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공약을 외우다
나는 초등학교를 끝으로 상급학교를 진학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의 恨(한)과 가족사를 써보려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뛰어난 기억력은 물려 받았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부터 賞狀(상장)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잘 그려 상을 받고 건강하여 개근상을 받고 학업이 뛰어나 해가 바뀌어 학급이 올라갈 때마다 상장을 받았다.
4학년 때 5·16혁명이 일어났다. 선생님들은 양복을 벗고 재건복을 입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국기 하강식도 시작하였다. 전교생에게 혁명공약을 熟知(숙지)하도록 과제가 주어졌다. 혁명공약을 외우는 순으로 하교가 이루어질 정도로 혁명공약 숙지 교육에 매달렸다. 나는 반에서 가장 먼저 한 字(자)도 틀림없이 외우고 박수 속에 하교를 하였다. 나는 우쭐하여 선배 집이나 반 학우들 집을 다니며 은근히 실력을 자랑하였다. “놀자! ○○야 놀자!” “아직 안왔는디 너는 워찌 빨리 왔느냐?” “혁명공약을 빨리 외워서요!”
다음날 조회시간에 학교 대표로 운동장 중앙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혁명공약을 외웠다. 반공을 國是(국시)의 1위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혁명공약 여섯 가지를 한 자 어긋남이 없이 외웠다. 교장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칭찬을 하여 주셨다.
“무식혀야 사는 벱이여, 진학은 꿈도 꾸지 말그라!”
나는 장차 뛰어난 소설가도 되고 기자도 되고 화가가 될 것을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학교장 賞(상)을 타고 졸업을 하였다. 나는 중학교 원서도 써보지 못하고 좌절을 맛보았다.
“아홉 식구 입에 풀칠도 어려운데 무신 중핵교? 글구 무식혀야 사는 벱이여, 니 큰형 봐라 공부 잘허고 상급학교 다니다가 모략에 죽지 않았냐 시방! 진학은 꿈도 꾸지 말그라!”
늙고 초라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당신의 장남이 모략으로 변을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25 전쟁이 나기 2년 전 1948년 10월 어느날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서 반란이 발생하였다. 붉은물이 든 尉官(위관)장교 몇 명과 지창수 하사관이 연대장을 사살하고 반란군으로 돌변하였다. 이들은 순식간에 여수시내 관공서를 함락하고 순천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순천관공서도 휩쓸었다. 반란군들은 군산에 주둔한 ○○연대와 합류하여 서울로 진격하려고 北進(북진)을 하였다.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정부에서 대규모 진압군을 내려 보냈다. 곡성에다 진을 치고 반란군들을 막으니 수가 적고 화력이 미약한 반란군들은 숲이 울창한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낮에는 숲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민가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곳에나 불평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소작농이나 머슴들이 동조하고 더러는 산으로 가서 전투교육이나 공산당 이론을 배웠다.
지리산은 무척이나 넓고 깊었다. 3개 道(도) 10여 개 郡(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반란군들의 세가 늘어나고 민간인들의 합류가 늘어나자 정부에서도 지리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주민들을 면소재지 학교로 疏開(소개)하고 대대적인 공비토벌 작전을 개시하였다.
큰형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우리집 이웃에 문○○이라는 자가 里責(이책)이 되어 포섭을 하고 지리산을 오가며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지리산에 김일성 대학을 개설하고 엘리트들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하달하였다. 里責은 구례읍에 나가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의 큰형 이름을 장부에 올리고 말았다.
마을이 소개가 되고 里責의 방에서 장부가 발각되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있던 큰 형은 갑자기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굴비처럼 엮이어 섬진강가로 끌려가 재판 과정 없이 즉결처벌로 죽임을 당하였다. 屍身(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는 실신을 하고 어머니도 실신하였다.
마을마다 상급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거의 참변을 당하였다. 아버지는 곰방대에 담배만 연신 빨면서 “亂世(난세)에는 무식헤야 사는겨!”만 되뇌며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 나이 61세 환갑에 내가 태어나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전쟁과 굶주림과 老産(노산)으로 어머니가 젖이 나지 않자 아버지는 심봉사처럼 핏덩이 나를 안고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키웠다고 한다.
