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7장
1. 지혜자의 마음(1-4)
성경 내용을 실천한다 해서 말씀에 순종한다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성경의 말씀도 없거니와, 설령 실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자 내용대로 움직인 것뿐입니다.
가령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내용대로, 잔칫집이 아닌 초상집에 갔다고 해서, 성경대로 실천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은, 실제로 초상집에 가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문자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과 다르게, 렘 16:5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내용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문자로 서로 대립되는 내용이 허다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문자로 대하게 되면,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 역시, 초상집과 잔칫집의 의미는 도외시하고, 단지 몸이 초상집에 가는 것을 성경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도자가 말하는 잔칫집은 혼인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혼인집보다 초상집으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몸이 초상집에 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문자 의미대로, 혼인집이 아닌 초상집에 가야 하는 것이면, 모든 초상집을 다 찾아가야 하는, 난감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설령 모든 초상집이 아니라, 아는 사람의 초상집으로 범위를 축소한다 해도, 그 또한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는 사람 집의 초상이라 해서, 모두 찾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상집과 혼인집은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초상집에는 인생의 끝으로 인한 슬픔이 있는 반면, 혼인집에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기쁨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초상집에는 인간이 꿈꾸는 행복과 희망이 없는 반면, 혼인집에는 행복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넘치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초상집에서는 위로의 말을 하게 되지만, 혼인집에서는 축하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방향도 다릅니다.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이 말처럼 초상집에서는 인생의 끝을 생각하게 됩니다.
혼인집에서 끝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 있는 곳이 초상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죽음의 존재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주되심은, 당연히 모든 사람의 끝을 보게 하는 초상집입니다.
이런 이유로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실제로 초상집에 가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끝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자의 마음입니다.
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여러분은 이 말에 공감이 됩니까? 좋은 이름을 명예로운 이름의 의미로 해석해 보면, 좋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좋은 기름, 곧 소유의 가치가 되는 기름보다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명예와 돈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라고 했을 때, 우리 마음은 돈에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라 좋은 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성도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성도라는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습니다. 인간의 이름에는 모든 사람의 끝인 죽음만 있지만, 성도라는 이름에는 심판에 속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예수 안에 부르심으로 얻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라는 이름은, 인간이 꿈꾸는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꿈꾸는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상이 가치를 두는 좋은 기름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의 행복에 모든 뜻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좋은 이름보다 좋은 기름이 더 낫다고 할 것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죽는 날은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되는 두려움의 날이지만, 출생하는 날은 인생이 시작되는 행복과 축하의 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인간의 마음은, 죽는 날이 아니라 출생하는 날로 향합니다. 그런데 만약 누구든 죽는 날을 더 낫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그 세계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끝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 끝의 자리에서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죄의 존재를 붙들어 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피의 공로와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성도에게 죽음이라는 끝은, 끝이 아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는 끝을 잊게 되면, 현재의 달콤한 행복만 추구하게 됩니다. 혼인집에 있는 기쁨과 행복이 계속되는 인생에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우매한 자의 생각입니다.
세상은 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끝이 어떻게 되는가에 마음을 둔다면, 소유 또한 헛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초상집에서 얻는 유익이기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사람의 끝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잠 10:2절에서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모든 사람의 끝을 봄으로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끝이 죽음인 것은, 소유도 권력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임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는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피가 의가 되어, 죄의 권세에 붙들린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이 공의가 증거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평이고, 공평이 현실화되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인간은,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 조건의 여부와 관계없이 죽습니다. 때문에 소유의 차이는 차별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이고 율법을 주심으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고, 공평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죽음의 현장에서 확인하고 경험합니다. 이것이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고후 1:9-10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세상은 자신의 일만 잘되면, 아무 문제없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품고 있는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잊고 있습니다. 누구나 초상집에 갈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초상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혼인집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초상집에 갔으면서도 인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우매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혼인집이 아니라 초상집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죽음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 지혜자의 마음입니다.
2. 책망과 노래(5-7)
인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멀리하고, 유리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종교를 선택하는 것도, 신을 믿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행동입니다. 교회를 찾는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를 믿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유리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입니다.
믿음이 인생에 불리하게 작용할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들 때 위로가 되고, 마음에 평안을 주기도 하고, 즐거움이 되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습니다.
