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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구도심 답사
골목길 도시화석을 찾아서③ 관산동(중)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의 속성 흥미로워
80년대 랜드마크 허스맨션, 새서울아파트
공간을 알뜰히 활용했던 경제개발기 감성
사라져가는 업종과 미각, 여전히 남아있어
공릉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관산동 마을. 중앙의 저층빌라는 80년대 후반에, 오른쪽 신성아파트는 90년대 후반에, 왼쪽 천변길 빌라들은 2000년대 초반에, 중앙의 쌍둥이 고층건물은 2010년대 초반에 각각 건축됐다. 하나의 사진 속에 4개의 시층(時層, 시간의 지층)이 중첩된다.
[고양신문] 대개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과거에도 동일한 모습이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공간감각을 가지고 일상을 살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게, 한치라도 더 유용하게 바꾸려는 욕구의 흔적들이 바로 기자가 구도심 답사 연재에서 찾고자 하는 도시화석이다.
때문에 “도시화석이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믿는 기자의 관점은 과거의 감성이 오늘날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의 속성과 맥락 자체가 흥미롭다는 뜻에 가깝다.
2000년대 초 높고 든든한 공릉천 제방이 정비된 후 관산동은 장마철 침수 걱정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공릉천 제방 정비되며 수해 걱정 사라져
1990년대 중반부터 5~6년간 거의 매년 여름마다 경기북부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문산과 금촌 봉일천 등 파주시의 통일로 주변의 마을들이 막대한 침수피해를 입었다. 당시 통일로를 따라 피해지역을 몇 군데 둘러봤었는데, 연립주택 2층까지 물이 차서 시가지 골목마다 물에 젖은 가재도구들이 산더미를 이룬 참담한 풍경이 펼쳐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주만큼은 아니지만, 관산동 역시 1998년 여름에 공릉천변에 접한 안말이 꽤나 심각한 물난리를 겪었다. 당시만 해도 경기북부의 치수·배수시설(하천둑·우수관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던 시절이라, 하천과 접한 저지대 시가지들은 연례행사처럼 하수관 역류로 인한 침수를 걱정해야 했던 것.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공릉천 제방과 하수관로가 정비되고, 하류인 지영동에 하수처리장(벽제수질복원센터)이 신설되면서 비로소 안말 주민들이 장맛비에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다.
1985년에 지어진 허스맨션. 관산동 빌라촌의 효시로 손꼽힌다.
고양시 곳곳에 빌라 지은 ‘허스개발’
관산동 빌라촌의 효시가 된 건물은 바로 안말 복개천길 옆에 3층 높이 4개동 규모로 지어진 ‘허스맨션’이다. 1985년에 입주한 이 빌라는 허스(HURS)라는 이름부터가 특이한데, 건물을 지은 허스개발 허석 회장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를 고양에서 찾자면, 이씨 성을 가진 건축주에 의해 지어진 원당시장 앞 ‘리스쇼핑’을 들 수 있겠다.
허스개발은 80~90년대 고양시를 주름잡던 대표적인 중소규모 주택건설업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구도심 곳곳에 ‘허스’라는 이름의 아파트와 빌라들을 지었다. 이중 하나가 일산1동 한뫼초교 옆에 남아있는 허스맨션인데, 주변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어 조만간 모습을 감출지도 모르겠다.
능곡 토당동에 지어졌던 허스아파트 역시 몇해 전 주변이 재개발되며 사라졌다. 현재 대곡역롯데캐슬아파트가 신축된 곳이 토당동 허스아파트가 있었던 자리다. 하지만 바로 앞 큰길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랫동안 허스예식장으로 운영됐던 허스빌딩이 여전히 한 시절의 영화를 간직한 도시화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성기 시절 허석 회장은 중소주택건설업체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협회를 결성하기도 했고, 고양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여러 분야에서 족적을 남겼다. 80~90년대 고양시의 발전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계실 허석 회장. 고령의 나이지만 여전히 정정하시다는 허 회장님을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 인터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영어로 이름을 표기한 허스맨션과 한글로 이름을 표기한 허스아파트. 동 표시는 반대로 해서 나름 변화를 줬다.
