가방 이리 줘볼래?”
그녀는 오른손으로 가방을 달라는 몸짓을 취했다.
“진짜... 괜찮은데.”
“너 고집 있구나. 이 누난 정말 괜찮으니깐 나한테 줘.”
그녀는 웃을 때 눈이 사라지는 눈웃음을 띄며 말했다.
“아...네.”
나는 꾸물거리는 손동작으로 그녀에게 가방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또 한 번 나를 행동으로 놀라게 했다.
‘저러면 옷 다 젖을 텐데.’
그녀는 나보다 볼품없는 검은 가방을 비 맞지 않게 두 손으로 껴안았다. 하지만 구겨진 표정 없이 한결같은 발랄하고 선한 인상으로 남은 길을 걸었다.
이후로 5분정도 흐르고 우리는 해송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에서 우산을 접고 내 가방을 받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백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다.
“잠시만..”
비를 한가득 머금은 우산을 털며 기다리는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철우야, 진짜 고마워. 덕분에 비 하나도 안 맞고 왔어.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이걸로 젖은 곳 좀 닦아.”
그녀는 하얀 배경에 수채화 물감으로 분홍색, 다홍색 꽃이 그려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눈이 더 가는 곳은 손수건보다 하얗던 가녀린 그녀의 손이었다. 내 가방을 쥐던 그 손엔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감사합니다.”
부끄러워서인지 나는 무심한 대답과 70도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우산을 펴고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물건을 어디에 두고 온 사람처럼 서둘러 걸었다.
“정말 고마워! 다음에 또 보자.”
몇 발자국 더 걸어 노란 복수초가 촘촘히 핀 화단을 지날 때 내 뒤에서 그녀의 인사가 들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목소리에서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사실은 화단의 꽃향기를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녀의 향기가 내 머릿속에 묻어 언제든 그녀의 모습만 상상하면 그녀의 향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수건에 묻어있던 온기까지도.
오후가 시작될 무렵, 나는 어제와 같은 곳에 있었다. 기분 탓인지 살짝 너덜해진 개강파티 벽보 근처, 선배를 다시 만난 곳이다. 선배의 안부가 궁금했던 나는 수강정정 기간이란 걸 이용해 어제와 같은 시간, 선배의 수업이 한 번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의실 주변을 서성거리며 선배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강의가 시작하기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의가 시작되고 강의실의 문은 닫혔다. 문에 달린 희미한 창으로도 선배를 찾을 수 없었다. 교수님의 마이크 소리 틈으로 얕은 숨을 마시며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50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을 주겠다는 알림과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창가 벽에 기대어 발끝만 바라보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너, 민철우 맞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을 때, 내 머릿속으로 다섯 글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기생오라비?’
서로 일면식정도 있는 사이였음에도 상우선배는 용케 나를 알아보았다. 촌스런 검은 뿔테안경과 얍삽함이 더욱 돋보이게 하는 청재킷은 여전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어쭙잖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 안녕. 아! 잠깐만 기다려봐.”
상우선배는 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갔다.
이삼 분이 지난 후, 선배는 두 손에 책 더미를 안은 채 나타났다.
“안 그래도 너 찾고 있었는데. 미진이가 이거 전해달라고 했거든.”
선배는 카키색 표지의 드로잉 북과 메이크업과 관련된 책자 두 권을 나에게 권내였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미진선배는...”
책들을 받으며 내가 물었다.
“아, 연락 못 받았나 보네. 미진이 어제 집에 내려갔어. 뭐 급한 일이 있나봐.”
상우선배는 별 일 아닌 듯이 그녀의 소식을 전했다.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그 곳에 계속 있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신경이 쓰이는 마음을 숨기고 싶기도 했고.
그녀를 잊기로 한 적도 있었다. 아니 잘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제멋대로 나타나 나를 들쑤신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상우선배에게 받은 책자들을 다시 보고는 살짝 미소 짓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른 손에 있던 우산을 펼쳐 빗속을 걸어갔다.
“선배, <메이크업의 실제와 활용>수업 듣죠?”
“어, 그런데 왜?”
“저 다음 학기에 그거 한 번 들어볼까 해서요.”
“뭐? 네가 왜?”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 요즘 그루밍족이 대세에요. 남자도 꾸며야 한다고요.”
나는 자신 없지만 설득하고 싶은 어조로 대꾸했다.
“야, 야. 화장도 본판이 있어야 잘 먹지. 남자 화장은 아이돌이나 하는 거야. 아서라, 얘.”
선배는 다시 기가 찬 표정을 추가해 손을 앞뒤로 휘저으며 반대했다.
“아이, 참. 남자도 들을 수 있지... 참.”
‘바보 아닌가? 내가 그거 듣고 싶다는 걸 진짜 믿다니.’
아직까지도 엉뚱한 면을 못 벗은 그녀생각에 내가 조금은 어른이 된 거 같았다. 그리고 그녀와의 다른 시간들을 생각하며 어른스럽지 못했던 내 태도에 후회를 했다. 사실 진짜 바보는 나라고 느꼈던 그 때를 생각하며.
갑작스레 그녀의 연락을 받고 등나무 앞 벤치로 나갔다. 저녁 11시, 조금 있으면 기숙사문이 닫힌다. 하지만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짐을 하는 순간, 그녀는 맥주 두 캔과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어~이, 철~~~스.”
가까이 다가오자 붉게 물든 두 볼에 약간 풀린 눈이 보였다.
“선배, 술 마셨어요?”
“누나가 오다가 살짝 한 잔하고 왔징. 철~~스, 자, 따라봐!”
그녀는 컵도 없이 맥주 캔을 건네며 말했다.
“살짝이 아닌 거 같은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지, 아주 큰~~~일!”
“무슨 일인데요?”
“...”
그녀는 흥이 오른 방금과 다르게 몸을 조금씩 흔들며 뜸을 들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 고백 받았어.”
나는 그녀를 부축하다 멈칫했다. 몇 초 후, 다시 부축하며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사실은 잘 못 들은 거라 믿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이완 선배 알지? 생각도 못했는데, 그 선배 인기 많으면서 나 같은 애한테 고백을 다하고. 참.”
“선배가 어때서요?”
“나 편들어 주는 거야? 에구, 고맙다.”
그녀는 다시 흥이 오른 귀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 어떡하지? 일단은 생각 좀 해본다고 했는데, 이게 참 생각 없다가도 막상 고백을 받으니깐 생각이 많아지네. 나, 어떡해? 철우야.”
“만나지마요.”
내가 대답했다.
“어?”
“만나지 마요, 그 선배.”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