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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청색지〉 신인상 당선작 _ 윤리의 기록 (외 9편) / 김성열
윤리의 기록
1.
「윤리의 기록」은 폴 세잔에 대한 오마주다 영혼이 마르도록 예민한 그의 별명은 에코르셰, 즉 피부를 벗긴 인체도였으나 ‘피사로의 학생’이라 규정한 자기 안에 확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쓸어 담아 인생의 윤리를 주조하였고 그것은 훗날 불멸의 기록이 되었다
2.
어느 메이지 지식인이 니체 번역에 함몰되었을 때
모리 오가이가 릴케의 희곡 『일상생활』을 묵묵히 옮겼던 것처럼
이 문장들을 의지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책을 덮고
3.
글을 썼다
자신의 길을 내는 것
윤리는 기만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적을 바꿔
뿌리를 내리면서
그것을 뽑아
언제나 이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4.
죽 쒀서 개 주지 않겠다는 다짐
이것은 움푹 파여
도래하는 너를 향해 어디론가 뛰쳐나가지만
이내 길 잃고
결국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는
과거로
채워져 있다
5.
이 기록의 인생을 폴 세잔은 이렇게 적었다 나의 피사로,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공부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믿는데 월동준비를 하면서 공부와 기도는 어쩌면 거절에서 만나 또 다른 삶을 잉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직 다음 작품만이 나를 증명할 것입니다
6.
君은 생각했다
7.
순간을
이상과 이하를, 그 사이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한**
그 순간의 실재는 언어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언어로 다가오고
그의 그림이 오늘도 진동하는 까닭은
심리적 참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저 이름에서
시간이 솟아오르고 있다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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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시적 사태의 미시적 원인을 알아가는 공부와 미시적 사건의 거시적 구조를 헤아리는 기도를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爲學曰益,爲道曰損 ”
** 밀란 쿤데라가 정의한 시詩
보간법
―불멸을 염(殮)하는 노이로제
규제적 이념은 같고 구성적 이념이 다른, 어떤 이가 말했다
이것과 저것의 간극을 벌려
혼란을 구겨 넣는 번롱은 읽지 않네
백과전서나 읽게
17년 전 종로에서 구입한 음반 4번 트랙을 들으며
그 겨울. 대구. 장 박사와 만났다
그래 그러니까 고작 일상어 비튼 설사를 사상이라 우길 텐가
관념어 부리는 걸, 시적인 것에서 그어 놓는 건 도그마야 미답의 탐사등을 제 골방에 무릎 꿇리는 성숙한 미성숙이지
결(決)과 소(消)는 다르네 이전의 문법에 대한 혐오는 구멍 큰 사어와 같아
나는 위기를 만들어 놓고 위기를 해소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네
그 사이로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니
그때 기억하는가 우리는 알고 있었어, 토대가 상부를 결정한다는 건 오역이란 걸, 그것은 신앙이란 걸, 알면서도 머물러 있었지 우매한 녀석이 되니까
심층의 어디서 온 이야기인지 어허, 자네야말로 여태껏 얄궂은 포만감에 젖어 덕(德)의 아사를 기만해 오진 않았는가 싶으이
재현을 포섭하지 않은 크로체란 없는 법일세
기발하군, 무의식의 시침질이나 개구리 해부에 정년까지 봉직하란 말인가
지우는 것이 방도가 아니란 말은 삼가겠네 또 풀어 내는 것이 고해라 하지도 않겠네 둘 다 지나온 길이니까
알고 있나 자네는 지금 무언가를 제하고 무언가를 요하고 있어
알지, 없애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닌 이후론 이전부터 성립되는 지점이
과거의 모든 불멸을 깨우며 지금 일어나는 질서가
우리가 가야 할 곳이니까
그런 문장을 알고 있는가
글쎄
돌아오며 한참을 뒤척거렸고, 눈빛이 식기 전에 멀어진 누군가를 기억했다 그리곤 무언가 발화되었다
언제나 필연적인 건, 그 다음이지
센비키야의 멜론
―1937년 4월 16일,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
어두워지는 숲
더 오래 자주 들어 올리는 팔
아무도 잡아 주지 않는 손
이것이 마르코의 기도였다
사람을 시험공부처럼 대하는 인물을 압니다
만만한 이의 선량엔 야멸차고
강파른 자의 부덕엔 절절매지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어려운 분의 비위를 맞추고자 가까운 이를 하대하는 자는
굽실거린 사람에겐 당위로 취급되고
망신 준 사람에겐 원한을 사게 돼요
그런데 이걸 모릅니다
마르코,
침착하게 내 얘기를 들어라
