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닥왕국의 몰락
강 현 덕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이 설립한 「이스트만 코닥사」는 기업가 정신에 입각하여 복잡한 사진술을 초보자들도 쉽게 다룰 수 있는 단순화를 목표로 연구에 매진하여 사진영상 문화에 크게 공헌했다. 최초의 휴대용 사진기인 코닥카메라를 선보였고 아마추어 사진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결국은 셔터를 누르는 것만으로 일반인 모두를 사진가로 만들어 놓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코닥은 미국 내 로체스터시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전역‧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포괄하는 말 그대로 거대한 초일류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코닥은 줄곧 이스트만 시대를 뛰어넘어 화상의 창조와 기억 및 조작과 재생의 최신 영상 기술개발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가 급격하게 대중화되면서 점차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해놓고도 아날로그 시스템의 필름시장에 안주하느라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1930년대 보석 마케팅을 위한 광고 중 가장 히트한 카피 중 하나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문구였다. 이를 사진계에 대입하자면 ‘코닥은 영원히’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코닥은 사진인들에게 친숙한 대표적인 브랜드였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코닥의 순간(Kodak moment)’이라 한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소중한 순간을 표현한 말이다. 즉 세계인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닌 추억을 파는 기업으로서, 코닥은 곧 카메라 필름이라는 등식으로써의 강한 이미지가 소비자들에게 잠재해 있었다.
코닥사는 사진과학의 영역을 확대하여 새로운 사진기술을 개발해 나갔다. 1976년에 개발한 전자사진 복사기‧고속 프린터의 이미지 라이터‧전자화상의 고품질 프린터에 이르기까지 신제품을 계속 쏟아냈다. 전통적인 사진유제의 분야에서는 샤프니스와 해상력이 우수한 고감도의 필름도 만들어냈다. 그리고 상공업 분야에서도 비은염 기술에 의한 각종 제품들이 시장을 점유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듯 「이스트만 코닥사」는 필름‧인화지와 사진영상 관련 장비 등을 생산하며 사진의 역사를 써내려간 미국의 대표적인 사진 기업이다. 1970년대 중반 코닥의 호황기 시절 미국 필름시장의 점유율은 90%, 카메라가 85%에 달했다. 또한 1981년 매출액이 100억 달러를 달성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코닥의 경제적 가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무렵까지 코닥의 기업가치는 130억 달러가 넘으면서 코카콜라‧맥도날드‧IBM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비중 있는 기업브랜드로서 코닥의 이름을 올려놓으며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디지털의 물결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코닥은 필름으로 돈을 더 벌었기에 더 이상 디지털 사업에 주력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날로그의 아성이 너무 크고 견고했다. 코닥은 뼛속까지 필름기업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디지털 카메라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코닥은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윤은 급감했다.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닥은 1975년 세계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다. 그러나 개발을 해놓고도 상용화를 추진하지 않았다. 몸체가 크고 화소수도 낮은데다 기록시간도 길었다. 이 신기술은 연구원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으나, 임원진은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이상 상품화하지 않았다.
코닥은 기술발전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물결에 편승하지 못했고, 소비자들은 재빠르게 경제성과 편리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업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기계의 시스템을 대체하게 되었고, 사진인들도 그 흐름의 추세에 따라 오프라인 작업에서 온라인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위기감을 느낀 코닥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디지털이미지 그룹으로 사업구조를 바꾸어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디지털 시장을 선점한 기업에 밀렸고, 뒤늦게 뛰어든 코닥은 이러한 시장상황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코닥은 디지털 시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 동안 코닥의 주식가치는 75% 가까이 추락했다. 2005년 이후 매출액은 반 토막이 났다. 2008년부터는 누적 적자만 17억 6천만 달러를 넘었고, 급기야 지난 2009년에는 필름생산을 중단했다. 2010년 매출은 72억 달러 수준으로 급락했다. 이후 1,100개 이상의 디지털이미지 관련 특허를 판매하여 기업을 살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느덧 업계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132년의 전통을 가진 카메라 필름의 제왕기업 「이스트만 코닥사」는 2012년 초 부도사태를 맞는다. 뉴욕 증시에서 한 달 간 종가 평균이 1달러를 밑돌게 되면서 퇴출 위기에 몰린 것이다. 로이터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닥은 수주일 안에 파산보호 신청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최근 1년 새 주가가 90% 이상 폭락한 이스트만 코닥사에 주식거래일 30일 종가를 평균 낸 결과 1달러를 밑돌았다고 고시하고,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주가를 부양(매달 마지막 거래일의 종가가 1달러를 넘어야 하며, 주식거래일 30일 동안 종가 평균이 1달러를 웃돌아야 함)하지 못하면 상장이 폐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후 주가는 더 떨어져 47센트까지 주저앉았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스트만 코닥사」는 결국 2012년 1월 19일(현지시간)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필름의 대명사 코닥왕국이 몰락한 것이다. 도저히 망할 것 같지 않았던 금융회사 ‘리먼브라더스’와 자동차기업인 ‘사브’에 이어 파산한 것이다. 성공의 덫에 빠져 사진의 소비패턴이 변화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스마트폰이라는 휴대전화 시장의 새로운 흐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노키아, 소니가 워크맨에 치중하다 애플의 아이팟에 시장을 내어준 사례는 유명하다. 이는 모두 개방적인 혁신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닥이 파산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코닥의 몰락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
