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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송온자
印光 大師 嘉言錄 11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천지의 큰 덕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생명력이고, 여래의 큰 도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는 자비심이지요. 사람과 만물이 비록 모습은 다를지라도 심성은 한 가지라오. 무릇 보살·벽지불·성문의 성현 삼승(三乘)과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평범한 육도 중생은 여래가 보기에는 누구나 똑같은 한 자식에 불과하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또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성현의 삼승은 그만 두고라도, 육도 중생만 해도 겉보기에는 비록 그들이 처한 신분지위와 그들이 각자 받는 고통과 쾌락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나지만, 그들 모두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는 못하여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했기는 매일반이라 천상 세계로 복이 다하면 아래로 내려오고, 지옥 중생도 죄가 소멸되면 다시 위로 올라오는 법이오.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서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가 지금 다행히 인간의 몸을 받았으니 이리저리 궁리하고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만 못한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마땅한 도리요.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르는 덕을 몸소 느껴보고 우리가 타고난 측은지심의 어진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오. 만물이 모두 우리처럼 천지간에 생겨나고 똑같이 천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면서, 우리와 똑같이 삶에 탐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어진 사람은 해골까지 흙속에 묻어 가려주고, 막 자라나는 풀과 나무는 가지도 꺾지 않는다오. 하물며 우리의 입과 뱃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뭇 생명들을 칼로 자르고 가르며 불에 굽거나 물에 삶고 기름에 지지고 볶는 고통을 당하도록 요구한단 말이오? 이러한 중생들도 시작도 없는 때(無始)부터 일찍이 아주 높고 귀한 지위에서 대단한 위엄과 권세를 누려 왔을 텐데 그러한 위엄과 권위를 잘 이용하여 공덕을 쌓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그를 빙자하여 악업만 지었을 것이오. 또 하늘(자연)이 낳아 기르는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면 하늘(자연)이 장차 내 복과 수명을 빼앗을 것은 두렵지 않단 말이오?
사람들은 오직 자기 가족끼리만 모여 몸과 마음 안락하며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장수하기만 바라지요. 정말 그러고 싶거든 마땅히 대자비심을 발하여 다른 생명을 살려주는〔放生〕 착한 일에 힘써야 해요. 그러면 천지신명이 모두 우리가 만물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를 보우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바가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오.
만약 우리가 재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온갖 생명을 잡아,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우리 자신의 입과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과연 하늘 및 땅과 더불어 우주의 세 근본 존재〔三才〕가 된다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우리와 만물은 함께 생사고해를 윤회하면서 시작도 없는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그들이 우리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이 사람이나 다른 짐승으로 우리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손에 살해되기도 하였을 것이오. 친척이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해한 은혜와 원한을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부끄러워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둘러 참회하고 고쳐도 오히려 때늦을 것이오.
하물며 여전히 구태의연한 인습에 얽매여 미혹된 편견을 고집하고,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본디부터 인간의 먹거리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강변한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미혹과 업장이 두터워 정말 윤회 고해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저들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여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착한 뿌리〔善根〕가 뻗어나, 정법을 듣고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마침내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해 있다면 마땅히 그들이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 불성을 깨닫도록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한 때의 강한 힘과 재주만 믿고 오랜 세월토록 구원받지 못할 죄업을 저지를 수 있겠소?
우리는 이러한 업보 윤회의 이치를 모르지만 여래는 훤히 들여다보고 있지요. 이러한 진실을 몰랐을 때야 그만이었지만 이제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알게 된 이상 부끄러움과 자비연민을 이기지 못해야 마땅할 것이오. 우리가 숙세의 착한 복덕으로 다행히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저들과 전생에 맺고 맺힌 원한 감정을 풀어버리도록 살상을 피하고 방생을 실행하여 모든 생명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 주어야 하오.
나아가 염불 독경의 공덕으로 그들이 악도(惡道)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회향기도해 줄 필요가 있어요. 설령 그들은 업장이 너무 무거워 곧장 왕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러한 자선공덕으로 서방정토에 결단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왕생하기만 한다면 곧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고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점차 부처의 과보를 증득해갈 것이오.
옛날 불교가 동방에 전래되지 않았을 때는 유교의 성현들이 세간의 윤리도덕으로 교화를 폈다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육도 윤회를 반복하는 사실이나,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이 되는 수행의 이치 등은 아직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까지 세우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놓아준 가르침이 수없이 많다오. 아주 확실하게 역사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는 행적만도 적지 않소. 서경(書經)에는 짐승, 물고기, 초목까지 모두 기뻐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문왕(文王)의 덕택은 해골까지 덮어주었다고 전해지오. 논어에는 낚시질은 하더라도 줄낚시나 그물질은 안 하며 주살을 쏘더라도 밤에 잠자는 짐승을 사냥하지는 않는다는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소. 맹자는 산 목숨을 보면 그것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짐승이 도살 당하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만 들어도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 한다는 측은지심을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의 출발점으로 강조하였소.
또 주(周) 나라 예법에 따르면 제후는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 없이 소를 잡지 않으며 대부는 정당한 이유없이 양을 잡지 않고 선비는 정당한 이유없이 개, 돼지를 잡지 않으며 서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진기한 음식, 곧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오. 그런가 하면, 간자(簡子)가 비둘기를 놓아 주고 자산(子産)이 물고기를 물에 넣어 기르며 수후(隨侯)가 뱀을 살려 보옥을 얻고 양보(楊寶)가 참새를 구해준 일과 같은 방생의 행적도 수없이 전해지오.
이러한 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살생의 악업은 유가의 성현들도 결코 금하지 않은 게 아님이 분명하오. 다만 세간의 중생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임기응변의 방편 도덕을 따른 결과 완전히 끊도록 요구하지 못한 것일 따름이지요. 무릇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로 목숨을 죽인다면 그 살생은 정말 적었을 것이오. 더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일 년에 며칠도 채 안 되었겠지요.
그런데 후세에 성현의 도가 스러지고 교화가 쇠퇴하면서 사람들 심성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마침내 너나 할 것 없이 육식을 집안의 다반사로 습관들이게 되었구료. 자기 한 입만 챙기느라 다른 생명의 고통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다행히 불교가 전래된 이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모르면 생사윤회가 그칠 날 없고 이를 깨달으면 열반을 증득하여 영겁토록 상주한다는 진실한 원리와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졌소. 그래서 고물고물한 모든 중생이 과거에 우리 부모였고 미래에 부처가 될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감히 잡아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주어야 마땅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역대로 거룩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 지혜로운 선비와 뛰어난 유생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어 따르면서 인자한 덕성을 함양하였소. 더러는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며 더러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널리 행하였소. 그토록 훌륭한 덕행과 아름다운 말씀들이 역사책에 수없이 실려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도 이들을 본받아 함께 자비심을 수양하고 만생명을 사랑하도록 권장하는 가르침이 아니겠소?
사람과 다른 동물은 모두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지각과 의식 있는 영혼과 심성을 지니고 같은 천지 사이에 살아가고 있소. 다만 숙세의 죄업과 복덕이 서로 달라 지금처럼 각기 다른 형체와 의식 수준으로 나뉘었을 뿐이오. 내가 강하고 저들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 살코기로 내 뱃속을 채우면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일이 바로 전생 복덕의 보답이라고 내세울 수 있겠소? 그 복덕이 한 번 다하고 나면 죄업의 과보가 눈 앞에 닥쳐 다른 동물로 떨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의 부림을 받다가 살육을 당하는 줄 누가 알리요? 그 때 몸으로 대적할 수도 없고 입으로는 말도 못하며 마음 속에 차오르는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기를 먹은 게 큰 죄악이었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나찰임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잡아 먹지 못하도록 막고 싶어도 그 때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궁지일 뿐이요. 한때 입맛을 위해 미래 오랜 겁토록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니 이는 자살에 비해 만 배나 더 참혹하고 끔찍스러운 짓이 분명하오. 어찌하여 이런 짓으로 그처럼 엄청난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단 말이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고 미혹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능엄경』에 “사람이 양을 잡아 먹으면 양은 죽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죽어 양이 된다.”하였소. 또 『입능가경』에도 세존께서 고기 먹는 것을 갖가지로 질책하시면서, 모든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생사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해오면서 서로 부모, 형제, 처자, 친구의 인연을 맺어왔는데 지금 생명을 바꾸어 짐승으로 태어났다 해서 어찌 그들을 함부로 잡아 먹을 수 있느냐고 탄식한 내용이 나오지요. 다른 생명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면 티끌처럼 무한한 영겁의 세월토록 서로 죽이고 잡아 먹기를 반복하는데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끊임없이 뒤바뀌듯 윤회 보복이 계속된다는 거지요.
사마타(奢摩他:禪定)와 부처님 출현을 기다려야만 비로소 그 복수의 사슬이 끊길 수 있다는데 사마타의 도를 어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때는 어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오? 그러하거늘 우리가 가까이는 앞선 성현들의 언행을 본받고 멀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가 감히 있겠소? 우리가 죽기 싫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여 지금 잡혀 요리되기를 기다리는 목숨들을 건져준다면 숙세의 업장을 덜어 내고 착한 복덕의 뿌리를 심어 기를 수 있으며, 나아가 살해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려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는 과보를 얻을 수 있으리이다.
印光 大師 嘉言錄 12
채식은 지계와 자비 수행의 밑바탕 (2)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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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과거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이기도 하지요. 온갖 방법을 강구하며 보호하고 구제하여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해야 할 판에, 어찌 한순간 우리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몸을 죽인단 말이오?