만약 믿음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인생에 있어서도 전혀 유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있다면, 예수를 믿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여러분이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리하다거나 즐거움이 된다거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붙들려간 대제사장의 집 바깥 뜰에 있을 때,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추궁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를 알아보는 다른 여종이 또 있었지만, 베드로는 또 다시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아는 관계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 예수님과의 관계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도, 유리하지도 않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인간의 헛된 망상과 착각은,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에 유리할 것으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하나하나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리한 내용들뿐인데, 유리한 내용으로 교묘하게 해석합니다. 그로 인해서 성경의 기능이며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책망이 사라집니다. 목사의 설교에 책망이 있다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목사의 책망일 뿐 성경의 책망은 아닙니다.
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누군가에게 책망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윗사람이거나 힘이 있는 사람의 책망이라면, 어쩔 수 없이 듣고는 있겠지만, 속마음은 불편할 것이고, 책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을 바르게 지적하는 책망이라 해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연히 책망 듣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대신 노래 듣는 것을 선택합니다. 노래에는 즐거움이 있을 뿐,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의 믿음은 모방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방을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을 알고 그 믿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방된 믿음이 인간에게 유리하고,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잘하면 복으로 보상되는 것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책망이 없습니다. 책망이 있다 해도, 인간의 기준에 의한 책망 아닌 책망일 뿐입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만, 인간은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으로 주어지는 유익을 알지 못합니다. 진리는 우매한 자의 노래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단지 자기감정에 충실하기에, 책망은 기분 나쁘고, 노래는 기분 좋다는 단순한 감정에 따라 판단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우매함을 드러내고 깨닫게 하는 것이 책망인데도 불구하고, 책망을 듣고자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지혜로운 자의 책망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된 진리에 관심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 16: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활동하시는 것은 책망입니다. 책망은 단순히 죄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기준이, 잘못되었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인간의 기준에 의하면, 믿음이 정당한 자와 정당하지 못한 자의 구분이 있게 됩니다. 인간의 행함이 기준의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 기준에 부합하면 정당하고, 부합하지 못하면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행함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면, 스스로를 책망의 대상자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책망을 들어야 한다 해도, 행함에 미흡한 부분을 수정하면, 얼마든지 정당한 믿음이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낫다 해도, 자신에게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의 유리함만 추구하며, 예수 또한 인생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배척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무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 12: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가 주라고 믿어주고, 입술로 고백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주변의 사람들도 믿음으로 인정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이 아니고는 안된다고 합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고, 책망을 통해서 자신이 죄에 갇힌 저주의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인간의 무능력과 불가능성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시는 모든 내막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가게 하고,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매한 사람의 노래를 듣는 자리에는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죄의 존재인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즐기는 것에 더 깊이 묻히게 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어 알게 하는 책망이야 말로, 주를 보게 하고, 진리로 이끌어가는 유익인 것입니다.
6절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는, 처음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 올랐다가, 순식간에 꺼지는 특성을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존재인 인간에게 생명이 되는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우리를 잠시 웃게 하는 것이 전부인 헛된 것에 치우쳐, 진리를 외면하는 우매함의 실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의 실상, 자신의 처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가, 결국 지옥의 탄식이 된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미련함입니다.
7절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뇌물은 자신의 탐욕을 현실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병폐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실상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유익을 기대하고, 신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뇌물의 의미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망하는 자의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심판의 존재라는 사실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씀이 되어, 우리를 책망하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며, 진리이신 주께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매한 자들의 노래, 웃음 소리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자신으로 인한 애통이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책망이 되어, 진리로 인도하는 은혜를 보기를 바랍니다.
3. 지혜가 아니니라(8-10)
세상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책임지고 운영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세상이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책임져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뜻대로 되도록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인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는데, 우리가 원한 바를 실현시켜 주기 위해 책임지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일이나 인생의 문제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어떤 협력자가 되지 못합니다.
