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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변강쇠
일본 제국주의 옹호론(日本帝國主義擁護論)과 그 비판
머리말
일본은 도쿠가와씨[德川氏] 막부(幕府) 말기인 1853년 미국 해군의 함포 사격 위협에 굴복하여 1854년 미·일통상조약(美日通商條約)을 체결하고 개국(開國)한 후, 서양 세력과의 통상무역에서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서양 열강의 압력이 가중되자 난국 타개의 방법으로서 한국을 침략하여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정립하였다.
근대 이후 일본의 정한론은 1850년대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17세기 일본 국학(國學)을 비롯한 일부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관(韓國觀)을 계승하여 정립한 정책으로서 ⓐ 먼저 삼한(三韓)을 정복하여 금·은·물산의 이(利)를 취해서 무역적자를 충당하고 일본의 난국을 타개하며, ⓑ 다음에 북으로는 만주(滿州)와 몽고(蒙古)까지 ‘진출’하여 지배하고, ⓒ 남으로는 대만(臺灣)과 필리핀[呂宋]을 거두어 지배한다는 침략론(侵略論)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은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경에 기토 다카요시[木戶孝允] 등에 의하여 정치적 측면에서 더욱 발전되었으며, 1873년경에는 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에 의해 구체적 정한(征韓) 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73년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 구미시찰단이 정한의 시기상조를 지적하고 선내치(先內治) 후정한(後征韓)을 주장함으로써 선정한(先征韓) 후내치(後內治)를 주장하는 서향파(西鄕派)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권력 투쟁에서 서향파가 패배하여 정권을 암창파(岩倉派)가 주도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일본의 명치정권(明治政權)의 정책에서 정한론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순서만 지연된 것에 불과했다. 일본이 선내치하여 근대적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한 후에는 그들도 한국을 침략·정복해서 식민지로 삼아 영구적으로 지배할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정한론은 한국침략론(韓國侵略論) 그 자체이므로 다루지 않고 암창파가 일본내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보다 교활하게 일본 제국주의 당국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고 정당화한 일본 제국주의 옹호론(日本帝國主義擁護論)부터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주제는 방대하고 지면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일본 제국주의 해외침략(日本帝國主義海外侵略)을 옹호하고 정당화한 일제(日帝)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을 중심으로 하여 극히 선별적으로 주제를 한정해서 논술하려고 한다.
일본의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의 대두 및 한국 역사 타율성론(韓國歷史他律性論)과 그 비판
일본에서는 1850년대 후반에 요시다 쇼인 등에 의해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고,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친황(親皇) 정권이 수립된 후 정한론이 국책으로 채택되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옹호하며 일본 국민들을 한국 침략에 동원하기 위하여 한국 역사를 ‘정한론’에 맞추어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최초로 1882년 3월 일본 육군 참모본부(日本陸軍參謨本部)에서 조선국사 편찬(朝鮮國史編纂) 작업이 시작되었다.
근대 일본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편찬 작업을 학계에서 학자들이 학문적 진실을 탐구할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정한론’의 실천을 위한 정신전력(精神戰力) 체계 수립의 일환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한국 역사를 왜곡하여 그들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도록 날조할 개연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1885년 도쿄[東京]의 제국대학(帝國大學)이 설립되고, 1887년 그 안에 사학과(史學科)가 설치되자 일본 육군 참모본부 산하 편찬과(編纂科)의 조선국사 편찬 사업이 제국대학 사학과로 이관되었다. 일본의 제국대학은 사학과의 주임교수로 독일에서 실증주의(實證主義) 역사학파의 대가로 유명한 랑케(Leopold von Ranke)의 제자인 리스(Ludwig von Riess)를 초빙하여 일본 학도들이 독일 역사학파의 근대적 역사 연구방법을 섭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랑케 학파인 리스 교수의 역사 연구방법론이 일본 명치정권의 국책으로서 한국·만주 침략을 위한 사관이나 사론을 왜곡·정립하는데 성의 있는 협력을 하지 못하자, 1889년에는 사학과와 별도로 국사학과(國史學科)를 다시 신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학과에서는 리스 교수의 지도하에 주로 서양사학을 공부하였고 국사학과에서는 일본인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책으로서의 일본 역사 체계 수립과 정한(征韓)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협력하고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며 옹호하기 위한 한국 역사에 대한 식민주의사관을 정립하는데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제국대학 국사학과 교수들인 시게노 야츠쓰구[重野安繹], 구메 쿠니다케[久米邦武],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등이 1890년에『국사안(國史眼)』이라는 교과서를 출판했는데 이들은 한국이 고대 개국과 동시에 일본의 복속국(服屬國)임을 강조하여, 예컨대 일본의 출운신화(出雲神話)에서 나오는 스사노오노 미코도[素佐之男尊]가 고조선(古朝鮮)의 지배자가 되고, 이나히노미코도[溜永命]가 신라(新羅)의 국왕이 되며, 그의 아들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이 일본에 귀복(歸服)하고, 신공왕후(神功王后)가 신라를 정벌하여 항복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것이 저들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날조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어서 일본의 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인 하야시 타이호[林泰輔] 등은 1892년에『조선사(朝鮮史)』(5책)를 간행했는데, 그는 여기서 대가야(大伽倻)의 왕자 아라사(阿羅斯)가 일본 국왕을 찾아가 내조(來朝)했고, 뒤에 국명을 바꾸어 임나(任那)라고 했으며, 이른바 신공왕후 재위기 때에는 임나에 일본부(日本府)를 두었는데, 가야의 7국이 모두 이에 속했으며, 후에 부근의 소국을 더욱 병합하여 모두 임나라고 불렀다고 기술하였다.
하야시가 오래 전부터 날조된 일본의 고대 사료를 왜곡·사용하여 만들어낸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근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일본인들이 서술한 한국 역사에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날조된 거짓을 정식으로 끼워 넣어 고대 가야의 옛 땅이 모두 일본의 정복지(征服地)였으며 백제와 신라도 일본의 신국(臣國)이었다는 당치도 않은 억설(臆說)을 날조해낸 것이었다.