첫째, 변화의 흐름에 느리고 시장환경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점이다. 코닥의 임원들은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썼고, 시판 뒤의 문제점이나 단점을 수정 보완하는 데는 게을렀다. 소비자들을 코닥의 제품에 따라오도록 내버려두면서 점차 고객들과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둘째, 또 필름기업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디지털 시대에 소비자들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과거에는 사진을 찍고 인화를 하여 앨범으로 장식을 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그냥 지워버리거나 화면으로 보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의 패턴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필름과 인화지도 팔지 못하고 매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대가 변한 뒤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맞추어나가지 못한 것이다. 기업과 현실의 경제는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코닥의 현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에 맞닥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진가 때문에 필름의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 매출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즉 코닥은 사진인들에 의해 무너져갔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은 또 다른 이유가 제기되기도 한다. 의료기관에서 사용하는 X-선 필름 등 정보‧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사용량이 더 많았다는 분석이다. 이들이 디지털 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매출은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 선도기업이 후발기업에 밀린 대표적인 케이스다. 코닥은 필름 관련의 사업이득이 디지털 관련 사업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존속성 기술에만 집착하다 시장의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들이 만든 디지털 기술이 당장은 소비자의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점차 고객이 요구하는 기능과 기술을 간파했어야 했다. 만약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만이 있었다면 어떠한 판단과 운영방침을 내렸을까. 뛰어난 경영능력과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을 지닌 그로서는 아마도 또 다른 시스템의 해결방안을 강구했을 것이다. 코닥이 디지털 기술에 매진하여 디지털 체제를 갖추었더라면, 코닥은 변함없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을 것이고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를 더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넷째, 근시안적인 성공의 덫에 갇혀 있었다. 기업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진화를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잘 나가는 기업일수록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안주하게 되고, 새로운 기업환경에 대해 현재의 상태가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실 안주 속에서 시장의 변화를 감지한 선지자가 개혁을 주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게 되어 있다. 어느 기업이든 파산하게 된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항상 갖게 되는 가장 큰 의문은 ‘잘 나가던 때와 하나도 다르게 한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최초로 개발해놓고도 필름시장이 잠식당할까봐 이를 상용화하지 않은 것이 코닥 몰락의 가장 뼈아픈 이유이다.
다섯째, 전략 및 선택과 집중에 실패했다. 코닥은 신기술 개발에 있어서는 항상 앞서갔다.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놓고 판매가 저조하면 이내 시장에서 철수하는 실수를 범했다. 2001년 온라인에 기반 한 사업을 위해 오포토(ofoto)라는 사진공유 사이트를 인수했다. 그러나 사진공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키우지 못하고 인화주문 사이트로만 운영했다. 또 2005년에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세계 최초의 Wi-Fi 기능이 있는, 이메일전송과 인터넷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를 출시했다. 이것도 시판이 저조하자 이내 시장에서 철수시켰다. 2007년에는 잉크젯 프린터 사업에 주력했다. 그러나 프린터를 비싸게 팔고 잉크를 반값에 파는 전략이 실패하여 이 사업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화학‧의료용품 등의 여러 사업을 기웃거렸지만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모든 휴대전화에 카메라 기능이 부가되면서 코닥은 또다시 뼈아픈 고배를 마셔야 했다.
1969년 7월 인류가 세계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하며 촬영한 사진기는 코닥 카메라였다. 사진의 대명사 코닥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1990년대까지 세계 5대 브랜드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 디지털 체제와 기업환경에 등한시했던 코닥은 업계에서 소외됐고 소비자들에게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들과 친숙했던 코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이 만들어낸 세상 어디서나 존재하고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의 속성이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사회에서 전통과 관행을 고집하며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살아남지 못함을 새삼 일깨워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코닥의 사례에서 오늘날의 열린 기업 생태계에 창조적 협력과 공생을 통한 개방적 혁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한국문화예술비평지, Vol. 10, 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