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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향기나는 메일 보내기 원문보기 글쓴이: 다정공자
성산 장기려 그는 누구인가?
서론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의사’ ‘작은 예수’등으로 불려가며 우리 곁을 살다간 성산 장기려 선생(1911-1995) 어떤 상황에도 거짓을 저주 받을 짓이라 여겼으며 자신이 수술을 잘못해 환자가 죽었을 때 괴로워 한 나머지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가 처벌을 원했으며 추운 겨울에 입고 나간 코트를 길거리 거지들에게 벗어주기가 다반사였으며 자신의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김일성대학 의대 최고의 교수, 부산 시민상, 자랑스런 서울대인 선정, 막사이사이상, 국제 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2006년 대한민국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신 분이며 영어 러시아어 일어에 능통하신 분입니다.
출생과 서울대
1911년 8월 14일에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 어머니 최윤경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성경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려주었으며 (재혼) 어머니 역시 신실한 기독인 이였습니다. 또한 할머니 이경심 여사 역시 손자를 등에 업고 손자를 위해 ‘이 금강석(장기려)이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의 나라에 크게 쓰이는 일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여인이었습니다.
1928년 서울대 의대(경성의전)에 입학한 그는 향학열이 대단하여 의대생시절 의대서적 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문학서적 등 두루 탐독 하므로 그런 그의 사상은 ‘파편화 된 지식을 거부하고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핌으로 진정한 지식에 이르고자 했던 태도’는 신앙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질계에 대한 지식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참된 진리가 못 된다고 믿게 되었다.
1938년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한(종합2위) 장기려 선생은 당시 한국의 최고 의사 백인제교수(1953년 숙청)의 조수로 서울대의대에 머물렀으며 계속해서 남아 서울대 의대를 지켜 백인제교수의 후계자로 남아주기를 원하는 스승의 청을 뿌리치고 1940년 조수의사 생활을 끝내고 열악한 환경의 평양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 외과과장으로 옮기므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시골 의사의 길을 실천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약속 시골병원 의사의 길
평양에서 의사 재임시절 주기철 목사님의 (재혼의)부인 오정모여사의 병을 집도하는 주치의를 했으며 오정모 여사는 감옥에 있는 남편 주기철 목사에게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출감하면 나와는 이혼 할 것을 각오하고 나오시오’했답니다. 또 산정현 교회에서 주기철목사의 동상을 건립하려고 할 때 극렬 반대하며 하나님 찬양에 주기철목사가 그것을 가리는 우상같은 존재는 될 수 없다며 단호하셨습니다. 김일성이 주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이 되어 금일봉과 적산가옥을 보냈는데 오 여사는 포상받기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라며 거절하였으며 오정모 여사의 신앙은 금욕적 신앙생활 엄격한 신앙의 훈련 빈틈없는 교인으로 인식되었다.
장기려 선생은 오정모 여사를 가르켜 히브리서 11장에 추가되어야 할 신앙의 인물이라 평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봉숙 여사와 결혼
혼사를 앞둔 당시 김하식 내과의사 딸 김봉숙을 먼발치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시큰둥하여 거부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인 제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못났으며 얼마나 못났겠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어 같이 살라고 하면 서로 믿고 살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으로 변했으며 이어 구혼 편지에서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둘째: 우리 부모님을 모셔야 하며
셋째: 공부하는 동안 생활비가 없거나 적으므로 궁핍한 생활을 꾸려 나갈
용기의 실천을 약속 할 것
이 세 가지 사항을 받아들인 김봉숙 여사와 결혼을 했으며 김봉숙여사 역시 피아노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부잣집 딸 김봉숙여사는 결혼 후 당대 최고의 월급을 받는 외과의사 부인이었으나 당시 남편은 받은 월급 전체를 불쌍한 환자와 이웃위해 사용했으므로 콩나물 값을 눈치 보며 외상 했으며 삯바느질과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부모님 봉양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므로 늘 손이 터 있었습니다.