우리 집이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은 宗家(종가)로써 時祭(시제)와 제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제가 수봉상이요, 제사가 30봉상이 넘었다. 흥부자식 생일 돌아오듯 제사가 한 달에도 몇 차례 돌아왔다.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은 1963년도에나 끝이 났다. 그러다보니 山峽(산협) 마을의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쑥죽이나 송키밥으로 끼니를 대신해야 하였다. 주민들의 상처도 그대로 남았다. 좌익에 가담하여 죽은 자도 많았고 우익이라고 반란군이나 폭도들에게 희생된 가족들도 많았다. 모두가 지리산이 안겨준 비극이었다.
지리산 마을까지 울려퍼진 혁명공약
해마다 흉년이 들어 보릿고개라는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였다. 주민들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高利(고리)와 長利(장리) 쌀 제도가 있어 해마다 농사를 지어야 헛수고였다. 봄에 식량이 바닥나면 부잣집에서 쌀을 한 가마 빌리면 가을에 한 가마 반을 갚야야 하였다. 현금을 빌리면 이자가 높아 고리채라고 불렀다.
찢어지는 가난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찧어서 밥을 지어 먹으면 어김없이 변비에 걸린다. 배설 때 항문이 찢어지거나 피와 함께 똥이 배설되었다. 어린이들은 항문이 아파서 울고 어른들은 안타까워 울었다.
각 가정마다 나무로 취사를 하고 난방을 하고 소죽을 끓였다. 그러다 보니 산들은 민둥산이 되었다. 볼품도 없고 산이 하는 기능들이 없어져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었다. 이렇듯 못 입고 못 먹은 주민들의 생활은 밑바닥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영양실조로 인하여 얼굴이 부스스하였다. 몸에 벼룩과 빈대가 득실대는 등 삶이 괴롭고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아이들의 배는 맹꽁이처럼 터질 것 같았다. 영양실조가 되어 浮黃(부황)이 났기 때문이었다. 머리에는 버짐이 덕지덕지 나서 된장을 발라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다녔다.
지역 경제가 이럴 때 주민들의 삶이 이러할 때 멀리 서울에서 혁신의 바람이 전파를 타고 지리산 인근 우리 마을에도 울러 퍼졌다. 바로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5·16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 공약을 제일 잘 외워 두각을 나타냈으나 가난한 형편과 아버지의 禁學令(금학령)으로 나는 학업의 꿈을 접고 농사꾼이 되어야 하였다.
나는 혁명정부에서 하는 일이 혁신에 꼭 맞는 일이라고 마을에 계몽을 하고 다녔다. 공무원들이 양복 대신 再建服(재건복)을 입는 것도 맞고 제사도 간소화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고리채를 신고하는 것도 옳고 장리쌀도 없애는 것이 아주 잘한 일이라고 박수를 쳤다.
새마을 사업과 獨學 결심
혁명정부는 고리채를 없애고 장리쌀 제도도 없애고 관혼상제의 간소화도 추진하였다. 儒林(유림)에서나 유지급 집안에서는 불만이 많았으나 나라를 위해서는 천번만번 합당한 정책들이었다.
1962년 6월10일 화폐개혁이 발표되었다. 처음에는 약간 혼란이 일었으나 워낙 돈이 귀한 시골에서는 微風(미풍)으로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1963년 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후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었다. 마을마다 새마을旗가 걸리고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다. 구렁이처럼 휘어진 골목길이 헐리고 서로 땅을 내놓으면서 좁은 길이 신작로로 변했다. 초가지붕이 걷히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농약이 개발 보급되고 풍년이 찿아오기 시작하였다. 지긋지긋한 쑥죽이나 송키밥 대신 쌀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통일벼가 보급되고 쌀수확이 곱절로 늘어났다. 비로소 쌀밥을 먹기 시작하였고 라면이 개발되어 식생활도 변화를 가져 왔다.