우리는 물뭍이나 허공을 기고 날고 헤엄치는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영명(靈明)한 지각(知覺)과 의식을 갖추었으나 단지 숙세의 업장이 몹시도 깊고 무거워 우리와 다른 모습의 몸을 받은 걸 알아야 하오. 비록 그들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먹을 것을 찾고 죽기 싫어 피하는 꼴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소?
우리는 다행히도 전생의 복덕에 힘입어 인간으로 태어나 지혜로운 마음까지 받았으니, 마땅히 만물이 모두 우리와 같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겨난 동포임을 알고 형제의 우애를 도탑게 다해야 할 줄 아오. 그래야 인간이 하늘 및 땅과 함께 삼재(三才)로 자부하며 천지자연의 생장변화 이치〔道·眞理〕를 참구하고 보필하는 대의명분이 부끄럽지 않게 되오. 인간과 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를 얻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며 타고난 천수(天壽)를 다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천지자연이 만물의 생명을 낳아 기르는 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의 입맛이나 즐기고 뱃속이나 채우려는 생각만 품고, 자기가 좀 강하고 재능 있다고 약한 그들을 마음대로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전생에 쌓아 둔 복덕이 다하고 살생의 죄업이 눈앞에 나타나는 날이 닥칠 것이오. 그 때는 인간의 얼굴과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업력(業力)에 따라 그들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잡아먹히는 꼴이 될 것이오.
하물며 육식은 독성(毒性)이 강한데도 즐겨 먹고 싶단 말이오? 피살될 때 원한의 마음이 내뿜는 독기(毒氣)가 엉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무릇 전염병이 나돌 때에도 채식하는 사람은 감염되는 일이 몹시 적다오. 또 고기는 아주 더럽고 혼탁한 물건으로, 이를 먹으면 피가 흐려지고 정신도 맑을 수 없게 되오. 발육성장은 빠른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일찍 노쇠해지고, 특히 질병에 가장 쉽게 걸리는 취약 체질의 화근이기도 하오.
반면 채식은 맑고 정갈한 식품으로, 채식을 하면 기혈(氣血)이 맑아지고 정신도 또렷해지며, 자양분도 풍부하여 건강장수하고 잘 늙지 않게 되오. 이는 비록 보건위생에서 늘상 거론하는 상식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지극한 이론이기도 하오. 다만 속세의 관습이 잘못 이어지면서 그만 미혹과 사견이 갈수록 두텁게 쌓여 본래 성품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오.
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죽이는 자는 결코 어진 사람이 아니오. 이는 습관(업습)과 천성 때문이라오. 그래서 성왕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는 길짐승이나 날짐승은 물론 물고기와 미물까지 모두 즐거워하며, 대도를 밝혀 백성을 교화하기에 활이나 창, 낚시 같은 살상무기를 모두 없앤다오. 옛 부터 지금까지 두루 살펴보면, 잔인하고 재물과 음식에 탐닉한 자들은 집안이 대부분 끊겼으며, 어질고 자비와 사랑으로 만물을 구제한 이들은 자손이 반드시 창성하였소. 그래서 산 사람을 차마 순장(殉葬)시킬 수 없어 대신 인형(俑:진시황릉에서 출토된 兵馬俑 같은 附葬品)을 만들어 쓴 창시자에 대해 공자는 결코 후손이 없을 것이라고 단죄하였으며, 제멋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 여래는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라고 수기(授記)를 내리셨소. 단지 푸줏간(도살장)만 멀리하면서 도살의 모습과 비명을 보고 듣지 않으면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적당히 자신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오.
이는 유가에서 세속의 풍습에 따라 할 수 없이 내세운 임시방편의 교화일 따름이오. 진실로 비린내와 매운 맛을 영원히 끊어야 바야흐로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에 부합한다고 일컬을 수 있겠소.
옛날 노(魯)나라에 용감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피차 이름만 익히 듣고 서로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였소. 그러다가 어느날 서로 만나 술을 사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오. 한 사람이 “고기 안주가 없으면 맛과 멋이 별로 없으니 가서 고기를 사오자”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그대와 내가 모두 고깃덩어리인데 어찌 달리 구한단 말이냐?”고 대꾸하였다는 거요. 이 말을 듣고 그 식견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침내 옷을 걷어 부치고 각자 살을 떼어 서로 상대방과 맞바꾸어 먹었다오.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의 교유야말로 마음과 뜻이 서로 진지하게 들어맞는 친구 사이라고 여기며 각자 살까지 베어 내어 먹었지만 마침내 죽고 말았소. 이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어리석음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육식 때문에 끝없는 살생의 죄업을 지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자리를 뒤바꾸어 가면서 살생으로 보복하고 있으니, 이들 노나라의 용사들보다 더욱 비참하고 혹독한 셈이오.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과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득의양양하게 육식을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미신이나 박복(薄福)의 소치로 덮어씌우고 비방하기 일쑤요. 세인의 습속이 오래 이어져 내려와 잘못조차 모르고 있는 게요.
그래서 석가여래께서 『범망경(梵網經)』과 『능엄경(楞嚴經)』·『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에서 살생과 육식의 과보로 초래되는 재앙을 지극하게 설법하셨으니, 이는 재앙을 발본색원하려는 진정한 대자대비심에서 나온 것이오. 근래 살육의 참상은 만고에 듣지 못했을 정도라오. 게다가 홍수와 가뭄, 전염병, 폭풍, 지진,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소. 이들 모두 결국 살생의 죄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과응보일 뿐이오. 세상인심과 윤리도덕이 갈수록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에 천벌과 인재(人災:사고)가 줄지어 일어나니, 이는 거울 앞에 서면 본래 모습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아 피하거나 속일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도 세속의 미혹은 막심하여 악을 저지르면서 선으로 착각하고 죄업을 지으면서 복을 닦는다고 잘못 믿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오. 그 가운데 가장 눈 뜨고 보기 어렵고 마음 아프게 하는 처참한 광경은 아마도 천지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일일 게요. 부자와 재벌은 소, 돼지를 잡아 제사 지내며 한편으로는 많은 복 받기를 기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오. 살림 규모가 작고 가난한 집안도 하다 못해 닭이나 오리를 잡아 신명의 보우로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만사가 뜻대로 형통하기를 기원하기는 매일반이오.
천지는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일이 자연스런 덕성이고 신명은 천지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직접 주재하는 존재인 줄을 모른 채, 사람들의 마음은 천지신명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오.
만약 천지신명이 자기 혼자를 위해 바치는 제사를 기쁘게 받아 누리면서 그 대가로 수많은 생명들이 도마 위에 칼로 난자질 당하는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어찌 총명하고 정직하면서 선행을 상주고 죄악을 벌하는 올바른 신명〔正神〕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사실인즉 원래 입맛에 탐닉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특별히 신명께 제사지낸다는 명분을 빌어 짐승을 살육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습관이 되고 풍속을 이루게 된 것일 따름이오. 커다란 악업을 짓는 줄은 모르고 신명께 제사 지낸다고 말하지만, 과연 천지신명이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희생물을 받아먹겠소?
하물며 명색이 신명이라면 반드시 총명하고 정직한 덕성을 지니고, 마땅히 사람들이 지은 선악대로 화복을 공평히 내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가축을 죽여 자기에게 제사 지낸다고 죄악을 지은 자라도 복을 내려 주고, 반대로 자기에게 희생을 바쳐 제사 지내지 않으면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로 재앙을 내릴 수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그 신명의 심성과 덕행은 시정(市井) 잡배와 다를 게 뭐가 있겠소? 그런 존재를 어떻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소? 총명하고 정직한 신명이라면 결코 이러한 요괴(妖怪)나 마귀(魔鬼) 같은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 따른 일만 행할 것이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육식이 좋은 걸로만 여기고, 마침내는 자기가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음식을 탐닉하는 것처럼 신명 또한 그러할 줄로 잘못 미루어 짐작하는 게요. 그래서 서로 본받아 아무도 잘못인 줄 모르는 게오. 비유하자면 고자리가 똥을 먹으면서 하늘의 신선도 당연히 자기처럼 그렇게 훌륭한 맛을 즐기리라고 착각하고, 늘 그 똥을 신선에게 바쳐 복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과 같겠소.
사실 지금 도살당하는 저 짐승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과거 전생에 다른 희생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내던 자들로, 지금 자기 살을 먹는 사람들이 당시 자기가 저지른 살생의 과보를 갚아주기만 바라는 처지라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일반 대중은 아직도 짐승을 잡아 신명께 제사 지낸다는 소문을 들으면 곧 기뻐 날뛰면서 큰 복덕을 짓는 일로 여기는구료.
장래에 자신들이 이러한 짐승으로 바꾸어 생겨나 사람들에게 도살될 때는 이미 입은 있지만 말은 할 수 없고 죽음을 피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게요.
하물며 불법(佛法)에 깊숙이 들어가 부처님의 가장 큰 기본계율을 받아 지내고 평생토록 채식하기로 결심한 출중(出衆)한 고매한 사람이 아무 까닭도 없이 육식을 탐닉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써가면서까지 수없는 생명을 죽여 신명께 제사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소? 그러한 짓은 천리(天理)에 어긋나고 성현을 모독하는 패역무도한 죄악으로, 미래 영겁토록 매 생애마다 그렇게 피살 당하는 짐승이 되는 과보를 받을 것이니, 어찌 몹시 슬프지 않겠소?
