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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World War II)
일본 제국이 석유가 없어서 벌인 중립이라는 잠에 빠져들어 있던 미국을 깨어나게 만들고 자신들을 스스로 멸망으로 이끈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중국 전선 및 영국-인도군이 주도한 버마-인도 전선,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나이 든 세대들은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태평양전쟁은 우호국 독일의 계획대로만 움직여줬다면 적어도 1942년 초까지 일어날리가 없었던 전쟁인데 미국이 참전을 안했으면 미국의 물자도 랜드리스로 일본을 제외한 추축국에게 전달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일본은 현재까지 인류가 일으킨 전쟁 중 가장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벌이게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다른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였으며 전후 미 해군과 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전쟁이다.
이쪽도 유럽쪽의 전선 못지 않게 엄청난 인명이 죽어나갔다. 일본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는 2천 5백만이 넘어가고 전사자는 연합군 4백만 이상, 물론 상당수가 중국군이다. 참고로 미군은 약 10만 정도. 일본군은 2백만 이상이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쟁인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들이 펼쳐진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 나아가 상륙전, 보급전 등 육/해/공을 아우르는 유기적인 대규모 합동작전의 경험은 전쟁 사상 엄청나게 큰 변화.
오늘날 미국과 일본의 SF 전쟁물에서 흔히 보이는, 탄막이 우주를 가득 메우고 수십~수백기 편대의 격렬한 도그파이트가 벌어지며 함선끼리 함대를 짜서 대단위로 포화를 주고받고 행성을 향해 상륙정이 비처럼 쏟아지는 이런 전쟁의 이미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주로 형성된 것이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일본군의 온갖 병크와 삽질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과 대한독립에 기여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서로 다른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적인 협력조차 안 되었다. 참고로 독일도 비슷했던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독일도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 미군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의 반목/대립은 정말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니...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구리바야시 중장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 하는 장면이 있다.
전쟁의 시작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태평양함대 기지 진주만을 전격 기습한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세를 타며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코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합리적/광신적인 자살돌격, 카미카제등의 정신나간 만행과 기행을 거듭한 결과 결국 막판에는 인류 최초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원자폭탄 실전투입 대상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은 이미 1937년 중일전쟁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양면전쟁을 스스로 일으키는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학이나 병법까지 찾아볼 것도 없이 2:1로 싸울 때 어떤 편이 유리한지만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도 유럽과 태평양에서 양면전선을 형성했고, 이기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더욱이 일본은 1939년에 일어난 노몬한 전투(이건 일본의 명칭이고 소련에서의 명칭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과의 전쟁은 최소 2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파악하게 된다. 본래 일본의 주적은 소련이었으나 노몬한 전투에서 개박살 난 후 러일전쟁이후 품어오던 북진정책을 거두게 된다. 거기서 눈을 돌려 남방을 노리게 되는데 딱 보니 소련보다는 방어도 느슨하니 쉽게 먹을 수 있는 땅덩어리였다. 자원도 풍부한게 아주 먹음직 스러운 고깃덩어리였다.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일본에게 석유와 철강을 수출하고 군수품을 판매하며 일본의 남방침략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중국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군수품 절반 이상을 영국 국적의 선박이 수송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1935년에 중립법을 통과시키며 교전중인 국가에 대해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기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경제 논리를 앞세워 법을 매우 좁게 해석 일본의 중국 침략을 묵인하고 대량의 무기를 판매했다
더 나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일본이 대중봉쇄에 참여를 요구하자 이를 승인하고 프랑스는 배트남의 비행장 이용을 승인하여 중국 폭격을 돕는 등 대놓고 일본을 지원했다. 여기서 남방을 점령한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서 일본은 무력으로 남방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라는 의문이 남는데 이는 독일의 승리에 숟가락을 올리자라는 우익적 사고가 담겨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영토를 공격함으로써 승전국가에 들어가기 위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일본과 영국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영국이 중국의 항전을 지원한다는 말이 일본 내에서 나돌며 반영감정이 솟아났다. 이를 시작으로 텐진에서 영국 조계를 포위한 채 통행하는 영국인을 일본 군인이 옷을 벗기며 수색함이 드러나자 영국 내에서도 반일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국은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는 상태에서 시시한 문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일본이 제안하는 모든 항목을 수락하며 중국에 대한 어떠한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고서 이는 일단락 되는듯 했다- 다만 이것은 단지 폭풍전야였으니.
영국내에서의 반일감정은 그래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미국이 영국을 동정하며 관심도 없던 아시아에 관심을 보이며 반일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일본도 똑같이 반영감정이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로인해 미국과 일본이 1911년 이래 유지해왔던 미일통상항해조약에 대해 1939년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에서 밝혀왔다. 그리고 국교조정회담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미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를 일본에서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고 1940년을 기해 미일통상항해조약은 해지된다.
