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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과 그의 명예(마태복음 6:5~13)
2025년 3월 2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4~13)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때때로 ‘당신들은 끝을 알고 사는지, 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사는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집니다. 또 어떤 때는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삶이란 대단히 잔인하고, 소망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기쁨을 얻기보다는, 결국에는 슬픔과 절망, 아쉬움에 압도되는 모습을 계속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생 자체가 너무나도 악이 많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가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은 정말 슬픈 곳입니다. 아무도 진실하지 않고, 단순히 진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무서울 정도로 세상이 악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이 삶 속에서 우리를 진정으로 책임지지 않을 이 땅에 있습니다. 누구도 나서서 ‘내가 너를 책임질 테니 평안하고 안심하라’며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치 바다 위에서 작은 판자 하나에 의지한 채, 하체는 물에 잠긴 채 표류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저 ‘Here you go, on your own.’, 홀로 남겨진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노래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모두 초월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상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을 돌봐 줄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며, 마치 놀라운 보화를 가진 듯한 특별한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정신적 지위가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에게 영원토록 돌봐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우리를 돌봐 줄 손이 있습니다. 우리를 돕는 손, ‘helping hands’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억울하고, 괴롭고, 정말 힘겨운 삶 가운데 있지만,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사회는 불안하며, ‘나는 10년 후에 무엇을 할까? 내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까? 자손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늙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수많은 걱정이 앞서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절대 제공될 수 없는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겉으로는 “으으으…힘들어, 힘들어.” 하면서도, 마치 등산하는 사람들이 “야, 힘들어서 못 가겠다.” 하다가도 정상에 오르면 모든 피로가 씻겨 나가듯,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인생은 그렇게 맡겨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운명은 그저 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맡겨져 있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어떤 손에 놓여 있다. 어떤 세력, 힘, 권세자, 권위, 안전한 장치가 나를 이끌어 가고 있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켜 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 불멸하며, 최고의 힘을 가진 분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것은 정말 뭐라고 해야 하냐면, 이것이 바로 그 나라의 힘입니다. 보통 이런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이것이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영원한 미래를 다시 보장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정말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이 세상의 삶에서 우리는 구원의 손길을 통해 그 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인도 받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도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한글 성경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만 봐도 의미가 좀 더 분명합니다. 영어에서는 “In the name of 누구”, “By whose name”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In the name of…”, “For the name’s sake” 등의 표현을 씁니다. ‘~이름을 위해서’ 하는 식입니다.
암행어사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가 거지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야, 거지야! 비켜! 돈 있으면 내놔!”라고 하면서 괴롭힌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패를 딱 꺼내며 “나 암행어사다!”라고 하면,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는 정부의 권세를 갖고 있는 자란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n the name of the government”, 이렇게 되겠죠. 아니면 왕의 명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구원받아 이제 그 나라의 도움으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 나라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힘과 위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원수가 우리를 채 가고, 속이고, 뜯어갈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구의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 임금 되신 주님이 계신 나라입니다. The Lord, 그 주님이 임금이신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명예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명예가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무너지고, 다른 나라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사단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고, 멸망이며,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하나님을 닮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전부 다 멸망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제적 힘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동화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두가 무슨 사회적 형태를 가지고 있든,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지지하는 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천국으로 갑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슬픈 일이 있다 할지라도 “엉엉… 이제 그만 울자.” 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약속받았고, 구원받았으며,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위해, 그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우리가 봉사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를 그렇게 돌보지 않습니다. 물론 먹고 사는 일은 돌봐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 내내, 매일 그 나라를 생각하며, 그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 나라의 임금의 자녀들로서 그 나라를 걱정하며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자기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까? 내 육신이 어떻게 먹고 살까?’ 한다면 좀 부족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 삽니다. 