세상사람들은 질병이 있거나 위험과 재난 등이 있는 경우 염불로 기도하고 선행을 닦을 생각을 안 하고, 망령되이 귀신에게 제사 지내 도움을 청하려 들기 일쑤요.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니 본디 재난을 초래한 업장에 살생의 죄업을 새로 덧보태는 셈이니 실로 불쌍하기 짝이 없소.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외부 환경의 인연〔境緣〕은 대부분 전생의 업장 때문에 말미암는 것이오. 그래서 질병이나 고난이 생기면 곧 염불과 선행을 닦고 숙세의 죄업을 참회하는 게 최상의 해결 방편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오. 그렇게 하여 업장이 소멸되면 질병도 낫고 재난도 점차 사라지는 거지요. 귀신들은 자기들도 아직 업장의 바다〔業海〕 가운데 잠겨 있는 형편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있겠소?
설사 막대한 위력을 지닌 정직한 신명〔正神〕이라 할지라도 그 위력은 부처나 보살에 비하면 마치 반딧불을 햇빛에 견주는 것과 같다오. 불제자(佛弟子)로서 부처와 보살께 기도하지 않고 귀신에게 기도하는 일은 부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라는 걸 알지 않으면 안 되오.
또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들이므로, 이치상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모든 중생의 목숨을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오. 세속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따라 부모에게 진수성찬을 봉양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은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되오. 불법을 들어보지도 못한 일반 속인들이야 육도윤회와 인과응보의 사리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게 진수성찬 바치는 것이 효도라는 사견과 망언을 일삼을 수 있고, 또 그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소. 그러나 이미 불법을 들어 이치를 안 사람이 과거의 부모 친척을 살해하여 현재의 부모를 봉양하거나 장례 또는 제사 지내는 행위는 단지 효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곧바로 천리(天理)와 불법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패역무도가 된다오.
그래서 통달한 선비와 지혜로운 사람들은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들으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한결같이 세속의 임시방편적인 절충법문에 따르려 하지 않지요. 이러한 임시방편의 절충법문은 아마도 세속 중생의 미혹된 감정에 잠시 따라주는 타협안으로 세워진 것이 분명하며, 삼세의 인과법칙을 통달하는 여래의 정도(正道)는 결코 아니라오.
세상의 모든 악업 가운데 살생이 가장 무겁소. 온 천하를 통틀어 살생의 죄업을 전혀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마 씨도 종자도 없을 게요. 설사 평생토록 산목숨을 몸소 죽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매일같이 육식을 하면 곧 매일같이 간접 살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살생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기를 얻을 수 없지 않소? 사실 백정(도살업자)이나 사냥꾼, 어부들은 모두 육식하는 사람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신 살생을 하는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육식을 하느냐 채식을 하느냐 문제는 실로 우리의 성품과 정신이 향상 승화하느냐 타락 침몰하느냐에 직접 관련되고, 나아가 천하통치가 태평성대를 이루느냐, 혼란무도에 빠지느냐에도 근본원인이 된다오. 따라서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하찮게 여길 수 없소.
요컨대 자기 목숨을 자중자애하고 천하 백성을 두루 사랑하여 모든 사람이 안락하게 건강장수하며 뜻밖의 재난과 사고에 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은, 마땅히 살생을 끊고 채식을 몸소 실천하며 널리 권장해야 할 것이요. 채식이야말로 천재지변과 사고를 예방하거나 줄이는 제일 신묘한 법문이기 때문이오.
모든 중생의 심성과 한순간 생각은 부처와 다를 바 없고 또 우리 사람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소. 불행히 전생의 악업으로 축생에 떨어졌으니 정말 더욱 큰 자비심과 연민의 정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아무 것도 모르는 속인들은 오랜 습속에 젖어 살생으로 육식하는 것을 식도락(食道樂)으로 즐기면서, 도살되는 짐승들의 고통과 원한이 얼마만한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구려.
인간은 약육강식을 당연한 자연법칙으로 여기지만, 전쟁이나 난리가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으면 짐승들이 도살되는 처지와 똑같은 상황이 되지 않겠소? 가령 적군이나 폭도들이 그대의 집을 불사르고 그대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며 그대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대의 목숨까지 죽이는데도 감히 욕설 한마디 퍼붓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는 것은 자기 힘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오. 짐승들이 도살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힘으로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만약 그들이 대적할 힘이 있다면 틀림없이 당장 사람을 물어뜯고 들이박으며 대행할 것이오. 인간이 자기 입맛과 뱃속을 채우기 위해 살생한 죄업으로 말미암아 맺히고 쌓인 짐승들의 원한과 분노가, 인간끼리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살육하도록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 화근이라오.
물론 홍수와 가뭄·기근·질병·폭풍·지진·해일 따위의 천재지변도 모두 그러한 살생 죄업의 여파로 끊임없이 계속 발생하지요. 마치 사람들이 명절 때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소. 내가 선물을 보내면 상대방도 답례를 해오는 것이 도리이듯 말이오. 선물이 갔는데 답례가 오지 않거나, 거꾸로 인사가 왔는데 답례를 보내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만약 답례가 없다면 이는 반드시 별다른 인연(사정)이 있어 상쇄하기 때문이며, 알고 보면 정말로 왕래 보답의 예법을 벗어나는 경우는 하나도 없소. 하늘(자연)이 상벌을 내리는 인과응보의 법칙도 이와 똑같거늘, 하물며 인간사회에서 서로 보답하고 보복하는 이치야 그렇지 않겠소?
그래서 서경(尙書)에는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로움이 내리고, 악을 지으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는 말씀이 전해 오고, 주역(周易)에는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도는 경사가 있고 악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아넘치는 재앙이 있다.”는 가르침이 적혀 있소.
하늘(자연)의 도〔天道〕는 도는 것(순환)을 좋아하여, 가면 간만큼 되돌아오기(반복) 마련이오. 나쁜 결과를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나쁜 원인을 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원인을 심어야지요. 이것이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에 모두 딱 들어맞는 지극한 법칙이라오.
印光 大師 嘉言錄 13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참선과 정토(염불)는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證得)하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僞山)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頓悟)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에 따라 어느 순간 자성(自性)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業習)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하여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 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大宗師)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오.
반면 정토 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 자리〔補處〕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不退轉:阿婢跋致)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그래서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결같이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나란히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거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자신의 간절한 믿음과 발원을 행하기 때문에 쌍방의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감응이 나타나는 것이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망상이 없도록 하며,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염송해야 하오.
이렇게 염불을 오래 계속하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몸소 증험(證驗)하고 서방정토의 풍취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그래서 대세지보살이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을 모두 추스려 청정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수행으로 삼매에 이르는 최상의 원통(圓通) 법문을 삼은 것이오. 정토 염불로 곧장 선정(禪定)에 드는 방편이 이보다 더 묘한 게 또 어디 있겠소?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을 구하지 않소. 그래서 공부에 힘이 붙어 진짜와 가짜가 서로 뒤섞여 공격해 올 때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번쩍 나타났다가 번쩍 사라지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소.
그러한 경계들은 마치 잔뜩 흐리고 비 오던 날씨가 장차 개이려고 할 때 두터운 구름장이 터지면서 문득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다가 눈 깜박할 사이 다시 어두컴컴해지기를 반복하여 도대체 날씨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오.
이러한 상황은 진짜 도안(道眼)이 뜨인 자가 아니면 식별해낼 수가 없소. 이 때 만약 한 소식(消息) 얻은 걸로 착각하면 악마에 집착〔走火入魔〕하여 미쳐 날뛰게 되고 어떤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오.
염불 수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온갖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萬德洪名:南無阿彌陀佛〕를 염송하는 방법은 마치 밝은 해가 중천에 걸린 대낮에 큰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단지 마귀나 요정, 도깨비들이 얼씬도 못하고 자취를 감출 뿐만 아니라 샛길로 빠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염두조차 일어날 여지가 없다오.
이러한 염불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공부가 순수해지고 힘이 지극히 붙으면 결국 “온 마음이 부처이고 온 부처가 마음이 되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마음과 부처가 하나가 되는〔全心是佛, 全佛是心, 心佛不二, 心佛一如〕”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와 이러한 수행은 단지 사람들이 이를 잘 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을 두루 제도하시고자 한 원력에 부합하지 못할까 걱정될 따름이오. 그러니 어찌 은밀히 숨겨 두고 전해 주지 않거나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전해주는 일이 있겠소? 만약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입과 마음으로만 전수하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면, 이는 삿된 악마나 외도(外道)일 것이며 불법은 아니라오.
법당 화상(法幢和尙)은 숙세에 영특한 근기를 타고나, 처음에는 진실한 유학자〔眞儒〕였다가 나중에 진실한 스님〔眞僧〕이 되셨으니, 글공부하고 도 닦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칭송할 만하오. 세상에 진짜 유학자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있게 되오. 별 볼일 없이 어중이 떠중이로 노닐던 무뢰한(無賴漢)들이 출가하면 정말로 거의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마왕(魔王)과 외도가 되기 십상이오.
법당 화상의 어록은 모두 사람들 마음의 눈을 곧장 통쾌하게 확 틔여 주는 훌륭한 법문으로, 인쇄하여 널리 유통시키고 선가(禪家)의 보배로도 삼을 만하오. 그러나 이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길을 밝혀 놓았을 따름이오.