빌라는 영어로, 아파트는 한글로
관산동에는 ‘허스’가 2개나 있다. 1985년 지어진 안말 허스맨션의 성공에 힘입어 1987년에는 웃말에 5층 4개동 규모의 허스아파트를 준공했다. 40년 가까이 된, 시멘트벽에 페인트칠 마감을 한 건물치고는 둘 다 외양이 단정하면서도 멋진 도시화석이다. 허스맨션은 흰색 벽에 빨간 지붕을 얹고 있고, 허스아파트는 처마곡선이 상쾌하게 올라간 기와지붕과 측면 벽의 화사한 동양화풍 벽화가 인상적이다.
재밌는 점은 아파트명 표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허스맨션은 버거킹 마크를 연상시키는 영어 로고로 이름을 쓴 후 동을 ‘가나다라’로 표기했고, 허스아파트는 거꾸로 한글로 ‘허스’라고 쓰고 동을 ‘ABCD’로 적었다. 나름 미적 변화와 조화를 추구한 시도가 재밌다.
허스아파트 한쪽의 텃밭과 놀이터. 오래 전 지은 아파트 치고는 구조가 아기자기하다.
허스맨션에는 울타리 주변으로 목련나무와 벚나무 등이 건물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또한 허스아파트에도 작은 규모지만 사무실과 주민회의실 건물이 있고, 뒤편에는 놀이터와 텃밭도 조성돼 있다. 텃밭을 가꾸던 노인들이 가끔씩 허리를 펴고 꼬마들이 뛰노는 놀이터를 건너다보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여유 공간 하나 없이 기능 위주로만 지어진 다른 빌라들에 비해 여러모로 정감이 가는 건물들이다.
새서울아파트 정문의 고풍스러운 돌간판.
새서울아파트, 우리도 서울생활권!
이번에는 또 하나의 원조인, 1987년에 준공한 새서울아파트를 살펴보자. ‘새서울’이라는 이름에서는 ‘우리도 서울 생활권에서 살아간다’는 걸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를 읽을 수 있다. 서울 불광동 터미널로 직통 연결되는 대중교통망, 88올림픽을 앞두고 통일로 주변의 환경이 쾌적하게 정비됐던 시절의 자부심이 바탕이 된 이름이다.
이처럼 ‘서울’을 끌어들이는 건물이나 상호명은 경기도의 경계지역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광명이나 안양 등 남쪽에서는 ‘남서울’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는 반면, 새서울아파트에서 보듯 북쪽에서 ‘북서울’이라는 표현은 선호되지 않는 듯하다.
새서울아파트는 높이가 5층, 동수는 5개동에 불과하지만, 세대수는 무려 400세대다. 한 동마다 12개에서 18개에 이르는 라인이 횡으로 길게 펼쳐진, 인상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아파트로서는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통일로변 버스정류장의 이름이 ‘새서울아파트’로 표기된 것만 봐도 마을 랜드마크로서의 위상이 방증된다.
3동 다음에 5동으로 이어지는 새서울아파트. 4동이 실종됐다.
3동 다음 5동... 4동은 어디갔지?
측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아파트명과 동수가 적혀있는데, 재밌는 점은 3동에서 5동으로 건너뛴다는 사실이다. 4동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층수나 동수를 적을 때 4라는 숫자를 기피했던(또는 F라고 표기했던) 과거의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된 재미난 도시화석이다.
예쁜 벽화가 그려진 뒷담장에도 눈에 띄는 모습이 하나 발견된다. 두 세대마다 한 줄씩 통로가 꼭대기층부터 바닥까지를 수직으로 관통하고 있고, 맨 아래쪽에는 나지막한 철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어떤 용도로 쓰였던 통로일까? 정답은 연탄재를 버리는 배출구다. 5층에서 연탄재를 버리면 맨 아래층으로 쿵, 하고 떨어졌을 장면이 상상된다. 신축 당시 호별 난방이 연탄보일러로 설계됐다는 걸 보여주는 도시화석이다.
