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는 것이 불가의 법도인 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한동안 휴일 새벽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달려 봉선사에 갔었다. 90년대 초반,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친구는 봉선사 새벽 예불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옆에 있어 주는 것, 새벽 봉선사에 가서 같이 촛불을 켜는 것 말고는 친구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새벽 두시반 집을 나서 봉선사에 닿으면 네시, 큰법당에의 창호문이 모과빛으로 변하고 새벽 예불이 막 시작되는 시간이다. 봉선사 일주문 근처의 수양올벚나무가 어둠 속에서도 하얀빛을 발했다. 워낙 단단해 병장기로 이용할 수 있어 승병을 기르던 절 입구에 많이 심는다고 친구가 말해줬다.
싸한 새벽공기,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던 하얀 벚꽃, 그리고 목탁소리... 얘네들은 지네들이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인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벚꽃이 축축 늘어져 바람결에 흔들거리고 있다. 도심을 비켜났다고는 하나 매연과 소음에 올벚나무의 삶도 퍽 고단한 모양이다. 작년보다 꽃송이가 더 성글성글하다.
친구 덕분에 봉선사에서 처음 법당에 들어가봤다. 옆 사람을 따라 절을 하고 앉고 서고 절을 하기를 반복했다. 놀러가는 곳으로만 알았던 절집이 종교적 공간임을 처음 느낀 곳이 봉선사인 셈이다.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 사이로 봉선사에 갈 때면 이 길과 광릉을 우리에게 남긴 세조를 생각한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형제들을 죽인 무소불위 제왕의 삶을 누린 세조도 결국은 인간, 생전의 죄로 인한 공포가 컸을 것이다. 시체가 빨리 썩게 석곽과 석실, 병풍석을 절대 쓰지 말고 자신이 묻힌 광릉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건들지 말라는 지엄한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세조가 묻힌 광릉은 소박하고, 광릉 숲은 천연기념물의 보고가 될만큼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생전에 지은 업보의 두려움으로 우리들은 오백년간 인간의 손이 타지 않은 광릉숲을 갖게 되었다. 걷기도 아까운 전나무 숲길을 우리들은 매연을 내뿜으며 달린다.
봉선사에서 마주치게 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춘원 이광수. 6.25로 전소된 봉선사를 중창하면서 절집 최초로 한글 현판에 한글 주련을 단 운허 스님이 이광수의 팔촌형, 부도밭에 춘원 이광수기념비가 세워진 연유다.
창씨개명과 징용, 학병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글을 쓴 뼈 속까지 친일파였던 춘원이 봉선사에서 불교에 귀의하며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반성했는지는 춘원만이 알 길이다. 봉선사에 잠시 기거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면 그의 변절의 역사를 봉선사에서 기억해낼 이유가 전혀 없었을텐데...
세조의 유언으로 엄격하게 보호되며 지켜진 숲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우리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운허 스님과의 인연으로 봉선사에 기념비를 남긴 친일파 춘원. 삶이란게 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길 위에서 떠올리는 삶에 대한 성찰만으로 봉선사에서 세조와 춘원은 충분한 역할은 충분하다. 나의 삶은 당당한가, 잘살아야겠다.
참...봉선사 공양은 아주 근사하다. 강화 순무 한조각으로 한끼 공양이 가능한 석모도 보문사 공양간과는 격이 다르다. 지성으로 차려진 밥상은 너무 황홀해 거의 정신을 잃게 한다. 공양간을 찾아들면 이곳에 연을 가진자든, 갖지 않은 자든 내치지 않는다.
여름철 연꽃 축제를 하는 야단법석 기간만 아니면, 언제든지 공양이 가능하다. 야단법석 기간에도 참 양심껏 돈을 받는다. 천원짜리 국수, 이천원짜리 비빔밥,,, 다 근사하다. 생각해보니 새벽 봉선사에 가본지가 꽤 오래됐다. 혹 밤을 새게 된 날, 밤과 아침의 경계가 무너진 날, 봉선사에 가야겠다.
봉선사 백련을 보러 갔는데, 백련은 꽃봉우리를 열심히 맺고 있을뿐 아직 피워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알싸한 백련향이 내내 코끝에 머물렀습니다. 봉선사 객승 방 쪽마루에 벌러덩 누워있던 초이가 어느 순간 일어나 어슬렁 거리고, 어딘가에 앵글을 맞추더니 봉선사에서의 우리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따로 또 같이... 함께 길을 떠나도 템포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해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미쳤습니다. 돌계단에도 앉고, 마루에도 앉고, 혼자서도 앉아 있고,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문득 풍경과 우리들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느낌조차 의식해 본 적이 없는데, 오랜만의 동행가 보내온 사진으로 우리들의 봉선사를 한걸음 떨어진 낯선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