지금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권세를 부어주셔서, 우리는 그 나라에 갈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는 주의 나라의 명예를 위해 일합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그 나라를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침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란 명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명예가, 당신의 권위가, 당신의 권세가, 당신의 위치가, 당신의 영향력이, 당신의 계획이, 당신의 모든 뜻이 최우선적으로, 당신의 모든 영원한 정하신 뜻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이름’이란 ‘하나님’ 혹은 ‘주님’ 아니면 ‘Jesus’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도를 보십시오. “나라에 임하옵시고…” 바로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속에 다 이루어지고, 세상도 하나님의 뜻으로 전부 잠식되고, 전부 지배되기를, 통치되기를 원합니다. 악한 것들이 사라지고, 더러운 것들이 상쇄되고 다 빠져나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원수에게 속지 않게 하옵소서. 결국,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죽는 날까지 모든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습니다.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주의 이름을 위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한두 말씀만 보면,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옵소서…”(요 12:27)[1]
예수께서 이제 마지막 때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정말 마지막, 맨 마지막 날을 당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소서.” 주께서 당하셔야 할 그 수난, 겪으셔야 할 그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소서.”[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도 있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버지 나라의 명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명예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 나라의 명예입니다. 그분이 그곳에 계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곧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세상적이면, 세상에서 사탕발림이나 하면 인기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그 나라의 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3]
그래서 21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는 고난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그 나라 때문에, My name’s sake, 즉 내 명예 때문에, 하늘나라를 위하기 때문에, 나를 위하기 때문에, 내 아버지를 위하기 때문에, 성령에 순종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그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이 큰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냐?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냐?’
또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부분인데, 요한복음 14장에도 있지만,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3)[4]. 즉,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아버지께 구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래, 이제 받을 준비 됐니?” “네, 네, 됐습니다!” “자, 그러면 받아라~” 이렇게 하시면서, “내가 ‘예수’ 할 때 받아라. 예수!” 하면 선물이 툭 떨어지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는, “자, 내가 ‘하나님’ 할 때 받아라. 하나님~” 그러면 어디선가 “엇!? 누가 나를 불렀죠?”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요 16:24)[5] 그렇다면, “하나님, 저 복권 샀는데 당첨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 사람과 경쟁하는데 저 사람 떨어지고 제가 붙게 해주세요.” “저 사람이 저를 괴롭히니까 설사병 걸려서 쓰러지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도자체가 악하잖아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화를 참고 있다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저 사람 좀 쓰러지게 해주세요.”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갑자기 “아, 머리가 어지럽다…” 하면서 쓰러진다면, “봐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기도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성공이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6]. 어떤 사람이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희가 이 사람을 누구의 이름으로 고쳤느냐?” 그러자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나았느냐고요? 이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나았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그분,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예수! 일어나라! 했더니 ‘예수?!’ 하면서 어브브브~ 하면서 갑자기 병이 낫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것은 구원자다. 하나님의 아들, 이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다. 우리가 이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분의 명예가 나를 살리는 것이고, 그분의 약속이 나를 살리는 것이다!” 약속이 살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 나라의 힘을 보여주시고, 그 힘으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이지, 내가 ‘예수’ 한 번 소리 탁 하면, 움직이지도 않던 사람이 움찔움찔하더니 탁 일어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무슨 마법이어서, 그 소리에서 무슨 요술 같은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예수! 예수!” 많이 부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하시는 그분의 나라의 프로젝트, 그 나라의 뜻, 그 나라의 이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5장 8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폭행하고, 체포하고,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한 저명한 율법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건드리지 말라. 잘못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싸우는 격이 될 것이다. 저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자. 그러니 다시는 ‘이 이름’으로 전하지 말게 하자.”[7]
“이 이름으로 전하게 하지 말자.” 그렇다면, 그들이 막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들이 단순히 “내가 예수 이름으로 전하노니, 네가 이 말을 들어라! 내가 예수 이름으로 전한다!” 이것을 막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의 뜻을 전하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 나라의 뜻을 반대합니다. 겉으로는 좋게 보이고, 교회와도 잘 지내는 척하지만, 다 거짓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몇 년 동안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압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물들지 마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것, 보여주는 것, 완전히 거짓입니다. 하나님 나라 외에는 여러분을 구할 자가 없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이 사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사울, 곧 바울이죠. “이 사람은 정말 주의 교회를 핍박하던 무서운 사람인데요?”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해 쓰일 자다.”[8]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도 바울이 이제 일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예수! 예수!" 하고 이름만 외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곧, 그 나라의 일을. 그 나라의 명예를 위해.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이름으로’라고 말하지만, 영어로는 ‘In the name’ 혹은 ‘for the name’이라 표현됩니다. 즉, ‘예수 이름을 위하여’, ‘예수 이름 안에서’라는 의미죠.