평양의 정황
이 때 김일성의 외숙이자 꼭두각시인 강양욱목사가 조직한 조선기독교연맹이 기독교를 교란했으며 김익두 목사가 변절했으며 일제 앞잡이 김응순 목사가 협박을 하면서 정치보위국에서는 끝까지 저항하던 평양신학교 김인준 목사를 고문하여 죽이고 후임 이성휘 목사마저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 주요 도시의 중요한 목사들이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을 했으며 이에 견디지 못한 목사(한경직, 황은경, 함석헌등)들은 사선을 넘어 월남에 이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장기려 선생은 평양에 머물면서 불쌍한 환자를 위해 계속 머물게 된다. 머무르는 기간 동안 김일성대학 의대 외과과장(인민1병원 외과장)까지 오르게 되나 모함을 받아 강등이 되었으며 이때 정치보위국에서 선생의 뒷조사가 시작되나 오히려 뒷조사를 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청렴함에 감동을 받게 된다. 과장의사 부인이 삯바느질을 해서 궁핍하게 먹고 살고 있으나 선생의 고액 월급 전액이 가난한 인민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었기에 때문이다. 다시 선생은 북한 최고의 월급을 받는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자신의 가정 생활고는 여전하였다.
해방 이 후 공산치하에서 상황을 살펴보면 남한보다 기독교 교세는 북한이 월등하였다 자연히 북한 공산주의는 초기정권 수립에서 기독교와 충돌 할 수밖에 없었으며 첫 번째가 토지수탈이다 토지를 빼앗긴 35만 명 중 기독인이 상당수가 되었으며 교회가 소유한 땅마저 수탈대상이 되어 김일성 정권과 대립각을 새웠으며 두 번째는 1946년 11월 주일날 선거를 강행하였다 주일날 선거는 기독교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그것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다.
월남하는 장기려
마침내 국군은 평양을 완전 점령하여 장기려 박사는 국군 야전병원에 근무를 하게 된다, 다시금 국군이 후퇴를 할 때 선생의 가족은 나누어 월남하기로 결정을 하고 먼저 앰뷸런스로 장기려 박사와 아들1명은 월남을 하고 뒤이어 부인과 가족들이 월남하기로 했으나 전쟁의 상황이 그렇지 못하여 가족이 이북과 이남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선생은 일제 때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에 크게 실망했으며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 한 교단에서 장로로 자신이 창단 주역된 교회를 섬겼으나 역시 실망하여 77세 때는 제도권 교회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부산 복음병원의 장기려
6.25전쟁 중에 장박사는 부산으로 피난 온 후 복음의원을 개원하여 초대교회의 신앙생활 위에 기독공동체로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원장과 운전기사의 월급이 같았다. 부산 사람들은 보통 복음병원에 간다고 말하지 않고 장박사한테 간다고 했다. 무엇이 이런 신뢰와 존경받는 의사로 만들었을까. 당시 간호사의 말을 빌리면 선생은 행려병자에게 찾아가 치료는 물론 손톱도 깎아주고 몸도 닦아주었다고 한다.
한국전 당시 1953년 미국유학생 전영창이 미국에서 모금한 5천 달러와 장기려 박사의 선함의 의기투합에 의하여 한상동과 차봉덕의 도움으로 복음진료소는 이 후 복음병원으로 성장을 가져왔지만 196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장박사의 주도로 이루어 질 때 복음병원은 협조하지 않았으며
부산의 복음 병원이 양적으로 팽창하여 원래의 목적에 상실 할 때 ‘사업의 확장이 과연 하나님의 축복일까? 아니면 맘몬의 장난일까? 우리는 자기의 신앙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한 것이 아닌가 하여 회개한 바 있습니다.’
1973년 고등계 형사 경력이 있는 송상석이사장(목사)은 장박사의 양아들 겸 제자인 박영훈(당시:복음병원 외과과장 후, 복음병원장)송도제일교회 장립집사를 꼬드겨 병원장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변경시켜 제거(1974년 정년퇴임) 하며 이 사태로 복음병원은 폭력이 난무하고 고신교단은 장박사와의 처음 약속(고신교단은 복음병원에 간섭하지 않는다...)을 헌 타이어 버리듯 버립니다.
