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단상斷想 / 이종승
대체로 인류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사망한 자의 무덤을 지어서 영혼의 불멸과 추모의 대상으로 받들어 왔다. 고대의 고인돌이나 왕릉은 물론 서민들의 묘소도 이런 염원은 다르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교를 신봉하고 조상을 섬기기를 제일의 덕목으로 여긴 터라 다른 나라보다 유별나다. 왕족은 왕족대로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그들의 신분에 맞추어서 죽은 자의 동네인 무덤을 조성했다. 그 결과 방방곡곡의 아름다운 산야가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나라의 산마다 심각한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오늘은 친구가 초대하여 새로 조성한 자기의 가묘와 부모의 묘소를 살피러 갔다. 반세기가 넘치는 지우들 다섯 명과 함께. 우선 부자로 소문이 난 묘지는 조선의 판서 묘소가 부럽지 않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널찍한 상석과 우람한 비석이며 봉분이 제주의 오름으로 착각할 만하였다. 떨떠름하였지만 친구의 부모 묘지라서 술잔을 헌작하며 재배하였다. 내심으로는 젊은 날에 무척 애옥살이로 살더니 사후에라도 거드름을 피우려나 하는 발상인가 하고 고소를 머금었다.
이곳에서 몇 결음만 내려오면 몇 해 전에 작고하여 묻힌 친구의 묘지가 나온다. 이 친구도 우리와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처지다. 생전에 부모가 부유하여 호기롭게 살았다. 그런데도 그의 유언을 따라 가로와 세로가 40cm에 불과한 평장이다. 웃자란 풀과 잔디가 덮여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둘이서 막역하게 살던 친구 간이지만 두 무덤의 차이가 귀족과 상민의 거리다. 씁쓸한 마음으로 사후의 세계를 헤아려 본다. 본래 우리의 몸조차 자기의 것이 아니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다. 영혼의 불멸이라 하지만 이는 가상일 뿐이다.
나도 조상을 모시고 숭배하는 우리의 전래사상에 심취하여 살았다. 아버님이 50대에 당신의 유택과 조부모의 묘소를 사초할 일을 걱정하다가 작고하셨다. 선친의 소망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가 십여 년을 저축하여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선친의 소망을 이루어 드렸다. 그 뒤로 팔순의 고개에 이르도록 험준한 산의 능선에 누워 계신 조부모와 부모를 위해 기제사와 벌초에 정성을 바쳤다.
그러나 나의 묘지는 전통대로 따르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고 내가 살다가 가는 지구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주거지는 날로 고층빌딩으로 뒤덮여서 현기증이 나고, 늘어가는 무덤으로 산야의 나무들과 꽃들이 밀려나고 황량한 흉터만 늘어간다. 우선 내가 사후에 묻힐 자리부터 후손들이 누릴 자연에 낙서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내랑 의논하여 부모의 묘소 곁에 평장으로 가묘를 만들었다. 사후에라도 부모님의 무릎을 베고 재롱을 떠는 상징으로. 사실은 내가 작은 공적이 있어서 현충원에 들어갈 자격은 있다. 그러나 허명을 좇아서 현충원으로 들어가 유공자들의 묘역에 막대기 만한 비석을 세우면 무엇하랴. 그보다 고향의 조상과 향토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는 게 도리가 아닐까.
더러 외국 여행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묘지 문화를 살폈다. 거대한 나라인 중국은 역사적 고적지를 제외하고는 묘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정작 유교의 종주국이지만 묘지의 공해를 일찍이 간파한 것일까. 푸른 나무의 숲이 산야를 덮고 있다. 일본은 청정한 숲이 산마다 우거져 있다. 이들은 화장한 다음 위패를 가정에 걸어놓고 조상의 영혼을 섬긴다. 뉴질랜드도 울창한 숲을 본래대로 보존하고 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단란한 공존처럼 자연스럽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도 서서히 편리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우선 수목장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 얼마나 허례허식을 지양하고 간편한가. 지금은 선산에 넘치는 고총을 찾아가 풀을 베고 술잔을 따를 자손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나조차 기력이 따르지 않고 고향과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 고행을 강요할 수도 없다. 몇 해 동안은 인부를 얻어서 고통을 덜어도 보았지만 씁쓸하였다. 이제는 그 인부조차 구하기가 어렵다. 늘어나는 선산의 고총을 파헤쳐서 흙으로 돌아간 유골을 습득하여 납골당을 짓는 일은 공해를 양산할 뿐이다. 가족 묘지를 군대의 행렬처럼 늘어놓은 일도 덧없는 일이다.
중국의 모택동과 호치민 및 김일성 부자는 시신이 영구히 부패하지 않도록 신전처럼 장식했어도 먼 훗날에 살피면 꼴불견인 거드름일 것이다. 영원한 부와 권력을 소망한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이를 증언하지 않던가. 이들의 호사스런 치장도 영원한 세월은 부질없는 허무의 자취로 지워버릴 것이다. 캄보디아의 세계적인 지구의 7대 불가사의인 앙코르 와트도 나무뿌리가 휘감고 삼키려 하지 않던가. 지구상에 영원한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존엄은커녕 흉물로 외면을 받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뎡사오핑은 본인의 소망에 따라서 화장하여, 대지에 뿌렸다. 아랍의 삼권을 한 손에 쥐고, 20년간 절대왕정을 휘두르던 파드 국왕은 가족끼리 봉분도 짓지 않고 검소하게 장례를 마쳤다. 얼마나 겸허하고 소박한 삶의 뒤처리인가. 이 지구는 인간과 짐승이 영원토록 공존해야 할 별이다. 여기에서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지의 은총을 누리다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게 도리가 아닐까.
나도 조상을 섬기고 고향의 은의를 잊지 않고 팔순에 이르도록 선산을 지켰다. 그러나 이제는 고향 사람들이 떠나거나 죽어서 황량한 고을로 향수조차 느끼지 못한다. 노구를 이끌고 지팡이를 짚으며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릴 수도 없다. 내가 유년에 떠난 고향과 선산을 맡길 수도 없지 않은가.
이제는 선산도 시류를 따라 알맞게 변화를 시도하여 자손들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떠난 그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나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날아와 우짖고 구름도 스치며 넘어간다면, 분에 넘치는 호사이고 도리라고 여긴다. 범정 스님은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라고 했다.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자연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우리의 후손들이 기댈 영원한 품이다.
[이종승] 수필가. 전북문협 회원
장례문화가 나날이 바뀌고 있는 것을 봅니다. 팔순이 되도록 선산을 지키고 가꾸시면서 깨달은 바를 제안해 주셨습니다. 인간과 짐승과 온갖 자연에 깃든 생명들이 공존해야함을,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부터 솔선하시려는 마음을 읽습니다.
후손에게 물려줄 지구별을 위해, ‘소박하고 겸허하게 인생의 뒤처리’를 함께하자는 당부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