새서울아파트 담벼락의 연탄재 배출구. 지금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는다.
풀어야 할 과제 많은 재건축
구도심 어디나 그렇듯 관산동에서도 일부 주민들은 조합을 결성해 재건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새서울아파트 상가 한쪽에 ‘새서울아파트 재건축 사무소’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하지만 주민의 합의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일부 주민들은 새서울아파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몇몇 빌라들을 하나로 묶어 규모가 큰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하지만 토지나 건물의 현황이 비슷해야 합의가 용이한데, 준공 시기가 서로 다른 빌라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이 재건축 추진의 부담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웃말에서는 새서울아파트를 중심으로 재건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촌향도의 흔적, 호남향우회
앞선 기사에서 70년대 개발시기 이촌향도 인구들이 유입되며 관산동의 인구가 증가했다는 점을 짚은 바 있다. 그렇다면 관산동에 모여든 출향인들은 어느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을까. 이에 대한 답을 주는 도시화석이 바로 ‘호남향우회’ 간판이다. 관산동 안말에서 호남향우회라는 글씨는 두 곳에서 발견되는데, 마을 안쪽 신문지국 건물 2층을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통일로변 건물로 이전을 했다고 한다.
호남향우회의 이전 사무실과 현 사무실의 간판.
이전 간판에는 ‘(재)고양시 벽제 관산 호남향우회’라고 표기됐다. 고양-벽제-관산-호남이라는, 시대와 단위가 서로 다른 지역명이 시공간을 아우르며 하나의 명칭 속에서 어우러진다. 이처럼 지역 정체성의 다층적 혼합이 산업화시기 출향인들의 보편적 특징이다.
새로 이전한 간판에는 ‘재. 고양시 호남향우회 벽제관산지회’라고 표기했다. 지회라는 이름이 새로 붙은 걸 보니, 향우회 안에서 조직의 정비가 이뤄진 것 같다.
관산동 인근에 넓게 펼쳐진 농경지. 지방에서 올라온 출향인 중 일부는 수도권 근교 농민으로 터를 잡았다.
흥미롭게도 호남지역에서 상경한 출향1세대들 중 일부는 관산동, 두포동, 내유동 등 인근 공릉천변 농경지에서 대도시 근교농업으로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방 농부에서 수도권 농부로 변신하는 ‘이촌향도’의 사례도 적잖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삼성빌라 골목의 관산동 파사드
구도심 골목길을 걷다 보면 수직이나 수평 공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쓰고자 하는 욕구들이 드러나는 풍경들을 만나곤 한다. 앞서 허스맨션을 이야기하며 골목의 나무들을 언급했지만, 사실 초기의 몇몇 빌라들을 제외하면 관산동 빌라들은 대부분 별도의 정원이나 녹지대, 놀이터 등을 조성하지 않고, 가용 면적을 온전히 건물을 짓는 데 활용한 것을 보게 된다.
기자가 '관산동 파사드'라는 별명을 붙여준 삼성빌라 골목의 풍경.
대표적으로 무려 24개의 3층 적벽돌 빌라건물이 골목길 양쪽으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삼성주택을 꼽을 수 있다. 삼성주택은 공간을 최대한 사용하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일절 배제한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몇 개 동은 용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동과 달리 건물의 방향을 90도 틀어버린 모습도 발견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란히 늘어선 건물들이 마치 하나의 벽면인 것처럼 길게 이어져 보이는 인상적인 경관이 연출된다. 가히 ‘관산동 파사드’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공간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측면을 톱니모양으로 건축한 빌라들.
