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에 새로 만들어진 도로에 나치 손아귀에서 유대인 어린이 수백명의 목숨을 구해낸 영국인 니콜라스 윈튼 경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BBC가 4일 전했다.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네 사람이 이제 80대와 90대 노인이 돼 거리 명명식에 참여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유대인 수만명을 실어 나르던 열차가 섰던 작은 간이역 아래 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추방과 학살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체코슬라바키아 유대인 어린이들을 미리 영국 등으로 피신시킨 것이 '킨더트랜스포트 저니'였는데 프라하를 마지막으로 떠난 열차가 출발한 지 85년이 되는 해가 올해다. 밀레나 그렌펠베인스(94) 할머니는 생일 축하 카드만한 낡은 여권을 꺼내며 “이것은 자유로 가는 내 여권이었다”고 말했다. 노랗게 바랜 카드에는 할머니의 처녀적 이름 밀레나 플라이슈만과 아홉 살이 적혀 있었으며 영국 국왕이 입국을 윤허했다고 적혀 있었다. 밝은 흰색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은 소녀가 활짝 웃는 사진이 앞에 붙여져 있다.뒤쪽은 스바스티카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 문서를 꼭 쥐고 목 주위에 이름표를 두른 채 밀레나는 세 살 여동생 에바를 보살피며 나치 독일을 열차로 횡단했다. 이렇게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유대인 어린이 수십명이 네덜란드로 들어간 뒤 영국으로 건너는 배에 몸을 실었다. “우유를 탄 차 한 잔이 우리가 받은 모두였다. 누구도 우유를 탄 차를 마시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쏟아버렸다."
결국 밀레나와 에바는 나중에 어렵사리 탈출한 부모와 상봉했다. 플라이슈만 가족은 운이 좋았다. 친구와 친척 다수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활력 넘치는 밀레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테레시엔슈타트 게토로 끌려가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는 여정을 시작하며 앉았던 철도역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역 프라하 부브니 역은 기념관으로 변신했고, 더 크고 현대적인 역이 근처에 지어지고 있다. 철로 아래 보행로와 사이클 도로가 이제 니콜라스 윈튼 거리로 명명된 것이다. 밀레나는 "사람들은 왜 이 거리를 니콜라스 윈튼 거리로 불리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덕에 많은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녀와 다른 세 명의 ‘어린이들’이 유대인 난민 연맹(AJR)이 개최한 기념 행사에 초청했다. 이 연맹의 마이클 뉴먼 의장은 “니콜라스 경을 추모하며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로 자녀들을 보낸 부모들은 물론 나치 압제의 가장 어린 피해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한 위탁 가정에도 존중을 표한다"고 말했다.
프라하 7지구의 얀 치진스키 시장은 “오늘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가 선의의 행동을 시작하길 기다리지 않지만 그들은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정말 중요하다"면서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면 다른 이들이 따른다"고 말했다.
밀레나는 그 카드를 찾지 못했는데 1980년대 스물아홉 살의 영국 주식중개인이 찾아내 BBC 프로그램 '이것이 인생'(That’s Life)을 통해 소개하며 비로소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지금은 전설이 된 동영상에서 말 없는 윈튼은 전쟁이 터지기 전에 자신이 도와 목숨을 구한 '어린이들'과 40여년 만에 감격의 상봉을 했는데 그 작전은 팀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공을 미뤘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1938년 성탄절부터 이듬해 1월까지 프라하에서 한 달을 지내며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을 찾아 사정하고 위탁 가정을 찾고, 가짜 서류를 만들어 아이들을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가려고 노력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에야 작위를 받았고 2015년 106세 나이에 저하늘로 떠났다. 여생 대부분을 자신이 살려내지 못한 아이들 생각에 괴로워했다.
밀레나의 열차는 점령지 프라하를 떠나는 여덟 번째, 마지막 트랜스포르트 열차였는데 모두 250여명이 탑승했다. 그 뒤 아홉 번째 열차가 떠나기로 한 1939년 9월 1일,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열차는 떠나지 못했고, 몇몇 아이들만 여정에 나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