그때쯔음 독일이 네덜란드를 공격 함락시키자 일본은 남방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령을 압박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90%의 물자 독점권을 요구했고 프랑스가 함락됨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압박하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1940년 일본은 일본 제5사단을 인도차이나에 진군시켰고 그 유명한 추축국 동맹인 삼국 추축 동맹을 체결한다. 일본은 과거 1937년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방공혐정을 맺었지만이는 소련을 겨냥한것이었다. 하지만 삼국 추축 동맹이 맺어진 시점에서 일본과 소련은 일소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으며 독일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 동맹의 겨냥점은 미국과 영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에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영국 역시 1만 파운드의 차관을 중국에 지원한다.
그리고 첫번째 교섭이 일어난다.
미국과의 협상자리에서 미국은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의 해체 등을 내걸었다. 그리고 일본은 협상자리에서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묵인할 것, 만주국의 승인, 경제 협력 강화,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할 것, 중국이 항전을 포기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 등 한마디로 일본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제안을 했다. 이에 미국은 만주국은 승인하되 중국에서의 철수와 동남아에 대한 침략을 중지하라는 타협안을 내놓지만 일본은 타협은 없다 라는 자세를 유지 Yes와 No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압박을 넣었다.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고 소위 말하는 ABCD포위망(America미국, Britain영국, China중국, Dutch네덜란드) 이 형성되어 석유금수와 철강의 일본 수출이 제한되게 된다.
당시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 해체 등을 내걸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독일의 상승세에 자극받아 아시아-태평양권을 홀랑 집어 삼키려던 일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은 변함없다. 못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이걸 씹고 만행을 벌이다가 처지가 안좋게 되니까 협상을 하자는데, 그 동안 만행으로 턴 재산과 권리는 다 가지고 간다는 작자가 과연 정상적인 자인지 생각해보자.
또한 본토 인구가 대부분인 미국과 달리 식민지 인구가 많은 일본은 동원력에서도 불리했다. 누군가는 '그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인구가 3배 차이났던 건 뭐임?'이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병력동원이 힘든 러시아에게는 국지전 수준이었고 당시 러시아 자체가 내전으로 치닫는 막장 상황이었으며, 자세히 뜯어보면 다른 서구열강들이 일본을 이용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대리전 성격을 지닌 게 러일전쟁이었으므로 논외다. 사실 러일전쟁은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러시아와 한판 붙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또라이 기질이 낳은 삽질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실제 경과도 이 시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당시의 미합중국과 일제는 애초에 양립하기 힘든 관계였다. 당장 1930년 당시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기본적으로 대공황의 탈출법을 군수산업 위주의 수요 창출에서 찾은 나라들이다. 식민지 쟁탈전 참가는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 오스트리아, 체코에 만족 못 하고 폴란드까지 치고 들어간 독일처럼, 일본도 만주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까지는 자원 확보를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국제적으로 그렇게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중일전쟁을 지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질서를 통제해 가기를 원했던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일제의 동아시아 석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던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는 국제정치학, 정치경제학의 통설이다.
히로히토가 말년에 토고 시게노리 당시 외상을 증오한다고 고백한 것도, 자신이 보기엔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이던 헐 노트를 토고 외상이 더 이상의 교섭은 불가능하다고 섣부르게 포기하여 일본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동맹은 삼국 중 한 나라가 공격을 받았을 때 다른 나라가 방어국을 도와 참전할 수 있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이 발발했다 치더라도 독일에는 따로 선전포고를 하는 등 별개로 취급해야 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대미선전포고를 때렸다는 거. 일부 극우는 "그때 독일이 아니라 미국과 손잡아야 했다. 그랬다면 일본이 승전국으로 지금까지도 그 땅을 유지하고 더 이득이 컸을 것이다."라는 주장도 하는데, 위에 열거한대로 당시 두 나라는 손 잡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어긋난 게 많았다.
일본은 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추축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개입으로 미국에 양면전쟁을 강요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확보한 일시적 해상력 우위를 이용하여 최대한 단기간에 미국에 압도적인 피해를 입혀 굴복시키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양면전쟁이고 뭐고 죄다 씹어버릴 정도로 미국의 국력과 잠재력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이 문제.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일본에선 미국과의 총력전을 구상하고 준비 과정과 예상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모아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하게 한 바 있다. 연구진들이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필패'였다. 연구진들은 일본의 공업 생산력과 자원, 특히 석유의 생산 및 수송 능력을 볼 때 도저히 미국을 총력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도조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란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 전에 한 전쟁도 어찌어찌 이겼잖아? 이번에도 될거야." 인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