우리들은 오로지 정토염불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그 말씀의 구절들을 붙잡고 씨름하여 둘 다 손해 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라오. 선가에서 주창하는 것은 오직 근본 요지에 국한되며, 그밖에는 일체 밝히지 않소. 원인을 닦아 과보를 얻고 미혹을 끊어 진아(眞我)를 증득하는 일은 모두 스스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 할 공부라오.
그런데 문외한들은 선가에서 이러한 수행과 증득의 도리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선가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곧 선가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비방하는 죄악이오.
교리를 좀 아는 총명한 사람들은 으레 염불수행이 왜 굳이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선택하는지 따져 묻지요? 마치 상대적인 분별과 취사선택을 완전히 초월한 수행만이 절대궁극인 양 여기는가 보오. 그러나 이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궁극의 경지는 부처가 된 다음의 일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다면 설령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조차 모두 취사선택의 편에 속하오.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선택을 인정한다면, 염불법문이 동방 대신 서방을 향하고 혼탁한 사바 고해를 떠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발원을 어찌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참선 법문 같으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 법문에서는 취사선택이 모두 옳다오. 참선은 오로지 자기 마음〔自心〕만 참구하는 것이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함께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서로 판이한 법문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 법문을 가지고 염불 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것은 그 의도가 몹시 잘못되었소.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안 하는 것은 본디 최상의 정수이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없애려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오.
여름에 모시옷 입고 겨울에 털 가죽옷 입으며,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 아니겠소? 서로는 비난할 수도 없거니와 또 어느 한쪽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오. 오직 각자의 근기와 본성에 적합한 방편을 골라잡는다면 폐해가 없이 유익할 것이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이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자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르고 있소. 대저 아직 미묘한 무상정각을 증득하지 못한 중생이라면 누가 취사선택을 벗어날 수 있겠소?
3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 동안 원인 자리를 닦아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일체의 수행과정이 어느 것 하나 취사선택의 연속이 아니겠소? 모름지기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이 한시 바삐 진리의 몸〔法身〕과 고요한 광명〔寂光〕을 증득할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하여 특별히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지송(持誦)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음을 잘 알고 명심해야 되오.
印光 大師 嘉言錄 14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문은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으며,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않고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은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하오. 그런데 염불 법문은 미혹을 끊은 자가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우뚝 올라서게 되니, 이 아니 수승(殊勝)하오?
하나는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하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힘을 아울러 보태니, 두 가지 법문의 쉽고 어려움은 어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소?
의례히 보면, 총명한 사람들이 선서(禪書) 좀 섭렵하다 재미있는 걸 느끼고는 마침내 참선을 최고로 여기고 마치 사방으로 통달한 도인처럼 자처하는 경우가 많소. 대부분 참선과 염불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과대망상에 잠긴 부류라오.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결코 따라서는 안 되오. 만약 이들을 따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일은 티끌처럼 수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전혀 가망이 없을 게요.
권(權)이란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를 굽어보시고 거기에 맞춰 드리운 방편 법문〔臨機應變〕을 일컫고, 실(實)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증득한 도의(道義) 그대로 설법하심을 일컫소.
또 돈(頓)이란 점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빠르게 한 번에 뛰어 넘어 들어감을 일컫고, 점(漸)이란 점차 닦아 나아가고 점차 증험해 들어가 반드시 많은 세월과 생명의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실상(實相)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오.
그런데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의 법문이야말로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불도를 이루게 하는〔見性成佛〕 법문으로 정말로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의례히 자랑하는구려. 설사 참선으로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본다〔明心見性〕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리와 본성상의 부처〔理性佛〕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만약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확철대오하면서 증득하여 스스로 삼계고해를 벗어나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위로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복덕과 지혜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겠소. 그러나 이러한 대보살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경우는 이른바 확철대오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백천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할 따름이라오.
그 나머지 근기가 조금만이라도 처지는 사람은 제아무리 미묘한 도를 확철대오했을지라도 보고 생각하는 번뇌〔見思煩惱〕를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여전히 삼계고해에서 생사윤회를 되풀이해야 한다오. 그렇게 생사를 되풀이하다 보면 깨달음에서 미혹으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많고 미궁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게 사바세계 수행의 현실이오. 이러한 즉, 참선법문이 비록 제아무리 실(實)이고 돈(頓) 그 자체의 수행이라고 할지라도 정말로 근기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실(實)과 돈(頓)의 진짜 이익을 받지 못하고, 결국 권(權)과 점(漸)의 방편법문이 되고 마는 게 아니겠소?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힘이 백퍼센트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소? 그러나 현실상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진리와 본성을 단지 깨달을 수 있을 뿐 몸소 증득할 수는 없게 되오. 지금 말법시대에 확철대오한 사람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하물며 확철대오한 바를 증득한 사람은 말할 나위가 있겠소?
여기에 비하면, 염불(念佛) 법문은 위로도 통하고 맨 밑바닥까지 통하며, 임기응변의 권(權)이면서 항상 불변의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실(實)이기도 하고, 점차〔漸〕적이면서 단박에 뛰어넘는〔頓〕 수행법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리로 시비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오. 위로는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닦아 익혀야 할 법문이오.
여래께서 중생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끝마치고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일 뿐이오. 다른 법문들은 최상의 근기를 지닌 자만이 그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으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수많은 겁을 닦아도 해탈하기 어렵소. 오직 염불 법문 하나만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이처럼 곧장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어찌 점차〔漸〕 수행법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소? 비록 제아무리 뛰어난 근기로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보통의 근기로 원만하고 곧장 닦아가는 염불만은 못할 것이외다. 겉보기에는 느리고 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법문의 위력과 여래의 서원이 평범한 중하근기 중생들도 막대한 이익을 단박에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 그 이익은 완전히 부처님의 자비광명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무릇 참선하거나 강경(講經)하는 사람들이 정토 염불 법문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으면 너무 평범하고 쉽다고 여겨 가볍게 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라오. 만약 그들이 염불 법문을 한번만 제대로 깊이 연구해 본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널리 펼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런데 어찌 권(權)이네 실(實)이네, 돈오돈수네 돈오점수네 하는 잘못된 시비논쟁에 끄달려 스스로를 망치고 중생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만 저지르고 있겠소?
‘집착하지 말라(不執着)’거나 또는 ‘집착을 놓아 버려라(放下着)’ 등의 말은 추상 이치로는 지극히 옳지만 구체 현실 상황은 보통 평범한 중생들이 행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오. 온 종일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사치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며칠 동안 물 한 잔 쌀 한 톨 얻어먹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허기져 금방 쓰러져 죽게 생긴 사람이 “나는 용의 간이나 봉황의 골수조차 더러운 쓰레기로 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판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물건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할소냐?”고 허풍 떠는 것과 똑같은 빈말〔空談〕에 지나지 않소.
요즘 세상에 불교의 이치〔敎理〕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곧장 참선에만 파고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텅 빈 해탈 병〔空解脫病〕에 걸려 있소. 좌선 좀 하여 생각이 맑아지고 텅 빈 경계〔空境〕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잡념망상을 고요하고 맑게 가라앉혀 어쩌다 펼쳐지는 환상의 경계〔幻境〕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를 마치 무슨 소식(消息)이라도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크게 환희심을 내면 마음을 잃어버리고 미쳐 날뛰게 되어 부처님도 고칠 수 없게 된다오. 다행히 수행자가 이를 몸소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서 환상과 망상을 내버리면 마침내 모든 법문을 일관회통(一貫會通)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걸은 뒤 문득 사통팔달의 큰 길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말법시대의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형편없는데다가 선지식조차 매우 드물다오. 만약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하여 정토염불 법문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서 단지 자신의 힘만 믿고 참선에만 매달린다면,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고〔明心見性〕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하는 이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환상을 진짜로 착각하며 홀림을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악마에 집착하여 미쳐 날뛰는 자들이 정말 많아질 것이오. 그래서 영명(永明) 선사나 연지(蓮池) 대사 같은 선지식들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를 관찰하여 염불 정토법문을 적극 힘써 펼친 것이라오.
참선이라는 법문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소? 옛날 위대한 수행자 가운데 조주(趙州)의 염(念) 선사 같은 분은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여든이 넘도록 행각(行脚)을 계속 했다오. 그래서 그를 칭송한 시에도 “조주는 여든에 여전히 행각하였으니, 단지 마음자리가 아직 고요해지지 않아서였네.”라는 구절이 있소. 장경(長慶) 선사는 좌선으로 방석 일곱 개를 닳아뜨린 뒤 돌아다녔으며, 설봉(雪峯) 선사는 세 번 투자산(投子山:舒州 소재)에 올랐고 아홉 번이나 동산(洞山)에 오르기도 하였소. 이처럼 위대한 조사들도 확철대오하기가 그토록 어려웠거늘, 악마에 들린 무리들은 악마의 말을 한번 듣고서 모두 다 깨쳤다고 날뛰고들 있으니, 앞에 말한 조사들이 몸소 이들의 신발을 들어준다고 할지라도 쓸 데가 없구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새김〔佛心印〕을 전하여 사람 마음을 곧장 가리켜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게〔見性成佛〕 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보고 이룬다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가리켜 말함이오. 사람들에게 먼저 그 근본을 알아차리게 하면 수행과 증득의 법문은 모두 그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으며, 마침내 더 이상 닦을 게 없고 더 이상 증득할 것도 없는 궁극의 경지에서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 번 깨달음과 동시에 곧장 복덕과 지혜가 함께 나란히 갖추어지고 궁극의 불도(佛道)가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오. 마치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어 넣으면〔畵龍點睛〕 용이 곧장 살아나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휘황찬란하게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 효용은 각자 몸소 받아 느낄 수밖에 없소. 그래서 그대로 곧장 마음이면서 부처인 도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법이 함께 나란히 온 세상에 쫙 퍼지게 되었소.