하야시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역사학으로 옹호하고, 방조하기 위하여 한국 민족의 과거의 사실과 능력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중에 가장 크게 왜곡시킨 부분이 고대 한국 민족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계였다. 그는 고대 조선이 때로는 북방의 중국에, 때로는 남방의 일본에 복속하여 처음부터 자율성(自律性)이 없는 타율성(他律性)의 민족이었음을 주장하고,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제외하고도 이른바 신공왕후가 신라를 침공하여 정벌(征伐)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야시는 ⓐ 이른바 임나일본부설 ⓑ 이른바 신공왕후의 신라정벌설(新羅征伐說) 이외에도 ⓒ 백제가 일본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는 설 ⓓ 백제가 일본에 보호를 의뢰하여 멸망을 면했다는 설 ⓔ 고구려가 일본의 신하가 되어 조공했다는 설 ⓕ 신라가 삼한을 평정한 이후에도 일본을 군국(君國)으로 섬겨 조공했다는 설......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물론 날조되고 왜곡된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일본의 제국대학 사학과와 국사학과의 교수들과 졸업생들은 1889년 사학회(史學會)를 조직하고『사학회잡지(史學會雜誌)』를 간행하면서, 이 잡지에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나카 미치요[那珂通世]·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츠보이 구마조[坪井九馬三] 등 다수의 신진 학자들이 그들의 식민주의사관에 의거하여 한국 역사를 왜곡한 논문들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시작한 일을 학문 연구의 탈을 쓰고 제국대학의 역사학자들이 대행해주자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일본이 한국을 ‘정벌’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고대에 일본이 지배했던 ‘일본 구강토(舊彊土)의 회복이며 복구(復舊)’라고 떠들고 선전하였다. 일본 정부가 체계적인 교육에 의하여 날조된 한국 역사와 일본 역사를 국민들과 학생들에게 가르치자, 이에 속아서 날뛰는 일본 국민과 일본 학생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초기 식민주의사관과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날조에 정면으로 대항한 인물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였다. 단재는 이미 1908년경에 고대 조선이 북방의 중국에 복속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무설(誣說)이라고 일축하면서 ‘한(漢) 세종(世宗)이 설치한 사군(四郡)은 한반도에는 없었고 한국인들의 조상이 되는 부여족(扶餘族)과는 무관하며 중원의 제왕이었던 수(隨) 양제(煬帝), 당(唐) 태종(太宗), 요(遼) 성종(聖宗) 등은 오히려 한국을 침략했다가 패배했는데, 옛날 한국 민족이 중국에게 복속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은 거짓’에 불과하다고 독사신론(讀史新論)을 통해 반박했다.
특히 단재(丹齋)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하여 고대 한국이 일본에 복속했다는 하야시 등의 거짓된 주장들을 자신의 저술인 독사신론에서 단호하게 부정하고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하였다.
첫째, 일본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乎)가 신라를 침범했다는 주장은 우리 나라의 옛 역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일본의 역사서를 보더라도 대어협주(大魚挾舟) 조일급국(潮溢及國) 등의 그들 자료 설명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사실에 없는 일을 날조해낸 황당무계한 주장에 불과하다.
둘째, 더욱 가소로운 것은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이 형제간에 묵은 감정을 품어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외국으로 추방한 일이 있는데 일본 학자들이 비미호(이른바 신공왕후)의 이른바 신라정벌설(新羅征伐說)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공왕후(神功王后)가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의 국왕이 굴복하여 아우인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냈다고 왜곡하여 날조한 것이다.
셋째, 고대에는 일본이 우리 나라의 어느 땅도 점거한 사실이 없는데 그들은 일본이 대가야를 멸하고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날조하여 주장하면서 마치 일본이 한국의 국토를 점거함을 역사상의 상례와 같이 보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다.
단재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황당무계하게 날조된 무설(誣說)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단재는 고구려의 국력이 강대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중국의 침략도 물리쳤거늘 일본에 조공했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주장이라고 일본 학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단재는 백제와 신라도 강성하고 문화가 크게 선진해서 일본에 조공하거나 복속하기는커녕 도리어 백제와 신라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가르쳐주고 일본을 개화시켜 주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그러면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한국 역사를 이렇게 왜곡하여 날조하면서 이러한 황당무계한 거짓말을 역사적 사실처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들었다.
첫째, 한국을 고대부터 일본의 소유물같이 인식하게 하여 한국을 침략하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국민의 외경사상(外競思想)을 고취하고 국민정신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다.
단재는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과 날조의 목적을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허무(虛無)의 사(斯)’도 날로 거듭하면 ‘확실한 사’와 같이 된다고 경고하였다. 즉『삼국지(三國志)』·『수호지(水滸誌)』가 소설인 줄 모두 알지만 그것을 거듭 읽고 거듭 전하는 사이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의 금낭삼계(錦囊三計)나 무송(武松)의 경양망타호사(景陽罔打虎事)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이 저들 일본인은 모두 역사서 속에서 “한국이 원래 일본의 속국이라 한 류”의 말을 써 넣어서 상전상송(相傳相誦)하매 학교 강의에서는 일본의 어린이가 기뻐 뛰며 한거독서(閒居讀書)의 경우에는 장부의 용기가 솟아올라 한국을 옛날부터 일본의 소유물과 같이 생각하게 해서 한국을 침략하여 정복해서 일본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단재는 여기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폐해를 잘 인식하고 이의 철저한 비판과 극복을 촉구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려는 이론인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에 가장 날카롭게 저항하고 비판한 사람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강점함을 전후하여 단재는 1910년 4월에, 백암은 1911년 4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일제는 식민주의사관에 의거하여 한국 병탄이 ‘일본의 구강토(舊彊土)의 회복이요, 복구’라고 터무니없는 강변을 하면서, 일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에 침략 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던 거짓 학설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더욱 강조하여 한국 민족의 저항과 독립운동을 무마하려고 획책하였다.