또 사도행전 15장 2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행 15:25)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뚝 떨어져 내려온 ‘예수’라는 이름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공헌하시며 선포하신, 그가 우리에게 꿈으로 심어주신 그 그 나라의 견해들과 의지를 위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이런 장면이 종종 나오죠. 자객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두 명을 쓰러뜨립니다. 상대는 칼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당한 것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이름으로 여기 있는가?” 유럽이나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도, 또는 중국 영화에서도 이런 대사가 종종 등장합니다. “누가 보냈어?” “Who sent you?” 결국 핵심은 ‘누구의 이름으로 왔느냐?’라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사도행전 21장 1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즉, 바울은 그분의 명예를 위해, 그 나라의 명예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식기도를 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밥 먹자.”하고 기도하는데 ‘감사합니다’만 하기에는 기도가 온전치 않으니, 거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신앙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빈다. 그렇지만, 사실 ‘주여, 감사합니다, 아멘.’ 하고 끝내도 괜찮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어떤 구색을 갖춘 것으로서, 우리는 이 질서를 잡아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자’ 하고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기도 끝에 ‘예수 이름으로’라고 안 했다! 능지처참하라!”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기도한 것은 이미 그 나라를 위한 것, 그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죠.
여러분이 저와 함께 살아갈 때, 저는 우리가 모두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이름으로’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 이름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n the name of Jesus’, 혹은 ‘For the name of God’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있는가? 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성락교인들 중에서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교회에서 간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괴롭히고, 찢어 놓고, 심지어 교회를 무너뜨려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합니다. 고소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명예를 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너는 이 땅에서 내 일을 할지어다.” ‘For the name’,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일할지어다.’ 그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생업에 종사하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마음을 온전히 고정시키지 않으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께 헌신하고,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연결된 삶을 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목회자들이 있고, 전도사님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를 배은망덕하게 여기지 말고, 그 나라의 일을 추구하며, 그 나라를 세워가며, 그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박멸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받으심직한 선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이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수들과 계속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단님, 안녕히 가셨습니까? 진지는 드셨습니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것 말고요. 저는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통찰력을 통하여 내게 주신 내 주님이 시키신 일을 우리가 목숨 걸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 정말 교회를 살릴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관리하는 목사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제게 무슨 소용일까요? 목자를 소개하지 않고 목자를 표현하지 않는데, 목자의 고민에 합류하지 않는데.
우리 모두가 목자와 하나 되어 주의 이루시는 일에 단결하여서 세상에 어떤 음성이 있을지라도 오직 하나가 되어서 주의 나라를 위해 쓰여지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살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뛰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꿈을 키우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정말 좁쌀만한 제 이름을 같이 두겠습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 교회를 받아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예수 이름, 주의 이름, 주의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주의 나라의 권세를 위한 우리 뜻을 모아 주께 사용되고 또 우리 인생을 이렇게 역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받아주시옵소서. 원수를 위해 불의의 도구로 우리를 소모시키는 자가 아니라 주의 나라를 위해 우리 인생을 정말로 거룩하게, 아름답게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전에 우리의 삶은 정말로 치명적으로 더럽고 불명예스럽고 비참하며 배반스럽고 부끄럽지만, 이제는 명예스러운 주의 일에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종과 하나가 되어 주의 교회의 성공을 위하여 모두가 목숨까지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2]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3]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 15:18~21)
[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여 16:23)
[5]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여 16:24)
[6]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5~12)
[7]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38~42)
[8]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3~16)
[출처] 20250302 예수 이름과 그의 명예(마태복음 6:5~13)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 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