印光 大師 嘉言錄 15
참선과 정토(염불)의 관계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타고난 근기가 뛰어난 자는 한 경계 한 기미에 곧장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진리의 말을 토해내며, 평범의 소굴에서 스스로 벗어나 나고 죽음에 걸림이 없이 대자유와 대해탈을 누리게 되오. 그러나 근기가 조금만 처지는 자는 설령 확철대오 할지라도 번뇌업습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면서 중음(中陰)을 거치고 태반(胎盤)을 나오면서 대부분 혼미와 후퇴를 거듭하기 마련이오. 확철대오한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서 정말로 부처님의 자비가피력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정토 염불 법문에 전심진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온당한 계책이라오.
율종(律宗)이나 교종(敎宗)·선종(禪宗)은 맨 처음 교리(敎理)를 분명히 배운 뒤 그에 따라 수행하여야 하오.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야만 바야흐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교리조차 잘 알지 못하면 눈 먼 소경수행〔盲修轄煉〕이 되어, 뭔가 조금 얻으면 다 통했다고 착각하거나 악마에 들려 미쳐 날뛰기 십상이오.
설사 교리를 분명히 알고 수행공부가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미혹을 다 끊지 못하고 터럭 끝만큼만 남겨 두면 여전히 윤회 고해를 벗어날 수 없게 되오. 미혹과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 생사고해 벗어나기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와는 너무도 멀리 동떨어져 얼마나 수많은 겁(劫)을 더 수행하여야 비로소 부처의 과보를 원만히 이룰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소.
비유하자면, 평범한 서민이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읽고 글공부 시작한 지 십여 년 만에 갖은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학문이 이루어져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과 같겠소. 그가 아주 큰 재주와 능력이 있다면 낮은 관직부터 점차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오. 재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점의 관직으로 모든 신하 중의 으뜸 자리지요. 그러나 재상도 만약 태자에 비교한다면 귀천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 나오. 하물며 황제에 빗대겠소? 평생 신하로서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신명을 다 바쳐 나라 다스림을 도와야 할 운명일 따름이오.
그러나 이러한 재상 직위도 오르기가 정말 쉽지 않소. 반평생 힘과 재주를 다해 수고하면서 온몸으로 감당한 뒤 운 좋게 황제에게 인정받아야 말년에 잠시 그 자리에 오를까 말까 하는 거요. 만약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할 것은 당연하오. 그러한 자가 백천만억이나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힘〔自力〕에만 의존하는 것이라오.
학문과 재능은 교리를 분명히 알아 그에 따라 수행함을 비유하고, 직위가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은 수행공부가 깊어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비유하며, 단지 신하로 일컬어질 뿐 끝내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은 비록 생사윤회를 벗어날지라도 아직 불도를 이루지는 못함을 비유하오. (신하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소. 황실에 탁생(託生)하여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마찬가지 이치로 기타 법문을 수행하여도 부처가 될 수 있지만 다만 정토염불 법문과 서로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차이가 나게 되오. 독자들은 이 비유가 함축하는 뜻을 잘 음미하고 문자에 얽매이지 않기 바라오.
그런데 화엄경의 맨 끝에 보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조차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회향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재상이 황실에 탁생하여 황태자로 태어나겠다는 비유와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소. 염불 법문이 화엄경을 얻음으로써, 마치 큰 바다가 온 강물을 집어 삼키고 너른 허공이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밝혀졌으니 정말로 위대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학문이나 재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재상이 되지 못하는 자가 몹시 많다는 것은 미혹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생사고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이 너무도 많음을 비유하는 것이 되겠소. 그런데 염불법문은 설령 교리를 잘 모르고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단지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만 지송(持誦)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친히 맞이해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되오.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은 뒤 바로 그 생애에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르지요.
이는 부처님의 힘〔佛力〕이자 또 자신의 힘〔自力〕을 겸비하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님을 감동시킴이요, 48대 서원으로 극락왕생을 바라는 모든 중생을 자비로이 맞이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힘이 나에게 호응(응집)하심이라오. 감동과 호응〔感應〕의 통로가 서로 교차하여 이와 같은 효험을 얻게 되오.
또 만약 교리를 깊이 분명하게 알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한 사람이 극락에 왕생하게 되면 그 품위(品位)가 더욱 높고 불도를 훨씬 빨리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오. 그래서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포함한 화장(華藏) 세계의 대중이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같은 역대 위대한 종사(宗師)와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이오.
비유하자면, 황실에 태어나면 한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고귀한 태자로 모든 신하를 거느리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오. 이는 바로 황제의 힘이오. 태자가 자라면서 점차 학문과 재능이 하나씩 갖추어지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고 모든 신하와 백성이 그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오. 이는 황제의 힘과 자신의 힘을 겸비한 것이겠소.
염불 법문 또한 이와 같소.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면서 바로 생사고해를 벗어남은 태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신하를 압도하는 것과 비슷하고, 방생한 뒤 미혹과 업장이 저절로 끊어져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름은 태자가 자라면서 학문과 재능을 갖추어 황제 지위를 물려받음과 비슷하오. 또 이미 미혹과 업장을 끊은 이는 마명이나 용수 같은 역대 조사와 같고, 벌써 부처 후보의 지위에 오른 이는 문수 보살이나 보현 보살과 같으며, 화장 세계 대중이 모두 왕생을 발원한 것은 마치 예전에는 변방 시골에 처박혀 감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엄두도 못 내던 이들이 지금은 동궁(東宮)에 거처하면서 머지않아 등극(登極)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오.
우리 중생들의 심성은 부처와 똑같소. 단지 미혹되어 진리를 등짐으로써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을 따름이오. 이를 불쌍히 여기신 여래께서 자비로이 근기에 맞춰 설법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에게 본래의 집에 되돌아갈 길을 열어 주셨소. 그 법문이 비록 많긴 하지만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소.
바로 참선과 정토염불이오. 둘 모두 해탈이 가장 쉽지만, 참선은 오직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염불은 부처님의 힘을 겸비하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비교하면 염불 법문이 시절인연과 중생근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셈이오. 비유하자면, 사람이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직접 헤엄치지 않고 배에 올라타야만 안전하고 재빨리 저쪽 언덕(彼岸)에 도달하면서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것과 같은 이치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오직 크고 안전한 배와 같은 염불 법문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다오. 그렇지 않고 한번 근기에 어긋난 법문에 들어서 시절인연을 놓치면 애써 수고만 다할 뿐 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대보리심을 발하고 진실한 믿음과 서원을 내어 평생토록 오직 나무아미타불 명호만 굳게 지니고 염송하기 바라오. 염송이 지극해지면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염송 그 자체가 무념(無念)이 되어 선종과 교종의 미묘한 의리(義理)가 저절로 철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임종에 이르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소 오시어 직접 맞이해 갈 것이니, 곧장 최상의 품위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오.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있을 따름이니 정말 간절히 일러 주겠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면, 미묘하고 또 미묘하고 미묘하리로다.(竭誠盡敬, 妙 妙 妙 妙)
印光 大師 嘉言錄 16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1)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법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사를 끝마치는 일이오. 생사해탈 문제는 너무도 큰 일이라 논하기가 몹시 어렵소. 우리 범부들은 근기가 열악하고 지식도 천박한데다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삿된 스승과 외도(外道)들까지 득실거리니, 생사윤회를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소? 오직 염불 법문밖에 없으니, 진실하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염불에 일심으로 정진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구해야 할 것이오.
불법 가운데 방편 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 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겠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정토(염불)의 난이도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한 설법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의 사료간(四料簡:네 수의 게송)이 단연 으뜸이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본다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정말로 염불하여야 당연하지만,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또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통달했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를 해탈할 수 있는 거요.
영명 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이신데, 중생을 일깨워 건지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베푸셨소. 사료간은 정말로 사바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항공모함〔慈航〕이며, 대장경의 핵심요점이자 수행의 귀감이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도 있으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공덕이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걱정 하리요?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으면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저승(中陰) 경지가 눈 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無禪無淨土
鐵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쇠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 사료간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선(禪)이고 무엇이 정토(염불)이며, 있고 없고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오. 선(禪)이란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선종에서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 일컫소.
선종에서는 말을 다 갈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참구하여 스스로 얻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따름이오. 실제로는 주체〔能〕도 없고 객체〔所〕도 없으며 고요하면서도 밝게 비추는 무념무상의 신령스런 지각〔靈知〕이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자리〔純眞心體〕요.
정토란 정토삼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깊이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지송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법문으로, 오직 우리 마음 안에 정토가 있고〔唯心淨土〕 자기 성품이 바로 아미타불이다〔自性彌陀〕는 추상 이치만 치중하는 편협한 의미는 아니오.
참선(수행)이 있다 함은 참구하는 힘이 지극하여 생각이 고요하고 감정이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진면목을 보는 확철대오를 가리키오. 이른바 명심견성(明心見性)이오. 정토(염불)가 있다 함은 진실한 보리심을 내어 깊은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흔들림 없는 염불 수행을 용맹스럽게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하오.
