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들
김연종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이 무엇일까
악어가죽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많던 애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요즘 어때?
기분을 묻는지 근황을 살피는 것인지
감출 수 없는 가벼움이 미간에 떠오른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을 때
빨간 립스틱과 반짝이는 아이라인들
시는 잘돼?
이제 막 잊혀지려는 찰나
아련하게 떠나갔던 목소리가 화면에 도착한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문장으로 되물었을 때
시집 두어 권과 퇴고하지 못한 쪽지들
별일 없고?
새살이 차오르기도 전에
과거를 파고드는 질문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덧난 상처를 다시 건드렸을 때
네모반듯한 손수건과 반송된 메시지들
검은 새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구찌, 페라가모 샤넬, 루이뷔똥...
가방들이 춤을 춘다
가방들이 택시를 타고 KTX를 탄다
가방들이 일렬로 서서 한강에 뛰어 든다
명품들이 미세먼지처럼 몰려다닌다
가방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치즈와 김칫국이 가방에서 동시에 태어난다
새 가방과 버려진 가방이 동시에 카톡을 보낸다
'가방끈 놓지 마라 놓치면 다 죽는다' 가방이 진동한다
가방은 대꾸하지 않는다
B주류
306 보충대가 있던 시절이었다 화요일에 비가 온다는 갑작스런 예보였다 당황한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면 우리 동네는 마비가 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간 옷을 입은 사내가 비광처럼 입소할 거란 소문이 돌았다 노인정 화투판이 발칵 뒤집혔다 연예가중계를 본 가게들도 모두 셔터를 올렸다 강타가 올 때도 세븐이 다녀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비는 내리지 않았고 김태희도 오지 않았다 이제 306도 문을 닫았고 보충대 앞 주공아파트도 철거 예정이다 월드 가수 비가 들렀다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빌라는 오늘도 비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메인 화면은 보지 않고 자막뉴스만 본다 텅 빈 주행선을 두고 비스듬한 갓길로만 달린다 발레보다 B보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B급 정서를 터부시하면서도 강남스타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다 막장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를 배우지만 조신 모드로 글을 다듬는다 입질이 없으면 막고 품으라는 식의 저렴한 미끼로 문장의 아가미를 낚는다 시상식이나 만찬장에서 주류는 마이크 볼륨을 높이고 비주류는 귓속 볼륨을 높인다 비타민처럼 아낌없이 뒷담화를 퍼붓는다 터무니없는 비난에도 개의치 않는다 자체 발광인 주류가 덕담을 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B주류가 건배를 자청한다
Beautiful Night
&&&
Begin Again
동거
살만큼 살았다고 박차고 나가지만
막상 나를 떠나는 순간
온갖 멸시와 천대를 겪으며 세상에 버려지는
머리카락이 그렇고
손발톱과 대소변이 그렇고
타액과 정액 또한 그렇다
한때 나였다가 나의 일부였다가
가장 추한 모습으로 나를 찔러대는
뼈와 살을 내어주마더니
간까지 빼어 주겠다더니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더니
부딪치면 깨졌다
떨어져 있을 땐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불빛마저도
잠깐 스쳤다 사라져버린 꿈과
오래토록 나를 옭아맸던 신념과
영원히 내 곁에 있으리라 믿고 싶은 사랑
내가 집이라고 굳게 믿고 들락거렸던
패밀리
병신들
둥근 밥상머리
한 쪽 모서리가 우물거린다
곰곰 되씹다가 대못이 된
간혹 듣고 자주 중얼거린
결국 내게 되돌아온
씹다만 껌처럼 아무렇지 않게
병신들
속을 뒤집고 밥상을 뒤집고
고스톱 판이라도 뒤집어야 직성이 풀린다
둘러앉은 식탁이 내뱉는
내가 내 상처에 겨누는
눈을 감아도 찔러대는
이토록 질긴 모서리들
진품명품
네 순서 맞니?
꼭 이번에 낳아야겠어?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생각 안 하고?
생리휴가 쓰려면
피묻은 생리대를 보여줘
생리혈로 쓴 휴가 계획서를 제출하던지
신성한 달거리에도 죄의식에 시달린다
달빛 교성은 소프라노 음색으로만 울려퍼진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화분을 선반에 올려 놓는다
땅콩회항이라니 언니
물컵은 깨지지도 않았어
서류뭉치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
반상의 구별도 못하는 아랫것들한테
머리를 조아리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레드카펫이라면 몰라도
포토라인이라니 기가 막혀
분리불안이 있는 라일락을 꺾어 화병에 꽂는다
가짜가 가짜를 고발한다
선채로 죽은 나무들이 유튜브에서 핏대를 세운다
벽보는 이미 훼손되었어
시든 꽃을 보느니 사랑과 전쟁을 다시 보겠어
페이크 뉴스로 사타구니 계곡은 온통 몸살을 앓는다
쌍욕을 하고 떠난 자는
미아가 되었거나 미숙아가 되었다
애지중지 분노조절장애를 진품명품에 의뢰한다
나도 내가 누구였는지도 잘 모르게 됐어 거울에다 지껄여봐 너는 대체 누구니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 할 수가 있었어 널 위해서라면 난 아파도 강한 척 할 수가 있었어
요실금처럼 흘러나오는 페이크 러브를 반복해서 듣는다
2018년 <마하야나> 가을호
첫댓글 진품명품이 다 패밀리? b급? 모두다 가방에 다 있네요. 우리들의 못난 것들, 다 있네요......가방 싸! 스스로에게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