롬 11:35-36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인간이 주께 드려서 그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정성과 열심을 주를 위해 사용했으니, 주께서도 나의 믿음을 보시고, 원하는 바를 이뤄주지 않으실까? 라는 기대가 있다면, 그 자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정성과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착각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인생을 꿈꾸다가 실망과 낙심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그런데 이 말을 문맥대로 이해하면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일을 시작했지만 끝에 가서 실패한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말에 일치되려면, 시작에 비해서 점차 더 번성한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시작보다 나중이 더 낫고 발전되었을 때,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사람의 일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욥 8:7절에 보면 수아 사람 빌닷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현실이 이 말대로 실현된다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말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끝이 시작보다 나은 사람이 있는 반면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와 불신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열심의 여부와도 무관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하고 싶은 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 싶은 대로 사용되는 처지일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시작과 끝, 일의 시작과 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관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집니다. 우리는 되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그 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생임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8절에서 말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뜻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인생의 가치는 마지막, 끝의 일로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롬 6:21-22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마지막이 사망과 영생으로 나눠진다면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영생입니다. 그리고 시작이 어떤가의 문제는 사실 의미가 없게 됩니다. 시작이 어떻든 영생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생각하면, 분명 끝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도해 가시는, 인생의 끝이 영생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성도의 인생은 누구라 해도 시작보다 끝이 나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끝에 도달하기 전까지 어떤 인생이 주어져도, 끝에만 모든 소망을 둘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끝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 바라보는 급한 마음에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 인한 분노가 자리할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분노와 원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노골적으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노가 있게 하시면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시고, 심판이 마땅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의 일하심으로 인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일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을 준비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환영하는 우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을 믿고, 자신의 모든 인생까지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닌, 끝에 있을 영생에 둡니다. 그래서 끝을 생각하지 않는 우매한 자들의 믿음은, 항상 현재를 급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고, 결국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사람이 오늘에 만족을 못하면, 옛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면서, 옛날이 더 나았다는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애굽에 있을 때가 더 나았다고 불평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약속의 땅을 잊은 것입니다. 이처럼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잊은 것이 지혜가 아닙니다.
오늘은 흘러갑니다. 오늘이 좋다 해도, 좋은 날은 끝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항상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기회로 주어지는 날로 바라봐야 합니다. 자신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붙들린 인생임을 실감하는 오늘이어야 합니다.
옛날이든 오늘이든 인간으로 존재한 시간입니다. 옛날에도 죄의 존재고, 오늘도 죄의 존재입니다. 마지막까지 죄의 존재로 머물다가 끝나는 인생이, 우리의 시작이 되고 마침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속한 자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보다 오늘이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은, 지혜가 아닌 우매한 것입니다.
4. 인생의 이치(11-14)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복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가 하나님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생명이고 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기에, 땅의 것을 복과 화로 나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만, 그 복에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땅의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머리로는 인정이 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것을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면서,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땅의 것은 복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마음 상태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땅의 것을 복으로 구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것만 소망하는 믿음이라 여기고, 그런 믿음이 되려고 땅의 것을 바라는 욕심을 버리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믿음을 벗어나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결과일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점을 항상 오해합니다. 소위 믿음 좋은 사람 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음 좋은 사람 되는 길도, 방법도 없지만, 설령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 좋은 사람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일까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늘의 생명에 속한 자로 부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의 전부를 누리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엉터리라 해도, 그리스도께 붙들린 성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좋다, 나쁘다’로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항상 땅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마음을 누가 말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땅의 것에 마음 두고 사는 것이, 곧 죄가 생산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항상 땅의 것으로 마음이 끌리는 인간은, 죄를 생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피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 되게 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또한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죄를 보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3-14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두 가지를 병행하여 두시고 행하십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면 형통한 날을 주시고, 못하면 곤고한 날을 주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세상에 마음을 둔 인간의 계산속입니다. 사람들은 형통을 행복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형통을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형통하면 성공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곤고의 날은 반대로, 불행과 연결 짓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날이 행복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 형통한 날이 있게도 하고, 곤고한 날이 있게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날을 원하든 무시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주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곤고한 날이 있을 때, 자신의 믿음 상태를 살피며 고칠 것을 고치면, 곤고의 날 대신에 형통의 날을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사탄의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도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형통의 날에는 기뻐합니다. 굳이 기뻐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기뻐하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형통의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더 신앙에 가까운 말이 아닐까요?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형통한 날이 주어지고 기뻐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형통이 계속 되면 마음이 어떻게 변할까요? 처음의 감사가 있는 마음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형통이 계속되면 하루하루의 형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감사의 마음은 희미해지고 사라집니다. 자신이 누구로 인해 사는가를 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날에 되돌아보라고 하는 것은, 형통의 날을 살았던 것이 자신이 누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형통한 날에 기뻐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형통한 날도 곤고한 날도, 죄인을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가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곤고한 날에 되돌아 볼 것은 형통의 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게 된 형통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현재의 곤고의 날 역시 주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날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유자로 존재하는 성도입니다. 형통과 곤고에 매이지 않고, 모든 날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에 있는 참된 형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에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을 병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이치입니다.