선과 정토는 추상교리만 언급하는 개념이며, 선이 있고 정토가 있다는 말은 근기에 따른 구체 수행 방법을 두고 일컫는 표현이오. 교리로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 부처님도 덧보탤 수가 없고 중생도 덜어낼 수가 없지만, 근기에 따른 수행은 모름지기 교리에 의해 실천을 시작하고 실천이 지극히 무르익어 교리를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진실로 자기 안에 존재함을 증명하여야 하오.
두 쌍의 용어는 표현이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므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여 그 차이를 느껴야 하오. 가령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또는 깨달았더라도 철저히 관통〔확철대오〕하지 못했으면 참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소. 깨닫기만 하고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깨달으면 곧 생사가 없다”는 말은 전문가(대가)의 표현이 아니오.
깨달음이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에 불과하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진실한 수행과 실제 증험의 길이 펼쳐지게 되오. 깨닫지 못한 자는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미신적 수련으로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走火入魔〕 위험이 매우 크오. 그래서 먼저 마음의 눈을 뜨고 깨닫는〔開悟〕 공부가 수행의 첫걸음으로 매우 요긴한 것이오.
깨달은 바를 증득하여 대가가 되려면 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용맹스럽게 가행정진(加行精進)해야 되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말라빠진 고목처럼 가만히 앉아 죽은 화두나 들고 있는 것을 마치 대단한 참선(수행)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구려. 이는 정말 크나큰 착각이고 오해요.
또 염불도 추상적인 유심정토(唯心淨土)와 관념적인 자성미타(自性彌陀)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믿음과 발원이 없거나, 혹간 믿음과 발원이 있더라도 진실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니 그저 입으로 공염불하거나, 또는 열심히 정진하더라도 마음이 세속에 미련을 못버리고 내생에 부귀스런 집안에 태어나거나 천상에 올라가 온갖 복덕과 쾌락을 누릴 생각이나 하든지, 아니면 내생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지혜를 얻어 불도와 정법을 크게 펼침으로써 중생들을 두루 이롭게 하기나 바란다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소.
印光 大師 嘉言錄 17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2)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사료간 중 첫 번째 ‘참선도 있고 정토(염불)도 있다’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明心見性〕 경지에 이른 뒤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소.
참선으로 깨달은 뒤 경장(經藏)의 가르침에 깊숙이 들어가 여래의 권실법문(權實法門)을 두루 통달하고, 다시 그 중에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는 정토 수행만이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두루 이롭게 할 확실하고 안전한 대도정법임을 깨달은 자가 여기에 해당하오.
확철대오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 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이 달린 격 아니겠소?
대승 경전을 독송하여 제일의미〔第一義〕를 이해한 뒤 대지혜요 유창한 말재주〔大辯才〕를 겸비하여 악마와 외도가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간담이 서늘해진다면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바가 없을 것이오.
그리고 자기가 깨닫고 수행하는 바를 가지고 중생들을 교화하여 마음의 눈을 틔워 주되, 사람들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설법하면서 참선과 염불을 함께 닦아도 좋을 사람은 선정쌍수(禪淨雙修)로 인도하고 오로지 염불수행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정토전수(淨土專修)로 이끌어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라도 그 도덕 감화의 혜택을 입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오.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 세계의 위대한 사범(師範)이 되는 게오.
명심견성한 사람이 염불로 정토 왕생을 구하면 임종 때 9품 연화 가운데 최상품으로 화생(化生)하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연꽃이 피면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금방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거나, 최소한 원교(圓敎)의 초주(初住) 지위에 올라 일백 부처 세계에 부처의 분신(分身)을 나투어 인연과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 제도하게 되나니, 바로 장래의 부처나 조사가 된다는 뜻이오.
그러면 저절로 두 번째 게송은 아직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 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오. 아미타불께서 과거 법장(法藏) 비구로 수행할 때 48 대서원을 발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듯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念佛〕하면 감동과 호응의 길이 서로 통하여〔感應道交〕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정과 지혜를 함께 깊이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십악(十惡)의 죄를 저지른 패역무도의 중생이라도 임종 때 막심한 괴로움에 못 이겨 큰 참회심을 통절(痛切)히 일으키고 아미타불 명호를 간절히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 화신의 인도를 받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단지 굳게 믿고 간절히 발원하며 진실하게 염불수행을 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극락 왕생할 수 있기에, 만 명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 정토에 간다고 한 것이라오.
그렇지만 임종 때 염불 몇 번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 맹렬하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하오. 그저 유유자적하니 염불의 횟수나 기간만 따지면서 미지근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왕생할 가망이 별로 없음을 명심하시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염불로 단지 부귀공명을 구하거나 천상에 나기만 바라는 사람은 정토가 결코 없소. 왕생하지 못하는 자는 오직 자신이 발원하지 않은 것을 탓해야지 행여 자비로운 아버지 아미타불께서 와서 맞이해 주지 않으심을 원망해서는 안 되오. 요컨대 발원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극락정토요.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설법을 들어 단박에 불퇴전(不退轉:阿脾跋致)의 지위를 증득하게 되오. 비록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 영원토록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으며, 근기와 성품에 따라 혹은 단박에 혹은 점차로 모든 과위(果位)를 증득하지요. 그래서 단지 아미타불만 뵈오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고 반문한 것이오.
세 번째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보고 생각하는〔見思〕 번뇌를 끊어 버리기 쉽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소. 두 번뇌는 인연따라 꾸준히 단련하면서 남김없이 말끔히 제거해버려야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소. 조금이라도 덜 끊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남아 말끔하지 못하면 여전히 육도 윤회를 피하기 어렵소.
생사의 바다는 깊고 험하며 깨달음의 길〔菩提路〕은 멀기만 한데 아직 고향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이 목숨 다하면 어떻게 되겠소. 확철대오한 사람도 열 가운데 아홉은 이 모양이라오.
차로(蹉路)란 길 가던 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망설임 또는 허송 세월로 시기를 놓친다는 뜻이오. 보통 차타(蹉陀)라 하고 세간에서는 담각(擔閣)이라고 부르지요.
또 음경(陰境)이란 중음신의 경계(中陰身境)인데, 임종 때 금생 및 과거 역대 전생의 모든 선악 업력(業力)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하오. 이 경계가 한번 나타나면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려 가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받는다오. 마치 채무자가 파산한 경우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채권액이 가장 많은 사람이 큰소리 치듯이, 가장 강렬한 업력이 먼저 끌어당기면 자신은 마음속에 만 갈래 생각의 실마리가 엉클어지면서도 조금도 주인 노릇을 못하고 무거운 쪽으로 휩쓸려 떨어지게 되오.
오조(五祖) 계(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가 노공(魯公)으로 환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음(陰)은 소리와 뜻이 음(蔭)과 같아 뒤덮는다는 의미요. 업력이 진여 불성〔眞性〕을 뒤덮어 제 모습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하오. 더러 차(蹉)가 길을 헷갈려 잘못 든다는 착로(錯路)이고, 음경(陰境)이 오음마경(五陰魔境:모음이 중생의 불성을 해칠 수 있기에 악마로 비유한 말)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이는 선〔禪〕과 있다〔有〕는 문자의 의미를 몰라서 오해하는 헛소리요.
확철대오한 선사가 어찌 열 명 중 아홉이나 길을 잘못 들고 오음마경에 홀려 주화입마로 미쳐 날뛰겠소? 교리도 모르고 자기 마음도 밝히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증상만〔增上慢〕에 걸린 사람이나 미쳐 날뛰는 것이지, 어찌 확철대오한 수행자에게까지 그 악명을 덮어 씌운단 말이오. 너무 중대한 문제라 밝히지 않을 수 없소. 다만 아직 자신을 안정시키고 운명을 수립〔安身立命〕하는 진실한 경지까지 이르지 못해 생사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확실하게 스스로 주인 노릇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겠소? 정말로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 왕생하는 염불 법문이 가장 안심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탄탄대로지요.
마지막 네 번째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 왕생하려는 발원도 없이 그저 죄악을 짓는 데만 골몰하여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오.
印光 大師 嘉言錄 18
영명(永明)선사의 사료간(四料簡) (3)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법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오직 참선과 정토(염불)만이 가장 근기에 합당한 길이오. 깨닫지도 못하고 왕생을 발원하지도 않은 채 다른 법문이나 그럭저럭 배우다 보면,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길도 열리지 않게 되오.
고작해야 평생 수행한 공덕으로 내생에 천상의 복록이나 누릴 것이오. 금생에 올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니 내생에 복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욕(五欲)의 향락에 탐닉하여 널리 악업만 지을 게 분명하오.
일단 악업을 지으면 죄악의 보답을 피할 수 없고, 날숨 한번 안 들어오면 곧 지옥에 떨어져 쇠 침대 위에 구리 기둥이나 껴안고 억겁이 지나도록 빛과 소리와 맛 등에 탐착하여 생명을 살상한 죄악 등을 갚아야 할 것이오. 그 때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대자대비를 몸소 베푸시더라도 죄악의 업장 때문에 그 가피를 받을 수가 없소.
옛날부터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지 않으면서 널리 많은 선행이나 닦는 것은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소. 금생의 수행으로 내생〔第三世〕에 복을 누리면서 복으로 말미암아 죄악을 짓고 그 다음 생에 타락하여 과보를 받을 것이니 말이오. 쾌락을 내생에 잠시 얻으면 고통은 영겁토록 물려받소. 설령 지옥의 죄업이 소멸되더라도 다시 아귀와 축생에 생겨나 사람 몸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고도 또 어렵게 되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손으로 흙 한 줌 집어 들고 아난에게 물으셨소.