성산 3훈은
첫째, 사랑의 동기 없이는 언동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셋째, 잘못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믿고 해결하도록 합시다.
노년의 장기려
1987년 선생은 안기부로부터 이런 소식을 듣는다. 김일성 머리 뒤에 혹을 떼어 내고 싶은데 누구도 못 믿어 떼어 낼 수가 없으니 김일성은 스스로 탄식하며 ‘장기려가 있었다면 내 몸을 맡길 텐데..’ 하니 밑에 사람들이 강제로 잡아오려고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선생의 생애에서 한국교회로 인한 슬픈 나날이 더 많았으며 행복했던 순간은 적은 것이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문제의 신랄한 지적과 비판보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선생은 어느 4월에 김교신 선생과 주기철 목사님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4월이 되면 나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와 김교신 선생의 서거를 생각하게 된다. 두 분은 최근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죽은 후 부활이 있으니 육을 죽이는 생활을 하고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선생의 친아들 서울대 의대 교수 장가용 박사와 더불어 한명의 아들이 선생님 돌아가시는 영결식장에 상주의 완장을 끼고 있었는데 그가 손양원 목사의 조카 손동길이었다 그는 평생을 선생님의 비서 또는 조수의사로 벗으로 끝까지 선생님을 지켰다. 마치 요한처럼...
1988년 종들의 모임 선교사 문제로 제도권교회에 염증을 느낀 선생은 '내가 이젠 진리를 찾았습니다.' 라고 산정현 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모두 4팀으로 나누어 "할아버지,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세요."하면서 선생에게 매달렸다. 선생은 "내가 가긴 어딜 가느냐? 집에 가서 자거라. 어디 안 간다. 너희가 진리를 찾으려면 날 찾아오면 된다."라고 달랬다. 교인들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장박사님, 어떻게 우릴 버리고 가십니까? 그만 돌아오세요."하자
선생은 "너희들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듯이 여러분이 나를 존경한다. 존경하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택한 길이면 따라와야지 존경한다면서 왜 안 따라옵니까?" '너희가 존경했더라면 나를 따랐을 것이다.'이것이 예수님 말씀이 아닙니까.
선생이 한국교회를 보면서 가장 통탄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였다. 맘몬을 섬기는 기독교,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독교에 대해 크게 실망하며 거침없는 개혁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하늘을 찌를 듯하다 고딕의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하다 말했다. 선생은 십일조를 교회가 강요하는 것은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남편과 가장으로써 이산가족이 되어 김봉숙 여사를 포함한 가족과 헤어져 살았던 장기려 박사는 ‘내 아내(김봉숙)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 하시면서 남한에서 어떠한 재혼의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산가족 면회시절 대한민국은 그를 최초 면회자로 선정했으나 자신은 머지않아 천국에서 만날 테니 애뜻한 이웃에게 끝까지 양보하여 죽는 날까지 만나지 못했으며 한 때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사랑’의 주인공 ‘안빈’이냐 아니냐가 시대의 화제가 되기까지 했다.
