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쳐흐릅니다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삼천리강산에 봄이 가득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정기적으로 부산모임에 가는 차례여서 갔다 왔는데, 천리 넘는 길을 꽃 속으로 갔다가 꽃 속으로 왔습니다. 서울서 이북 백두산까지 이 천리, 가볼 수는 없지만 거기도 봄이 왔을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만입니까,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이 풍편에 들리는 말에 이북에 두고 온 내 동생 도,아들도, 딸도, 손자들도 다 살아 있다는 소식 31년 만에 처음 들었으니 그야말로 봄소식 아닙니까? 천지는 살았습니다. 생명은 살았습니다. 살아 있음을 보기 때문에 봄입니다. 내게, 그럴 때는 누구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자연은 공번된 것이요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이 순간의 나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1978년 4월 15일 이른 아침입니다. 아닙니다, 영원한 찰나입니다 내 잔은 넘쳐흐릅니다. 하나님이 아침에 내게 그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께 편지를 쓸 때는 어떤 마음으로 쓰는지 아십니까? 나는 여유 있는 마음이 못됩니다. 지극히 가난한 미천입니다. 붓을 들고 앉으면 마치 엘리야의 과부가 아침마다 그 쌀 항아리를 긁는 모양으로, 언제나 내 마음의 바닥이 소리가 나도록 긁지 않고는 못합니다.
2월호를 4월이 돼서야 발송을 했으니 3,4월호는 부득이 합병을 해서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신변에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홉 해째 누워 있는 병든 아내가 갑자기 위독에 빠져 이번에는 아주 가는 줄 알았습니다.
38선 넘어온 후 미군 부대의 찌꺼기를 얻어 내다가 내 목숨을 이어오게 해주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인 내 생질이 이민으로 아주 미국으로 떠나갔습니다.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청춘에 공장에서 고된 노동하는 것만도 슬픈데,……그 원통한 사정 호소할 길 없어 죽기로써 단식한다고 나섰던 아가씨들, 깊은 밤에 내쫓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됐기 때문에, 열두평 밖에 못되는 집으로 데리고 왔더니 삼십명이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하룻밤 새워 보냈지요. 청주에서 노동자들이 단식투쟁한다 해서 거기 갔다 왔지요. 목요 기도회에 가니 어머니들 아내들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갔더니 새로 누구도 잡혀가고 누구도 기소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정말 편지를 써야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앉았습니다. 닦아오는 4월 19일은 혁명의 날인 동시에 또 씨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지 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붓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밤을 밝히면서라도 쓰자던 결심도 어디로 가고, 나는 자리도 베개도 없이 맨 방바닥에 누워야 했습니다. 눈을 뜨니 벌써 5시 아닙니까? 찬 물로 몸을 닦고 앉기는 했지만 마음은 아직 창조 전의 혼돈이었습니다. 기도를 하자, 명상을 하자, 불을 켰다 껐다, 뜰을 나갔다 들어왔다, 몇 차례를 반복하는 동안 아침은 하얗케 밝았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문깐에 누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나가 보니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기억할 수 없는 육십은 되서 보이는 남자 한분이 서 있었습니다. 들어오라 해서 좌정을 하고 나니,자기는 씨알의 독자라는 것이요, 지난번 킹목사 기념 강연 때도 나갔었고, 간디 때에는 몰라서 못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씨알의 독자라는 것으로 우선 마음은 열렸으나 무슨 일 때문일까 생각을 하려는데, 문득 옆집에서 종이쪽지를 하나 꺼내서 내밀면서 “조금 생긴 것이 있어서” 하면서 그것을 내게다 주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서 펴고 보니, 놀라지 마십시오. 20만원 자기앞 수표입니다. 그런 때에 그러지 않는 것인 줄은 알면서도,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어, 아니 열리는 입을 열어 이름을 물었더니, “그저 그래 두십시오”하고는 새로 독자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리로 잡지를 보내주라고 했습니다.
당하고 나니 내 가슴은 전기 줄이라도 붙잡은 것 같은데,곧 그림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간디가 “나는 속수무책에 빠졌다”하면서 마지막 결사단식을 시작했다가 정부와 회교 양측의 화해로 그 단식을 해제하게 되던 날 간디를 찾아왔던 이름 없는 날품팔이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애가 과일 한 알을 손에 들고 할아버지께 드린다고 하며 찾아 왔을 때 간디 측근의 사람들은 거지 소년이 무엇을 구하려 온줄 알았다가, 그 소년 말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듣고 간디한테 안내 했더니, 간디가 그것은 네가 번 돈으로 산 것이니 네가 먹으라고 한즉 그애는 자기 마음에 할아버지가 단식을 해제하는 날은 자기가 드리는 그것을 꼭 맨 처음으로 잡수시라고 할 생각으로 처음부터 생각하고 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 소감으로 그에게 말을 하자니 나는 목구멍이 자꾸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단, 중단, 짠물을 속으로 삼켜가며 간신히 끝냈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섰습니다.
문간 가까이 가더니 그는 “대나무가 전 보다 좀 적어진 듯합니다.”하면서 그전에 우리 집에 왔던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서 “여기 와서 물었더니 대나무 숲 있는 집으로 가라고 해요” 했습니다. 내 속에는 또 다른 기쁨이 죽순처럼 쑥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소동파의 시를 알려 주고 싶어졌습니다. “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을지언정, 집에 대 없이는 살 수 없느니라, 고기 못 먹으면 사람 파리하지만, 대 없으면 사람 속돼 못 쓴다” 했습니다. 했더니 그는 “대나무가 잘삽니까?” 했습니다. “하나 옮겨 보시렵니까?” 했더니 그런다고 해서 분재로 해보려고 심어 두었던 것을 뽑아 드렸더니 그는 좋아서 가지고 갔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작별하고 돌아서니 활짝 피었던 목련이 바람도 없는데 가벼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았고, 아직도 얼굴도 아니드는 이 나라의 수난의 여왕의 앞날을 알리는 환상과도 같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내 깨어진 거문고 통을 어떤 손가락이 와서 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들어줄 귀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나는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깨어진 토기의 잔은 넘쳐흐르기 시작했고, 여왕의 결혼식 노래가 희미하게 하늘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씨알의 소리 1978. 3-4월 72호
저작집; 9- 207
전집; 8- 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