또한 일제는 그들의 ‘정한론(征韓論)’이 원래 한국 정복 다음에 만주 침탈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남만철도주식회사(南滿鐵道株式會社) 안에 ‘만선지리역사조사실(滿鮮地理歷史調査室)’을 설치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마쓰이 히토시[松井等]·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만선사(滿鮮史)’라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어용사학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하던 중에 한국 민족주의 사학계에서 출판한 서적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백암 박은식이 1915년『한국통사(韓國通史)』를 저술·간행하여 해외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읽혔을 뿐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유입되어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에 대한 대항책으로서 일제 식민주의사관에 의한『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편찬·보급하기 위하여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안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한국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명분과 실리가 절대 없으며,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강조하여 식민주의사관을 보급하고 주입시키기 위해 일제(日帝)가 마련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일제는 1925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칭하고,『조선반도사』도『조선사』(전37책)로 개칭하여 1932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은혜’로 알게 하며 사료집도 겸하도록 고려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유리한 것만 선택하고 불리한 것은 모두 빼어 한국의 역사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적합하도록 극도로 폄하하고 왜곡한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그 외곽 단채로서 조직된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가 펴낸 그밖의 다수의 한국 역사에 관한 서적들,「청구학총(靑丘學叢)」등 여러 학술잡지에 게재된 일본 어용사학자들의 논문들도 일제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 역사를 극도로 왜곡하였다. 왜곡의 몇가지 요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한국민족사의 기원이 주변 국가의 식민지(Colony)로 시작되었다고 날조하여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 역사가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한(漢)의 식민지인 한사군(漢四郡)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사실에 없는 황당무계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여 주장하고, 한국 민족의 고대사가 북방민족의 식민지로부터 출발했음을 강조하는데 발광하였다.
둘째, 그들은 한국 역사의 특징을 타율성이라고 강조하여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 역사가 고대 이후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북으로는 강대한 북방민족과 중국, 남으로는 일본의 세력권과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따라서 외세에 의하여 한국 역사가 결정된 타율성의 역사를 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북방민족의 지배력을 강조하면서 한국 역사의 부수성(附隨性), 주변성(周邊性)을 강조하여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주장해서 한국 역사의 타율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일본이 고대에 가라지방에 직할 식민지를 설치하여 신라와 백제도 지배했으며 고구려의 조공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날조하기도 하고, 한국 역사의 이러한 타율성은 한국의 ‘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에서 나온 ‘반도적 성격’으로서 운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이 날조되고 왜곡된 것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셋째, 그들은 한국 역사의 타율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 역사의 특징 하나를 사대성(事大性)이라고 왜곡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한국 민족은 주변의 강대국에 복종하고 그들에게 의존해서 국가와 생명을 유지해온 사대주의의 역사를 가진 것이 특징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넷째, 그들은 한국 역사에 나타나는 문화는 독창성(獨創性)이 없고 종주국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 모방성(模倣性)이 특징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다섯째, 그들은 한국 역사는 고대 이후 최근세까지 당쟁(黨爭), 정쟁(政爭)이 지배하고 당파성(黨派性)이 지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 역사의 당파성이 사색당쟁(四色黨爭)뿐만이 아니라 사대성과 결합하여 친원파(親元派), 친명파(親明派), 친청파(親淸派), 친노파(親露派) 등 파당을 지어 한번도 제대로 단결해보지 못한 것이 한국 역사의 특징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여섯째, 그들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동화(同化)’라는 이름으로 한국 민족 말살정책을 실시해서 한국 민족을 영구히 소멸시켜 일본 민족내의 천민층으로 편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보조를 맞추어, 한국 민족은 원래 일본 민족과 조상이 동일했다고 주장하면서, 왕검(王儉) 단군(檀君)이 소잔오존(素盞嗚尊)의 아우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한국 민족이 일본 민족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형태의 날조된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하였다.
일곱째, 그들은 한국 역사는 장기간 정체성(停滯性)이 지배하여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과 원동력을 결여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는 일본의 고대 말이나 10세기 후지와라[藤原] 시대에 해당한다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이 점은 장을 바꾸어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여덟째,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 역사를 지배한 이러한 특징들이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과 일상생활에 침전하여 민족적 성격으로 고착되어서 한국 민족은 사대성·당파성·모방성 등 열악한 민족성을 갖게 되었다고 날조하고 왜곡하여 주장하였다.
일제 어용학자들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한국 역사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왜곡하고 날조한 것들이었다.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의 창조적인 면, 자주 독립, 강성했던 면, 자랑스러운 일들, 승리한 면, 단결했던 일들을 모두 부정하고 한국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철저히 왜곡한 것은 한편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여 정당화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한국 민족의 독립사상을 근원부터 소멸시켜 버리려고 획책한 것이었다.
일제 어용학자들의 이런 주장들은 너무 터무니없는 왜곡과 날조이므로 여기서 낱낱이 비판하는 것보다 결론에서 모아서 일괄하여 비판하기로 한다.
일본의 한국사회 정체성론(韓國社會停滯性論)과 그 비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정립된 이론으로서 둘째로 주목해야 할 것이 ‘한국사회 정체성론’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하여 수탈적 통치를 하게 되자, 한국사회는 각 부문에서 정체되고 정체성(停滯性)이 지배하는 사회여서 내재적으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발전하고 근대화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일본이 ‘진출’하여 한국사회를 진보·발전시키고 근대화시켜 주어야 할 사회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한국사회 정체성론’이라는 것을 정립하여 선전하였다.
‘한국사회 정체성론(韓國社會停滯性論)’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여 퍼뜨린 대표적 인물은 일본의 경제사학자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였다. 그는 일본 경용의숙(慶庸義塾) 대학, 후에는 동경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교수로 재직하면서 러·일전쟁 직전에 일제(日帝)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료의 수집·조사차 1902년 여름 한국을 탐방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이때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1904년「한국의 경제조직(經濟組織)과 경제단위(經濟單位)」라는 논문을 학술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였다.
후쿠다는 그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증명할 자료로서 1902년 그가 탐방했을 때 한국 사회의 상태를 ① 한국사회에는 토지사유가 없고 토지 공유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② 교통의 발달이 저급하고 ③ 전국을 유통하는 화폐의 보급을 볼 수 없으며 ④ 촌락은 씨족(氏族)적 통제하에 있어서 상공업의 사회적 분화를 볼 수 없고 ⑤ 독립된 상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02년 당시의 한국사회는 ① 토지 사유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였으며 ② 교통이 전국적으로 소통되어 있었고 ③ 1678년 상평통보(常平通寶) 주전 유통 이후 화폐가 전국에 유통 보급되어 화폐경제(貨幣經濟)의 단계에 있었으며 ④ 상업과 수공업은 촌락농업으로부터 분화되어 있었고 ⑤ 독립된 상인들도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사실이 이러했는데도 후쿠다는 그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정립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사실을 처음부터 완전히 왜곡한 것이었다.