무참한 곡률이 직선의 평판
고통은 통점이 자극과 맺는 관계라서
옆집의 모멸은
입술에 식용유 묻히며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너의 패륜을 더는 묵상하지 않길 바란다
너의 진솔은 경솔한 자긍이니
고립을 자초할수록 넌
추앙하겠지 그 혐오도
한참을 듣던 마르코
섣달 그믐밤을 흉가처럼 물들여 가는 노동
주님, 그 힘, 두었다가 어디에 쓰시려고요
가난은 소음을 견디는 일
원치 않는 주파수에 삶을 맞춰야 하고
잘못하지 않고
면죄부를 받고
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또 면죄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면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가 좁혀졌던
마르코
어느 날은 충동과 하루 종일 술래잡기를 했다
마르코가 숨는 곳은
잠드는 것
시간을 자르면 어떤 공간이 나왔나
그곳에선
발목에 못을 박고 있었다
君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마르코는 이것도 가져가라고 그의 발목이 부서져라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세상은 고요해졌고
하느님이 마르코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날개가 돋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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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날개」
침묵
내가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찾던
육체가
그림자를 따라 움직여
밤과 낮이 있었다
하지 않았던 일들은 잊지 않고 나를 찾아아
삶을 요구하였고
나를 낭비하였던 경건한 일들은
모독이 되었다
아무도 울지 않아서 내가 모두 울었다
벽에 문을 그려 넣고 열었던 밤
저 아래 놀이터 아이들이 보였고
빛이 따스한데
해동되지 않은 마음에
君이 있고나
네가 얼마나 외로울까 싶어
밥을 먹는다
펼쳐지는 광야
날마다 없는 길을 내고
일상이라 부르던
개종을 거듭하여
회심에 이르길
마흔 해
이렇게 삶을 녹여
죽음을 꺼내 보면
수많은 말들은 침묵이 되어
묘비명을 지우고
일어나 걸으면
밤이
누워 있으면 낮이 왔음을
어딘가에 적고 있구나
안 돼, 기다려
낮이 밤에게 하듯
신이 나에게 하는
듣기 싫은 사랑의 말
그래서 우리는 먼 길을 돌아서 기도하게 된다.
바깥이 안으로 접힌
오래 구겨진 사람의 주름
여기에 기억나지 않는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오늘의 기원
금을 모은 이듬해 타워팰리스가 분양되었으나
집집마다 따귀 때리는 소리가 늘어갔다
아버지는 혈변을 보셨고 어머니는 김밥을 말았다
그래도 너는 무리였다
여기저기서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려준다 하였다
이해할 수 없어 무서웠다
고지서가 쌓여가던 여름날 얼마 후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함성이 노랗게 시들어갈 즈음 어머니는 청약통장을 깼다
2층에서 지하로 옮겨가기 위해서
깊이 서럽지 않기 위해서
자기 꼬리를 먹는 뱀의 머리처럼 각자의 슬픔을 모두 연민하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픔을 먹어 치운 내면에서 불에 탄 자신이 뛰쳐나오고
그 불이 옮겨붙은 사람들은 애도의 얼음에 갇혔다
깨문 혀에서 돋아난
잘린 혀
피어나는 이명들
밤새 신음하던 두 팔을 안고 일어선
열두 해의 저물녘
어디선가 들었던 헤겔의 예언이 떠올랐다
비판은 기생이요
히스테리는
대안 부재의 증언이다
君은 저 음성을 여러 혈관에 넣어 읽어 보았다 재의 수요일이었고 실낙원의 문은 넓었으며 이데올로기는 좁았다 성화가 술렁거렸다 “좀 초조해요 떼죽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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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抄) ||
심사평마다 반복되는 문장들이 있다. 높은 수준의 작품이 많아 심의가 어려웠다는 상투형이 그렇다. 2024년 청색지신인상 본심에 올라온 강동호, 김동민, 김새벽, 김성열, 김온유, 김재석, 노은주, 손성준, 신정연, 양지승, 이건주, 장승재 씨의 작품은 상투형이 왜 상투형인지 보여 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신인상이라는 엄중한 시선을 걷어 낸다면 기성의 시에 기술적으로 근접하는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그중 상당수는 기술적인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왜 시를 쓰고자 하는가와 이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사유가 미흡하다는 데 아쉬움이 있었다. 최근에 ‘시’로 통용되고 있는 특정한 말들의 조합과 배열, 그 효과로 발생할 수 있는 익숙한 정동을 염두에 두고 이에 따라 기술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생각을 거두기 어려웠다.
