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주일 큐티
에스라 2:36 ~ 58
모든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
관찰 :
1)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소개 => 36 ~ 58절
- 36절.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 37절.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 38절.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 39절.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 40절.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 41절.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 42절.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 43절.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 44절.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 45절.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 46절.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 47절.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 48절.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 49절.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 50절.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 51절.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 52절.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 53절.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 54절.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 55절.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 56절. “아얄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 57절.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 58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 이곳에서의 소개는 주로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지파 사람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스라는 역대상하에서도 레위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역할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기술했습니다. 이곳에서도 포로 귀환하는 이들의 역할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그들에 대한 소개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기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느디님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2) 느디님 사람들에 대해서
- 느디님 사람들이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역대상 9장 2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즉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난 뒤 다시 그들의 땅 안으로 돌아온 자들의 명단 중에 느디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느디님 사람들은 자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소개됩니다.
- 느디님이란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가? 보통 구약성경에서 ‘~ 사람’ 하면 대부분 어느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에브라임 사람, 길르앗 사람, 혹은 모압 사람, 베냐민 사람 등등이 그렇습니다. ‘~ 사람’이라고 하면서 지역과 상관없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느디님은 지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명 중에 느디님은 나오지 않습니다.
- 이 느디님 사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성경에 소개된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신하(신복)의 자손들이 그들입니다. 솔로몬의 신하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한 두 명이 아닐텐데... 솔로몬의 신복이란 솔로몬이 특별히 종으로 삼은 자들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건축 사업을 다 마치고 난 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열왕기상 9장 20절과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로서 느디님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 것을 성경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은 총 392명이었습니다.
- 에스라 8장 15절 ~ 20절에는, 에스라가 2차로 포로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에 레위인들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전에서 일할 레위인들을 찾아오도록 모든 족장들을 가시뱌 지방으로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에스라는 레위인들뿐만 아니라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도 데리고 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들을 데리고 와야 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기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럼 느디님 사람들과 레위인들과는 어떤 관계인가? 에스라 8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220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느디님 사람들이란 바로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다윗과 방백들이 준 사람들이라는 것이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 느디님이란 단어는 ‘주어진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마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처럼 특정한 목적, 즉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해 주어져서 그들을 수종드는 사람들이 바로 느디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방 자손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국적과 신앙을 바꾼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다윗이 그들을 모아 레위인들을 돕는 일꾼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전에는 거의 언급됨이 없다가 포로 귀환 이후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성전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라는 칭호로서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고하는 한 그룹의 사람들 속에 당당하게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일개 성전 노예들로서 아주 하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레위인들이 활동을 하려면 이들의 소임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이때 자신의 소임을 마다하고 레위인들을 돕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제사장, 레위인들과 같이 언급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아직 연약한 상태일 때 이전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돕기를 꺼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기꺼이 레위인들을 돕는 일을 감당함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참여했기에 그들이 이처럼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 교회에서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의 일을 거부하지 않고 마땅히 도와야 할 자들을 도움으로써 교회가 든든히 서 가도록 한다면 그 역시 칭찬받고 세움 받는 느디님 사람들인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위치에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사역을 돕는 느디님 사람을 찾으시며, 기억하십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영단번의 제사를 드리셨기에 더 이상 제사로 나아갈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기에 제사장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성전을 수종드는 레위인을 보필한 이름 없는 느디님 사람들이 있었기에 에스라의 신앙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 중에서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은 자들도 있었지만 느디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사장과 레위인과 찬양하는 자들보다 더 경건하고 영적인 순결을 유지했습니다.
- 이러한 기록이 가감 없이 남겨져 있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이름이 나기보다 無名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사모합니다. 교만한 사역자는 진실로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처의 문지기로서 하나님만을 구하는 하나님께 진실됨을 인정받는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근신하며, 겸손하기를 구합니다.
2) 이 시대 주님께서는 참으로 느디님 사람들과 같은 예배자를 찾으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서기를 소망합니다.