“내 손의 흙이 많으냐? 대지의 흙이 많으냐?”
아난이 당연히 “대지의 흙이 훨씬 많습니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하셨소.
“사람 몸 얻기란 내 손의 흙과 같고, 사람 몸 잃기란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게송의 형식에 맞추느라 아주 간단히 축약한 표현이오.
그래서 네 번째 게송을 읽고 나면 마음이 놀라고 정신이 번쩍 들지요. 모두 생사고해를 깨닫고 보리심을 내어 정토(염불) 수행이 없는 사람은 재빨리 발원 수행으로 정토를 있게 하고, 정토가 있는 사람은 용맹정진하여 결정코 극락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요긴하고 또 요긴하오.
다른 모든 법문은 오로지 자력에 의존하여 미혹의 업장이 깨끗이 사라져야 생사를 끝낼 수 있는데, 정토 법문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 왕생하여 성인의 경지에 합류할 수 있소. 모두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자력에 의지해 수행한다는데,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이오? 단지 시작도 없는〔無始〕 때부터 쌓아온 업력밖에 무엇이 있소? 그래서 억만 겁이 지나고 천 만 생을 거치도록 해탈하기 어려운 것 아니오?
아미타불의 크고 넓은 서원력에 의지하면 저절로 일생에 모든 것을 끝마치게 되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문 듣기 더욱 어려운데, 이미 보배의 산에 들어 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간단 말이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소. 염불 법문이 단지 하근기의 중생에게만 적합한 게 아니라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통한다는 점이오. 최상의 지혜나 최하의 어리석음이나, 근기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等覺菩薩〕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법문으로 일생에 생사를 끝마칠 수가 있는 것이오.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0여 대선지식을 두루 참방(參訪)하여 무량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선 뒤, 맨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이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에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소. 이걸 보아도 정토법문이 정말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원만한 법문임을 알 수 있소. 만약 염불이 어리석은 아저씨, 아주머니나 하는 것이고 궁극의 법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부처와 불법을 비방하는 지옥의 종자요,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과 미친 기와 타락 운명은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하오.
정토법문이 이처럼 고상하고 원만한 까닭은 자력에만 의지하는 다른 모든 법문과는 달리 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겸비하기 때문이오. 이는 보통의 교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교리라오. 보통의 눈으로 특별한 교리를 보면 당연히 제대로 판단 평가할 수 없지요. 자력에 의지하는 보통 법문이 관직에서 단계대로 승진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는 특별교리인 정토법문은 왕실에 태어나면서부터 태자가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소.
그러나 정토 수행에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은 전혀 없소. 단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구하면 저절로 가피를 입게 되오. 부처님이 중생을 보호하고 생각〔護念〕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함을 알아야 하오. 그래서 지성으로 감동시키면 반드시 가피력의 응답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천진불성(天眞佛性)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고 있소. 비록 악역무도(惡逆無道)한 죄인이라도 그의 본성이 지닌 신령스런 광명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소. 다만 맑은 거울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 같소. 어리석은 사람들은 광명이 없어 비추지 않는다고만 투덜거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금방 광명이 다시 나타날 줄은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은 부처님 생각에 의지해 잡념망상을 쫓아내는 일이며, 마음의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신령스런 광명〔靈光〕이 아미타불 광명의 끌어당김을 받아 점차 환하게 드러나게 되오. 자력과 타력이 서로 호응〔自他相應〕하여 감응의 길이 열리게 되니〔感應道交〕 극락 왕생의 미묘한 뜻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염불하는 사람은 단지 지성으로 간절하게 늘 부처님의 마음을 품고 부처님의 행동을 행하기만 하면 되오. 공경을 다한 만큼 이익을 얻고 정성을 보인 만큼 받아쓰기〔受用〕 마련이오. 모두 힘써 수행하기 바라오.
印光 大師 嘉言錄 19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4)
글 :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말법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중생의 근기는 형편없고 업장은 막중한데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매우 드무니, 만약 정토 염불을 저버린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되오.
영명 선사께서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염려하며 특별히 사료간으로 후세인들을 일깨우고 계시니,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며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틀림없소. 그런데 애석하게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쳐 버리고 깊이 궁리하거나 음미하지조차 않으니, 이는 중생들의 사악한 업장이 가로막는 탓이오.
정토 염불 법문을 수행함에는 마땅히 믿음과 발원과 실행〔信願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믿음이란 부처님 힘〔佛力〕을 독실하게 믿는 걸 뜻하오. 아미타여래께서 원인 자리〔因地〕에 계실 때 48대 서원을 발하여 매 서원마다 중생을 제도하기로 다짐하셨소. 그 가운데 “나의 명호를 염송하고도 나의 국토에 생겨나지 못하는 중생이 있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소. 이제 그 원인 수행이 원만하여 그 과보로 아미타불이 되셨으니 우리가 지금 아미타불을 염송한다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력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자비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믿어야 하오. 자식이 어머니만 그리워한다면 어머니는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품안에 받아들일 것이오.
그 다음으로 정토법문을 믿어야 하오. 영명 선사께서 사료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토법문과 다른 법문이 그 크기나 난이도 및 이해득실에서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분명히 알고, 비록 다른 스승들이 다른 법문을 몹시 칭찬한다고 할지라도 동요되지 말며, 설령 여러 부처님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다른 법문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할지라도 이끌려 가지 않아야만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소.
서원이란 바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오. 머리(목숨)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면 할수록 미혹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오. 아울러 서방정토에 왕생한 뒤 다시 사바고해에 되돌아 나와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발원도 함께 가져야 하오.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을 모두 추스리고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스려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리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릴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독경) 또한 마찬가지요.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데〔寫經〕, 얼마나 일심(一心)으로 전념(專念)했던지 오직 베껴 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하늘이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어두운 줄 모르고 여전히 쉬지 않고 계속 베껴 쓰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날이 이렇게 어두컴컴해졌는데(불도 쓰지 않고) 어떻게 경전을 베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물었다오. 그러자 경전을 쓰던 사람은 그만 감정 생각이 생기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소.
무릇 밝고 어둡다는 분별은 중생들의 허망한 견해〔妄見〕이자 속된 감정이오. 그래서 일심으로 전념할 때는 망상과 감정이 모두 텅 비어 버려 오직 경전 베껴 쓰는 것만 알고 날이 어두워진 줄은 모른 게오. 또 날이 어두워지면 빛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거지요. 그러다가 남이 옆에서 끄집어 흔들면서 그만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감정생각이 갈라졌소.
망상이 움직이자 광명과 암흑이 즉각 판연히 구별되고 더 이상 경전을 쓸 수 없게 된 거라오. 그래서 수행공부의 길은 정말로 오롯하게 추스리는〔專攝〕 데에 있소. 감정생각이 일지 않아 무념무상하다면 어디에 사견(邪見)이 있겠소. 사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혜〔正智〕지요.
〔옮긴이 보충해설 : 유가의 서경(書經)에는 요순(堯舜) 임금 때부터 전수되어 온 도맥(道脈)으로 알려진 16자 심법(心法)이 실려 있다. “사람 마음 오직 위태롭고 진리 마음 오직 미약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오직 일념으로 중용의 도를 진실되게 붙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進一, 允執厥中).”
우리 속담에는 “정신이 한 군데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精神一到, 何事不成?)”라는 말이 있고, 중국에는 정성이 미치는 곳에는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致, 金石爲開)는 속담도 있다. 모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염불 경지와 같은 도의 본질속성이다.〕
그리고 정토염불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과응보를 크게 제창하여야겠소. 최상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 본디 윤리강상(倫理綱常)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지요. 그러나 중하 근기의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구체 사례도 뚜렷한 증거로 소개해 줄 필요가 있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행실을 경계시킬 수 있겠소?
〔옮긴이 : 유형의 국가 정치에서 법령과 형벌을 제정하여 공포 시행하는 이치도 이와 똑같으며, 무형의 종교 도덕상 인과응보 법칙과 서로 표리관계로 일체(一體)를 이룬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진리〔道〕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오. 사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독실하게 믿는 일도 결코 쉽지 않소. 소승의 초과(初果:수다원)와 대승의 초지(初地)에 이르러야 진실로 인과응보를 독실하게 믿을 수 있다오. 그 아래 중생들은 한번 마음에 거슬리는 인연을 만나면 살생이나 도적, 간음, 거짓말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소. 미혹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악업이 뒤따라 지어질 위험이 크지요.
그런데 총명하고 글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마치 중하 근기의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나 알려 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 뜻만 대강 알아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없거니와, 설령 잘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오.
오직 초과(初果)와 초지(初地)에 올라 성인(聖人)의 부류에 끼어야만 미래의 생사윤회를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빛·소리·냄새·맛·느낌·생각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독실한 믿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소.
그래서 몽동(夢東, 徹悟) 선사께서도 “심성(心性)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인과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며, 인과를 깊이 믿는 사람은 마침내 반드시 심성을 크게 밝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소.
세상에 염불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정말로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사람은 왜 그리 적은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이는 오직 염불하는 사람들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없거나, 내세에 부귀공명을 누릴 복덕의 과보만 구하기 때문이오. 내세의 부귀공명이란 게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추진력이 다하면 되돌아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요.
