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곡 불꽃 속에 있는 시인들
우리는 가장 자리를 따라 일렬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나의 그림자가 불꽃을 더
붉게 만들었다. 많은 영혼들이
내 그림자에 놀라워했다.
“저 자는 진짜 몸을 가진 것 같구나!” 영혼들에게서 이런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은 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내게 접근해보려 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목마른 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벽처럼 태양을 가로막는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불타오르는 길 한 복판에 이들과 마주한 다른 무리의 영혼이 왔습니다.
이들이 내 시야를 막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을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느라 분주했고 떠나면서 제각기 목청을 돋우었습니다.
새로운 무리가 “소돔과 고모라!”라고 외치면
다른 무리는 “황소를 꾀어 제 음욕을 채우려
파시파이가 암소 안에 들어가네! 라고 외쳤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팔레스티나의 도시들로 동성애와 수간 등의 성의 문란함으로 악명이 높아 하느님의 유황불로 멸망했던 곳입니다.
파스파이는 너무나 잘 알려진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아내입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에게 제물로 바칠 황소를 보냈는데 미노스가 이 황소를 하찮게 여기자 복수를 하려고 파시파이가 황소에게 색정을 품게 하였습니다. 다이달로스에게 나무로 암소의 형상을 만들어 달라고 해 정을 통해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습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 테세우스와 미노스의 왕의 딸과의 이야기로 신화가 이어집니다.
미노스 궁전의 전설이 있는 크노소스 궁전입니다.
미노스왕의 전설로 유명한 크노소스 왕궁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입니다.
프레스코 복사화가 보이는 크노소스 궁전
크노소스 미궁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게 1200여개에 달하는 방들, 그리고 복잡하게 설계된 3~4층 건물입니다.
유럽 최초의 문명인 크레타 문명은 BC 3,000년경의 문명인데 크레타 문명의 절정에 달했던 미노스 왕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왕궁 유적지입니다.
크레타 섬의 사진을 보니 카잔타키스(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의 묘 사진반갑습니다. 카잔타키스의 묘에 이십 몇 년 전에 갔었는데 (디지털 카메라가 없던시절) 2017년에 다시 갔었습니다. 이십 몇 년 전에는 국문과 교수님의 인솔로 갔었는데 묘 앞에 잔을 들고 소주를 붓던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카잔타키스 묘, - 2017년 그리스 여행 중에
카잔타키스 묘 앞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묘비명입니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이 길이 다른 여정이 애욕 죄의 부조리 성을 가리킵니다. 한 무리는 가고 한 무리는 오면서 그들의 징벌에 맞는 외침과 찬송을 되풀이 했습니다. 연옥에서는 성가를 부르면서 죄를 씻습니다.
지옥의 애욕 자들은 (지옥 15~16곡)은 사막의 불비를 맞으며 계속 고통을 받고 있으나 연옥의 애욕 자들은 눈물로서 참회하고 찬미하고 정죄하는 것이 다릅니다.
내게 처음으로 질문을 했던 망령들이 가까이 다가와 다시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을 두 번 알게 된 나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진짜 피와 뼈를 지니고 있지요.
나는 눈먼 자가 되지 않으려 오르고 있소.
위에서 한 여인이 나를 위해 은총을 내려 주셨으니,
필멸의 몸뚱이로 당신들 세상을 지나는 것이라오.
당신들은 누구이며 우리 뒤에서 다른 무리를 지어 가는 저들은 누구인지 말해주시오. 하니
먼저 내게 질문을 던졌던 그 영혼이 다시 말했다.
“더 나은 죽음을 위해 우리 세계를 여행하며
체험을 쌓는 축복받은 그대여!
우리와 감께 가지 않는 망령들은
카이사르가 개선해 돌아왔을 때
‘여왕’을 부르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카이사르가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에 동성애로 생각한 어떤 이가 개선 행진 중에 ‘여왕이여!’하고 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나간 무리들이 바로 이 때문에 자책으로 ‘소돔!’이라 외쳤고 저들의 죄악은 동성 간의 정욕을 추구한 죄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는 이성간의 죄였지만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아 짐승처럼 욕정에 굴복하여 짐승이 되어버린 그 여자(파시파이)의 이름을 우리의 치욕으로 외쳤다고 합니다.
파시파이에게 흰 소를 만들어 선물하는 다이달로스입니다.
파시파이에게 흰 소를 만들어 선물하는 다이달로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이탈리아
폼페이 베티 하우스에 그려진 벽화였습니다. 2012년 폼페이 여행 중에 폼페이 파우노의 집 마당에는
'다리우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싸움'이 있어 보았는데 위의 벽화는 벽화여서 박물관으로 옮겼나 봅니다.
미노타우로스, 프레드릭 와츠, 영국 데이트 브리튼 미술관, 영국
- 2019년 딸과 함께 여행 중에 간, 라파엘 전파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 많은 미술관
단테는 당신들은 누구이며 우리 뒤에서 다른 무리를 지어 가는 저들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곳에는 애욕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라 이들 영혼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그러나 내 이름을 듣고자 원한다면 말해 줄 수 있소.
나는 귀도 귀니첼리. 죽기 오래전에
참회했기에 금방 이곳에 왔지요.
귀니첼리라는 말에 단테는 뛸 듯이 반가워하며 나의 아버지라며 존경과 애정을 표현합니다.
단테는 한참 동안 그 망령을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마침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섬기려는 깊은 소망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귀도첼리는 내 귀에 들리는 당신의 말은 내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니 레테(레케강 망각의 강)인들 이를 지울 수 있겠냐고 하며
이런 사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새로운 용법으로 시를 쓰는 한,
당신의 우아한 시는 당신이 쓴
잉크마저 값지게 만들 것입니다.
귀도 귀니첼리는 라틴어에 밀려 방언으로 간주되던 이탈리아어로 시를 쓰는 청신체파로 주로 사랑과 여성 찬미라는 주제로 서정시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단테와 귀도 카발칸티가 귀도 귀니첼리의 청신체 시를 계승했습니다.
단테의 말을 들은 귀도 귀니첼리는 단테에게 새로운 영혼을 소개합니다. 그는 프랑스의 프로방스의 음유시인 아르노 다니엘이었습니다. 사랑의 시와 산문에서 탁월했던 모국어(프로방스어, 오크어)의 대장장이라고 그를 칭찬합니다.
귀니첼리는 아르노 다니엘을 가리키며 그는 모국어 방언(프로방스어)구사에 있어서 자기보다 뛰어난 자라고 합니다. 당시의 격조 높은 라틴어 숭상의 시절에 지방 사투리를 섞어 연애 시를 썼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된 것은 단테 이전에 이런 훌륭한 선각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테도 이런 선배 시인들을 좋아하면서 자신의 신곡도 라틴어가 아니라 지방 속어들 중의 하나인 피렌체어로 썼습니다. 이들의 노력이 이탈리아어 형성의 기반이 됩니다.
단테가 자신의 신곡에서 이탈리아어로 쒸어 지지 않은 유일한 구절은 프로방스어(오크어)로 씌어진 아르노의 시구절입니다. 아르노다니엘은 신곡에서 자기 모국어로 이야기 하는 유일한 비 이틸리아인입니다.
귀도 귀니첼리는 단테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데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을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불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단테는 훌륭한 시인들을 만나 감사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