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출 수필
“비설거지와 수수 범벅"
아침부터 재난 주관방송사인 KBS-1TV는 <제 19호 태풍 ‘솔릭’>으로 서해안 지역 큰 피해!>라는 큼직한 ‘제목’을 화면에 띄우고 재난 대비 생방송을 시작한다. 이날 방송을 책임진 앵커는 본격적인 재난 방송 시작에 앞서 이 시각 현재 ‘재난 당국’에 파악한 제19호 태풍 '솔릭'의 피해 현황을 보여 준다. 「태풍 '솔릭'의 직접 영향권에 든 제주 지역에서 실종·부상자가 발생하고 수천 가구가 정전되는가 하면 방파제가 유실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제주 등 전국 9개 공항에서 347편의 항공편이 결항했고 인천 지역 등 전국 곳곳의 바닷길도 막힌 상태다. 재난 당국은 '솔릭'이 23일 하루 동안 계속 북상해 24일 오전 3시께 서산 남동쪽 육상<에 상륙한 뒤 한반도를 관통해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면서 엄청난 피해를 몰고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세심한 대비를 당부했다.
재난 대비 방송을 보는 동안 「지역에 따라 자연환경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법은 제각기 다르지만,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순종하듯 겸손하기만 하다. 피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의 참상은 하나같이 비참하고 참담했다. 비록 그곳 현장이 우리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곳 또한 대한민국의 우리 땅이요, 우리 국민이 모두 힘을 합쳐 이겨 내야 할 자연재해이기에 TV를 시청하는 동안, 마치 내 살이 찢겨 나간 듯이 진한 아픔을 느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피해 상황도 걱정이지만 정작 더 크게 우려되는 것은 이번 태풍의 피해로 농어촌 주민들의 상처받은 삶의 의지와 희망을 잃은 정신적 고통일 것이다.
태풍 재난 방송에 몰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느라 긴장되었던 내 마음이 희망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며 팽팽하게 조였던 긴장이 풀리자 TV 화면에서 눈을 뗀 나는 커피 한잔을 들고 마산 서한이 건너서 보이는 창가로 다가섰다. 마창대교와 우리가 살았던 ‘신마산 일대’ 시가지가 보인다. 마산 제2부도 물양장 인근에는 친수 시설 공사의 흔적과 사업 주체를 찾지 못한 ‘인공섬’과 한 때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이 찾았던 ‘돝섬’을 보니 불현듯 2003년 9월 12일 <제14호 태풍 매미> 때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 오후에 예고없이 닥친 해일(海溢)로 바닷물이 육지 500m까지 밀려와 아파트 지하 주차장 속으로 바닷물이 빨려 들어가는 생생한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며 경악했던 그 일이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같이 떠올랐다.
바닷물이 지하 주차장을 채우고, 지상 주차장도 물바다가 되고, 정전되어 해가지니 암흑천지로 변하고, 엘리베이터도 멈춰서고, 지상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는 물이 차 설비가 합선되면서 마치 불꽃놀이 하듯 번쩍거리고 일제히 요란한 경보음을 내는 광경을 연출하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 가족에게 닥쳐올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18층 꼭대기에 살았던 우리 부부는 그 시간 이후부터 전기와 수도가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두어 달 넘게 매일 두 차례 18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의. 식. 주의 문제 해결과 생리 해결을 위한 고생을 수없이 했지만, 정작 주민들이 입은 고통은 산 자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 이날의 ‘해일’로 우리가 살았던 지역에서 18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순식간에 희생된 아픔을 남겼다.
요즘에는 TV 방송이 새 소식을 알려 주는 중심 매체가 되어 TV로 태풍 소식을 보고 듣는 세상이 되었지만, 필자가 초·중학교에 다녔던 1960~70대 그 시절에는 태풍이 오면 직접 몸으로 부딪쳐 경험하거나 선생님한테서 들어서 알았고, 평상시 보고 듣는 정보도 주위에 국한되어 시야도 생각도 좁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나라 안팎 소식은 학교에서 소년신문을 읽어서 알게 되거나 뉴스와 일반상식은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어른들의 설명을 통해 알았다. 코미디 같은 세상의 60~70년대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TV는커녕 라디오도 귀했던 시절이라, 필자의 고향 마을을 비롯한 대개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장님 댁에 라디오방송 수신 장비를 갖추어 놓고, 가정마다 스피커를 연결하여 라디오방송을 들려주거나 긴급한 소식은 동네 한가운데 정자나무에 매달아 놓은 혼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로 알려 주었다.
<아, 아, 아. ◌◌동민 여러분! 내일 새벽부터 우리나라 전역에 ◌◌호 태풍 ‘솔매’가 닥친다고 하니, 각 가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여 가옥과 농작물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변을 단디 단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흠~~~>. 이렇게 태풍이나 큰비가 올 징조로 샛바람이 살살 불기 시작하고, 비 실은 시꺼먼 구름이 동쪽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전 가족에게 빨리 비설거지를 마치라고 근엄하게 이르신다.