후쿠다는 그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세우는 이론적 무기로서 독일 유학 때 자신의 스승이었던 뷰허(Karl Bucher)의 경제발전 단계설(經濟發展段階說)을 원용하였다. 뷰허는 1893년에 발표한『국민경제의 성립(Die Entstebung Der Volkswirtscbaft)』에서 경제가 ⓐ 가내경제(家內經濟) ⓑ 도시경제(都市經濟) ⓒ 국민경제(國民經濟)의 3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각 단계의 경제에 대한 내용 설명에서 가내경제를 고대인의 경제생활 양식으로, 도시경제를 중세인의 경제생활 양식으로, 그리고 국민경제를 근대인의 경제생활 양식으로 설명하였다. 후쿠다는 뷰허의 ‘경제발전 3단계설’을 빌려다가, 1902년 당시의 한국 경제는 가내경제의 단계에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어서 후쿠다는 1902년 당시의 한국사회의 국가경제 단계는 일본 역사에 대비하면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에 해당한다고 비정하였다. 일본의 후지와라 시대는 한국 역사의 고려 초기에 해당하니 한국 사회는 일본 사회에 비하여 약 1천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것이 된다.
후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본에 비하여 1천년이나 뒤떨어진 후지와라 시대식 한국사회는 자급자족(自給自足)적 촌락경제로 정체되어 있어서 아무리 시간을 주어 이것을 계속한들 스스로 근대국가의 국민경제를 성립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였다. 후쿠다는 근대국가와 국민경제 성립의 연원은 봉건제도와 전제적 경찰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제멋대로 설정하면서 일본이 근대국가와 국민경제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봉건주의(封建主義) 시대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경찰국가(國家警察) 시대를 거치면서 수련 교육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인데, 한국에는 가마쿠라 막부와 같은 봉건주의 시대도 없었고 도쿠가와 막부와 같은 경찰국가 시대도 없었으니 정체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대국가와 국민경제를 성립시킬 능력을 근본적으로 결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주장이고 거짓에 넘친 유사 이론이었다.
조선왕조 후기 이미 17, 18세기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나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상업이 전국을 상권으로 만들어가면서 활발히 발전하고 수공업 부문에서도 매뉴팩처적 경영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화폐 유통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져 발전하고 있었다. 농업 부문에서도 봉건적 지주제도에 대한 항조(抗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자기의 소작지를 자작지로 유도하려는 도지권(睹地權)이 성장하였고 이앙법(移秧法)과 같은 새로운 농업 기술이 도입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봉건사회의 골간이 되는 사회신분제도는 일본보다도 더 현저히 이완되고 해체되어 근대사회를 뚜렷하게 지향하고 있었다. 학문과 사상 부문에서도 조선 후기인 17, 18세기부터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여 모든 부문에서 중세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근대사회를 지향한 정책 방안들을 제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50~60년대에 이르면 이러한 근대를 향한 사회 변동들이 속출하였다. 사상과 학문에서도 근대적 사상으로서의 개화사상과 동학사상이 형성되어 우리는 이 시기를 ‘근대의 시작’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으며, 1874년 무렵에는 근대를 추진하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초기 개화파의 형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 개항이 강박되자 아직 충분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뒤이어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개방체제로 들어간 것이었다.
개항 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초기 개화파 집단은 근대 행정 기구로서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0년), 병기(兵器) 제조 학습 유학생 사절단인 영선사(領選使) 파견(1881년), 일본 국정 시찰단인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1881년), 신식 육군[別技軍] 창설(1881년), 대외적 균세정책 실시(1882년), 해방책(海防策) 수립(1882년), 해관(海關) 설치(1883년),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와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 설립(1883년),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1883년), 치도국(治道局) 설치와 서울 시내의 도로 확장 정리(1883년), 서울 시내의 근대 경찰제도 개시(1883년), 복식(服飾)제도의 개혁(1883년), 해외 유학생 파견(1882~84년), 근대 농업 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설치(1884년), 26개 근대적 상공업 기업체 설립(1880~84년) 등을 실행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청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진주하여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자주근대화 정책을 방해하자, 초기 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대대적 개혁정책을 촉구하였다. 갑신정변 때의 신정부가 발표한 혁신 정강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으로 나라의 전면적 자주근대화 정책을 반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이용하려고 이 정변에 협조·참가한 일본인들은 정작 정변이 성공하여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이 강력한 근대국가로 성장하는 것은 일본의 경쟁 국가를 만드는 데 협조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변 도중에 정변에 협조·참가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휘하의 일본 공사관 경비 군대를 갑자키 철수시켜 청군(淸軍)의 공격 앞에서 갑신정변 세력이 붕괴되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1894년에는 조선 왕조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구체제(舊體制)를 타도하려고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일으켜 황룡촌전투(黃龍村戰鬪)에서 승리하고 전주성(全州城)을 함락시키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은 조선 조정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군대를 파견해 한반도에 상륙시켜 타국의 영토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도발하고 내정(內政)에 간섭하는 불법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사실상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한 후 한반도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적으로 두번째의 무장봉기(武裝蜂起)를 일으켰을 때, 일본군은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전봉준(全琫準)·손병희(孫秉熙) 등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항쟁에 참여한 무려 30만명의 농민을 학살하였다. 또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행하던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통하여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운동을 단행하자 일본 정부는 이에 내정을 간섭하여 갑오경장의 실패에 결정적 요인을 제공하였다.