누구에게든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병행하시며, 주를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통은 복이고, 곤고는 화, 또는 징벌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시시하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11-12절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곧 지혜로 인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애당초 지혜를 얻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생명에 속할 수 없는 불의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아들의 피로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물려받을 자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을, 돈의 그늘 아래 있음과 같다고 하는데, 돈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은, 돈이라는 힘 아래에서 든든함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지혜가 성도에게는 힘이 되고, 든든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돈은 돈 있는 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고, 죄로 인한 죽음에서 건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지혜 있는 자를 살립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살리고, 생명의 나라에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복된 것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 되게 하셔서, 지혜를 주신 모든 것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이며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가치도 모르고, 세상만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야 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에 귀가 기울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총 덕분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생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이 이미 하나님의 아름다움 일에 속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인생은 형통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잊고 살다가, 곤고한 날로 인해 되돌아보게 된다면, 곤고한 날은 우리가 바라는 형통의 날보다, 훨씬 더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루하루가 어떤 날인가를 떠나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유익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통의 날과 곤고한 날 두 가지를 병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삶에서, 주께서 행하신 일로 감사하는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의 형통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을 포함하여, 모든 날에서 주가 동행하시고, 주의 행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감사하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지혜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5. 경외하는 자는(15-18)
세상은 인간의 행동을 의와 악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행동을 하면 의인, 악한 행동을 하면 악인으로 규정하면서,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들은 또 이러한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소위 의로운 행동을 해서 의인으로 인정받고자 합니다. 의인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신앙 좋은 사람으로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의와 악을 선택하여 관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의와 악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 앞에서의 모든 말은 공허한 말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의와 악을 선택하여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만약 의와 악이 인간에 의해 관리될 수 있다면, 의인과 악인은 순전히 인간의 선택과 행함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과 악인에 대해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5절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세상은 의인을 높이고 악인은 경멸합니다. 종교의 세계에서도 복의 대상은 의인이며, 악인은 벌의 대상입니다. 기독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복 주실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세상 현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자기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의 실상을 무시하고, 인간의 상식과 틀에서만 의인과 악인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인은 복 받고 악인은 벌 받는다는 단순 논리만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16-17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것은, 착한 일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물론 착한 일을 지나치게 하면, 본인에게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주변 사람들도 지나치다며 적당히 하라고 만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도 악한 일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할까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고,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패망하게 하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나치다 할지라도 의인이 되고 지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패망하는 것일까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전도자의 말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겔 33:12절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상식에 의하면,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의인,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악인입니다. 그런데 의인이라 해도 의로운 행동만 하게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 악한 행동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의로운 행동을 할 때는 의인, 악한 행동을 할 때는 악인으로 변동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기 전의 의로운 행동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동이 99점이라고 해도, 1점의 악한 행동으로 99점의 의는, 의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99점을 쌓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의로운 행동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인이 되고자 하고, 악에서 멀어져 악인이 되지 않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쌓고 의인으로 인정되어, 구원과 복을 얻고자 하는 발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개의 기독교인들의 의에 대한 생각이 이러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으니, 죄를 멀리 하고 의를 행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자기의 노력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것이 복과 형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기대를 갖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우리가 의인되고 악인 되는 것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에서, 구원의 조건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구원 받을 수 있을까,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패망하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와 악을 살피는 것은, 하늘의 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이 모든 일, 곧 자기의 의와 악을 살피면서, 구원을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의의 근거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무엇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 19: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의를 행하고, 의인 되는 것과 상관없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의로운 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악을 행할 때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할 일이라는 뜻이 되기에, 인간을 본래적 악인으로 규정하고,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선언한 성경과 전혀 반대되는 생각일 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로부터 온 것을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로부터 온 것만이 참된 복이 되는 것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자신이 의인인가 악인인가를 살피는 모든 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여호와로부터 온 의로움으로, 의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온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의로움 안에 있는 의인인 것이고, 이것이 죄에서 떠나 참된 의인으로 머무는 길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로움으로 의인되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스스로 패망하는 길에 있는 것이고, 결국 ‘멸망하는 의인’이라는 어리석은 자로만 남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의와 악에 대한 능력이 없습니다. 악은 버리고 의를 선택하여, 의만 행하다가 구원 받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의와 악을 판단하고, 선택할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하나님으로 오는 의로 말미암은 구원이 계획되었고, 그 계획에 의해 악을 행하고, 악인으로 살아가도록 조치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악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능을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늘의 의에 마음을 두고, 자신의 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죄에서 떠난 의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하는 모든 것은 죄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 의가 됩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도 죄가 되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행동에도 의의 의미를 두지 말고,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의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한다 해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만 의로 믿는 것이, 의인으로 인정되는 성도인 것입니다.