비료포대와 밀가루 포대마다 미국 국기와 악수하는 그림이 있었고 영어가 적혀있었다. 나는 눈 뜬 장님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투머리를 튼 서당 훈장님도 이장님도 영어를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獨學(독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여태는 먹지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 왔다면 앞으로는 무식해서 文盲(문맹)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강의록을 사서 혼자서 배우면 중고등 학교 과정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강의록 값은 3000원이었다. 우리집 경제는 무척 어려웠다. 아홉이나 되는 식구에 제사가 많은 宗家(종가)이고 보니 내가 쓸 돈이 없었다. 나는 직접 책값을 벌기 위해 장작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나무지게 지고 매일 왕복 백리길을…
아침 밥을 먹고 톱과 지게를 지고 지리산으로 올랐다. 죽은 나무를 썰고 도끼로 패서 장작을 만들었다. 지게에 장작을 지고 구례읍으로 자갈길 50리를 걸었다. 버스나 트럭은 먼지를 끼얹고 지나갔다. 산을 출발하여 구례읍에 도착하면 오후가 되었다. 국밥집에 겨우 100원을 받고 팔았다. 허기가 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건만 100원을 꼭 쥐고 귀가를 하였다. 집에 도착하면 초저녁이 되었다. 발이 불어터지고 肉身(육신)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파김치가 되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반복하다 보니 1500원이 모였다. 그런데 그때 심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염세주의가 겹치면서 죽고만 싶어졌다. 공부도 필요 없고 부귀도 영화도 덧없이 느껴졌다. 밤새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유서를 써 내려갔다. 나를 얻고 삶의 의욕을 얻은 아버지가 나를 잃으면 어찌 될까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학문을 하지 못한 까막눈의 삶은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부잣집 아들이 목숨을 살려주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갔다. 칡넝쿨로 올무를 만들고 소나무에 걸고 목을 올무에 넣고 매달렸다. 목이 조이는가 싶더니 우지직하고 줄이 끊겼다. 나는 소나무 밑으로 떨어졌다. 자살은 실패하고 말았다.
자살 방법을 달리하기로 하였다. 마을 앞 신작로로 갔다. 멀리서 목재를 싣고 GMC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뛰어 들었다. 찌익!-브레이크 소리와 동시에 트럭이 멈추었다. 임꺽정같은 운전수가 내 뺨을 갈겼다.
“이 자식아 죽으려면 물에 빠져죽어 임마, 내 가족이 열이야.”
“고맙습니다. 죽는 방법을 가르쳐줘서요.”
트럭은 나를 밀치고 먼지를 날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마을 아래 오동나무 沼(소)로 갔다. 커다란 돌을 들고 깊은 곳을 향해 걸었다. 누가 내 배에 올라타고 누르고 있었다. 나는 물을 쏟아내며 龍宮(용궁)인가 눈을 꿈뻑거렸다. 분명 용궁은 아니었다. 나를 건져낸 사람은 방학을 맞아 내려온 황부잣집 아들 대학생이었다.
“임마 죽을 용기 있음 살아봐, 네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죽을 용기로 배워봐!”
“고마워요.”
‘통신강의록’으로 獨學
물에 빠져 죽으려다 살려냈다는 소문이 돌자 아버지는 통곡을 하였다. 2000원을 주시며 주경야독을 하라고 허락을 하셨다. 나는 3000원을 서울로 送金(송금)하고 강의록이 오기를 기다렸다. 흡사 이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처럼 대문에서 집배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보름 만에 강의록이 도착하였다. 표지에 링컨 대통령이 실렸고 삼국지보다 두터웠다. 영어를 비롯하여 수학 등 全과정이 수록되었다. 영어가 제일 흥미가 있었다. 빨래 집게처럼 생긴 글자는 에이(A) 字였고 소쿠리테 같은 자는 큐(Q) 字였고 사다리처럼 생긴 글자는 에이치(H) 字였다. 혼자서 이해가 어려운 영어나 수학은 대학생을 찾아가 배웠다. 국어나 사회는 그냥 읽고 머리에 기억하면 되었다.
틈만 나면 책을 파고드니 웬만한 글자는 내 것이 되었다. 3년을 독학을 하니 비료포대의 영어를 대충 읽고 이해가 가능해졌다. 나는 검정고시는 보지 않기로 하였다 죽을 때까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나는 《삼국지》를 비롯하여 《수호지》,《금병매》등 중국의 奇書(기서)들을 다 읽고 방인근의 《벌레먹은 장미》같은 禁書(금서)도 읽고 《단테의 神曲(신곡)》이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까지 읽었다.