1896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창립되어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의회(議會) 설립을 주장하고, 종래의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독립협회의 회원들이 집권하면 일본의 한국 점령은 영구히 불가능하게 된다고 판단하고 고종(高宗) 군왕에게 뇌물을 바쳐가면서까지 무력(武力)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탄압하도록 권고 주장하고 영구 해산시킬 것을 공작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대의 국가 정치체제에 의한 근대적 국가와 근대적 사회 건설의 구체적 정책을 수립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한 맹렬한 정치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최초의 의회 설립법(상원 설립법)까지 제정 공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한국 사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1902년에 이르면 정부 조직과 기구는 근대화되며 다수의 근대적 학교들과 수십개의 근대적 상공업 기업체와 3개의 증기선 운수 회사와 10여개의 근대적 신문들과 다수의 근대적 잡지들과 서양식 병원들과 철도와 전기와 수개의 전국적인 은행들을 설립하여 근대적 사회·근대적 국가를 향해서 진보 발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무력침략(武力侵略)을 자행하여 한국을 강점하고 식민지로 삼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자력으로 훌륭한 근대적 국가와 근대적 사회를 수립하여 크게 발전할 수 있었음이 1850년~1902년의 역사적 사실로써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도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는 1902년 당시의 한국 사회가 내재적 발전 능력을 완전히 결여한 정체성(停滯性)이 지배하는 사회로서 10세기의 일본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에 해당하는 정체된 사회라고 학문의 탈을 쓰고 중상모략(中傷謀略)을 자행한 것이었다.
후쿠다가 이러한 터무니없는 ‘한국사회 정체성론(韓國社會停滯性論)’을 주장한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문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억지 주장을 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는 한국이 1902년경에도 10세기 일본 후지와라 시대 단계의 정체에 빠져서 스스로의 내재적 힘으로는 이를 벗어나 발전할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하였으니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여 식민지 지배를 담당해서 정체에서 벗어나 발전시키고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고취하고 정당화하며 옹호하기 위해서 한국이 일본에 비해 1천년이나 낙후한 10세기 후지와라 시대 단계의 정체(停滯)에 빠져 있다고 거짓 학설을 정립한 것이었다.
후쿠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은 터무니없는 거짓 학설이었는데도 그 영향은 매우 컸다. 후쿠다가 일찍이 독일에 유학하여 유명한 뷰허(Karl Bucher) 문하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일본 일급 대학의 저명한 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것이 한국 침략을 추진하는 일본 제국주의 당국자들과 어용학자들의 정서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로서는 다보하시[田保橋潔]가 그의 방대한 저서인『근대 일선관계(日鮮關係)의 연구』에서 개항기 조선에는 세 줄기의 세력이 있었는데 유생세력은 복고적이어서 자주적으로 근대국가를 설립할 능력이 없었고, 동학은 샤머니즘에 근거를 둔 비류(匪類)들이어서 근대화를 달성할 능력이 없었으며, 오직 개화파 세력만은 주목할 만한데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이 실패했으므로 조선근대사는 독립을 지킬 수 있는 내재적 자주근대화· 근대국가 건설 능력의 결여로 서양열강의 식민지가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을 일본이 선점(先占)하게 된 것이라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였다.
심지어 일본의 어용사학자 키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직후인 1920년 한국을 여행한 후 발표한 어느 여행기(旅行記)를 통해 당시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 중 일부는 일본의 평안조시대(平安朝時代)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이라고 후쿠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은근히 지지 찬양하였다. 후쿠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이 일본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의 공공의 지지를 받던 궤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사학 부문에서는 가와다[河合弘民]·구로다[黑田巖] 등이 후쿠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추종한 데 이어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교수 사카다[四方博]가「조선에 있어서 근대자본주의의 성립」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약간 수정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개항 이전까지의 조선 사회는 정체되어 있어서 내재적 힘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혈맥을 받아서 근대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시작하여 결국 일제의 통치하에서 근대화가 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가리켜 도리어 일본 자본주의가 정체된 한국사회에 혈맥을 대어준 수혈(輸血)이라고 함으로써 ‘침략’을 ‘수혈의 은혜’라고 강변하여 정당화하고 옹호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들도 한국사회 정체성론에 가담하였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모리야[三谷克己]는 그의『동양적 생활권』이라는 저서에서 토지국유론(또는 토지공유론), 공동체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등을 내세우면서 조선 왕조 말기까지의 사회경제는 봉건사회조차 성립하지 못하고 원시사회 직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토지국유제도가 지배하는 단계의 정체된 사회였다고 주장하였다.
1945년 8·15해방 후에도 경제사 부문의 일부에서는 여전히 한국사회 정체성론(韓國社會停滯性論)을 고수하였다. 예컨대 사카다는「구래(舊來)의 조선사회(朝鮮社會)의 역사적 성격(性格)에 관하여」라는 장편의 논문에서 조선 왕조 5백년의 사회는 정체된 사회였다고 주장하고 그 원인으로서 자본축적의 결여, 당쟁에 의한 중앙 정국의 동요와 지방 관리의 평민 착취, 유교 정치인들의 완고한 수구사상 등을 주요인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자기의 ‘정체성’ 개념은 극히 진보가 지완하거나 보통 건전한 사회라면 응당 나타날 것으로 예기되는 그러한 발전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정체성이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후투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의 통설에 동의한다고 기술하였다.
해방 후의 한국 역사 연구는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상품경제 유통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발전하고 있었으며, 개항 후 1910년까지 열정적으로 근대적 국가와 근대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맹렬하게 운동했는가를 많이 밝혀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들은 일본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의 한국사회 정체성론이 얼마나 허구에 찬 거짓말이며 황당무계한 억설(臆說)인가를 잘 증명해주었다.
한국사회는 정체되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진보·발전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무력(武力)으로 침략하지만 않았더라면 한국인들은 근대적 국가와 근대적 사회를 내재적인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할 수 있도록 발전하고 있었고 그러한 민족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이러한 한국 민족과 한국 사회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식민지로 병탄하는 만행을 자행하고서는 엉뚱하게 한국사회 정체성론을 조작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려고 획책했던 것이다.