6. 지혜가 지혜자를(19-22)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 하나만을 보고, ‘저 사람은 의인이다’라고 하기 전에, 과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가 부터 물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증거합니다. 곧 의인으로 인정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겔 18:5절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9절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6-8절에서는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행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우리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누구도 의인으로 인정되어 그 의로 살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할 자인 것이고, 이같은 선언에서 ‘나는 아니다’라고 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교인들에게 의인처럼 될 것을 가르치고 요구합니다. 여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점차 거룩하게 되어가는 삶을 살아야, 믿음 있는 성도답게 되는 것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덕과 윤리에서 의를 찾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믿음의 척도와 기준도, 윤리와 도덕으로 굳어진 것이 지금의 기독교 현실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상식에서 생각한다면, 의로운 삶을 사는 기독교인은, 당연히 복과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15절에서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16절에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도 말합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는 분명 다릅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성화되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는, 분명 맞지 않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20절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사는 동안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진실 되게 지켜 행하는 자입니다. 곧 선을 행하되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자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의인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헛되고 허무할 따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능력합니다. ‘기독교인은 빛과 소금을 삶을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도 허구입니다. 죄 아래 있는 세상은, 인간의 선함과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조차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수로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까? 비록 의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기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의가 아니라 악을 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신앙생활을 잘한다거나 의롭다거나 능력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저주의 존재라는 사실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에서 죽음이라는 끝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희망이 없는 세상에,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절에서,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읍에 열 명의 권력자가 있다면, 성은 그들로 인해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지혜가 지혜자를 이들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한다면, 결국 세상은 지혜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뜻이 됩니다.
이 지혜는 애초에 우리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의 지혜를 끄집어내고,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신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것들은, 믿음의 시각에서는 헛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헛되지 않은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이 헛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저주의 인간이 성도라는 거룩한 존재로,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지혜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고백하게 하고, 헛되지 않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합니다.
21절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칭찬의 말을 들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인정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이 또한 헛되고 부질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인간이 없고, 나 또한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비난과 비방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저주한다면 화가 나겠지만, 나 또한 누군가를 저주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저주한다면, 다른 누군가도 얼마든지 나를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저주 받지 않아야 할 정당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하고, 좀 더 정당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높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잘못됨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힘쓰는 자는, 자신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헛되지 않은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자기 정당성을 위해 이용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지혜와 능력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자신에게서 능력을 끄집어 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올 능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지혜가 능력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배설물이라는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지혜가 지혜자를 세상 권력자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7. 사망보다 쓴 여인(23-29)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악하고 거짓된 것이라 해도,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롬 1:21-22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라는 말까지 했지만, 인간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사람이 지혜자가 되고자 결심한다 해서,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인간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혜가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고 실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람들은 지혜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인간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지혜자가 되고자 한다면, 지혜를 주셔서 지혜자로 살게 하시고, 지혜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지혜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죄와 저주의 존재로 증거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야,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인간으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벌레와 먼지와 같은 존재로 부인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와 지혜와 생명으로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인되어야 할 존재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가를 알고자 하여,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연구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면, 악한 것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누군가가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여, 악한 것의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은 배제한 상태에서, 세상과 타인의 악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수준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절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전도자가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여 알게 된 것은, 여인이 사망보다 더 쓰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처음부터 여인이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지혜와 명철을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혜와 명철이 전도자를 여인이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로 끌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에 대한 전도자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안다면, 전도자, 곧 솔로몬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왕상 11:1절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솔로몬에게는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솔로몬이 사랑했던 여인들의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아서, 솔로몬을 붙들어 그 마음을 돌아서게 한 것입니다.
왕상 11:4절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말한 것처럼 여인으로 인해서,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한 자로, 여인들의 신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자신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다만 여인의 마음에 붙들려 여인만 바라볼 뿐입니다.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자 했을 때도, 여인이 사망보다 쓰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면서, 여인에게 붙들렸던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고, 여인은 사망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와 명철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게 되면, 타인의 잘못됨과 문제에 대해 판단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데, 당신은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적을 하고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알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자신을 지적하고, 악한 자로 판단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타인을 지적한다면, 여전히 참된 인간은 예수님 한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전도자가 여인의 마음을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한 것이, 마치 남자가 여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자에게 여인이 사망보다 쓴 존재였다면, 우리에게는 세상이 사망보다 쓰다고 할 정도로 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악함을 자신의 밖에서만 보고자 한다면, 그 또한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사망보다 쓴 여인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지혜로 오셔서, 어리석은 우리를 이 은혜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29절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었지만, 정작 사람은 자기를 위해 꾀를 내며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지혜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지혜에 마음을 둔다면, 사람이 꾀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지혜가 세상의 헛됨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꾀를 가지고 산다 해도, 그 끝은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찾아와 지혜에 마음을 두게 된다면, 그것은 천 사람 가운데서 찾은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