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칼럼]
■옛 적십자 병원, 광주항일독립운동 기념관으로 활용하자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소 소장
https://jnilbo.com/2020/03/17/2020031610574019380/
역사 속에서 축적된 광주인들만의 정체성, 문화적 기질을 ‘광주정신’이라 한다면 그것은 ‘정의로움’과 ‘당당함’이 아닐까 싶다. 광주인들의 DNA가 된 정의로움과 당당함은 가슴 속에만 머물지 않고 발로 뛰어 실천으로 옮겨졌는데, 뜨거운 실천성도 ‘광주정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정의로움을 실천한 광주정신의 상징으로 5·18 민주항쟁을 든다. 그래서 광주를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광주를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실천지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한말·일제하 최대 항일독립운동의 실천지 또한 광주를 포함한 남도였기 때문이다. 광주를 포함한 남도가 항일독립운동의 주 실천지였음은 구체적인 다음의 몇몇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광주·전남은 한말 최대 의병항쟁지였다. 1909년의 경우 의병 전투 횟수의 47.2%가, 참여 의병수의 60.0%가 남도에서 벌어졌고, 남도인이 참여했다. 3·1운동 당시 광주천변의 장터에서 는 천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이 된다. 1919년, 국가보훈처는 일제하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형무소에 수감 된 독립운동가 5,323명 중 광주·전남인이 1,985명이라고 발표했다. 37.3%로 전국 최다 인원이다.
옛 적십자병원이 시민의 손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리고 5월 항쟁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부상 당한 시민들을 치료했던 이곳을 향후 5·18 선양사업에 활용한다는 보도도 접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필자는 옛 적십자병원을 ‘광주항일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어 활용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왜 항일독립운동기념관이어야 하는지는 적십자 병원과 병원이 들어선 터가 품은 역사적 원형을 확인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1909년 2월 3일, 이곳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한말 남도 의병의 물꼬를 튼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의 처형 장소다. 그리고 옛 적십자병원은 이전 측량학교 건물터로, 1917년 이곳 측량학교 건물에 정상호,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등 젊은 지식인들이 신문잡지종람소라는 간판을 달고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던 현장이었다. 이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광주 3·1운동의 한 축이 되었고, 이후 광주 독립운동의 리더가 된다.
또한 이곳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고보생들을 비롯한 농업학교·광주여고보생들이 충장로, 옛 도청, 전남대병원, 광주천 부동교로 이어지는 행진 루트였다. 뿐 만 아니다. 일제하 농민·노동·사회운동과 야학을 통해 광주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흥학관은 5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다.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의 흔적 위에 1980년 5월, 피를 나눈 광주의 공동체 정신이 옛 적십자 병원에 더해진다. 이처럼 옛 적십자병원은 많은 다의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광주정신의 중요 상징터다.
옛 적십자병원이 품은 5·18의 공동체 정신도, 광주 3·1운동을 잉태하고 실천했던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이었음도 다 중요한 광주인들의 자산이다. 다만, 광주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필자는, 광주가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였음을 기리고, 연구하고 간직하는 장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광주 3·1운동을 포함, 항일독립운동의 혼이 서린 옛 적십자병원(터)을 광주항일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광주항일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서면 광주의 또 다른 정체성인 항일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정리하고 기릴 수 있도록 도서관, 독립운동단체, 관련 연구소도 입주시키자. 한말 의병, 광주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항쟁으로 면면히 이어진 광주정신을 기리는 기념장소로 만들자. 그래서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만이 아닌 항일독립운동의 성지였음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