일본 어용학자들의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과 그 비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한 후, 일제(日帝)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정책과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에 대하여 사회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는 달리 한국 민족을 지구상에서 영구히 소멸시켜 버리려는 ‘한국 민족 말살정책(韓國民族抹殺政策)’을 강행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정책은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들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면서 그것을 감출 수 없게 되자 이를 ‘동화정책(同化政策)’이라고 기만적으로 표현하였다. 다른 민족을 자의로 동화하려고 강제(强制)하는 것 그 자체도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이른바 ‘동화(同化)’는 한국 민족을 일본 민족과 동등하게 ‘동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을 영구히 소멸시켜 일본의 ‘예속 천민층(隸屬賤民層)’으로 개편하겠다는 내용의 ‘동화정책’이었다. 이 사실은 모든 측면에서 명백하게 증명된다. 한국인은 ‘천박한 조센징[朝鮮人]’으로 분류되어 모든 공식 활동에서 천민(賤民)으로 차별받았으며, 봉급과 임금에서도 공식적으로 천민의 차별을 받았다. 예컨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한국인 회사원이나 노동자는 동일한 직장에서 일본인과 똑같은 양과 질의 작업을 하고서도 ‘조센징[朝鮮人]’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제에 의하여 천민으로 차별되어 일본인 임금의 약 50%밖에 받지 못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동화(同化)’라는 이름으로 한국 민족을 지구상에서 영구히 소멸시켜, 그들에게 온갖 천대를 받으며 헐값으로 노예처럼 일하는 일본의 ‘예속 천민층’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일제가 강행한 대표적인 ‘한국 민족 말살정책’은 ① 한국어 사용 금지, ② 민족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 ③ 한국의 성명(姓名)을 없애기 위한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 ④ 민족의식에 대한 말살정책, ⑤ 일본어 사용 강제, ⑥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 작업, ⑦ 일본의 텐노[天皇]에 대한 숭배 교육 ⑧ 황국신민화(皇民臣民化) 서약제도(誓約制度) ⑨ 일본 역사에 대한 교육 실시 등이었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정책 가운데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의 요점은 한국을 ⓐ 일본 공업화를 위한 식량 공급지로 삼고, ⓑ 일본의 공업 발전에 소요되는 원료 공급지로 삼고, ⓒ 일본의 공업 제품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 판매 시장으로 만들며, ⓓ 일본의 자본 수출에 의한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지로 활용하면서, ⓔ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하고, ⓕ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국 정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식민지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행하여 실로 막대한 경제적 착취를 실현해서 본국으로 실어갔으며, 착취 물자와 일본의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약간의 철도를 놓거나 항구 시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일제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며 저항 의사를 가진 한국인들에게 잔혹한 탄압을 가하여 실로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와 일반 한국인들이 학살되고, 체포·투옥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이 받은 고통과 학대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의하여 한국이 근대적인 발전을 저지당하고 저해당한 것은 여기서 일일이 들 수 없을 만큼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제의 한국 강점·식민지 지배 시기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당국자들과 그 어용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인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근대화’시켜주고 자본주의 생성과 경제개발이라는 ‘은혜’를 베풀어 준 정책이라고 터무니없는 궤변(詭辯)과 기만선전(欺瞞宣傳)을 자행해온 데에 있다. 이 짧은 지면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 전부를 낱낱이 다룰 수는 없으므로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서 일제가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보기로 한다.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10년~18년에 걸쳐 토지 약탈과 식민지 체제 수립을 위해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는 이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 농경지 등 27만 2천 76정보(町步) ⓑ 임야 9백 55만 7천 856정보 ⓒ 기타 국유지 137만 7천 211정보 ⓓ 합계 1천 120만 6천 873정보를 일제의 식민지 지배 기관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소유지로 만들어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 한국 국토 총면적의 50.4%에 달하는 천문학적 숫자의 방대한 규모의 토지 약탈이었다. 일제가 약탈한 이 토지에는 종래의 관유지(官有地)·공유지(公有地) 뿐만 아니라 조선 농민들의 사유 농지 9만 6천 700정보와 사유 임야 약 377만 5천 622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일제의 무력(武力)에 의해 무상으로 약탈당해서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즉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전혀 자본 비용의 지출 없이 식민지 강점의 무력과 권력에 의거하여 무상으로 한국 전국토의 약 50.4%를 직접 약탈하여 소유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약탈한 토지 중에서 전답 13만 7천 224정보를 30만 7천 800호의 조선 농민들에게 소작시켜 국내 최대 지주가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이 토지의 소작료율도 종래 조선 왕조 관유지의 소작료율인 총 생산량의 25~33%에서 총 생산량의 50~60%로 대폭 인상하여 수취함으로써 한국 소작농에 대한 착취를 대폭 강화하였다.
일제(日帝)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또한 종래 조선 농민들의 토지에 관련된 중요한 권리들인 경작권(耕作權)·도지권(賭地權)·개간권(開墾權)·입회권(入會權) 등을 식민지 통치 무력으로 부정하여 소멸시키고 조선 농민들을 완전히 무권리한 상태로 떨어뜨렸다. 조선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를 약탈당하고 각종 권리들마저 빼앗겼으며, 토지조사 결과 성행한 일본 자본의 토지점유와 상업·고리대 자본의 지배로 더욱 몰락하여 자작농층과 자소작농층이 소작농층으로 전락하였다. 여기에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소작경쟁이 격화되고 소작료율이 대폭 인상됨으로써 소작농층도 더욱 몰락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유민(流民)으로 전락해서 도시나 만주 등지로 밀려 나가게 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농민들에게 참으로 극심한 피해와 손실과 타격을 준 것이었다.
