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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8일 [연중 제23주일]
복음: 마르 7,31-37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일 강론>
(2024. 9. 8.)(마르 7,31-37)
<신앙인은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1) 귀를 먹었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듣고 싶어도, 또 들으려고 해도, 여러 가지로 막혀 있어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곧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어버린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 탓입니다.
목자로서 일해야 하는 자들이 목자가 되어 주기는커녕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해 주지는 않고 성경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독점하고서 사람들을 억누르는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상황입니다(마태 23,13).
2) 예수님은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께서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일들’을(기적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당신의 ‘온 삶’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3)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장애를 치유하신 말씀인데 막힌 귀’와 ‘묶인 혀’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전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안 듣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을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말을 안 하는 것’은 죄입니다.
<들으면 안 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신앙인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말씀’을 받아서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ㄱ)”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4) 요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물론 일부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하느님 말씀처럼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은 권력자들과 기득권층 편에 서고, 나쁜 권력과 나쁜 기득권층을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교회의 진짜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묶여 있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는 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고,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5)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새로운 창조자” 라는 증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