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색이골에서 / 정선례
안녕. 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렀어.
네가 무등산으로 간 지도 까마득하다. 부모님 따라 도시로 이사 간다며 설레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으로도 도통 기별이 없어서 잘 지내는지 궁금해.
소나무 우듬지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햇살 받으며 한가로이 누워 구경하는데 쿵쿵 울리는 거야. 내 발가락이 길어 순간적으로 나뭇등걸을 붙잡아서 위기를 모면했다. 하마터면 땅으로 떨어질 뻔 했지, 뭐야. 옆구리에 타이어를 두른 여자가 산책하러 나왔다가 등으로 나무 치기를 했나 봐. 등에 담이라도 걸린 걸까? 그래도 미리 신호라도 보내주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작은 배려가 아쉬운 순간이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두 손으로 움켜쥐고 맛 좋은 알밤을 까먹는 데 열중하느라 오늘은 그 여자가 지나가는 줄도 몰랐어. 언제나처럼 바람에 등 떠밀려 갔나 봐. 길이 여러 갈래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딱 마주치면 재빠르게 눈인사라도 해야겠어. 내가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야. 꽤 거만하고 까칠하다는 말을 듣는 내가 누구에게 쉽게 마음을 열겠어? 더군다나 흙 묻은 일바지에 남방이라니, 집 밖에 나오면 좀 차려입어야 되지 않나? 나를 몇 번 봤다고 반가워하는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더군. 경계의 눈초리로 흘깃 보고는 오동나무 삼 형제 위에 있는 우리 집으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렸어. 궁금해서 나뭇가지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더군.
겨울잠을 자는 내 사촌지간인 다람쥐와 달리 먹을 것이 귀한 긴 겨울에는 나무껍질도 갉아 먹는다면 알만하지? 내 식성이 좋은 건 타고난 것 같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미색이라고 부르는 깊은 숲으로 가는 바람길이야. 이 숲에는 상수리, 밤나무, 가문비나무가 많아 나와 친구들의 배꾸리를 양껏 채워 주고도 남을 만큼 열매가 많지. 한 번도 이사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또 있어. 숲이 깊어 고요하다는 거야. 이 숲도 예전 온돌방에 나무 때는 시절에는 민둥산이었대. 생활 기반이 땅인 다람쥐와 달리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내 조상들은 집이 아주 부족했을 것 같아. 주거와 난방시설이 바뀌면서 우리도 한 세대 하나씩 집을 갖게 되어 삶의 질이 높아졌어
산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입는 것처럼 나도 털갈이하거든. 여름에는 붉은 갈색이었는데 잿빛 갈색으로 털이 바뀌고 있어. 어느 곳에서나 사는 것은 마찬가지일 거야. 나는 요즘 추운 겨울철 먹이를 모으느라 요즘 일 년 중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도토리, 밤, 나무 열매를 땅속에 저장하고 나무 틈새에도 감추어 놓는데 절반이라도 찾아 먹을지 모르겠어. 기억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가 봐. 그냥 생각나는 현상인 것 같아. 어리석은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네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흔히들 말하지. 자연에서 동물과 식물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 갇혀 판단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 무생물인 나무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이 있어서인지 어쩌다 애경사 품앗이하느라 도시에 가면 가방을 꼭 끌어안게 되더군. 나무 위에서는 족제비, 부엉이, 까마귀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땅에서는 구렁이가 호시탐탐 노린다던데 네 안부가 궁금해. 비 오는 날처럼 가을이라 괜히 감성이 풍부해져서 너와 함께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그리워하는 것 같아. 적요한 숲,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어스름한 산책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너를 떠올리곤 해. 오동나무 삼형제나 우람한 목백합 나무에서 누가 빠르나 도토리 10개 내기를 하면 너는 승부욕이 발동해 순식간에 오르곤 했지. 거의 날마다 이곳을 찾다시피 하는 그 여자의 장난기가 가끔 발동하면 긴장했었는데. 그럴 때는 크고 두툼한 꼬리로 균형을 딱 잡고 높은 가지에서 낮은 가지로 뛰어내려 바위 뒤로 숨었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또렷해서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흐르기도 해. 너처럼 나도 이곳 비포장 언덕길을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썼건만 이제는 체념해야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아.
남부지방 외진 이곳 미색이가 이제는 좋아졌어. 행정에서 말하는 지명은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지. 초당림 둘레길 골짜기 땅에 붙여진 이름인데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그 유래는 잘 모르겠어. 지역에 따라 산이나 강, 해안 곳곳에 어떤 대상의 지형적인 특성과 연관 지어 이름을 붙였다더군. 강원도 화천에 해가 일찍 지는 봇이라 하여 '어두운 골' 지명이나 서울에 '너의' 뜻 지명인 여의도(汝矣島)나 해남 송지면 '언제나봉'산이 있는 것처럼 자연 풍광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 같아. 물 맑고 적요한 이곳에서는 다 나 하기 나름이야.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게으르면 주변에 나눔은커녕 긴 겨울 동안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해. 어디에서 살든지 다 나 하기 나름인 것 같아. 바쁘더라도 짬을 내 놀러 오렴. 까치가 제 집인 줄 알고 가끔 무단침입하는 얘기나 이곳이 대한민국 명품 숲에 선정되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노거수가 베어나가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 등 나뭇가지로 지은 집에서 밤새워 얘기 나누자.
거듭 말하건대 어느새 내가 살아온 터전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나 봐.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오동나무 삼 형제가 의좋게 나란히 커가는 우둠지 이곳을 떠나지 말아야지 결심했어. 사람만이 환경의 동물이 아닌 거지. 지역의 3대 한 곳이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이 사철 흘러내려 목마르면 멀리 가지 않아도 되니 참 좋아. 그곳에도 물과 햇볕, 공기가 풍부한 거야? 타고난 성품이 무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해서 조금 서운하다. 이해해라. 내가 돌려 말할 줄 모르잖니.
나와 숲 관리자 외에는 거의 찾는 이 없는 이곳에 어느덧 사랑이 스며들었나 봐. 우람한 백합나무 잎새에 빛이 쏟아져 반짝여. 억수로 운 좋은 날이야. 편백 잔가지 사이로 햇볕이 빨려 들어올 때면 그루터기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렇게나 앉아 멍때린다. 모퉁이를 돌아가던 젖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지 않았다면 밥때도 잊고 그곳에 못 박힌 듯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첫댓글 다람쥐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아니네요?
청설모? 누굴까요?
자꾸 읽게 되고 더욱 궁금합니다. ?
청설모 맞지요?
와! 정 작가님은 동화 쓰시면 되겠네요. 저도 청솔모 같은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