열네 살의 농사꾼
열네 살 나이로 소년 농사꾼이 되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으로는 책을 읽었다. 마을마다 새마을 노래에 맟추어 山林綠化(산림녹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온 나라의 산들이 민둥산이 되다시피 하였으니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었다. 집집마다 火木(화목)으로 난방을 하고 취사를 하고 소죽까지 끓였으니 산이 민둥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산림감시 직원이 있었으나 마을마다 다니며 감시를 할 수는 없었다. 6·25 전쟁 이후 한 차례도 나무심기를 시행한 적이 없었다. 망태에 도시락을 담고 삽이나 괭이를 들고 할당된 산으로 출발하였다. 郡(군) 전체 야산이나 국유림까지 다 대상 지역이었다.
나무 심을 구덩이를 파는 조가 구덩이를 파놓으면 다음날 그곳에 가서 나무심기를 하였다. 망태에 묘목을 담아 구덩이에 심고 흙을 덮고 단단히 밟아주면 되었다. 가파른 산에서 종일 나무를 심다보면 허리도 아프고 꽃샘바람이 어린 육신을 파고들기도 하였다.
일부 양심불량의 어른들이 있었다.
“큰 구덩이를 파고 묘목들을 묻어버려! 그래야 빨리 마치고 갈 수가 있다!”
“그렇구만요 그럽시다.”
“아재들요, 그러면 안됩니다. 이 묘목이 우리 세금이 될 수도 있고 외국에서 주는 借款(차관)이 될 수도 있어요. 남으면 내일 심으면 됩니다.”
“아이고 그 말 들으니 그렇네. 근디 차관이 무엇이냐?”
“차관은 외국에서 돈을 꾸는 것입니다. 나중에 갚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렇구나 확실히 공부허는 것이 헛되지 않구나!”
나는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옳은 말을 잘하여 내가 보는 앞에서는 묘목을 없애거나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였다. 소년시절에 공부하지 못하면 까막눈이 되고 민둥산을 방치하면 나라의 장래가 푸르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다.
산림녹화 사업의 성공
묘목은 주로 잣나무 낙엽송, 은사시나무, 밤나무 등이었다. 개인 산은 有實樹(유실수)가 많았고 국유림은 낙엽송이나 잣나무가 많았다. 유실수는 십년 전후면 열매가 열리고 잣나무는 30년 이상이면 잣이 열리고 산이 울창해져 숲이 되고 그 때부터 인간에게 베풀기 시작한다.
태양이 힘을 잃고 석양이 되면 車(차)가 밀가루를 싣고 와서 勞役(노역)에 따른 대가를 나누어 주었다. 밀가루는 봄을 지나는데 요긴한 먹거리가 되었다. 빵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팥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분식 장려도 이 무렵 시행하였다. 부족한 쌀로만 주식을 하지 말고 밀가루 음식도 골고루 섭취하여 경제에 보탬이 되고 건강에도 도움을 주려는 혁명정부의 식생활 개선 정책이었다.
산림녹화 사업은 해마다 지속되었다. 解凍(해동)이 시작되는 3월 초에 시작하여 4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그 시절 산림녹화 사업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같은 울창한 숲은 없을 것이다. 민둥산을 없애고 어디로 가나 전국의 산들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맑은 산소를 우리 인간들에게 공급해주는 것은 그 시절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하고 그린벨트를 만들어 철저하게 관리를 한 덕분이다.
퇴비 增産 운동
우리나라는 오fot동안 농업을 崇尙(숭상)해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풍족한 생활은커녕 쌀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다. 地主(지주) 제도가 있어 농사지어도 소작료 70%를 주고 30%를 가지고 먹고살았다. 봄에 식량이 바닥나면 다시 지주 집에서 長利(장리) 쌀을 얻어 먹고 가을에 이자까지 갚아야 하였다.
각종 진딧물과 병충해는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 농사짓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지주 제도를 없앤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소작인들이 신고를 하면 소작인이 지주가 되는 실로 혁명이나 다름 없었다. 지주 제도를 없앤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풍년을 만들어주고 쌀밥을 제대로 먹게 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혁명정부에서는 면 소재지마다 농촌지도소를 만들었다. 농업전문지식을 농민들에게 傳受(전수)해주고 정보와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화학 비료는 땅을 산성화시키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 동안 無知(무지)로 인하여 땅을 산성화시켰다면 지금부터는 퇴비를 많이 넣어 地力(지력)을 회복하자는 것이 퇴비증산 운동이었다. 마을마다 퇴비장 만들기를 적극 장려하였다. 새마을 사업으로 잘 닦아진 마을 도로 옆에 퇴비장을 만들고 마을마다 전시를 하였다. 작게는 2톤 트럭만큼 퇴비를 만든 집들도 있었고 버스만큼 많이 만든 집도 있고 머슴이 있는 大농가들은 산더미처럼 퇴비를 쌓았다. 퇴비증산은 다수확으로 나타났다. 보리타작을 하면 보릿가마니가 온 마당을 차지하다시피 풍년을 맞았다.
