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를 돌려달라
6월 19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빼앗긴 땅 대마도를 되찾자는 취지의 대마도의 날입니다. 지난 2005년 지방의회인 마산시의회에서 제정하여 20회를 맞는 날입니다.
일본엔 다께시마의날이 있지만 우리에겐 대마도의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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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승만대통령은 건국후 3일째 되는 1948년 8월 18일 첫기자회견에서 중대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對馬島;쯔시마)를 반환해줄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상,하두개의 섬으로 되어있는 한일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350년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것이다.”
그리고 1949년 년말 기자회견에서는 “대마도 반환은 우리의 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은 350년전에 대마도를 침입하여 왔고 당시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웠다.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은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선언했기에 이 대마도도 되돌려주어야 한다.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수 없을 것이다”라고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게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가 60여회에 이르며 그는 대마도 반환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여론도 이러한 주장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중국 거주 동포들의 지원시위는 이대통령에게 많은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마도 탈환’의 대명제를 아예 포기하고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신념이 굳어가는 현실에 처해있다.
2005년 2월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매년 2월 22일)이 제정되는 것을 본 마산시
의회에서 대마도의 날(6월19일)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정부(노무현대통령)는 외교 마찰을 우려해
취소할것을 요구하나 마산(지금의 창원시)시의회는 이를 거부,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6월 19일은 세종(1419년)때 이종무장군이 대마도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항한 뜻깊은 날이다.
당시 한국의 대마도의날 제정을 지켜본 일본의 여론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
영토분쟁(센카쿠 열도와 쿠릴열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들은 또다른 영토분쟁이 발생할까봐 항상노심초사하고 있던중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한국의 소리에 거의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래서 앞질러 ‘다께시마를 반환하라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한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의 소리가 작아진 반면 일본은 독도반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마도는 일본 최단거리로서는 138km 떨어져 있고 부산에서는 50km 떨어진 부산에서 육안으로도 볼수있는 아주 가까운 섬이다. 나가사키현 소속의 이섬은 인구 28,000명 밖에 되지 않지만 일본에서 3번째로 큰섬이다. 총면적 708제곱km로 울릉도 10배의 크기이다.
역사적으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는 뗄래야 뗄수없는 밀접한 사이다. 아니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해서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겐 문제가 많다. 과거 조선의 500년이 명,청나라의 속국과 다름없었으며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0년을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땅이다. 이런 실효지배 사실을 무시하고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현재 우리가 실효지배 하고있는 독도는 어떻게 되나. 독도가 걸린다. 여기에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고민이 있는것이다.
대마도엔 천년이상된 신사만 29개사가 있는데 한결같이 한국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국보급 한국의 보물을 간직한 곳들이다. 슈센지(修善寺)에는 1905년 맺어진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창하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되어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수 없다”고 버티다가 순직한 최익현열사의 순국비가 있다.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 또한 이곳에 있다.
그리고 고종의 유일한 딸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일본으로 유학와서 인질같은 삶을 살다가 대마도 번주였던 소(宗) 다케유키와 정략결혼하여 대마도에서 살다가 이혼한후 한국으로 귀국, 이방자여사의 극진한 뒷바라지를 받았으나 결국 1989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금곡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조울증,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임진왜란때 대마도주 였던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전쟁발발 일년전 조총3자루를 가지고 동래부로 찾아들어 “곧 도요도미가 이 조총으로 조선을 침략할것이니 미리 대비 잘하시라”고 귀뜸을 하고 떠났으나 결국 이 조총은 동래부의 창고속에서 난이 끝날 때까지 잠자고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임란당시 소요시토시는 침입군들의 길잡이가 되어 부산으로 쳐들어 온다. 도요도미의 오른팔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사위였기에 어쩔수가 없었을까 아니면 누구보다 조선의 형세 및 상황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대마도가 요즘 한국인 관광객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년간 26만명 한국방문객이 대마도를 방문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정부는 이 외지고 산간벽촌인 이 섬을 너무 등한시 하고있다. 오로지 북섬에 한반도를 탐색하는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있을 뿐이다. 우선 너무 먼 도서지역이다. 도쿄에서 1,000KM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내국인 관광객이라고는 찾기가 힘들다. 형편이 이렇게도 편향된 대마도에서 한때 ‘한국인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한국인을 거절하는 요식업체, 숙박업체가 늘어나던 때가 있었다. 발단은 한국인은 화장실을 너무 험하게 쓴다는 것이다. 사용후 화장지를 물에 내리지 않고 쓰레기 통에 버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매너가 너무 없다는 얘기다. 한국 깍아내리기에 좋은 소재를 만난 몇몇일본의 TV에서는 화장실의 이사정을 실황중계까지 하는걸 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벌어진후 오래되지 않아 그들은 한국인 관광객 없이는 밥을 먹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차츰 ‘한국인 금지’의 팻말이 하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전 또다시 대마도에서 ‘한국인출입금지’의 팻말이 나붙은 곳이 생겨났다. 대마도에 있는 千年古社 와타쯔미(和多都美 )神社의 경내에서 한국인들의 추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담배 피우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침을 내뱉는 사람들, 근엄한 경내에서 아주까리 동백꽃이 어쩌고 하면서 노래하며 춤추는 여인, 이런 추태가 촬영되어 일본 SNS와 TV에 까지 방영되니 이 무슨 창피인가.
한국(馬韓)을 마주보고 있다고 對馬島(쯔시마)로 이름을 지었다는 대마도(일설에는 말을 키우는 섬이라고 해서), 대마도인들은 자기들의 사투리인줄 알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말이 너무 많다. 친구, 총각, 바지, 지게, 일본, 빨리빨리,,,, 등등. 이런 말들은 그들도 예사로 쓰며 다 알아듣는다.
이조초 까지만 해도 한.일양국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며 양쪽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줄타기를 하던 돌립국이었지만 일본막부가 1600년대초 침입을 하였다. 이에 대마도 주민들은 끝까지 항쟁을 하였으나 결국 패하게 되어 결국 막부의 지배를 받게되나 당시 일본의 막부는 대마도까지 지원해줄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해적질을 하기시작한 왜구들이 조선과 일본 본토를 수시로 침략한다. 조선정부는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영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의 반에 가까운 량을 그들에게 공여하고 태종은 부산포, 제포와 왜관을 무역항으로 열어준다.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고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 그들은 1436년 대마도를 조선의 한고을로 편입시켜 줄것을 간청하는바 대마도를 경상도로 예속시키고 島主를 태수로 봉한다. 만약 이때 조선에서 섬 관리자라도 상주 시켰었더라면 오늘날 ‘대마도는 조선이 지배했던 영토’였다 라는 주장에 더힘이 실릴수 있었을텐데,,, 애석한 일이다..
조선초 일본을 통신사로 다녀온 신숙주일행은 그당시 일본인들은 ‘대마도를 자기나라가 아닌 외국으로 보았고 그 주민들은 半조선인으로 알고있었다’ 라고 전하고 있다. 오로지 먹고살기위해 조선으로 스스로 굴러들어온 보물(대마도)을 제대로 관리를 못해 일본에게 빼앗겨 버린 대마도가 아쉽고 당시의 조선 집권자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일본정부는 쯔시마(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