금생에 염불하는 사람이 내세의 인간이나 천상의 복록을 구한다면 그 복록으로 부귀공명을 얻겠지만 올바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인과응보를 믿지 아니하겠지요. 인과응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부귀공명의 지위에 올라앉으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어 죄악만 더욱 증대시키게 될 것이오. 그래서 복록이 클수록 죄악도 더욱 많이 지어 그로 말미암아 다음 생에 막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3세의 원한〔第三世怨〕이라는 것이오.
그러므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복록을 보답 받을 생각일랑 절대로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오. 오직 용맹스럽고 날카롭게 앞으로 곧장 나아가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만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미묘한 법문으로 믿어야 하오. 그래서 철오(徹悟:夢東〕 선사께서 일찍이 “정말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고 가르치셨소. 이 16글자는 정말로 염불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요, 종지(宗旨)요.
또 “아미타불 한 구절은 우리 부처님 마음의 요체이니, 세로로는 다섯 시기〔五時:부처님의 다섯 설법 시기인데, 보통 천태종에서 화엄·녹야원(소승 아함경)·방등(方等:유마경·승만경 등 대승경전)·반야·법화 열반으로 나누는 견해가 대표적이다.〕를 관통하고, 가로로는 여덟 가르침(八敎: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네 化法과 頓敎·漸敎·秘密敎·不定敎의 네 化儀를 합쳐 부르는 천태종의 개념)을 포괄하네(一句彌陀, 我佛心要, 竪徹五時, 橫該八敎)”라고 찬탄하셨소.
정말로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하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그 궁극 경지를 알 수 있으며,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等覺〕 보살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게 있다오. 그래서 보살도 조금밖에 모른다〔菩薩少分知〕고 말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야 더욱 더 믿고 실행해 나갈 일이오.
印光 大師 嘉言錄 20
임종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臨終舟楫)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부처님께서 입적한 승려를 화장하도록 규정하신 것은 본디 그로 하여금 산산히 부서질 가짜 형체를 떠나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비(茶毗)의 규정을 세우신 이후 승려대중은 이를 항상적인 법도로 받들어 지켜왔소.
그러나 법과 도가 쇠퇴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겨나서, 지금 불자들은 경솔하게도 화장하는 일을 부처님의 법제에 따르지 않고 있소. 병든 이가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임종 때에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움직여 감실(龕室:본래 탑 아래의 방, 불상을 모셔두는 석실인데 여기서는 시신을 안장하는 화장용 坐棺을 가리킴)에 하루 이틀 넣어 두었다가 화장을 하니, 정말로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소.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八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곧 지식(知識:지각)이오. 앞의 다섯 인식[前五識]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이고 제6식은 의식[意:뜻]이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부르오.
무릇 사람이 생겨날 때는 제8식이 가장 먼저 오고 제7·6·5식이 차례로 뒤따라 온다오. 그리고 죽을 때는 이 제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오. 무릇 제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靈識)으로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오.
그런데 이 제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8식이 떠나가오. 제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 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제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는 것이오. 이 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 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 때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려운데, 단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오.
불경을 찾아보면, 목숨[壽]과 따뜻한 기운[煖]과 인식[識] 세 가지는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옛 부터 죽었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역대 기록을 찾아보면 하나하나 상세히 확인할 수 있소.
유교에서도 죽은 뒤 사흘 만에 대렴(大殮: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 못 박는 일)의 예법을 행하는데, 이는 가족들이 사모와 비애의 감정으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을 배려하기 때문이오.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는 비록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소. 부랴부랴 움직이고 옮기거나 변화시킨다면 자비심은 과연 어디에 있겠소?
옛말에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兎死狐悲)는 속담이 있소. 짐승 같은 미물도 비슷한 종류(처지)를 서글퍼함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고 더구나 같은 불자인 우리들이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란 게 고통이 극도에 이르면 성질을 내기 쉬운 법인데, 임종에 성질내는 마음을 품으면 타락하기 가장 쉽소.
불경에 보면, 아기달왕(阿耆達王)이 불탑과 사원을 세워 그 공덕이 매우 크고 높았는데, 임종에 시중들던 신하가 부채를 들고 있다가 왕의 얼굴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고통스러워 성질을 낸 까닭에 죽어서 그만 뱀의 몸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소. 물론 생전의 커다란 공덕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사문(沙門:수행스님)을 만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법을 듣고 뱀의 몸을 벗어나 천상에 올라갔다고 하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죽은 이의 인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갈아입히고 옮기거나 화장을 하면, 그로 하여금 고통스러워 성질을 내게 함으로써 더욱 타락하도록 조장하는 결과가 되겠소. 잔인한 마음으로 이치를 어기고 일부러 참혹한 독약을 베풀려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내가 죽은 이와 무슨 원수를 지고 무슨 한이 있다고 선량한 마음으로 악한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지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오.
만약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한 일이라 증거를 댈 수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경전에 기록된 내용도 믿을 수 없단 말이오? 지금까지 불어난 각종 폐단은 결국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단지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몸의 따뜻한 기운이 식어감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습관이 반복되어 일상처럼 되었기 때문에, 설령 이러한 이치를 언급하는 자가 있더라도 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죽은 이의 고통은 더욱 펴지기가 어렵게 되었소.
오호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태어남과 죽음밖에 없도다. 태어남은 산 거북이의 등가죽(甲)을 벗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산 게를 끓는 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오.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 한꺼번에 번갈아 지지고 볶아댈 때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바라건대, 환자를 보살피고 시중드는 모든 사람들은 세심하게 주의하고 신경 쓰되, 특히 환자와 쓸데없이 한가한 잡담을 나누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오. 어수선하게 떠들어대거나 구슬픈 심기를 내색하지 말아야 하오. 오직 환자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한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야 마땅하오.
또한 자신이 스스로 염불조력[助念]하여, 환자가 그 염불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따라서 염송하도록 이끌어야 하오. 만약 재력이 넉넉하다면,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조를 짜서 번갈아 염불해 주도록 안배하여 염불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면 더욱 좋겠소.
환자가 귓속에 늘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도 부처님의 성호를 늘 염송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의 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할 것이오.
만약 재력이 없다면 가족 모두 함께 마음을 내서 직접 염불조력함으로써 최후의 연분을 잘 매듭짓도록 하여야 하오. 사후에 처리할 일들일랑 행여라도 환자 앞에서 발설하여서는 절대 안 되오. 다만 목탁이나 방울 치는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염불하여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환자 귓속에 들어가고 환자 마음이 늘 염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소리가 둔탁(鈍濁)한 목탁은 임종 시 염불조력에 결코 써서는 안 되오.
환자의 몸은 앉든지 눕든지 그의 자세에 자연스럽게 맡기고 절대로 움직이거나 옮기지 말며, 모두 염불에만 전심전력하며,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정신의식(神識)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 다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바야흐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힐 수 있소. 만약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 관절에 덮어 씌우면 한참 지나 다시 부드러워진다오. 그 때 감실(龕室:坐棺) 안에 안치해도 늦지 않소.
할 일이 모두 끝나면 더욱이 계속 염불해야 하오. 독경이나 참회예불과 같은 다른 불공(佛功)은 그 어느 것도 염불만큼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오.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권속들이 한결같이 이에 따라 실행한다면 죽은 이나 산 사람 모두 큰 이익을 얻게 되리다.
그리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본래 오른쪽 옆구리를 땅바닥에 대고 누우셨기 때문에, 그 자태 그대로 관에 넣어 다비(茶毗:화장)하였소.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도 각기 자연스러운 자세에 따라서, 앉아서 입적한 사람은 감실에 안치하고 누워서 열반한 사람은 관에 안치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오랜 습관이 풍속으로 굳어져 아마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또한 각자 편리한 대로 행하도록 그 뜻에 맡기면 되오.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모습과 감응은 원래 사실상의 근거가 있소. 좋은 곳[善道]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나쁜 곳[惡道]에 떨어지는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오. 온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열기가 정수리(頂)에 모이면 성도(聖道:극락세계)에 올라가고, 눈(眼)에 모이면 천상(天道)에 생겨나며, 심장(心)에 모이면 인간(人道)에 환생하고, 배(腹)에 이르면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지며, 무릎에 이르면 축생(畜生道)으로 태어나고, 발바닥에 몰리면 지옥(地獄道)에 떨어진다오.
그래서 대집경(大集經)의 임종징험게(臨終徵驗偈)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소.
頂聖眼天生
人心餓鬼腹
畜生膝蓋離
地獄脚板出
정수리는 성인에
눈은 천상에 생겨나고
사람은 심장에
아귀는 배에 모여든다.
축생은 무릎을 통해 떠나가고
지옥은 발바닥으로 빠져나간다.
무릇 태어남과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중대한 일이오. 그래서 이 한 순간만큼은 가장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마땅히 한 몸과 같은 자비심(同體之悲心)으로 죽는 이가 극락왕생의 대업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하오. 옛사람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소.
我見他人死
我心熱如火
不是熱他人
看看輪到我
내가 다른 사람 죽는 걸 보면
내 마음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네.
다른 사람 때문에 뜨거운 게 아니라
곧 내 차례가 돌아올 걸
생각해 보니….
인연(因緣)과 그에 대한 과보(果報)의 감응(感應)은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소. 그래서 스스로 이롭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남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하오. 이 글을 적어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모든 사람이 각자 주의하고 명심하여 실행하길 간절히 기원하오.
첫댓글 관세음보살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인광대사 가언록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