50kg 뽕가마니를 지고 성삼재로 오르다
농가 소득을 위하여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밭마다 뽕나무를 심고 산으로 가서 꾸지뽕을 따서 누에를 길렀으며 야생 뽕잎을 따러 지리산까지 갔었다. 뽕나무보다 많은 누에를 치다 보면 뽕잎이 모자랐다. 나는 형을 따라 지리산으로 야생 뽕잎을 따러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두 개씩 싸고 큰 가마니를 지고 지리산으로 갔다. 성삼재(해발 1200m)에 올라 아침을 먹고 피아골 부근에 가서 야생 뽕잎을 따기 시작하였다. 중간중간 뱀이 있는지 작대기로 소리를 내고 뽕을 따서 가마니에 넣었다. 몇시간을 따면 한 가마니가 되었다. 무려 50kg이나 되는 뽕가마니를 지고 성삼재로 오르면 코는 산에 닿고 땀은 팥죽같이 흘렀다. 열다섯 소년의 몸으로는 苦役(고역)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이미 밤이 되었다. 이처럼 지리산을 몇 차례나 다닌 후에 누에가 고치를 만들었다. 누에고치를 팔면 마을에 돈이 돌았다. 흑백 티비도 사고 선풍기도 장만할 수 있었다. 나는 조그만 액수를 받아 책을 사서 읽었다.
지리산은 우리집에게 상처도 주고 도움도 주었다. 반란군들의 은신처가 되고 共匪(공비)들의 안마당이 되어 우매한 사람들을 끌고가 얼어죽게 만들고 핏물이 흐르던 산이었다. 지리산은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산목련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였다. 뽕을 따러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인내심과 무엇이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반드시 이룬다는 교훈도 얻었다.
‘의무가 福(복)이 되어!’
농사꾼이 되어 체력을 단련하고 독학으로 까막눈을 면하게 되었다. 어느 사이 어깨가 넓어지고 청년이 되었다. 그 시절은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군대를 갔었다.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광주 00사단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45일의 고달픈 훈련이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에 총을 잡고 사격연습을 하고 유격훈련을 하고 화생방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00공병학교로 배치받았다. 학교라는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병학교에는 각종 건설 중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크레인, 불도저, 그레이더, 롤러 등 모든 육중한 장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피교육생들은 엔진공학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교관님은 조그만 책을 보고 강의를 하였다. 나는 대학 노트에 깨알같이 적었다. “
“교관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라.”
“큰 궤도를 만들어 강의를 하시면 보고 쓰기도 쉽고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제안이다. 글씨 잘쓰는 사병과 그림 잘그리는 사병은 나오라. 오늘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림을 그렸다. 모든 장비의 도안을 그리고 궤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궤도가 완성되어 사령관님이 알게 되었다. 금도금이 된 만년필과 새 군복과 군화와 일주일 특별 휴가를 賞(상)으로 받았다.
내 작은 제안이 이렇게 칭찬을 받을지 몰랐다. 제대 후 나는 이러한 일들을 기록하여 보훈문예에 ‘의무가 福(복)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공모전에 공모하여 당선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좋은 일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국방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의무가 福(복)이 되어!’를 홍보영화화한다는 것이었다. 승낙 사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혼쾌히 사인을 하니 다시 고료를 지급하고 영화에 출연까지 하는 영광을 얻었다. 국가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領夫人(영부인) 묘역을 만들다
병장을 달고 제대를 몇 달 앞둔 1974년 8월15일이었다. 그렇게도 인자하시고 온화한 영부인이 광복절 축하장에서 괴한의 흉탄을 맞으셨다. 온국민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아가셨다. 국민들이 비보를 접하고 슬픔에 잠기었다. 우리 부대는 서울 인근에 있어 수도권 지역의 건설공사에 투입하기 위하여 항상 대기중이었다.