반면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이 그 일부가 되어 있는 ‘지주’의 권리를 대폭 강화했으며, 반봉건주의(半封建主義)적 기생지주제도를 엄호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의 주요 목표 하나가 일본 자본의 토지 약탈과 토지 점유를 지원하기 위한 편의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지주 권리의 강화, 조선총독부 소유지를 일본 이민에게의 불하, 한국 소작농의 소작지에 부착된 권리들의 박탈, 토지등기제도의 도입, 일본 이민의 토지 구입에 대한 대부 등 여러가지 편의한 제도의 설정으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일본 자본의 한국 토지 점유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과세 대상 한국인 농경지 면적을 약 80.7% 증가시켜 그들의 총독부 지세 수입 증가의 원천을 확보하고 그 후의 일제의 조세 수탈 강화의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약탈적 식민지 정책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조선 농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일제는 조선 농민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토지조사반에 무장한 헌병경찰관을 반드시 포함시켜 편성하고, 일반 토지조사원도 군경(軍警)의 제복을 입혀 조선 농민들을 무력(武力)으로 위협하여 탄압하였다. 즉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의 무장조사단(武裝調査團)을 편성하여, 비유하면 한 손에는 측량기(測量器)를, 다른 한 손에는 총기(銃器)를 들고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의 관리들은 이러한 내용의 토지약탈 정책을 벌여 놓고 오히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의 토지제도를 ‘근대화’시켜 주었다고 거짓말로 선전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총무과장으로서 ‘토지조사사업’의 실무 집행 책임자였던 와다 이치로[和田一郞]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업적이라고 하여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들었다.
첫째, 와다에 의하면 조선 왕조 말기까지의 한국의 토지제도는 토지공유제(土地共有制)가 지배적이었고 토지사유권(土地私有權)과 토지사유제도(土地私有制度)는 확립되지 않았는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비로소 토지공유제도를 폐지하고 토지사유권과 토지사유제도라는 토지제도의 ‘근대화’를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와다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조선 왕조의 양전(量田)사업을 계승하여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내부의 요청에 응해서 완성한 대사업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와다의 두 가지 주장은 물론 모두가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토지사유권과 토지사유제도는 과전법(科田法) 붕괴 후 15세기에 이미 확립되기 시작하여 개항 이전에 완전히 확립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고문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산적한 토지매매문기(土地賣買文記)가 잘 증명해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이미 수백년 전 조선 왕조 시대에 확립되어 몇 차례 법인 받았던 토지사유권과 토지사유제도를 일본 양식으로 ‘재확인’하고 ‘재법인’한 것에 불과했으며, 도리어 그보다도 그들의 식민지정책상 무상의 토지약탈을 달성하는 것이 제일차적 목적이었다.
또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조선 왕조의 양전사업의 계승 완성으로서 내부의 요청에 즉응한 것이라는 주장도 거짓말이었다. 독립 국가로서의 조선 왕조나 대한제국의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은 조세(租稅) 체계 정비를 목적으로 한 단순한 ‘생산물’의 수취(收取) 체계 정비 사업으로서 당시의 국가 재정상의 필요와 내부적으로 결부된 것이었다. 그곳에는 ‘생산물’의 수취 체계 정비에는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으나 ‘생산수단인 토지’를 백성들로부터 약탈하려는 목적은 개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은 당시 한국 사회의 요청과는 완전히 유리되어 외부로부터 강요한 일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생산물’의 수취 체계 정비는 물론이고, 그보다도 ‘생산수단인 토지’의 무상약탈에 핵심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일제(日帝)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의 본질과 그 옹호론(擁護論)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8·15해방 이후 4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일제의 한국 식민지 수탈정책을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으로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최근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의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교수는「조선토지조사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와다의 토지 수탈 조사를 미화한 저서인「조선의 토지제도(土地制度)와 지세제도(地稅制度)에 대한 보고서」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를 요컨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조선에서는 결부제(結負制)의 존속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국가와 수조권(收租權)적 토지 지배가 강하게 존속하여 토지사유제도가 꾸준한 성장을 이루었는데도 다원적 소유가 형성되어 토지사유제도가 확립되지 못했었는데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조선에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지세제도를 확립시킨 것이야말로 사업의 제일의 역사적 의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결부제는 생산력 기준의 토지 파악 방법으로서 지세 징수에 편리한 제도로 인식되어 존속된 토지면적 파악 제도에 불과하지 결부제가 곧 국가 수조권 존속을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되거나 다원적 토지소유제도의 존재를 증명하고 토지사유제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토지사유제도는 15세기에 확립되기 시작하여 개항 이전에 이미 완전히 확립되어 있던 제도였다. 미야지마 교수는 토지의 장부 편성 방식을 한국식 양안(量案)에서 일본식 토지대장(土地臺帳)으로 바꾼 것을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확립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토지소유 ‘장부기재방식’의 일본화는 될지언정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그 자체가 확립된 증명 자료는 되지 않는다. 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토지사유제도라는 ‘근대화’를 확립시켜 주었다는 것을 억지로 증명하기 위하여 국가수조권(國家收租權)이 존속했으므로 조선 왕조 말기의 토지제도는 사유제(私有制)가 아니라고 억설(臆說)하고, 그래도 부족하게 보이니 토지 장부 기재 방식의 개편까지 억지로 동원한 것이다. 또한 근대적 지세제도는 한국 역사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이미 확립된 것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인 토지사유제도가 확립되고 따라서 토지소유제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식민지약탈(植民地掠奪) 옹호론(擁護論)이다.
둘째, 미야지마 교수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사업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내재적 발전에 즉하여 근대적 토지 변혁으로서의 성격이 기본에 있었다는 것, 이 점에 사업의 제2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앞서 와다 이치로[和田一郞]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미 비판했으니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미야지마는 실제로 ‘토지조사사업’이 조선 왕조의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승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그 주체가 일제의 조선총독부임을 가능한 한 쓰지 않아서 이 책을 외국인이 읽게 되면 이 ‘사업’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셋째, 미야지마는 ‘토지조사사업’이 조선 농민들에게 결코 부정적 결과와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종래 결부제에 이익을 보고 있던 재지유력 양반층, 중간 이득을 얻고 있던 향리층이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지위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토지 ‘약탈’을 자행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농민의 중요한 권리들을 소멸시킨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는 ‘토지조사사업’이 한국 전 국토의 50.4%를 무상으로 약탈했고 여기에는 한국인 농민의 사유 농지 9만 6천 7백 정보(町步)와 사유임야 337만 5천 662정보가 무상으로 약탈당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는데 왜 전혀 논급하지 않는 것인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목적과 본딜이 토지약탈(土地掠奪)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의로 한마디도 쓰지 않고 마치 농민들에게 긍정적 역할을 한 정책인 듯한 인상을 주려고 애쓴 것은 그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약탈 정책을 고의로 호도하고 옹호하려고 획책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야지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신진 학자들까지 과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침략·약탈 정책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서 근대화정책(近代化政策)이라고 미화하고 옹호하는 추세에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침탈정책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정계에서 표출되는 경우가 이른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妄言)’ 시리즈이다. 이미 일본 정부는 1953년 재3차 한·일회담 때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일본 측 수석대표가 회담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5항목의 망언을 한 바 있다.