의사로써 그를 살펴보면 선생의 최후 기록 ‘예수님의 생애와 나의 회고’를 살펴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의 의사 생활을 회고할 때에 진료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 주로 기억에 남아 있고 성공한 것은 별로 없다. 혹시 있다 하면, 성령의 역사로 생각되는 것뿐이다.’ ‘의사로서 가장 기본적 기술은 혈관 견찰법인데 견찰한 것이 풀려져서 다시 수술을 한때가 있었다. 이와 같은 과실을 생각할 때에 나는 죄인이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다라는 생각으로 나는 우울해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병원장 명예병원장까지 봉사를 했으며 장로로써는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 서울 산정교회 창립 장로, 부산 산정현교회 창립 장로로 활동했으며 한국최초의 노벨상 후보 함석헌 옹과는 고향 친구며 스승 유영모마저 제자 함석헌을 버릴 때 우정으로 지켜준 사람이며 평소 김교신 선생과 주기철 목사님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선생은 어느 4월에 김교신 선생과 주기철 목사님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4월이 되면 나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와 김교신 선생의 서거를 생각하게 된다. 두 분은 최근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죽은 후 부활이 있으니 육을 죽이는 생활을 하고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한 때 장기려 선생를 기리는 사람들이 동상을 제막하려고 왔을 때 노구의 몸으로 ‘나의 동상제막을 하려는 사람들은 벼락을 맞아 죽으라’는 역정을 내리셨으며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쳤던 경건한 의사이자 어떤 신앙인보다 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다. 자신의 묘비에 ‘오직주님만을 섬기다 간사람’이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의 신실한 크리스천 이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선생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과 이념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역사의 산 증인으로 올곧은 신앙인으로서 의사로서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십자가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 새 사람으로 거듭 난 사람, 이념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모두가 사람으로 보일 뿐 직위가 없었고 고하가 없었던 분이셨다. 하나님이 주신 인술을 그저 값도 없이 불쌍하고 가진 것 없는 분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가신 분이다. 이 분에게 무슨 상이 필요 있으랴. 하나님 나라에서도 상급을 포기하시며 나누어 주실 분이다.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필자의 생각을 정리 하겠습니다.
영성이란? 삶의 전영역이며 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삶의 그림자가 나와야 합니다. 제자도 혹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라 실천함 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시적 눈을 통하여 연출되어지는 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 내재 내주하심이며 결코 화려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주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도덕적 윤리적 부분을 강조하며 어떤 형태의 무엇을 추구합니다. 영성은 예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존재 할 것입니다. 결코 어떤 형태로 모양으로 마치 유행처럼 시대와 환경에 맞게 변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영성은? 소박함이요 작은 것임에도 주님은 크게 흠향하시며 영성은 인간의 눈에는 바보짓이요 어리석음이며 낮은 곳에서 조용히 보잘것없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또한 특정인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 성공하고 명망있는 목회자 전유물이 아니라 부유하면 나누어 쓰고 모자라면 자족되어지는 삶이며 이것은 거룩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성화가 아닌 성화, 영화로의 길입니다. 성경에서 찾아보면 산상수훈의 길이며 그 길은 성도에 의하여 실현되어지고 있으며 이미 예전에 존재했으며 현실에서 실천되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전승될 무소유의 삶입니다. 마치 장기려 성도의 삶처럼 말입니다.
(밝힘::제목: 장기려그사람, 출판사:홍성사, 압축& 인터넷 부분 표절)
첫댓글 장기려 박사의 어떤 신앙 노선 부분은 성경적 기독교 진리와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려고 했던 실천적 믿음 생활에 대해서는 배우고 기억해야 할 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는 함석헌을 통해서 아마도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런 글에서 부차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북한 기독교와 공산당의 관계와 한국전쟁의 쓰라린 고통의 시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되며 극한 어려움가운데 믿음을 지킨 선진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슬픔을 이기고 다시 승리해야 합니다.
정말 멋진 분이셨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않습니다.
참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롤모델이 현대에도 충분히 높여지고 장려되었으면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참 익숙하지만 정작 각자의 모임에서 이렇다할 교제다운 교제없이 한 모임에 소속된 소속감에 그냥 익숙한 얼굴만 보면서 사는 경우도 상당수 있을 꺼라 생각됩니다. 교제회원 게시판에서 계속 발전된 교제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동영상을 다 보았습니다..그분의 삶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장 박사는 종들의 모임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기존 교계에 염증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종들의 모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종종 참석하신 것 같습니다.
" 우매할만큼 바보가 되라"
저의 개인적인 간증이지만 제가 첫번째로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처음 얼마동안은 그말씀에 순종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경말씀을 알게되고 저의 욱하는 자아가 합쳐져 저의 의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이정도 했으면 주님이 봐주시겠지..
장기려박사님의 "바보"와 제가 되야할 "바보"는 물론 많이 틀립니다.저에게있어 "바보"란 나의 "의"를 죽이라는
말씀인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것에 불순종한 열매가 바로 사랑님에대한 저의 대처였습니다.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