건축도 간판도 텃밭도 ‘악착같이’
그런가 하면 사선으로 잘린 부지를 활용하기 위해 건물의 모서리를 톱니모양으로 설계한 빌라들도 눈에 들어온다. 또한 아주 작은 자투리땅이라도 남게 되면 창고와 같은 가건물을 짓거나, 텃밭을 일구며 쓰임새를 찾기도 한다. 기자가 3월 말에 답사를 갔을 때 한 어르신이 하천변 군사시설(시멘트초소) 주변에 텃밭을 조성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5월 초에 다시 가보니 어느새 감자와 쪽파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한치의 노는 땅도 용납하지 않는 어르신들의 텃밭개척정신에 다시 한번 경탄했다.
천변 군사시설 옆 노는 땅에 감자밭을 뚝딱 일구신 동네 어르신.
왼쪽사진은 좁은 건물 모서리에 간판을 무려 4개나 달아놓은 영다방. 가만히 보면 맨 위 간판은 전화번호 띄어쓰기 오타가 났고, 그걸 바로잡은 게 두번째 주황색 간판이고, 맨 아래 빨간색 간판에서는 전화번호 국번이 62국에서 962국으로 바뀌었다. 오른쪽은 빈공간을 전혀 남기지 않고 글씨로 채운 식당의 전면.
일부 가게의 간판에서도 유사한 억척스러움을 감지할 수 있는데, 작은 건물 모서리에 무려 4개의 간판을 수직으로 내건 영다방, 벽면과 유리와 난간까지 글씨로 가득 채운 남도아구찜 등이 그런 경우다.
이렇듯 공간과 시선을 과도하게 점유하려는 경향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자의 눈에는 무척 흥미롭게 보인다. 구도심이기에 여전히 용인되는, 경제개발 시기의 보편적 정서와 감성이 투영된 도시화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가정배달경제의 대표주자였던 우유대리점과 신문보급소. 지금은 사라져가는 업종이다.
예스러운 감성과 미각의 보물창고
구도심에는 신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업종의 매장과 간판들을 만날 수 있다. 신문보급소와 우유대리점도 그중 하나다. 둘 다 산업화시기 가정배달경제의 대표주자였던 업종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냉장시스템이 갖춰진 가게가 많지 않던 시절 신선한 우유는 배달해 먹어야 했고,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에는 종이신문을 구독해야 풍부한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경제환경의 변화와 함께 이제는 사라져가는 업종의 도시화석들이 관산동 골목길에는 아직 남아있다.
벽제철공소에서는 샷시가 아닌 '샷슈'를 만들고, 종합수리센타에서는 도어록이 아닌 '도화록'을 판매한다.
거리의 간판이나 글씨에서 맞춤법이 예스러운 도시화석 표현들을 찾아봐도 재밌다. 선일수퍼는 한동안 용어경쟁을 벌였던 ‘수퍼’와 ‘슈퍼’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진노래방은 디지털 노래방이 아니라 ‘디지탈’ 노래방이고, 벽제철공소에서는 알미늄으로 새시도 샷시도 아닌 ‘샷슈’를 만든다. 압권은 종합수리센터 취급품목 표기에서 발견한 ‘도화록’이다. 외래어 도어록을 한자어로 음차한 느낌인데, 굳이 한자로 쓴다면 ‘盜禍簏(도둑이 화를 당하는 상자)’라고 쓰면 뜻도 통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신도시 식당가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메뉴들이 적혀있는 식당들.
그런가하면 업력 지긋해 보이는 전주식당 간판에는 ‘족(돈)탕, 싱싱한 간천엽, 추억의 토란탕’이, 무대포주막촌 유리창에는 ‘간재미찜, 홍어전, 고갈비’가 적혀있다. 신도시 식당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메뉴들을 읽다 보니, 구도심 골목에 숨은 미각의 도시화석들도 하나씩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재밌는 일도, 하고픈 일도 점점 많아진다. 관산동에서 만난 도시화석 이야기는 한주 더 이어진다.
※ 도움말 엄호용 (관산동 삼화인테리어 대표)
※ 참고도서 『갈등 도시』 『대서울의 길』 (김시덕,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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