우리 공병단이 영부인의 묘역을 조성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불도저를 트레일러에 싣고 흑석동으로 향하였다. 많은 장병들도 출동하여 묘역조성을 하기 위해 대기하였다. 나무들을 잘라내고 地官(지관)이 방향을 잡고 측량을 하고 불도저로 묘역이 들어설 부지를 정리하였다.
육중한 장비의 굉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온통 슬픔이 사무쳐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장비가 부지를 대충 정리하고 사병들이 삽으로 정성스럽게 봉분을 만들고 묘역 전체에 잔디를 심고 조심스럽게 밟았다. 묘역이 조성되자 웅성거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점검을 나오신 것이다. 키가 큰 서00 장관이 뒤를 따르고 JP도 동행하였다. 평소 존경하던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갑자기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를 썼다. 대통령 일행은 묘역을 점검하시고 바로 돌아가셨다.
우리 부대는 발인을 하던 날 새벽에 철수를 서둘렀다. 장비는 이미 철수를 하였고 부대원들을 실은 트럭이 국립묘지 정문을 빠져 나오자 이미 시민들이 도로가에 줄을 서 있었다. 영부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부대에 가서 장례식 중계를 TV로 보았다. 장례차가 도로를 지날 때마다 시민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장례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눈물을 훔치었다.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슬픔을 표현하겠는가! 소년시절부터 흠모하던 대통령을 뜻하지 않게 옆에서 보게 된 것은 내가 군대를 갔고 공병부대에 근무한 까닭일 것이다
‘그 熱砂(열사) 끓며 넘치며’
나는 제대와 동시에 건설회사에 취직하였다. 軍시절에 불도저 면허증을 취득하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軍시절 보람 있었던 일들을 수기로 써서 호국문예에 공모를 하였다. ‘의무가 福(복)이 되어!’가 당선되고 다음해에는 ‘값진 34개월의 기억들’이 당선 되었다.
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었다. 나도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하였다. 면접과 시험에 합격을 하고 00건설 사우디 현장으로 해외 취업을 떠났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모래바람과 싸우며 2년을 견디며 일을 하였다. 동료들의 사고사도 목격하였고 애환들도 많았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정리하여 노트에 적었다. 귀국하여 수기를 써서 노동부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당선이 되었다. ‘그 熱砂(열사) 끓며 넘치며’라는 현장수기였다. 나중에 MBC에서 단막극으로 제작되어 근로자의 날에 방영이 되었다.
읽고 기록한다는 것의 힘
귀국을 하여 내 집도 마련하고 중장비(불도저)도 직접 구입하였다. 농촌으로 다니면서 경지정리 사업을 하였다. 잔다랭이를 정리하여 트랙터가 드나들며 농사를 짓기 편리하게 하였다. 소년시절 농사를 지을 때 어려움을 실감하였기에 농촌 발전을 위하는 사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20여 년을 농지정리 사업을 하니 농촌도 거의 농지정리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계몽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생계는 아내에게 맡기고 도서관으로 가서 살았다. 책을 읽고 메모를 하여 책을 쓰기로 하였다. 내가 주경야독을 시작한지 30년 만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유명 일간지 기자가 찿아와 인터뷰를 하였다. ‘독서왕’으로 대서 특필이 되었다. 뒤이어 월간지에 소개가 되고 공영방송 KBS-TV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에 독서왕으로 소개가 되었다.
방송에 내 사연이 나가고 전국에서 격려 전화가 이어졌다. 산업강사 협회에서 스카웃이 되었다. 나는 사회 단체, 군부대, 기업체에 초대를 받아 토종 성공학을 강의하였다. 불우한 청소년 시절의 주경야독 이야기, 새마을 사업, 군시절 이야기와 사우디 熱砂(열사)의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회사에 많은 도움을 준 이야기를 하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든 뚜fut한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기록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나는 소년시절에 겪은 산림녹화 사업 등 새마을 사업과 軍시절 제안을 하고 노력하여 보람된 군복무를 하였다. 사우디에서도 꾸준히 기록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극본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남은 여생 꾸준히 책을 읽고 기록하여 삶의 자취를 남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