(……)
심의위원들이 각자 선정한 응모작들 중에서 세 분의 시편이 공통적으로 추천되었다. 신정연의 「비생물」 외 9편, 강동호의 「꿈과 먼지」 외 9편, 김성열의 「윤리의 기록」 외 9편이다.
신정연 씨의 시편은 유연히 흘러넘치는 말들이 능수능란하게 배열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시를 구성하는 말들의 복잡도에 비해 그만큼의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분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
강동호 씨의 시편들은 의미를 사유화하기 이전에 읽는 이를 감각적 반응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다. 강동호 씨의 시는 개념화를 거치기 이전에 말의 결과 술어의 배치만으로도 우리에게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
김성열 씨의 시편들은 묵직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시에 대해서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는 무형의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예리함을 요구한다. 경계가 견고한 만큼, 좁은 틈이나마 비집고 나아갈 수 있도록 시인에게 가능한 요청을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강동호 씨와 김성열 씨의 작품을 두고 치열한 논의의 과정이 있었다. 두 시편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고유의 미덕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선택은 선후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청색종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토론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숙의 과정 끝에 심의위원들은 김성열 씨의 「윤리의 기록」 외 9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먼저 강동호 씨의 시는 모든 심의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 시의 생태계라는 것이 있다면 어디에도 강동호 씨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다는 믿음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 믿는다. 하지만 김성열 씨의 시는 다르다. 그의 시는 그 정제되지 않은 묵직함으로 생태계 일각을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생태계 바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는 《청색종이》의 이름으로 김성열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호명하기로 결정했다. 김성열 시인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작품들을 보내 주었지만 《청색종이》의 이름으로 함께하지 못한 모든 응모자들께 아쉬움과 함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김태형, 이재훈, 최진석, 이은규, 김지윤, 신철규, 김대현(대표 집필)
|| 당선소감 ||
당선 소식을 듣고 며칠 후 아침 기차로 이전에 살던 집을 찾았습니다. 처음 시를 짓기 시작했던 곳. 거기엔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어린 당신이 있었습니다.
원수 갚는 일에 무능한 君, 아파도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君, 그래서 부끄러움을 잃어 가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던 君.
그런 당신에게, 나의 아내란 이유로 힘든 일을 겪게 한 날이 많았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봄날, 아이가 입원한 병원 복도. 노트북을 열어 더는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 후로 11년이 가고, 생략되는 법을 배워 명찰 없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드려도 사방은 침묵뿐이었는데 할 수 없다고 여겼을 때 끊어진 삶이 이어졌습니다. 작은 빚을 내 책 사서 읽던 일에 알리바이를 건네준, 도무지 알 수 없는 은총입니다.
연필의 시간과 지우개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이제 우리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알아 갑니다. 이 삶의 목표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탈출하는 것.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나로 둘러싸인 방에서 나오도록, 제 이름을 불러 준 청색종이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김성열 bluemoses@gmail.com
연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석사학위 취득 후 동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 중퇴. 〈2024 청색지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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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청색종이》 202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