누나와 나는 마당 가 멍석에 널어놓았던 나락을 가래로 가마니에 퍼 담아 축담 위에 올려 비료 포대를 씌어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해놓고, 덕석은 말아 집 뒤쪽 추녀 아래 덕석 보관 시렁에 차례로 얹어 놓는다. 장손인 나는 어른들의 기대만큼 내가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할 일도 참 많았다. 어머니는 장마 중에 밥을 지을 수 있도록 땔감을 준비하도록 저한테 특명을 내린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손도끼 질 솜씨가 어른 못잖게 실팍짐을 알기 때문이다. 다람쥐처럼 몸을 날려 낫을 찾아 들고, 뒤란 감나무 아래 높다랗게 재어놓은 나무 낟가리에서 청솔가지를 넉넉하게 빼내서 곰삭은 가지를 참나무 받침목에 번갈아 얹어가며 손도끼로 한 자 길이로 잘라 가지런히 재어 모은다. 이렇게 자른 청솔가지를 단으로 재어 부엌의 가장자리 시렁 밑에 몇 단씩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그런 후 뒷마당 두엄 밭에 매어 놓은 우리 집 살림 밑천 누렁이 암소를 아래채 마구간으로 옮겨 매고 할아버지께서 베어다 놓은 꼴 단을 풀어 부드러운 억새를 한 아름 안아다 여물통에 넣어 주고 다시 뒤란으로 나가 돼지우리 안에도 새 짚단을 깔아주고 여물통도 깨끗이 청소한다.
아버지와 막내 삼촌은 마루 밑에 넣어둔 마니라 밧줄과 굵은 새끼줄을 꺼내와 지붕의 전후좌우로 촘촘하게 힘껏 당겨 매고(일명 ‘재 넘기’라고 부름), 줄의 끝을 마루 기둥과 댓돌로 쓰는 큰 돌덩이에 단단히 이어 묶는다. 할머니는 장독으로 납시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열어둔 장독 덮개를 닫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내어 주신 저녁 밥쌀을 도랑사구에 받아 씻어서 가마솥에 밥을 얹혀 얼른 남새밭으로 나간다. 가마솥 밥 위에 얹어 쪄 먹을 호박잎을 따와 작은 소쿠리에 담아 부엌에 갖다 두고, 다시 넓은 대광주리 들고 손놀림이 빠른 누나와 큰 밭에 가서 따온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겨 삶은 줄기를 저녁 밥반찬으로 곰삭은 멸치액젓에 묻혀 낸다.
어느새 빗방울이 마당 가 감나무 잎사귀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이장님이 마이크로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아랫방에서 곰방대에 ‘풍연초’를 재어 담배를 피우시던 할아버지는 그제야 대나무 삿갓을 쓰고 다랑논에 막아놓은 물꼬를 트기 위해 볼이 좁은 삭 괭이 들고 개암나무 무성한 산등성 허리를 돌아 열댓 마지기 우리 논배미가 있는 보름 뫼 들녘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며칠째 장마가 계속되면 불을 지펴 방안에 배인 눅눅한 습기를 말린다. 이럴 때 우리는 대청마루 끝에 제비처럼 앉아 물동이로 퍼붓는 듯이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당 끝에서 두꺼비가 살금살금 기어들고, 삽짝 밖 무논에서 소나기 타고 하늘로 튀어 오른 황금색 미꾸라지가 마당 위로 툭툭 떨어진다. 강풍과 폭우가 요란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뒤 부엌 안 아궁이 고래로 물길이 터져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문전옥답 논두렁을 받치는 언덕은 해마다 터져내려 우리 어머니 가슴을 애태우게 했다.
태풍으로 바람 불고 장마 들어 비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외부지역과는 완전히 고립된다. 멍멍개와 고양이는 대청마루 밑에서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돼지는 배고프다 꿀꿀대고, 닭장 속의 꼬꼬닭들은 비가 오는데도 추적이며 마당 가를 서성이다 대청마루에 함부로 올라 발 도장을 찍고 할아버지의 곰방대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짐승들조차 이러거늘, 분탕질이 한창 심할 때인 우리 6남매들은 적막강산이 되는 밤이 오면 더욱 답답하고, 석유라고 떨어지는 날이면 밤새 어둠 속에서 제삿날 쓰고 남은 초를 찾아 반딧불이 같은 작은 불을 켜고 지내야 했다.
이런 날이 며칠간 계속되어 우리가 지칠 때가 되면 할머니는 우리의 짜증을 녹여 줄 간식을 준비하였다. 호랑이도 무서워 했던 ‘수수 범벅’이었다. <수수에다 팥, 강냉이, 빼때기>를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볶아서 맷돌로 갈아낸 가루를 범벅하여 가마솥에 쪄낸 ‘수수 범벅’을 배부르게 먹으며 놀았다.이제는 지나간 세월이 반백 년도 넘었다.
우리 6남매들의 큰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조부모와 부모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신지 오래되었고, 그 시절 코흘리개 철부지에 불과했던 우리도 이제 예순 이쪽저쪽에 이른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그 시절에 밤낮으로 애쓰며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어른 들의 따스했던 손길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2018-10-10
첫댓글 2018-10-10에 썼던 수필입니다.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욕심이 앞서 군더더기가 많군요. ㅎㅎ
아릿아릿한 추억들이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다시 환생하니 작가의 큰 능력입니다.
귀한 작품 감사합니다.
인당께서도 농촌 출신이라 공감해 주시는 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