첫째, 36년간의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인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둘째, 일본의 통치로 인해 한국 민족의 노예화(奴隸化)가 진행되었다고 말한 카이로 선언(the Cairo Declaration)은 연합국(GHQ)의 전시(戰時) 히스테리의 표현이다.
셋째, 일본의 구(舊) 재한(在韓) 일본인 재산을 미국 군정 법령 제33호에 의하여 처리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넷째,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 체결 전에 일본의 영토였던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다섯째, 연합국이 일본 국민들을 한국으로부터 송환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이 ‘구보타 망언’은 ⓐ 일제의 한국에 대한 36년간 식민통치가 한국에 유익한 은혜를 베풀어주었다고 주장한 점, ⓑ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를 인정하기 직전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the Potsdam Declaration)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하여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발언이라는 점, ⓒ 한국의 독립에 일본이 시비를 붙였다는 점 등에서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참으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고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인 망언이었다.
이에 한국 측은 즉각 일본 측 대표가 발언한 문제의 5항목의 성명을 철회할 것과 일본 측의 이 발언이 과오이었음을 언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타는 본인의 발언을 철회할 의사가 전혀 없고 본인의 발언이 과오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국 측의 요구를 거절하여 1953년 10월 21일 제3차 한·일회담은 결렬되었다.
일본 측은 적반하장으로 부총리, 외무상, 보안청장관 등이 회합하여 주일(駐日) 한국 대표부의 폐쇄 등 8항목에 걸치는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를 제안하였다. 이 조치는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측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관점과 한국관(韓國觀) 전체가 얼마나 극심하게 왜곡되고 전도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계에서 주기적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폄하하면서 한국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망언을 계속해오고 있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여기서 지면의 제약으로 두 가지 사례밖에 들지 못했으나 일본의 정치인·언론인·학자·교육자 등 사회 지도층에서는 모든 부분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정체와 낙후에 빠진 한국을 ‘근대화’시켜준 은혜를 준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가 한국의 자주적 발전과 근대화를 저지했음을 대체로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을 멸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자신을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온갖 궤변을 동원하여 옹호하고 정당화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각계 사회 지도층이 다시 한국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관찰되기도 한다.
맺음말
한국 민족은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을 건국한 이후 자주적 독립국가를 영위하면서 찬란한 독자적 민족문화를 창조·발전시키고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율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일본 민족이 고대국가를 수립한 역사보다 무려 약 2천년이나 더 앞선 장구한 것이다. 한국 민족은 유구한 역사 기간에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받아왔으나 그때마다 굳게 단결하여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외침(外侵)을 물리쳐서 1905년까지 민족의 자주독립과 발전을 계속해왔다. 일본 제국주의 한국침략 옹호론자(日本帝國主義韓國侵略擁護論者)들이 한국 사회의 타율성(他律性) 운운하는 것은 처음부터 황당무계한 거짓 주장인 것이다.
한국 민족은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18세기 말까지 그때 그때 독자적인 고도의 선진문명을 창조·발전시키면서 문명 생활을 영위해왔다. 한국 민족이 창조한 문명은 역사상 매우 선진적이어서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18세기까지 항상 일본보다 앞선 선진문명을 전수해주어 일본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한국 민족은 특히 5~6세기에 일본에게 매우 선진된 고대 문명을 전폭적으로 광범위하게 가르쳐주었으며 일본은 이를 받아서 최초의 고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 이후 한국은 일본보다 선진국가를 영위해왔으나 한국 민족은 장구한 선진의 시기에 일본에게 항상 평화적으로 자기의 선진문명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한 번도 일본을 침략한 적이 없었다. 한국 민족이 일본보다 후진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 문명의 수용·흡수 과정에서 뒤늦은 때부터 지난 1백여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 한국침략 옹호론자(日本帝國主義韓國侵略擁護論者)들이 한국 역사의 정체성(停滯性) 운운한 것은 처음부터 황당무계한 거짓 주장이다.
한국은 19세기 중엽 후반에 들어와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수용하여 근대적 부국강병(富國强兵) 체제를 수립하는 일에는 일본보다 한발 지각했으나 이때에도 한국 민족은 한발 뒤늦은 것을 극복하며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는 운동과 정책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등 외세의 침략과 저지가 없었으면 한국 민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부강한 근대국가와 근대사회를 확립하여 크게 발전할 수 있었음이 이러한 민족운동들에서 잘 증명되고 있다.그러나 일본은 한국보다 한발 앞서 근대적 부국강병 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은혜로운 이웃 나라를 침략하려고 한발 늦은 한국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 추진운동을 기회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방해하고 저지했으며, 결국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강점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한 후 한국 민족에 대한 식민지 지배 정책은 전적으로 일본의 국익과 발전을 위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고 착취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일본을 위한 식량·원료·노동력의 공급지로, 일본 상품의 독점적 판매 시장과 자본 수출 시장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여 수탈·착취함과 동시에 한국 민족의 민족적 성격을 말살해서 생물학적 목숨만 붙어 있는 식민지 노예로 만들고 일본의 천민층(賤民層)으로 편입시켜 한국 민족을 영구히 지구상에서 소멸시켜 버리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다가 한국 민족의 완강한 독립운동과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의 승리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 한국침략 옹호론자들이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비롯해서 각종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을 ‘근대화’시켜주고 한국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황당무계하고 몰염치한 적반하장의 조작된 거짓말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와 정반대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의 근대화를 저해하고 저지했으며, 한국 민족 말살정책과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자행하여 한국 민족을 탄압하고 학대하고 학살했음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한국 민족은 1945년 8·15해방과 함께 일제의 사슬을 끊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후에야, 비록 분단된 상태일지라도 일제 식민지 통치의 잔재를 대부분 청산·극복하면서 비로소 근대화를 추진하여 달성하고 민족적 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