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걸까? / 송덕희
전날 미리 꺼내 놓은 편한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 걸어서 가면 딱 좋은 거리에 있는 ㅅㅈㅈㅇ초등학교에서 2년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다. 도착할 시각을 어림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선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드문드문 지나는 몇 사람은 느긋하게 걷고 멀리 울긋불긋 차려입은 이들은 등산하려나 보다. 버스를 향해 바삐 뛴다. 떡집 문틈으로 하얀 김이 피어나고, 인기가 한물갔는지 마카롱 가게는 간판이 떨어졌다. 쓰레기 봉지를 쌓아 둔 전봇대 옆 공터에 송엽국은 햇살을 머금고 폈다. 가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바람에 날린다. 차로만 휙 지나쳤던 길에서 본 풍경이 다채롭다. 빠르게 또 느리게 걸었다.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이 무슨 일로 왔는지 묻는다. 이유를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는 걸 모르네? 우리 학교의 큰 집 격인 이곳의 앞뜰은 옛 모습 그대로다. 양쪽으로 향나무가 드문드문 자리 잡고, 꽝꽝나무가 가장자리를 차지했다. 베고니아와 코스모스는 목을 내밀고 인사한다. 화단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나온다. 어쩐 일이냐고 묻는데, 그제서야 기분이 싸하다. “오늘 아니고 다음 주예요. 우리 교장 선생님은 ㅅㅈㅅ초등학교에 간다고 방금 출발했어요.” 한다. 이게 뭔 일이람?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출장지를 착각했고, 지금 차도 없는데 거기까지 가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다. “이름이 비슷해서 착각했나 봐요.” 나를 위로해 준다. 태연한 척 걸어 나오는 뒤통수가 따갑다. 서둘러 콜택시를 불렀으나 쉬 오지 않는다. 다른 학교 교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기분 좋았던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분다. 옷깃을 여몄다.
겨우 도착해 미리 와 있는 동료들에게 늦은 이유를 구구절절이 말할 수밖에 없다. 다들 비슷한 경험 한번 쯤은 있었노라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수 있지. 끝나고 돌아오는 맛이 개운치 않다. 내가 왜 이러지? 일정표에도 ㅅㅈㅅ초등학교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한 치도 의심 없이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잘못 입력된 정보가.
그다음 주 수요일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네시 20분. 서서히 업무를 마무리한다. 화장실도 좀 다녀와야지. 문을 나서려는데 방과후학교 주산부에서 준 자격증이 들어 있는 봉투가 떨어져 있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다들 조용히 일하는 중이다. 담당 선생님께 부탁하고 나오려다 멋쩍어서 “얼른 퇴근 준비하시게요.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한다. 교감 선생님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일어나 양미간을 찌푸리며 “혹시 연수를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묻는다. 아뿔싸, 머리를 부여잡는다. 직원들은 내 놀란 모습을 보고 빵 터졌다. 웃음소리가 나를 따라온다. 빈구석을 보여준 나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씁쓸하다.
광주문학관에서 요즘 시대의 독서교육이란 주제로 하는 연수를 진즉 신청했다. 아침에 출장도 냈다. 세시 30분부터 시작인데, 한 시간이나 지났다. 점심 먹은 후에 무얼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축제가 곧 다가와 이곳저곳을 살폈다. 교문에서 들어오자면 왼쪽으로 팬지가 피었다. 현관 앞은 너무 썰렁하다. 요즘 국화가 한창일 텐데, 활짝 핀 걸로 대여섯 개 놓으면 좋겠다. 행정실에 얘기했더니 가져왔다. 돋보일 장소에 놓고 사무실로 들어온 시각이 세시였다. 그후로 딴 일에 몰두한 채 단 한 번도 가야 한다는 생각을 안 했다. 뇌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지금이라도 가야겠지? 동구에 있는 광주문학관은 멀다. 동광주 진입로는 왜 또 이리 막히는지? 도착해 보니 연수는 막바지였다. 강사가 김광균의 <은수저>를 자신의 상황과 경험을 끌어내서 읽는 법을 설명한다. 이게 발산적 상호텍스트성을 살린 시 읽기란다. ‘산이 저문다 / 노을이 잠긴다 /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 애기 앉던 자리에 한 쌍의 은수저 /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귓바퀴에서 맴돈다. 감정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와 옆에 있는 저수지 주변을 걸었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가을 바람은 살랑살랑 뺨을 스치고, 길은 한적하다. 여차여차해서 늦었노라 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바빠서 그렇지. 다 그래.” 한다. 효자손을 들고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고개만 갸웃거리면 치매, 등을 긁으면 건망증. 해묵은 농담으로 위로하는 친구를 보며 웃는다.
나이 탓인가? 아니면 너무 바빠서?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사실로 착각하고, 중요한 일을 잊어 먹는 일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겠지? 자책하기보다 가볍게 넘길 일화 한 토막쯤으로 접어 두려 했다. 그러나 ‘회의’라는 글감으로 풀어먹고 있는 지금, 자꾸 의문이 든다.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